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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555. [역경의 열매] 정근 (1-20) “한국교회와 기독교인이 ‘세상의 빛과 소금’ 돼야”
긍정적 생각, 적극적 행동, 창조적 선교 등
성경의 3요소는 성경 핵심이자 성공 비법
‘빛과 소금’ 되기 위해 실천하며 행동하라
온병원그룹 정근 원장이 지난 4일 부산 부산진구에 있는 온종합병원에서 진행한 ‘한국건강대학 46기 졸업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대화는 ‘2000여년 전 강도 만난 자가 있다. 강도 만난 자를 도운 사마리아인과 말로만 외치는 바리새인 중 누가 옳은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됐다. 온병원그룹 정근(63) 원장이 ‘하면 된다’의 모토인 ‘행동하라’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대화는 지난 4일 부산 온종합병원에서 진행한 한국건강대학 특강 이후 가졌다. 건강대학은 온종합병원 전문의들이 노인들에게 건강을 지키는 방법을 알려준다.
정 원장은 앞서 제시한 질문을 최근 어디서든 한다.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어서다. 이날 건강대학 46기 졸업식 전 특강에서 했고 지난달 포항 기쁨의교회 강연에서도 했다.
그 메시지를 전하려고 먼저 꺼내는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자신의 삶이다. 정 원장은 부산대병원에 안은행을 개설했고 종합병원·요양병원·재활병원·안과병원이 있는 ‘도심형’ 온종합병원을 세웠다. 보건복지부 산하 NGO 그린닥터스재단을 세워 전 세계 재난 현장도 다녔다. 해방 이후 최초로 개성에 남북협력병원을 세워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성공 비법은 성경에 있다고 얘기한다.
그는 “긍정적 생각, 적극적 행동, 창조적 선교 등 성공의 3요소는 성경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또 “믿음으로 간구하며 범사에 감사하니 ‘긍정’의 마인드가 장착됐고 거리의 예수님처럼 선포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려는 적극성은 행동으로 연결됐다”며 “청년의 때부터 묵상하고 생각한 걸 기록하며 능력을 키우려고 하는 건 창조에 해당한다”고도 했다.
실제 이틀간에 걸쳐 취재할 때도 정 원장은 쉼 없이 움직였다. 건강대 특강과 졸업식에 이어 주일엔 병원환자가 성도인 누가교회에서 대표기도하고 병원식당에서 밥퍼 사역을 이어갔다. 외국인 무료진료에도 나섰다. 병원 복도의 고장 난 전등을 보면 보수를 요청하고 쓰레기가 보이면 바로 주웠다.
물론 정 원장이 자신의 성공한 삶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한국교회와 기독인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야 한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가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진단한다.
정 원장은 “교회 안 교회가 아니라 사회 속 교회를 고민해야 한다. 직장 등 사회 안에 있는 교인들은 세상으로 파송된 선교사”라며 “‘외식하는 서기관’(마 23:23)이 지금의 교회에도 많다”는 얘기도 했다. 부산 백양로교회 장로였던 그는 현재 병원 안 누가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발전을 위해 변화해야 한다는 소신도 밝혔다. 그는 “직급과 직책에 상관없이 모두가 봉사하고 모든 회의와 토의는 민주적으로 진행해야 한다”면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노력도 있어야 한다”고 전했다. 그렇게 메시지는 “행동하라”는 말로 마무리된다.
성경 속 성공 비법을 실천하며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행동해 온 정 원장의 삶은 어땠을까. 정 원장이 그 이야기를 시작했다.
* [역경의 열매] 정근 (1) "한국교회와 기독교인이 '세상의 빛과 소금' 돼야"
* [역경의 열매] 정근 (2) 늘 배 곯았던 어린 시절… 옥수수 죽 먹으려 일찍 입학
* [역경의 열매] 정근 (3) 결핵 덕에 생긴 별명 '빼빼'… 마른 몸 감추려 옷 껴입어
* [역경의 열매] 정근 (4) 생사 오가던 결핵환자에서 결핵협회장으로 인생 역전
* [역경의 열매] 정근 (5) 의대 입시 준비하며 시작된 부산생활, 이젠 '제2의 고향'
* [역경의 열매] 정근 (6) 하나님 만나 구원의 확신 얻고, 첫 사랑 여학생과 결혼
* [역경의 열매] 정근 (7) 주어진 일엔 언제나 "Yes"… 어느새 '의국해결사'로 소문
* [역경의 열매] 정근 (8) 예수님 본받아 시력 잃은 사람들에게 광명 되찾아 주리라
* [역경의 열매] 정근 (9) 정주영 회장과 만남은 북한 선교 예비한 하나님의 계획
* [역경의 열매] 정근 (10) 연대 보증 1억 떠안게 돼… 안과 개원으로 정면 돌파
* [역경의 열매] 정근 (11) "사람 고치는 일이 먼저다, 수술비는 걱정하지 말라"
* [역경의 열매] 정근 (12) 그린닥터스 출범… 국가·인종·종교 초월한 인류애 실현
* [역경의 열매] 정근 (13) 부산 지역 의료 감당… 그린닥터스, APEC 의료지원
* [역경의 열매] 정근 (14) 종합메디컬센터 온종합병원, 서면을 의료관광 중심지로
* [역경의 열매] 정근 (15) 개성공단에 병원 세우고 땅끝 북한 선교의 꿈 펼쳐
* [역경의 열매] 정근 (16) 협력병원 건립… 서원했던 선교지 북한의 결핵 퇴치 나서
* [역경의 열매] 정근 (17) 복지와 인권 사회문제 해결하고 싶어 시작한 정치 도전
* [역경의 열매] 정근 (18) 재난 현장이면 국내외 어디든 달려가는 그린닥터스
* [역경의 열매] 정근 (19) "고통 받는 곳에 하나님의 믿음·평화 지키려 달려왔노라"
* [역경의 열매] 정근 (20·끝) 누군가를 위해 주춧돌 놓는 수고 감당하고 싶어…
약력=1960년 출생, 부산대 의과대 졸업, 안과 전문의(의학박사), 부산의대교수, 재단법인 그린닥터스 이사장, 의료법인 온그룹의료재단 설립, 현 온종합병원·정근안과대표원장, 전 부산시의사회장, 전 대한결핵협회장, 전 대한의협 남북협력위원장, 전 국가인권위 전문위원. 국민추천 국민포장·대통령 표창
부산=글·사진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역경의 열매] 정근 (2) 늘 배 곯았던 어린 시절… 옥수수 죽 먹으려 일찍 입학
산골 마을 교사였던 아버지
박봉에 다섯 자녀 부양하며 생활고 겪어
한글 빨리 깨우친 덕에 방과 후 학교서
나눠주는 죽 먹으려고 6세에 학교 입학
정근(오른쪽) 원장이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이던 1969년 경남 진주 상봉서동 집 마루에서 형제들과 찍은 사진.
지금도 나는 사람들에게 내 소개를 이렇게 한다. ‘지리산 속 산청 삼장 촌사람’이라고.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인다. ‘예수 믿고 봉사로 바뀐 사람’이라는 말이다.
소개한 그대로 나는 웅장한 산세를 자랑하는 지리산을 뒷산이라 말하는 경남 산청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봄에는 각종 약초와 산나물이 지천에 깔렸다. 여름이면 울창한 숲이 그늘을 만들고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가 더위를 가져갔다. 가을과 겨울엔 곱게 물든 단풍과 눈꽃으로 비경을 이루는 지리산을 만날 수 있었다.
자연의 풍광은 아름다웠지만, 그 시절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배를 곯기 일쑤였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였고 교장으로 정년퇴임하셨다. 당시 교사라는 직업은 사회적으로 존경은 받지만, 경제적 수준은 열악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의 교사 월급과 비교하면 박봉이었다. 안 그래도 부족한 월급에 3남 2녀를 부양해야 하니 아버지는 요즘 말로 ‘투잡’을 뛰셨다. 방과 후엔 부업으로 학생들 과외를 하셨다. 어머니도 가게에 보탬이 될까 싶어 방앗간을 운영하기도 했다. 가끔 어머니가 방앗간 일을 마치고 가져오시던 달콤한 떡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 뒤를 졸졸 따라다닌 일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 시절 최고의 간식은 곶감이었다. 가을이면 동네 집마다 처마 밑에 곶감이 매달렸지만 곶감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감이 익기도 전에 따 먹어서다. 워낙 마른 데다 콧물을 달고 살았다. 콧물을 닦아낸 소매 끝은 반질반질 윤이 날 정도였다.
주린 배를 채우려고 택한 건 초등학교 입학이었다. 그때는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들이 학교 정문 앞에서 가마솥에 끓인 옥수수죽을 학생들에게 나눠줬다. 아버지 덕에 한글을 빨리 깨우친 나는 여섯 살에 삼장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래도 여섯 살 아이에게 학교는 버거웠다. 지금 생각하면 300, 400m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였는데 꽤 힘들게 느꼈던 듯싶다. 더구나 동급생은 말이 동급생이지 나보다 나이 많은 형, 누나였다. 키는 머리 하나 정도 더 컸다. 결국 두 달 만에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게 그만둔 학교를 1년 뒤인 일곱 살에 다시 들어갔다. 옥수수죽 매력이 꽤 컸던 게 아닐까 싶다. 미국 군부대가 학교로 제공한 딱딱하게 굳은 우유 덩어리도 좋다고 얻어먹었다.
바다를 처음 본 건 아버지가 통영의 학교로 전근을 가면서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새로운 학교로 갈 때마다 이삿짐을 싸야 했다. 산청 산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던 나에게 통영은 처음으로 경험하는 낯선 곳이었다. 지금도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은 그때도 아름다웠다. 친구들과도 습자지를 찢어 동전을 넣어 만든 제기 하나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모두가 못 입고 못 먹던 시절이었지만 돌아보면 그리운 추억이었다.
통영에서 진주로 갈 때까지 초등학교만 다섯 번 옮긴 나에게 여섯 번째로 옮긴 초등학교는 진주 도동초등학교였다. 이후 아버지는 진주에서만 학교를 옮겼고 나도 대학에 갈 때까지 진주에서 자랐다. 나에게 어쩌면 진주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역경의 열매] 정근 (3) 결핵 덕에 생긴 별명 ‘빼빼’… 마른 몸 감추려 옷 껴입어
중 1때 폐결핵에 영양실조까지 걸려
힘들게 투병하며 공부로 두려움 극복
진료 때 본 의사에 대한 경외심 갖고
아픈 이들 치료하는 의사 되리라 결심
정근 원장이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71년 집 앞 마당에서 아버지와 찍은 사진.
1975년 진주 지역에서 명문고로 알아주는 진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내 인생은 찬란하지 않았다. 오히려 살면서 첫 번째 시련을 지나고 있었다. 폐결핵이었다. 중학교 1학년의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병이었다.
잘 먹지 못하던 시절이었던 데다 어릴 때부터 원체 마른 체구였다. 중학생 때 결핵은 물론 영양실조에 걸리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 때 키가 150㎝, 몸무게가 50㎏도 되지 못했다.
당시 폐결핵은 치사율이 꽤 높은 전염병이었다. 기침할 때면 토해내는 핏덩이를 보고 공포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매월 약을 타기 위해 지금의 진주의료원인 도립병원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모든 게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감사한 건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청진기를 목에 건 의사 선생님을 보며 생명을 살리는 귀한 직업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됐다.
두려운 건 따로 있었다. 행여 친구들에게 병이 알려지면 감염을 우려해 나를 멀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두려움을 극복하게 한 건 공부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해 3년 내내 열심히 공부하고 치열하게 투병했다. 결핵 치료란 오랜 시간 인내를 갖고 약물치료를 해야 했다.
'빼빼'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정 원장의 중·고등학생 시절 사진은 화재로 모두 타 유일하게 남은 건 고교 동창이 건네준 졸업앨범 사진 뿐이다.
결핵 덕에 나를 괴롭힌 단어가 있다. 친구들은 나를 ‘빼빼’라 불렀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키는 180㎝로 훌쩍 컸는데 몸무게는 여전히 53㎏으로 워낙 마르니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당시에는 그 소리가 그렇게 싫었나 보다. 여름에도 젓가락처럼 가느다란 다리를 감추려고 교복 바지 안에 잠옷 바지를 하나 더 껴입고 다녔다. 조금이라도 살이 있어 보이게 하려는 고육책이었다. 몸이 안 좋으니 여름에 그렇게 껴입고 다녀도 더운 줄 몰랐다.
마른 몸 덕에 바람까지 신경 쓰였다. 혹여나 바람이 불어 옷이 몸에 붙으면 마른 체형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가장 선호하는 바람은 뒤 바람이었다. 뒤에서 바람이 불면 바지 속으로 공기가 한껏 들어와 다리통이 굵어 보였고 덩달아 기분도 좋아졌다.
아쉽게도 살을 찌우려는 노력은 번번이 효과를 보지 못했다. 집에 오면 설탕을 퍼먹어도 소용없었다.
다행히 병은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진로를 결정해야 할 나이가 되면서 처음으로 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의사가 돼 아픈 이들을 치료하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것이었다.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게 됐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 꿈을 이루기 위한 도전에 나섰다.
“근아, 대학은 어디로 갈 거냐”는 아버지 질문에 나는 “못해도 서울은 가 봐야겠다”고 답했다.
1977년 서울의 사립대 의대에 입학원서를 냈다. 건강한 몸은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해 준비했기에 자신 있게 서울행을 준비했다. 그리고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부산 서면에서 재수 생활을 시작했다. 끝난 줄로만 알았던 투병 생활은 끝난 게 아니었다. 폐결핵이 재발했다. 가래에 피가 묻어 나오면서 죽음을 마주하는 듯했다. 스무 살 찬란한 청춘의 때에 나는 추락하고 있었다. 그냥 추락도 아닌, 완전한 추락이었다.
***[역경의 열매] 정근 (4) 생사 오가던 결핵환자에서 결핵협회장으로 인생 역전
결핵 투병하며 재수 끝에 의대 합격
완치 가능한데 약이 없어 고통받는
북한 개성병원 결핵 환자들 본 후
‘결핵 없는 한반도’ 만들기 앞장서
대한결핵협회장이던 정근 원장이 2014년 협회 60주년사를 준비하면서 100주년 기념교회 옆에 있는 캐나다 선교사인 셔우드 홀 박사 공적비를 찾아 기도하고 있다.
추락의 시간 중에도 재수 생활은 계속됐다. 재발한 결핵 때문에 몸도 힘들었지만, 마음도 힘들었을 때였다. 고등학교 동기들이 대학에 입학해 학교 다니는 모습을 볼 때면 후회의 마음이 들었다. “의대를 지원하지 않았으면 나도 대학생이었을 텐데”하는 자책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했다.
그렇게 나를 힘들게 한 시절이 결과적으로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지금 내 명함엔 부산의대 교수, 부산의사회장, 그린닥터스 재단 이사장 등 10개 넘는 직함이 있다. 재수 끝에 의대에 들어갔기에 가능한 직함이다.
그리고 대한결핵협회장도 있다. 어릴 때 결핵을 앓던 내가 결핵협회장이라니. 인생역전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핵 투병 경험이 있으니 누구보다 치료의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았다. 장기간 약물치료를 해야 하는 인내심이 요구되는 질병이었다. 그래서 결핵 예방을 위한 홍보대사도 자처했다. 지면을 빌어 간단히 설명하자면 결핵의 초기 증상은 기침 가래 미열 등 감기 증상과 비슷해 초기 발견이 쉽지 않다. 이유 없이 기침 가래가 2주 이상 지속되면 결핵으로 의심해 봐야 한다. 가장 확실한 진단 방법은 객담(가래) 도말검사와 배양검사다. 결핵으로 진단되면 항생제의 일종인 항결핵 약제를 먹어야 한다.
안과 전문의인 내가 결핵 퇴치에 나선 게 단순히 내가 어릴 적 결핵을 앓아서만은 아니다. 2005년 북한 개성병원에서 북한의 결핵 환자들을 보고 나서다. 세상은 약으로 결핵을 완치할 수 있게 됐는데 여전히 약도 먹지 못해 결핵으로 시름시름 앓는 북한의 사람들을 봤다. 결핵이 없는 한반도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34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결핵 발생률이 1위였다. 북한을 제외한 수치가 이 정도니 남북을 모두 합하면 우리나라는 결핵 후진국이 될 게 뻔했다.
무엇보다 북한의 결핵 문제를 우리가 결핵 치료기술과 항결핵제로 푼다면 북한과 닫힌 문을 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결핵 퇴치에 늘 목말랐던 나는 결핵협회 이사와 부회장직을 맡았고 2013년 회장직까지 맡게 됐다. 2년간 28대 회장으로 일했고 2019년엔 대한결핵협회 복십자대상 공로부문도 수상했다.
전국에 분산돼 있던 결핵 퇴치사업과 연구 관련 민간단체를 통합해 ‘결핵 통합일원화위원회’를 만들었고 지역별 맞춤 사업을 위해 6개 지회·6개 지사 체제를 12개 지회 체계로 전환했다. 복십자의원의 정상화와 경쟁력 강화도 모색했다. 복십자의원은 1955년 9월 서울 중구 회현동 한켠에서 대한결핵협회의 부설 진료소로 시작했다. 협회의 법정기부금단체 지정도 이끌어냈다.
무엇보다 회장으로 있으면서 평소 품고 있던 꿈 중 하나인 황해도 해주에 ‘코리아 결핵 병원’을 짓겠다는 제안도 했다. 해주는 캐나다인 선교사 셔우드 홀 박사가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 병원인 ‘구세요양원’을 설립한 곳이다. 우리나라 결핵 퇴치 사업에 나선 홀 박사처럼 나도 북한의 결핵 치료에 나서겠다는 꿈을 키웠다.
***[역경의 열매] 정근 (5) 의대 입시 준비하며 시작된 부산생활, 이젠 ‘제2의 고향’
명의가 돼 부자 될 꿈 안고 죽어라 공부
생활비 마련하려 입주 과외 시작했지만
가르치는 아이 바뀔 때마다 리어카 이사
정근 원장은 1979년 부산의대에 입학한 뒤 40년 넘게 부산에 살고 있다. 대학 1학년 때 캠퍼스에 있는 무지개다리 앞에서 포즈를 취한 필자.
1978년 부산에서 재수 생활을 하면서도 ‘서울에 가야겠다’는 마음은 여전했다. 생각을 바꾼 건 개인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장남인 나는 넉넉하지 않은 가정형편을 고려해야 했다. 학비가 저렴한 국립대인 부산대학교 의학과로 진로를 바꿨다. 더구나 도시 생활은 촌사람에게 낯설었다. 첫 대입 때 잠깐 경험한 서울 사람은 깍쟁이처럼 여겨졌고 ‘나는 여기서 못 살겠다’는 마음을 갖기도 했다.
나의 첫 부산살이는 부산진구 전포동에서 시작됐다. 투병과 공부를 병행했고 드디어 부산의대에 입학했다. 지금 와서 고백하지만, 의대 입학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옥수수죽을 먹기 위해 초등학교에 일찍 입학하고 제대로 먹지 못해 결핵 투병이 힘겨웠던 나는 의사가 돼 돈 한 번 펑펑 쓰면서 살고 싶었다. 은행에 100억원 쯤 넣어두고 이자만 받고 사는 인생을 꿈꿨다. 입학 전부터 명의가 돼 돈을 많이 벌겠다는 각오를 다진 덕에 입학 후엔 죽어라 공부했다.
물론 의대에 들어갔다고 삶이 달라지진 않았다. 여전히 형편이 나아진 건 없었다.
부곡동 이모 집에 잠깐 얹혀살다가 입주 과외에 나섰다. 공부는 공부대로 하면서 생활비도 직접 벌어야 했다. 입주 과외는 돈도 벌면서 숙박까지 해결해 주니 나에겐 최적의 아르바이트였다.
아르바이트가 생활에 도움은 됐지만 삶은 늘 불안했다. 가르치는 아이가 바뀔 때마다 나는 짐을 싸야 했다. 두 번의 입주 과외, 하숙집을 바꾸면서 싼 짐이 열여덟 번이나 됐다. 부산대 캠퍼스가 있는 장전동, 부산의대가 있는 아미동, 동대신동 등은 물론 부산 변두리부터 산복도로까지 안 가본 데가 없었다.
포장이사가 있는 지금과 달리 당시 이사는 쉽지 않았다. 짐이 적어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책이며 냄비 그릇 등 가재도구를 실은 손수레를 끌고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대로변에서 ‘빵빵’ 거리는 경적 소리와 “어이 학생, 비켜”라는 운전자의 호통을 들으며 아슬아슬하게 다녀야 했다.
도움을 준 건 나처럼 손수레로 이삿짐을 나르던 고교 동창생들이었다. 이사하는 데 대여섯 시간은 족히 걸렸다. 산복도로부터 바다가 보이는 남천동까지 부산 곳곳을 이사하며 부산의 속살도 여실히 봤다. 겉모습은 거칠어도 속은 따뜻한 부산의 바다 사나이, 길에서 채소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던 부산 아지매, 산비탈 판잣집에 살며 수십 명이 공중화장실 하나로 버티던 아미동 사람들…. 모두가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 바다가 있어 좋았다. 통영 때 처음 만난 바다가 올망졸망한 섬들로 아기자기했다면 부산의 바다는 이곳을 삶터로 살아가는 사람들 덕에 활기 넘쳤다. 자갈치 아지매의 수다처럼 유쾌하고 정겨웠고 태평양의 깊고 장대함에 마음이 탁 트이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부산 생활은 이제 40년을 훌쩍 넘겼다. 누군가 나에게 ‘너의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지리산의 정기 어린 산청에서 태어나, 모든 것을 포용하는 부산의 바다를 보며 원대한 꿈을 키웠다고.
***[역경의 열매] 정근 (6) 하나님 만나 구원의 확신 얻고, 첫 사랑 여학생과 결혼
기독동아리 네비게이토 선교회 가입
수련회서 선교사로 헌신 하겠다 다짐
음악제 사회 보는 아내의 모습에 반해
정근 원장이 군의관 훈련생 시절이던 1989년 경북 영천 훈련장에 면회 온 아내 윤선희 원장과 찍은 사진. 학교 선후배 사이인 두 사람은 87년 결혼했다.
의대에 입학한 나는 열심히 생활비를 벌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놀기도 열심히 놀았다. 데모에 앞장서고 저녁이면 의대 동기들과 술 한 잔을 즐겼다.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현장에도 있었다.
그런 내 삶은 획기적인 변화를 맞았다. 두 번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서다. 첫 만남은 1980년 의예과 2학년 때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휴교한 사이 단짝 친구의 달라진 모습을 봤다. 나처럼 수줍음도 많고 조용하던 단짝 친구가 적극적이고 활력 넘치는 사람이 됐다. 바뀐 이유를 물었더니 뜻밖의 말을 꺼냈다. ‘성경공부’였다.
미국인 선교사와 같이 다니니 달라지더라는 친구의 말이 궁금하기도 했고 영어공부도 할 수 있겠다 싶어 친구를 따라 가보기로 했다. 바로 기독동아리 네비게이토 선교회였다. 네비게이토는 현재 110여개국에 있는 선교단체로 경건의 시간을 갖는 법, 말씀을 암송하는 법, 균형 있게 기도하는 법, 복음을 전하는 법 등을 알려준다. 물론 내 삶이 당장 달라지진 않았다.
학교 문이 닫혀 아버지가 교장으로 계시는 경남 남해 실천초등학교로 갔다. 그러다 미뤄졌던 의대 본과 시험날짜가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81년 1월 7일이었다. 갑자기 잡힌 시험날짜에 마음이 급해졌다. 부산으로 돌아와 공부하는 나에게 네비게이토에서 만난 본과 4학년 선배가 찾아왔다. 1월 1일부터 3박 4일간 네비게이토 수련회에 가자고 했다.
“7일이 본과시험”이라는 내 말에 선배는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눅 14:23)는 성경 말씀과 함께 “나도 의사국가고시 10일”이라고 했다.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그리고 수련회에서 첫 번째 운명을 만났다. 예수님이였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됐고 선교사로 헌신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선교지는 세상의 땅끝 북한이었다.
놀라운 경험도 계속됐다. 지혜의 눈이 떠졌고 머리가 깨우쳐졌다. 말씀을 묵상하며 성경말씀을 암송했는데 이게 일상으로도 연결됐다. 의대 수업 내용이 술술 외워졌다. 덕분인지 시험은 무난하게 통과됐다.
두 번째 운명적 만남은 본과 3학년 때다. 나는 그 만남을 ‘나의 사랑, 나의 운명’이라 표현한다. 요샛말로 ‘모태솔로’였던 나는 청명한 가을 교정에서 한 여학생을 봤다. 자그마한 체구에 귀여운 얼굴, 단아한 옷매무새에 스마트한 느낌의 그녀를 보자 가슴이 대책 없이 쿵쾅거렸다. 기독교 동아리 음악제에서 사회를 맡으며 야무지게 진행하는 솜씨도 눈길이 갔다. 답장 없는 연애편지도 보냈다. 같은 과 후배인 윤선희였다.
1년의 기다림 끝에 후배를 통해 학교 앞 빵집에서 만났다. 단팥빵 소보루빵을 앞에 두고 나는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외려 그녀가 1년 전 연애편지 이야기를 하며 누군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이후 우리는 매일 같이 만났다. 학교에선 의사고시를 앞두고 연애하는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봤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전공의 2년 차가 됐을 때 우리는 결혼했다. 안성형 수술 전문의인 아내는 지금도 병원에서 나와 함께 환자를 돌보고 있다.
***[역경의 열매] 정근 (7) 주어진 일엔 언제나 “Yes”… 어느새 ‘의국해결사’로 소문
‘삼신’이라 불릴 만큼 고된 인턴 생활
오히려 숙소 해결돼 호출에 신속 대응
적극적 병원 생활로 인턴 70명중 1등
정근(가운데) 원장이 인턴 생활을 하던 1985년 부산대학병원에서 의대 동기, 환자와 히포크라테스상 옆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누군가 인생에서 가장 바쁘게 살았던 때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나는 의대 시절이라 말할 것 같다.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자취방을 나와 학교에서 종일 강의를 듣고 도서관으로 옮겨 밤늦게까지 책 속에 파묻히는 생활을 6년간 반복했다.
1985년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 생활이 시작됐다. 보통 전문의가 되려면 인턴 1년, 레지던트 3년을 거쳐야 한다. 인턴 1년간 하나의 전공과에서 1~2주씩 있으면서 모든 진료과목을 배우고 레지던트 과정에서는 자기 적성에 맞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전공과목을 선택한다.
자연히 인턴 생활은 고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병원에선 인턴을 ‘삼신’이라 불렀다. 먹을 게 생기면 게걸스럽게 먹으니 ‘걸신’, 장소 상관없이 아무 데서나 자니 ‘잠신’, 잔심부름부터 응급환자 진료까지 모든 일을 하면서도 선배들한테 못한다고 구박만 받으니 ‘병신’이라 했다.
나는 부산대학병원에서 내과 외과 할 것 없이 모든 과목을 돌았다. 하는 일은 응급환자 진료를 빼면 단순했다. 전공의들의 환자 정리, 의대생들의 성적 정리 등을 했다. “이게 인턴이 할 일이냐” “잡일만 한다”는 불만이 인턴들 사이에서 나왔다.
이런 상황이 나에겐 기회가 됐다. 부모와 떨어져 사는 시골 촌놈이니 인턴 숙소에서 1년 내내 살았다. 크리스천이라 술도 하지 않으니 시간도 남아돌았다. 호출이 오면 신속하게 갔고 무슨 일이라도 군말 없이 했다.
어느새 ‘정근은 의국 해결사’라는 입소문이 났고 의국마다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런 일도 있다. 한여름 안과 의국에서 인턴 업무를 할 때다. 한 선배가 ‘어이, 인턴’이라 부르더니 병 하나를 내밀었다. 그러면서 “일 잘한다는 소리 들었다. 연구실에서 써야 하니 송충이 좀 가득 담아와 달라”고 했다.
모처럼 쉬는 일요일을 이용해 산에 올랐다. 녹음이 짙은 숲에선 매미 소리가 가득했다. 20여분 숲길을 걸으니 키 높은 플라타너스에서 널따란 잎을 뜯고 있는 벌레들이 보였다. 살이 통통 오른 송충이가 아무리 많아도 병을 채우는 건 쉽지 않았다. 주변에서 놀고 있는 동네 꼬마들이 보였다. “얘들아, 송충이 잡아 오면 한 마리에 10원씩 줄게”라고 제안했다. 꼬마들은 내 제안에 흔쾌히 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에는 송충이가 가득 채워졌다.
의사실에 돌아와 병을 내민 나를 보고 안과 선배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짧은 시간에 말도 안 되는 지시를 수행했으니 놀랄 만도 했다. 이처럼 일이 주어지면 ‘예스(YES)’라고 말하며 수행하는 나의 적극적인 병원 생활은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인턴 70명 중 1등이었다.
이는 전공의 시절로 이어졌다. 안과 전공의를 할 때 쓴 논문만 5편이었다. 보통 전공의가 평균 2편 쓰는 것과 비교하면 꽤 많은 셈이다. 무슨 일이든 처음이 어렵지 익숙해지면 쉬워진다는 걸 전공의 때 배웠다. 그리고 부지런함은 어느새 습관이 됐다. 행여 게으른 마음이 생겨나면 ‘빈궁이 강도 같이 온다’는 잠언 6장 12절 말씀을 떠올리며 각오를 다지던 그때를 떠올린다.
***[역경의 열매] 정근 (8) 예수님 본받아 시력 잃은 사람들에게 광명 되찾아 주리라
인턴으로 안과병실 회진 중 하루만에
시력 찾은 환자 보며 안과 전공 결심
부산 최초로 각막은행 설립 주도하며
각막 기증 운동 정착 하는데 앞장 서
정근 원장이 지난 12일 부산 부산진구 온종합병원의 국제진료소를 찾은 러시아 국적 외국인 노동자를 진료하고 있다. 이 환자는 광각막염 진단을 받고 응급치료를 받았다.
1985년 인턴 생활을 마무리할 즈음 나와 동기들은 인생의 진로를 결정해야 할 갈림길에 서 있었다. 레지던트가 되면 전공과목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의학도에게 인기 있는 과목은 내과였다. 병을 낫게 하고 사람을 살리니 실력 있고 소신 있는 의학도가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컸다.
모두가 선택을 고민할 때 나는 예외였다. 이미 가야 할 길이 정해져 있으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바로 안과였다. 당시 안과는 안경을 맞추는 곳으로 여겨지던 때라 부모님은 “의대까지 가서 왜 안과냐”며 거세게 반대하셨다. 지금은 장모이신 당시 여자친구 어머니도 나를 집으로 불러 ‘선택을 바꿔달라’고 간곡하게 말했다.
이 같은 반대에도 안과 전공을 결심한 건 한 할머니의 기적을 본 뒤다. 인턴들은 매일 아침 주임교수를 따라다니며 회진을 돈다. 나 역시 주임교수를 따라 안과 병실을 돌 때였다. 지팡이를 든 할머니가 보호자 부축을 받으며 진료실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나보다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다음 날 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전날 만난 그 할머니가 부산대학교병원 안과 복도에서 시력표를 줄줄 읽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보고 요한복음 9장을 떠올렸다. 예수님이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한 기적의 순간이 할머니 모습과 오버랩됐다. 사랑의 열병을 앓는 청년처럼 충격과 감동에 빠졌다.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꺼내든 카드는 안과의 미래 가치였다. 앞으로 TV 게임 등으로 눈 건강을 해치는 환경이 될 것이고 10년만 지나면 안과 의사들의 역할이 커질 것이라고 얘기했다. 수명이 연장되면서 노인들의 안과 치료도 많아질 것이라 했다.
놀랍게도 예측은 적중했다. 안과의사가 된 지 40년을 앞둔 지금, 안과는 의대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과가 됐다. 안과 의사가 되고 나는 백내장 수술만 20만건 넘게 했다. 부산대 의대 교수로 임명돼 부산대병원에서 근무하던 92년엔 부산 최초로 각막은행 설립도 주도했다.
각막 기증 운동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나부터 나섰다. 나와 우리 가족이 사후 각막 기증에 서약했고 의대 동기인 교수들도 동참했다. 학장을 비롯한 부산의대 교수 대부분이 기증을 약속했고 스승의 모습에 공감한 제자들도 함께했다. 의대와 간호대 학생 80%도 기증 의사를 밝혔다. 부산지역 언론이 이를 보도하면서 각막 기증 운동은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기증자가 너무 많아 밤마다 이식을 위해 병원으로 불려가기 일쑤였다. 제자인 전공의들이 구급차를 타고 사망한 기증자 집에 가 병풍을 치고 각막을 적출하면 그사이 나는 병원에서 수술 대기자에게 연락해 이식 수술을 준비했다.
이런 경험들은 후에 개성공단 병원과 재난현장에서도 안과 진료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됐고 예수님을 본받아 시력을 잃은 사람들에게 세상의 광명을 되찾아 주겠다는 다짐을 실천하는데 힘이 되고 있다. 지금도 나는 부산대 병원 안과 복도에서 할머니가 다시 세상을 보던 운명 같았던 때를 떠올리며 그 순간이 계속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정근 (9) 정주영 회장과 만남은 북한 선교 예비한 하나님의 계획
울산현대해성병원 과장으로 파견
정 회장의 녹내장, 안압 등 검사
비서만 대동해 진료 받는 모습에
소박함과 ‘하면 된다’ 정신 배워
정근 원장이 레지던트 1년 차였던 1986년 당시 여자 친구였던 본과 4학년 윤선희 원장과 부산대병원에서 찍은 사진. 두 사람은 1년 뒤인 1987년 결혼했다.
전공의 시절 특별한 만남도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다. 만남은 1987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산대학교병원 안과 전공의인 나는 갑작스럽게 울산현대해성병원으로 가야 했다. 해성병원 안과 과장이 개원하며 나갔고 과장 자리가 비었다. 안과 의사가 귀하던 때라 해성병원은 적임자를 구하지 못했고 부산대 병원에 안과 전공의 파견을 요청했다. 28살 전공의 2년 차인 나는 졸지에 해성병원 안과 과장 직무대행을 맡아 전문의 역할을 하게 됐다. 매일 부산에서 울산으로 출퇴근하며 백내장 수술도 하고 환자도 봤다.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진료실에서 쉬는데 오후 진료 시작 시간에 맞춰 점퍼를 입은 노인이 진료실로 쑥 들어왔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동행한 남성이 입을 뗐다.
“저는 비서고, 정주영 회장님이 눈 검사하러 오셨다”고 했다. “아 그렇습니까.” 순간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정 회장을 의자에 앉혔다.
비서는 정 회장의 안압검사를 요청하며 왼쪽 눈은 실명해 검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려줬다. 검사가 필요한 건 녹내장 안약을 넣는 오른쪽 눈이었다. 시력 검사 후 마취 안약을 넣을 때 소처럼 눈을 끔벅이던 정 회장이 검사를 시작하니 더 자주 눈을 감았다 떴다. 여러 번 측정해 평균치를 적는 방법밖에 없었다. 꾹 참고 검사를 마무리하자 정 회장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악수를 하고 진료실을 나갔다.
정 회장이 떠나고 나자 비로소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떠올랐다. 해성병원과 현대중공업 회장인 한국 최고 갑부가 진료 의사를 대기시켜 놓지도 않고 병원장도 대동하지 않은 채 진료실로 털레털레 걸어 들어와 진료를 받고 인사까지 한 뒤 가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정 회장은 2주 뒤 다시 나를 찾아 왔다. 어김없이 오후 진료가 시작되는 시간에 딱 맞춰 왔다는데 하필 나는 이날 오후 진료 시간에 늦었다. 오전 수술을 하면서 점심시간을 놓쳤고 숙소에서 라면을 끓여 먹느라 진료 시간을 지키지 못했다. 진료실로 들어가니 정 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간호사 말로는 20분 넘게 기다렸다고 한다. 마음속으로 ‘맙소사’라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정 회장은 나에게 “선생이 안압을 편안하게 잘 재 또 왔다”고 했다.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 나에게 “괜찮다. 천천히 하라”고 다독였고 이후 정 회장은 울산에만 오면 비서 한 명만 데리고 안과부터 들러 검사만 하고 가셨다. 나중엔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웃으며 농담도 건네셨다.
이후 정 회장의 삶은 나에게 다르게 다가왔다. 한쪽 눈은 실명했고 다른 쪽 눈도 녹내장으로 시야가 좁은데 직원들과 축구 경기를 하며 어울리는 모습에서 소박한 마음으로 열심히 될 때까지 하는 정신을 봤다. 내가 좋아하는 말 ‘하면 된다’의 정신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정 회장을 만난 건 하나님이 예비하신 게 아닐까 싶다. 땅끝 북한 선교를 서원한 나는 정 회장이 1998년 소떼를 몰고 간 평안북도 정주 옆 개성의 그린닥터스 개성병원에서 진료했고, 이후 그린닥터스 재단이 현대아산상도 받았으니 말이다.
***[역경의 열매] 정근 (10) 연대 보증 1억 떠안게 돼… 안과 개원으로 정면 돌파
월급까지 가압류되자 교수직 내려놓고
동료 교수들 격려 속 ‘정근 안과’ 열어
매년 이웃 위한 무료 진료봉사 시작
정근(가운데 하얀 가운 입은 사람) 원장이 1994년 부산 서면의 작은 건물 3층에 개원한 ‘정근 안과’는 2013년 정근안과병원으로 승격됐다. 사진은 정 원장 등이 승격 감사예배와 함께 건강검진 센터 확장을 기념하며 테이프를 자르는 모습.
내 인생에 두 번째 시련은 부산대 의대 교수로 잘나가던 시절 찾아왔다. 군의관 시절 보증을 서준 사람이 부도를 내면서 연대 보증 책임을 떠안게 됐다. 갚을 돈은 1억원이었고, 월급은 가압류됐다. 당시 대학교수 월급 10년 치를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할 만큼 큰 돈이었다.
시련은 새로운 도전으로 이어졌다. 개원이었다. 대학교수를 하다 개업하면 배신자로 찍히던 시절이었다. 힘든 결정이었지만 오히려 주변에서 나를 격려했다. 동료들은 내 상황을 이해해줬고 주임 교수도 “잘하라”고 격려했다. 다들 부산의 최대 도심이던 남포동을 개원 장소로 추천했지만, 은행에서 빌린 돈 5000만원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1994년 11월 서면의 초라한 건물 3층에 ‘정근 안과’를 열었다. 무리해서 최첨단 라식 장비를 들여놓고 열심히 진료했다. 힘들게 문을 열었지만, 병원은 잘 됐다. 입소문 덕이었다. 교수 시절 나는 안 해 본 수술이 없었다. 다른 곳에서 수술하다 실패한 환자, 수술이 어려워 합병증 발생 가능성이 높은 환자 등이 나에게 왔다. 성형외과에서만 다루던 안와골절도 과감히 시술했다. 그렇게 교수 시절 키워나간 수술 실력이 알려지면서 환자들이 병원을 찾았다.
바쁜 진료에도 빼놓지 않는 게 있었다. 이웃을 위한 의료봉사였다. 매년 5월 내가 출석하는 부산진구 백양로교회 주변 달동네에서 무료 진료 활동을 했다. 지역사회에도 자연스럽게 내 이름이 알려졌다.
그렇게 위기 상황에서 개인병원 문을 열며 기사회생했는데 살 만해지니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였다. 하루에도 기업 수십 개가 쓰러졌다. 고가 장비를 리스해 사용하던 의료계도 문 닫는 곳이 생겼다. 우리 병원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IMF의 힘든 시간이 지나갈 무렵 나는 병원을 확장하기로 했다. 2000년 단층 판잣집을 12층 규모로 건립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여전히 금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를 때였다. 주변에선 무리한 시도라고 말렸지만, 위기는 기회라 생각했다. 아이디어도 세웠다. 여러 과목의 전문의들이 한 건물에서 개원해 종합병원 효과를 내는 ‘메디컬센터’를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게 서면메디컬센터였다. 지금의 정근 안과병원 빌딩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지역 언론은 의료계에 새바람을 몰고 온 참신한 시도라 보도했다. 전국의 개원의들은 우리 센터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찾아왔다. 진료에 차질을 빚을 정도였다.
서면메디컬센터는 병원인 동시에 선교센터 역할도 했다. 중국 등 외국인 유학생들에겐 주일 예배 장소가 됐고 국제 재난구호단체인 그린닥터스의 사무실도 입주했다. 현재 그린닥터스 사무실은 온종합병원에 있다.
외국인 근로자 진료소도 갖췄다. 불법체류자인 이들은 비싼 병원비 때문에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했고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외국인 근로자들이 우리 센터를 찾았다.
그런 의미에서 연대보증의 시련은 내가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과정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역경의 열매] 정근 (11) “사람 고치는 일이 먼저다, 수술비는 걱정하지 말라”
IMF 외환위기 무렵 실직 가정 많아져
취약계층 노인 대상 무료 수술 시작
백양로교회 김태영 목사의 도움으로
그린닥터스 전신 백양의료봉사단 설립
정근 원장은 IMF 외환위기가 있던 1997년 백양로교회와 함께 의료 취약 계층을 돕기 위한 백양의료봉사단을 만들었다. 정 원장이 2002년 봉사단의 첫 해외 선교지인 중국에서 안과진료를 하고 있다.
1997년 시작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는 나에게 새로운 곳에 시선을 두도록 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모두가 힘들었다. 기업은 쓰러지고 직장을 잃은 가장은 거리로 내몰렸다. 우리 병원도 타격을 입기는 마찬가지였다. 50만 달러에 리스한 라식 기계의 월 이자만 800만원이던 게 2000만원까지 치솟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위기를 어떻게 견뎌냈나 싶을 정도로 아찔하다.
이런 참혹한 상황은 그해 11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이전부터 시작됐다. 진료실 상황은 더 좋지 않았다. 특히 노인 환자에게 타격이 컸다. 수술을 권하면 입을 다물거나 “아들이 실직했다”며 한숨을 쉬었다. 한번은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며 진료실에 온 할머니가 “수술만 받으면 고칠 수 있다”는 말에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함께 사는 아들이 실직한 상태라고 했다.
“사람 고치는 일이 먼저다. 수술비는 걱정하지 말라”고 차근히 설명했다.
그렇게 저소득층 노인들의 무료 수술을 시작하게 됐고 시스템의 필요성을 알게 됐다. 노인들은 눈만 안 좋은 게 아니다.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으니 다른 과 진료도 필요했다. 이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시스템은 교회뿐이었다. 서둘러 출석교회인 백양로교회로 가 김태영 목사님을 만났다.
“요즘 사람들 살기가 너무 힘들다. 우리 교회가 나서서 구제해 보면 어떨까”라고 제안했더니 목사님은 ‘좋은 방법’을 물었다.
나는 “영세한 지역주민들을 치료해주면 좋겠다”고 답한 뒤 교회가 봉사 조직의 역할을 했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1997년 5월 탄생한 게 백양의료봉사단이다. 봉사단은 그린닥터스의 전신이 됐다. 창립멤버는 고교 동창, 부산의대 동기들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함께 봉사하고 있다. 여기에 백양로교회를 다니는 성만호 치과 원장, 산부인과 전은숙 원장도 뜻을 같이했다. 봉사단엔 기독교는 물론 천주교 불교까지 아픈 사람을 돕기 위한 사람들이 모였다.
40, 50대 남성들로 구성된 교회의 바나바 남선교회도 봉사단에 합류해 행정을 돕고 약제를 챙겼다.
매년 5월 5일이나 석가탄신일엔 백양로교회 마당은 종합병원이 됐다. 전문의와 간호사, 봉사자들이 손발을 맞췄다. 한 번의 진료로 끝나지 않았다. 수술이 필요하거나 진료가 계속 필요한데 재정이 없는 이들은 봉사단 의사들의 병원에서 무료로 수술을 받거나 1년간 무료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봉사의 영역은 IMF가 수습되고 경제가 살아나면서 해외로 확장됐다. 첫 해외 선교지는 북한이 보이는 중국 옌볜으로 정했다. 한일 월드컵으로 전국이 뜨거웠던 2002년 여름 봉사단은 중국 옌볜과 왕팅 지역으로 떠났다. 첫날 옌볜과학기술대학에서 진료하고 이튿날은 왕팅 지역 교회에서 진료했다. 중국 공산당의 종교국장이라는 한 간부는 자신도 교회에 다닌다면서도 우리를 감시했다. 한국에서 온 의사들이 무료로 진료해준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 왔다. 중국 당국의 감시에도 대부분 기독교인인 봉사단은 늘 예배하고 기도했다. 이후 중국 간부는 우리 일을 돕고 식사도 챙겼다.
***[역경의 열매] 정근 (12) 그린닥터스 출범… 국가·인종·종교 초월한 인류애 실현
중국서 백양의료봉사단과 함께 봉사한
의료진 중심 YMCA내 와이즈멘 조직
그린닥터스는 2016년 9월 경주시 내남면 보건지소에서 지진으로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주민 200여명을 진료했다. 정근(앞줄 오른쪽 세 번째) 원장이 그린닥터스 관계자 등 의료봉사 동참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2002년 중국에 다녀온 직후 백양의료봉사단은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그해 부산 YMCA 김길구 반송복지관장이 “YMCA의 국제봉사클럽 와이즈멘을 설립하자”고 했다.
김 관장은 나와 같은 백양로교회 출석 성도로 교류가 많았다. 그의 조언대로 중국에서 함께 봉사한 의료진을 중심으로 같은 해 11월 부산서면 와이즈멘을 조직했고 이듬해 YMCA 내 의료봉사조직인 그린닥터스를 만들자는 계획을 세웠다. 국가 인종 종교를 초월한 인류애를 실천하자는 의미를 담은 ‘그린’과 ‘닥터’를 조합해 떠올린 이름이었다.
그 사이 백양 의료선교단은 국내 거주하는 외국인 근로자에게도 눈길을 돌렸다. 부산 지역의 각 대학병원 원목과 기독신우회 회장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슬쩍 제안했더니 부산백병원 신우회 회장인 오무영 교수가 취지에 공감했다. 오 교수는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진료해 주는 게 의료인들이 해야 할 일 아닐까”라며 힘을 실었다. 참석자들도 생각을 같이했다. 2003년 6월부터 백양의료봉사단의 이주노동자 무료진료 사업을 시작했고 비공인 민간 외교관 역사를 톡톡히 했다.
이렇게 외국인 의료봉사, 해외의료 봉사라는 백양의료봉사단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닥터스 조직을 짰다. 동참을 요청받은 이들이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2004년 2월 부산롯데호텔에서 구호단체인 YMCA그린닥터스가 출범했다.
백양의료봉사단이 서면 와이즈멘클럽을 거쳐 그린닥터스가 된 셈이다.
시작할 때는 연합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YMCA를 그린닥터스 앞에 붙였다.
1년 뒤엔 YMCA 요청에 따라 YMCA 명칭을 빼고 재단법인 그린닥터스로 보건복지부에 정식 등록했다. 이후 그린닥터스는 부산을 거점으로 서울 울산 대구 경남 경기 등 국내 지부를 비롯해 미국의 뉴욕과 미주리, 캐나다, 아프리카, 러시아 등 15개 해외 지부를 두는 국제단체로 성장했다.
재난 현장은 그린 닥터스가 있어야 할 곳이었다. 국가 인종 종교를 초월해 인류애를 실현하자는 초심을 잃지 않고 2004년 스리랑카 쓰나미부터 2015년 네팔 대지진까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갔다. 지난해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이 있는 폴란드, 최근 강진으로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한 튀르키예로도 달려갔다. 북한 개성병원 운영도 도왔다. 국내에서도 2016년 경주 지진 등 재난지역과 취약계층을 찾아가 의료봉사를 했다. 코로나 기간엔 부산 대구 지역에 기부 물품도 전달했다.
나에겐 이런 봉사를 통해 새로운 비전과 결실을 경험하게 했다. 백양의료봉사단의 첫 선교지인 옌볜에서 본 땅끝은 의대 2학년 겨울 수련회 때 하나님을 만나고 북한 선교를 서원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뜻밖의 결실도 있었다. 중국에서 함께 봉사한 정근안과의 송부근 부장은 봉사 후 교회에 다니게 됐고 지금도 매주 일요일 온종합병원에서 외국인 근로자를 진료하고 있다.
2006년 12월엔 성산 장기려선생 기념사업회와 부산과학기술협의회가 제정한 성산 장기려상의 봉사부문 첫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역경의 열매] 정근 (13) 부산 지역 의료 감당… 그린닥터스, APEC 의료지원
부산시의사회 책임지는 중책 맡아
의약분업 파업 철회안 통과 이끌고
무너진 의사 이미지 개선에도 힘써
부산시의사회 법제이사였던 정근(맨 오른쪽) 원장이 2000년 의사 파업을 철회한 뒤 정부에 의사들의 요구사항을 전달하기 위한 궐기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의사로 살던 나에게 조직을 경험할 기회도 생겼다. 안과의사회 소속으로 일하던 중 2000년 부산시의사회에서 상임이사를 맡아달라는 제안이 왔다.
제안을 받자마자 든 생각이 ‘술’ 자리였다. 단체 일을 하면 사람을 만나야 하고 술자리로 이어졌다. 정중히 고사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부산시의사회 박희두 부회장도 물러서지 않았다. 거듭된 설득에 별수 없이 수락했지만, 우려는 현실이 됐다. 회원들과 인사하는 상견례 자리가 시작이었다. 말 그대로 술판이었다.
“정근 법제이사 내 술 한 잔 받으시오.”
“부회장님, 저는 교회에 다녀 술을 안 마십니다. 죄송합니다.”
새까맣게 어린 후배가 선배 술잔을 거절하니 부회장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나도 여기서 무너지면 같은 상황이 반복될 거라는 생각에 “계속 이런 식으로 권하면 상임이사 그만두겠다”는 강수를 뒀다.
선배는 선배였다. 부회장은 “정근 이사는 사이다 한 병”이라며 통쾌하게 해결했다. 이후 나는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고 의사회 일을 3년 내내 할 수 있었다.
박 부회장이 부산시의사회장이 된 뒤 나는 의사회 살림을 책임지는 총무부회장직도 맡았다.
부산시의사회에서 일도 많았다. 상임이사가 된 그해 6월부터 의약분업과 함께 전국 의사들은 파업을 시작했다. 여론은 ‘의사가 자기 밥그릇만 챙긴다’고 부정적으로 봤고 검찰은 의사들의 구속수사를 천명했다. 누군가 파업 철회를 위해 총대를 메야 했다. 부산시의사회가 긴급회의를 열고 파업 철회안을 통과시킨 게 신호탄이 됐다. 전국 의사들이 파업을 철회했다.
의사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파업 철회를 이끌던 부산시의사회는 정부를 향해 궐기대회도 열었다. 파업 후에도 의사들이 경찰에 불려가는 상황이 계속되자 목소리를 내야 했다. 집회허가를 받은 합법적 궐기대회에서 의사들의 목소리를 정부에 전했다. 이후 전국 8만여명 의사들의 공적이 된 부산시의사회는 의사들의 응원을 받게 됐다.
무너진 의사들의 이미지 개선에도 나섰다. 방법은 단순했다. 본분을 충실히 하는 것이었다. 부산의 저소득 계층 어린이들을 무료 진료하고 의사들의 사회참여 봉사 비용인 1000만원을 치료 받지 못하는 학생들의 치료비에 사용했다. 날 선 시선은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술 없는 의사회’도 만들었다. 각 구·군 의사회 회장들은 건강도 챙기고 회비도 절약돼 일거양득이라는 호응을 보냈다. 2009년엔 부산시의사회장에 당선돼 3년간 헌신하기도 했다.
부산시의사회와는 별개로 2005년 11월 큰 행사도 감당했다. 미국 일본 등 아·태 지역 21개국 정상들이 부산에 모이는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이었다.
나는 APEC이 열리기 6개월 전 우연히 만난 준비단 담당자가 정상들의 건강을 고민하는 이야기를 듣고 APEC 의료지원에 그린닥터스가 힘을 보태겠다고 제안했다. 부산대병원 동아대병원 고신의료원 부산백병원 등 부산지역 병원과 의료단 구성도 협의했다. ‘APEC 의료단’이 공식 출범했고 철저히 준비했다. 그리고 1주일의 APEC 일정을 무탈하게 마무리했다. 나에겐 조직을 이끌고 협의하는 과정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역경의 열매] 정근 (14) 종합메디컬센터 온종합병원, 서면을 의료관광 중심지로
포괄간호시스템으로 차별화된 서비스
온종합병원과 정근안과병원을 필두로
의료기관 모여 메디컬 스트리트 조성
정근 원장이 2010년 3월 세운 온종합병원은 서면 일대를 의료 중심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병원 이름인 ‘온’은 따뜻함, 완전한 치유와 생명의 불을 켠다는 의미가 있다. 왼쪽 작은 사진은 도로에 설치된 ‘서면메디컬스트리트’ 이정표.
부산을 메디컬타운으로 만들려는 도전에도 나섰다. 지금은 부산의 도심지가 된 서면에 2008년 종합병원을 짓겠다고 선언했다. 부산진구도 서면 일대를 의료관광특구로 개발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지방자치단체와 의사가 뜻을 합하면 의료계 신성장동력을 육성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의료관광 선도국가인 싱가포르를 학습했다. 그리고 서면은 의료시설의 집적도가 높지만, 의료 관광의 중심지가 되려면 허브가 될 종합병원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종합병원 건축을 발표한 이유다.
예상치 못한 악재가 터졌다. 글로벌 금융위기였다. 건축자금을 빌리려고 은행 문을 두드리면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여신업계에서 병원은 모텔과 동급이니 그럴 만했다.
힘겨운 순간에도 멈추지 않았고 2010년 3월 종합병원을 탄생시켰다. 지하 3층, 지상 12층 전체 면적 1만6470㎡(약 5000평)에 400병상 규모였다. 이름은 온종합병원이었다.
온종합병원의 ‘온’에는 여러 의미를 담았다. 따뜻함을 뜻하는 한자 ‘온(溫)’은 아파서 병원을 찾는 환자와 그 보호자를 따뜻하게 안겠다는 뜻이다. 온전함과 완벽함을 뜻하는 ‘온(穩)’도 있다. 완벽한 의술로 온전히 치유한다는 뜻이다. 영문 ‘온(ON)’도 있다. 꺼져가는 생명의 불을 다시 켠다는 의미다.
이름처럼 병원은 차별화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2014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정부의 ‘보호자 없는 병원’으로 지정된 건 회진하다 목격한 장면 때문에 도입한 제도 덕이다.
뇌혈관 질환으로 입원한 칠순 노모 간병을 두고 4남매가 옥신각신하는 걸 봤다. 가족의 오랜 투병은 가정에 정신적·육체적 어려움은 물론 경제적 고통까지 준다. 이를 병원이 해결해 주기로 했다. 포괄 간호시스템을 도입해 간호사들이 입원환자를 돌보도록 했다. 이를 위해 간호 인력을 크게 늘렸다.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와 원무과 직원 등으로 구성된 ‘보호자 없는 병원 관리위원회’도 만들었다. 병원 곳곳에 고객의 소리함을 설치해 쓴소리에도 귀 기울였다.
60여명의 대학교수 출신 의사 등 의료진은 오늘도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2017년 12월엔 병상도 1300병상으로 늘렸다. 100억원대 암 치료 방사선기기도 도입했다.
정근안과의원도 최첨단 라식 기계를 들이고 망막질환 권위자인 엄부섭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부산대병원 안과)를 초빙하면서 ‘정근안과병원’이 됐다.
덕분에 부암동 방향에서 서면교차로까지 가야대로, 서면교차로에서 범일동 방향으로 중앙대로 약 1㎞ 구간은 성형 피부 치과 안과 등 200여개 의료기관들이 밀집한 서면메디컬스트리트가 됐다. 지자체는 서면메디컬스트리트라는 이정표도 세웠다.
감사한 건 부산 지역 주민들은 서면을 대한민국 의료관광의 중심지로 만든 중심에 온종합병원과 정근안과병원이 있다고 얘기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내가 배운 건 시련이 더 큰 성공을 거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변화를 두려워하면 성장할 기회를 놓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역경의 열매] 정근 (15) 개성공단에 병원 세우고 땅끝 북한 선교의 꿈 펼쳐
용천 폭발사고 후 북한 도울 길 찾다
개성공단 완공에 맞춰 병원 개원 준비
무보수 봉사로 시작, 2만 여 환자 진료
정근(가운데) 원장이 2004년 그린닥터스 관계자 등과 함께 북한의 개성공단에 세워질 병원 부지를 둘러본 뒤 함께 기도하고 있다.
대학교 2학년 때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겨울수련회에서 서원한 것도 착실히 준비했다. 땅끝인 북한 선교였다. 본격적으로 북한을 바라게 된 건 2004년 평안북도 신의주 용천 폭발사고다. 긴급 속보가 쏟아져 나왔지만 그린닥터스가 할 수 있는 건 적십자사를 통해 의약품을 보내는 것뿐이었다.
이때부터 북한을 돕기 위한 연결고리를 찾기 시작했다. 마침 그해 여름 개성공단이 건설을 완료했다는 뉴스가 TV에서 나왔다. ‘그린닥터스가 개성에서 병원을 운영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긴급회의를 열고 개성공단에 그린닥터스가 병원을 열자는 데 뜻을 모았다. 마침 정부가 개성공단 병원사업과 관련한 제안서를 받을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3개월간 준비한 110쪽짜리 발표 자료를 2004년 9월 통일부에 제출했고 경쟁 끝에 개성병원 운영사업자로 확정됐다.
그해 11월 병원 부지를 보러 서울에서 불과 60㎞ 떨어진 개성 땅을 밟았다. 황량한 북한의 산과 들, 깡마른 북한 사람들을 보니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2005년 1월 진료를 시작했다. 25평 단층 건물에 차려진 개성공업지구 응급진료소는 이름처럼 병원보다 응급실에 가까웠다. 개성공단 내 남북 근로자들을 긴급 진료 정도만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도 많았다. 북한 당국은 ‘그린닥터스’라는 이름부터 타박했다. 왜 영어를 쓰냐는 게 이유였다. 개성에 갈 의료진을 찾는데도 애를 먹었다. 의사들이 주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북한’이라는 장소 자체였다. 혹시나 북한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할까 싶어 주변 사람들이 말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소개하고 싶은 분이 있다. 김정용 개성병원장이다. 의사 수급난이 되풀이되자 내놓은 해결책이 단기 파견 대신 1, 2년 단위로 일할 상주 의사였다. 인도에서 봉사하는 김 원장이 떠올랐다. 전화를 걸어 막무가내로 “인도 의료선교사 마무리하시고 북한으로 한 번 옮겨보시라”고 권유했다.
수개월이 지난 뒤 김 원장은 인도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돌아와 원장직을 수락했다. 2005년 12월 개성병원에서 무보수 봉사를 시작해 2011년까지 2만여명의 몸 아픈 북한 근로자를 돌봤다.
어려움 가운데 기분 좋은 일도 있었다. 단체나 기업은 개성병원을 돕겠다며 의약품이나 의료장비를 지원했고 의약품 부족에 시달리는 북한에 항생제 등 약품을 제공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개성병원의 가치가 부각된 건 2005년 4월 개성 시내에서 발생한 연탄가스 중독 사고다. 당시에도 연탄은 북한의 주요 난방 연료였지만 고압 산소를 갖춘 곳이 많지 않아 연탄가스에 중독되면 치료할 곳이 없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 북측 관계자가 개성병원을 찾아 당 간부가 연탄가스에 중독됐다며 다급하게 치료를 요청했다. 개성에선 개성병원에만 고압 산소가 있었다. 이후 개성시민을 위해 고압산소통 수십개를 가져와 개성 시내에 보급했다.
응급진료 외에도 매월 한 두 번은 특별 외래진료를 실시해 남북협력병원 개설을 위한 토대도 마련했다.
***[역경의 열매] 정근 (16) 협력병원 건립… 서원했던 선교지 북한의 결핵 퇴치 나서
내과 외과 결핵과 등 종합병원의 틀 갖춰
검사실 공동 사용하며 남북이 함께 진료
숱한 어려움 맞서다 ‘정다르크’ 별명 얻어
정근(오른쪽 여섯 번째) 원장이 2007년 개성협력병원 개원식에서 남북 관계자, 의료진과 함께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2006년 의미 있는 결실도 맺었다. 남북 당국과 그린닥터스 등 3자가 ‘개성공업지구 의료시설의 건설 및 운영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했다. 개성공단 내 의료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응급진료소가 아닌 ‘개성공업지구 종합진료소(병원)’를 세우기로 했다. 개성협력병원이었다.
2006년 10월 북한이 핵실험을 하면서 한반도엔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협력병원 건립은 멈추지 않았다. 그해 12월 첫 진료를 시작했고 2007년 4월 개원식도 열었다.
협력병원은 기존 응급진료소의 5배 크기인 120평 규모의 단층 건물이었다. 합의서에 명시된 대로 진료소는 남측진료소인 그린닥터스 개성병원과 북측 진료소로 구분했다. 대신 방사선실 검사실 수술실 등은 모두가 사용할 수 있도록 남북 진료소 가운데 설치했다. ‘효율적인 진료’를 이유로 설득한 덕에 검사실 등은 남북 의료진이 모두 사용하도록 했다. 출입구와 진료소는 달라도 검사실이 뚫려 있으니 자연스럽게 공동 진료의 틀도 갖추게 됐다. 응급환자나 중환자는 남북 의료진이 함께 진료했다.
종합병원의 틀을 갖추면서 진료과목도 응급의료 수준에서 격상됐다. 내과 일반외과 정형외과 산부인과 결핵과는 물론 치과 진료도 가능해졌다. 북측진료소에서는 고려의학을 선보였다.
의료진 확보도 수월해졌다. 남측진료소엔 내과 1명, 외과 2명 등 3명이 상주 근무했고 요일별로 정형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정형외과 치과 결핵 등 전문 과목 의사들이 순환 진료를 했다. 북측에서도 의료진 14명이 상시 배치됐다.
주요 대형병원에서 의료진을 파견했고 국경일과 공휴일에는 대한의사협회와 그린닥터스 의료진이 특별 진료했다. 협력병원은 개성공단에만 머물지 않고 개성시와 사리원시로 활동 범위를 확장했다. 2009년부터 사단법인 광주선한의료들 팀이 개성 시내 출장 진료도 실시했다.
협력병원이 역점을 둔 또 다른 활동은 북한의 결핵퇴치 사업이다. 2008년 1월 결핵연구원의 도움으로 결핵 진단 장비와 시설이 협력병원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진료와 치료에 들어갔다. 그린닥터스 공동주최로 북한 어린이결핵퇴치 운동도 추진했다.
어릴 적 결핵에 걸리면서 의사의 길을 걷게 된 나로선 선교지로 서원한 북한의 결핵 퇴치에 나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2008년 4월 개성종합병원 설립 계획도 세웠다. 개성공단 내 3000여평 부지에 종합병원을 설립한다는 내용이다.
북한을 향한 계획은 2006년 1차 북핵 실험에 이어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 2009년 2차 핵실험에 2010년 천안함과 연평도 포격 사건 등으로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린닥터스는 2012년 아쉬움 속에 개성에서 철수했다. 2016년엔 개성공단 가동이 전면 중단됐다.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별명이 있다. ‘정다르크’다. 개성공단에서 숱한 어려움에도 병원을 지키려고 애쓰던 나를 그린닥터스 회원과 후원자들이 잔 다르크에 빗대 만들어줬다. 지금도 나는 그 별명이 언젠가 다시 불리기를 소망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정근 (17) 복지와 인권 사회문제 해결하고 싶어 시작한 정치 도전
19대·21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 출마
최악의 순간 경험했지만 선거 과정 통해
의사로서 해야 할 일 더 많다는 걸 깨달아
정근 원장이 2020년 21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를 선언한 뒤 지역 시장을 돌며 상인과 주먹 인사를 하고 있다.
초긍정으로 살던 내 삶에 세 번째 실패가 왔다. 낡은 정치판을 바꾸는 동시에 지치고 고달픈 국민이 행복한 삶을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며 의욕적으로 내민 도전장, 바로 정치였다. 30여년간 지역에서 다져온 신뢰를 토대로 복지와 인권 사회문제 해결에 내 역량을 사용하고 싶었다.
결과부터 말하면 정치 도전은 내 인생의 실패한 순간 중 하나가 됐다.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오전에는 진료를 보고 오후엔 발품을 팔며 유권자들을 만나러 다녔다. 유력 정당의 공천을 받지 못해 불리한 싸움이라고 다들 말렸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결과는 예상한 대로 낙선이었다. 결과를 받아들고 눈물을 쏟은 건 아쉬움 때문이 아니었다. 미안해하는 나에게 쏟아지던 주위 사람들의 위로와 격려 때문이었다.
2020년 21대 국회의원 선거에 다시 출마했다. 역시 무소속이었다. 실패할 걸 알면서도 계속 출마하는 나를 두고 “왜 계속 나오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사람들이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진흙탕 싸움이 난무하는 정치판에 왜 발을 들이려고 하느냐는 우려도 했다. 정치판엔 원칙과 열정으로 살아온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미국의 정치가 벤저민 프랭클린은 절제 청결 중용 등 13가지 덕목을 한 주에 하나씩 실천해 나갔다고 한다. 철학자 칸트는 정확한 시간에 기계처럼 실천했다. 잿빛 코트 차림에 지팡이를 짚고 집 밖으로 나오는 칸트를 보고 마을 사람이 오후 3시 30분이라는 걸 알아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프랭클린의 덕목 실천이나 칸트의 오후 산책은 말하자면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의식, 리추얼(ritual)이었다. 리추얼은 ‘종교상의 의식 절차나 의례’ ‘항상 규칙적으로 행하는 의식과 같은 일’을 의미한다. 이는 세상의 방해로부터 나를 지키는 혼자만의 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에게 리추얼은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것, 수술 전 기도하는 것이었다. 사실 벌인 일도 많고 관여할 일도 많은 나는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내 삶에 여유를 주는 건 교회에서 기도하고 찬송가를 부를 때다. 수술 전 차를 마시고 심호흡하며 기도를 드릴 때도 짧지만 여유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많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렇게 나는 무슨 일을 추진하기 전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해야 한다는 당위성만 확인되면 생각을 멈추고 즉시 행동에 옮겼다. 내일로 미루면 그 일의 성공 확률은 확 줄어든다. 무엇보다 기도로 응답된 메시지는 곧바로 행동에 옮긴다.
결과의 좋고 나쁨을 평가하는 건 나중 문제다. 의사회에서 일하고 개성공단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재난 현장에 가면서 만들어진 삶의 태도다. 일은 시작과 끝 모두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걸 고르라면 결과보다 시작하는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심플하지만 이것이 내 인생을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다. 정치 도전도 마찬가지였다. 최악의 순간을 경험했지만 과정을 통해 나는 의사로서 해야 할 역할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됐다.
***[역경의 열매] 정근 (18) 재난 현장이면 국내외 어디든 달려가는 그린닥터스
정부가 의료봉사단 출국 불허할 정도로
쓰나미와 강진으로 큰 피해 입은 지역에
의료진과 봉사자들 급파 의료활동 펼쳐
정근(왼쪽 두 번째) 원장이 2015년 대지진이 발생한 네팔 현장에서 그린닥터스 의료진, 봉사자들과 현지 주민들을 돌보고 있다.
그린닥터스는 북한은 물론 재난 현장이면 국내외 어디든 갔다. 2004년 12월 26일. 인도양을 강타한 지진은 10m 넘는 집채만 한 파도를 만들며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태국 등 해안가 마을을 강타했다.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순식간에 사라진 사람, 무너진 건물 등을 뉴스로 보자마자 결심을 굳혔다. 인도네시아 아체 지역은 피해가 가장 컸음에도 반군이 장악한 지역이라 갈 수 없어 스리랑카로 향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섬’이라는 뜻의 스리랑카는 더 이상 찬란하게 빛나지 못했다.
현지에서 사역 중인 한국인 선교사 도움으로 골시티에 도착하자마자 부서진 책상 3개와 의자를 가져와 침상을 만들었다. 20분 만에 진료소를 차리고 기도와 함께 진료를 시작했다. 땀이 비 오듯 흘러도 끝없이 몰려드는 환자들이 있어 멈출 수 없었다. 클리코다 지역에선 불교 사원에서 진료를 봤다. 스님과 기독교 선교사, 의료진들이 어우러져 서로를 도왔다.
2005년 10월 7.6 규모의 강진이 몰아친 파키스탄에도 그린닥터스는 어김없이 갔다. 정부가 긴급 의료봉사단 출국을 불허할 정도로 위험한 곳이었다. 재난현장인 카슈미르의 무자파라바드와 칼라코트는 건물 하나 없이 모든 게 파괴됐다. 가는 길도 험난했다. 산사태로 도로가 유실되고 토사가 마을을 뒤덮기도 했다. 병원엔 병상이 부족해 환자들은 복도나 마당에 이불만 덮은 채 누워 있었다.
사실 파키스탄에 가기 전 집에 남겨두고 온 게 있었다. 파키스탄은 재난 지역인 데다 탈레반 점령지였다. 항상 하던 일인데도 낯선 느낌이 들어 아내에게 쓴 유서를 서랍장에 두고 왔다. 미국에서 연수 중이던 아내는 후에 서랍장에서 유서를 발견하고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아내는 늘 재난현장에 간 나와 봉사자 안전을 위해 새벽이면 일어나 기도했다. 지금도 아내는 나와 함께 의료봉사에 동행한다.
2008년엔 사이클론이 덮친 미얀마와 대지진이 발생한 쓰촨성 현장에도 갔다.
늘 재난 현장에 발 빠르게 달려간 나였지만 2015년 네팔 대지진 때는 유독 굼떴다. 그런 나를 일깨운 건 김정용 원장이다. 그는 개성병원 초기인 2005년부터 2011년까지 북한 근로자를 돌봤다. 그런 분이 그린닥터스 단체 대화방에 ‘네팔 지진으로 다들 가고 있다. 우리에게도 기회를’이라는 글을 올렸지만 나는 망설였다.
갈 의료진이 없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 가슴을 옥죄는 듯했다. 결국 의료진을 모집하고 도움을 줄 선교사와도 연결했다. 수도인 카트만두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피해지역을 찾아다녔다. 의료봉사를 마치고 떠날 때 마음에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네팔 재건에 작은 디딤돌 하나라도 놓겠다는 약속이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3개월 뒤 ‘네팔 드림 프로젝트 의료봉사단’을 이끌고 네팔로 와 7박 8일간 현장을 누볐다. 이후 네팔에 학교와 보육원 병원을 세우며 프로젝트를 이어갔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느 곳이든 세우고 필요한 곳에는 어떤 방법이든 가게 하신다는 걸 알게 됐다.
***[역경의 열매] 정근 (19) “고통 받는 곳에 하나님의 믿음·평화 지키려 달려왔노라”
전쟁 피해 입은 우크라이나 의료지원
튀르키예 지진 피해 가장 심한 곳 찾아
여진에도 불구 이재민 500여명 진료
현지 선교사와 성도들 도움 많이 받아
정근 원장이 튀르키예 하타이주 이스켄데룬에 마련된 난민 캠프에서 현지 주민의 건강을 살피고 있다. 정 원장과 그린닥터스는 지난달 17일부터 24일까지 지진 피해를 본 튀르키예에서 긴급의료봉사에 나섰다.
그린닥터스의 행보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2022년 5월 우리는 폴란드로 향했다. 폴란드는 러시아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국경을 넘어 가장 많이 모인 곳이었다.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 등 16명의 의료지원단은 8박 9일 동안 폴란드 내 우크라이나 난민캠프에서 의료지원에 나섰다. 갑작스럽게 피란길에 올라 평소 복용하던 약을 미처 챙기지 못한 당뇨나 고혈압 환자에게 약도 전달했다. 의약품, 피부연고 파스 비타민 감기약 등을 챙겨 줬다.
그곳에서 유독 마음을 울린 글귀가 있다. 바르샤바한인교회 초석에 있던 글이다.
“먼 훗날 우리 아이들이 누가 이 전당을 지었느냐 묻거든 하나님을 사랑하는 너희 조상들이 믿음을 물려주기 위해 고달픈 나그넷길 가면서 즐겁게 건축했노라 전해다오.”
돌아오는 길엔 바람도 생겼다. 전쟁 후에도 병원 건축 등을 통해 우크라이나 재건에 도움이 되기를 희망했다.
지난달 6일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강타한 지진으로 수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때도 그린닥터스는 망설임 없이 달려갔다. 2월 17일부터 24일까지 7박 8일간 튀르키예에서도 지진 피해가 가장 심한 안타키아, 메르신 등에서 이재민 500여명을 진료했다.
튀르키예 남동부 하타이주 이스켄데룬에 마련된 난민캠프에선 내과 소아청소년과 외과 성형 안과의사가 치료에 나섰다. 차량으로 세 시간 떨어진 안타키아로 가 무너진 한인교회 앞에서 예배하고 현장진료도 했다. 현지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할 때 6.4 여진도 경험했다.
그동안 스리랑카, 파키스탄, 미얀마, 네팔 등 지진 등 자연재난 현장에서 긴급 의료봉사활동을 펼쳐왔지만 튀르키예에 갈 때 마음가짐은 남달랐다. 1950년 6·25전쟁 때 튀르키예를 비롯한 참전국 젊은 병사들이 이 땅의 자유를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튀르키예에 대해선 감사의 마음을 안고 1주일간의 일정을 보냈다.
이렇게 의료봉사에 나설 때마다 감사한 분들이 있다. 2004년 해일이 덮친 스리랑카 때부터 지금까지 현장에 갈 때면 함께 해 주신 한국인 선교사님과 한인교회 성도들이다. 기업과 대형병원, 제약회사 등은 물량과 인원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지난해 우크라이나 의료지원을 마치고 귀국길 공항에서 쓴 글이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동유럽이 러시아 침공이란 혼란의 큰 소용돌이에 빠졌고 코로나로 어느 누구도 출입이 자유스럽지 못해 전쟁지역에 봉사하러 나갈 엄두를 못내는 시기에 그린닥터스는 설립이념에 따라 이 세상 어디든지 인류가 재난으로 고통 받는 곳은 우리가 간다.”
바르샤바한인교회 초석에서 본 글귀를 통해 앞으로 그린닥터스 일원으로 의료봉사현장에 갈 때면 마음에 새기고 싶은 글도 생겼다.
“먼 훗날 우리의 아이들이 누가 이 우크라이나 전쟁지역, 튀르키예 지진지역을 다녀왔느냐 묻거든 하나님을 사랑하는 너희 조상들이 평화를 물려주기 위해 고달픈 나그넷길 가면서 즐겁게 의료봉사했노라 전해다오”라고 말이다.
***[역경의 열매] 정근 (20·끝) 누군가를 위해 주춧돌 놓는 수고 감당하고 싶어…
믿음으로 기도하며 간절히 구하니
‘하면 된다’ 긍정의 마음 갖게 되고
예수님처럼 적극 실천하려 노력
집무실의 정근 원장. 정 원장은 “‘하면 된다’의 마음으로 재난 현장을 가고 북한 선교에 나섰다”며 “‘고달픈 나그넷길 가면서 이름도 없이 헌신한 누군가가 했음’을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생각해 보면 삶은 변화무쌍했다. 우유죽을 먹으려고 눈을 뜨면 학교로 달려가던 개구쟁이 정근, 마른 몸이 부끄러웠고 결핵 때문에 병원을 들락날락하던 청소년기 우울한 정근, 리어카에 이삿짐을 싣고 산복도로를 다니던 가난한 청년 정근, 무슨 일이든 해내며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던 의대생 정근, 조직 개혁에 앞장섰던 교수 정근과 재난현장이면 어김없이 찾아간 그린닥터스 리더이자 의료인 정근.
바로 그 정근은 예수님이 주신 지혜를 실천하려고 노력하며 살았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믿음으로 기도하며 간절히 구하니 ‘하면 된다’ ‘잘 될 것이다’라는 긍정의 마음을 갖게 됐다. 말로만 외치는 바리새인, 행동하지 않는 서기관이 아닌 세상일에 나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닮고자 했다. 적극적으로 간구하고 생각하면서 창조적 아이디어를 도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잠언 24장 말씀을 기억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데도 힘썼다.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하면 빈궁이 도적같이 올 것이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언 24:33~34)
크기에 상관없이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고무그릇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었다고 본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새 온병원그룹을 이끌게 됐고 그린닥터스를 통해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대학 2학년 때부터 마음에 품은 땅끝, 북한을 향한 선교를 실천하는 기회도 만들었다. 2005년부터 개성공단에서 의료활동에 나서고 결핵 퇴치에도 나섰다. 2012년 아쉬움 속에 개성공단에서 철수하면서 선교는 잠시 멈췄지만, 북한을 향한 마음은 여전하다. 지금도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북한을 생각하면 안타깝다. 통일 후 북한의 열악한 의료수준을 한국수준으로 높여야 한다는 비전도 품고 있다. 최근 건설사를 인수한 것도 이런 비전을 향한 준비다. 북한에 병원을 세워 한국의 선진 의료 기술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다. 북한 인재들에게 선진 의료기술을 교육시키려면 병원과 의과대학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100년도 훨씬 전 서방국가에서 온 선교사들이 세브란스 등 병원을 세워 한국의 의료발전에 기여했던 것처럼 북한에 종합병원을 세워주는 게 내 마지막 사명이라 여기고 있다.
당장은 어렵더라도 누군가 완성할 수 있도록 이름도 빛도 없이 주춧돌을 놓는 수고를 감당하고 싶은 소망이 있다. 어릴 적 결핵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난 만큼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이 세상에 필요한 걸 남겨주고 싶다.
그래서 나는 ‘하면 된다’를 계속 실천하려고 한다. 이 말은 의외로 강한 논리를 갖고 있다. 뭔가를 이루고 싶다면 먼저 ‘뭔가’를 해야 한다. 이룬다는 의미를 갖는 ‘된다’의 전제는 ‘하면’이다. ‘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이룰 수 없음을 말한다.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일궈낸 일들을 아주 먼 훗날 사람들은 이렇게 기억했으면 좋겠다.
“우리의 후손들이 누가 이 일을 했느냐 묻거든 누구인지 모를 너희의 선조들이 고달픈 나그넷길 가면서 이름도 없이 헌신했노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