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없이 산다 / 조미숙
지난밤에 시아버지 제사를 모셨다. 간단하게 지낸다지만 손이 많이 간다. 손목이 아파 보호대를 끼고 일했다. 다행히 요 며칠 심하게 아프던 것보다는 덜하다. 제일 큰 임무를 끝낸 것 같아 한시름 놓는다. 아침 일찍 서울로 돌아가는 아들의 배웅도 큰딸에게 맡긴 채 침대에서 뒹굴었다. 리모컨을 돌려도 재밌는 것도 없고, 나른한 오전이 잠과 함께 지나갔다. 어제 시험을 본 큰딸도 한밤중이다. 글을 안 쓰는 2주일이 짧은 휴가가 끝난 것처럼 아쉬움이 남는다. 다시 글쓰기 숙제가 나를 덮친다. 왜 사서 고생인지 모르겠다.
제사상에 오른 반찬이 많은데도 라면을 끓여 점심을 때웠다.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글쓰기 방을 들여다봤다. 벌써 많은 글이 올라와 있다. 역시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시간이 많다고 마음 놓고 있었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 매 학기를 마치며 글을 썼는데 마땅히 쓸거리도 없다. 별일이 없다.
같이 일하는 선생님이 갑자기 아팠다. 평소에 일 욕심이 많고 뭐든 완벽하게 해내려는 성격 탓에 스트레스가 많았나 보다. 난 뭐든 설렁설렁하는 까닭에 깊게 생각하지 않는데 참 대조적이다. 아픈 언니를 보면서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난 그런 성격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걱정은 많이 달고 살지만 잘 털어버린다. 스스로 기대치를 낮춘다.
올해는 일이 많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배정받았던 한 학생이 아파서 아직 수업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어 점심 시간대가 한가해졌다. 여전히 이동시간이 짧아 발을 동동 굴러야 하지만 오전 일 끝내고 한숨 돌릴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발걸음이 무겁다. 꼬리가 휘날리게 반기는 반려견 보물이를 한 번 쓰다듬는 것으로 대충 물리치고 바로 씽크대 앞에 선다. 서둘러 저녁을 해결해야 또 공원에 나가 열심히 운동할 수 있다. 몸은 지쳤어도 땀을 흘리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잠시 한숨 돌리며 남편 앞에 앉아 야구 중계를 보다 씻고 일지 몇 장 쓰고 설거지를 마치면 대충 열한 시다. 그 사이 남편은 들어가 잔다. 일찍 일어나 나가니 나란히 잠자리에 드는 일이 좀체 없다. 이제 좀 쉬고 싶어 리모컨을 든다. 사실 남편에게 채널권을 빼앗긴 지 오래다. 남편이 한눈팔면 얼른 다른 데로 돌린다. 술 한잔 마시며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하루의 피로를 푸는 남편만의 방법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번에 뜻하지 않게 책을 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보잘것없는 글솜씨에 욕이나 먹지 않으려나 걱정이 앞섰다. 글쓰기 방에서는 사적인 이야기도 개의치 않고 내보였는데 활자가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온다니 불안하다. 내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 부끄러운 것은 기본이고 본의 아니게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다행히 남편과 아이들은 제 이야기를 싣는 것을 흔쾌히 승낙했지만 마음이 기쁘지만은 않았다. 혼자 사는 게 아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식구들이 관련되고 이웃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판단하고 생각한 게 과연 옳은 것이었나 의심도 든다. 또 어떤 글을 선택하고 어떻게 실을지 몰라서 고민이 깊었다. 오랫동안 글을 썼기에 중복되는 이야기가 많다. 여러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큰일을 해냈을까 싶어 새삼 존경스럽다.
예전에 썼던 글은 교수님의 도움을 받아 모으긴 했지만 사라져 버린 것도 있었고 내용이 짧고 엉성한 것도 많았다. 전에는 쓰기만 하고 고치는 작업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더 애를 먹었다. 고르는 작업을 몇 달째 하고 나서 나름 고쳤는데도 박선애 선생님에게 또 빨간 줄이 쳐진 종이를 받았다. 그때야 비로소 수업 시간에 지적받았던 내용이 되살아났다. 글쓰기 수업을 다시 받은 느낌이었다. 언제나 좋은 문장으로 글을 쓸 수 있을까? 내 머릿속의 지우개가 열 일을 하나 보다. 변화가 쉽지 않다. 더 바빠지기 전에 준비한다고 했는데 아직 멀었다. 출간은 개점휴업 상태다.
지난 연휴에 작은딸이 다녀갔다. 토요일엔 소개받은 한의원에도 가고 바람도 쐴 겸 구례에 다녀왔다. 설사를 자주 하는 딸과 늘 피곤하고 두통에 시달리는 나를 위해 약을 지었다. 일하려면 내 몸이 건강해야 한다는 것을 내세워 당당하게 거금을 투자했다. 한의학을 신뢰하지 않는 남편과 한약을 싫어하는 큰딸은 사실 눈치를 안 봐도 되지만 나만 챙기는 것 같아 마음이 걸렸다. 일요일엔 요즘 야구에 푹 빠진 아이와 야구장에 가서 신나게 응원하다 왔다.
이번 주는 막내가 다녀갔다. 큰딸 시험을 앞두고 있어 아이들이 들락거리는 일은 신경이 쓰였지만 학업과 알바에 지친 아들이 종강하고 오랜만에 쉬려고 오는데 다음으로 미루게 할 수는 없었다. 마침 순천정원박람회 입장권이 있어 둘이 순천에 갔다. 날씨가 더워 걱정했으나 생각만큼은 아니었다. 그늘이 많고 쉬어 가기 편하게 곳곳에 의자가 있었다. 어색한 포즈를 취해가며 서로 사진 찍어 주기 바빴다. 나중에야 다정하게 둘이서 찍은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들이 운전하는 차에 편하게 가서 맛난 것도 사 먹고 ‘카페 알록’에서 맛있는 커피도 마셨다. 간만에 아들과 데이트했다. 목포에 여자 친구가 있을 때는 얼굴 보기 힘들었는데 말이다.
갑자기 내리는 소낙비처럼 생각지도 못하는 일이 생기는 게 인생이라지만 지금까진 별일이 없이 매번 같은 하루가 돌아간다. 부모님도 다 돌아가서 안 계시고 아이들도 커서 내 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두 아이가 아직 졸업하지 않아 월세는 책임져야 하지만 2년만 버티면 된다. 아직 취직하지 못한 큰딸이 걱정되지만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술 담배를 많이 하는 남편의 건강이 위태롭긴 해도 아직 성한 몸으로 적은 돈이지만 부지런히 벌어 온다. 나도 골골하지만 아직 일할 수 있는 몸과 일거리가 있어 이만하면 됐다. 이제 와 무엇을 바라겠는가?
나이만큼 흐르는 시간도 빨라진다는 말처럼 벌써 6월이다. 아침엔 눈을 뜨고 저녁엔 잠드는 일처럼 아무 생각 없이 묵묵히 하루를 살 뿐이다. 찾기 힘든 네 잎 클로버(행운)보다 흔한 세 잎 클로버(행복)를 반기는 일상이기를, 하반기에도 별일 없기를 바란다.
첫댓글 별일 없이 사는 게 가장 좋습니다. 평범하기도 힘드니까요. 저는 이번에 경주 여행가서 생전 처음으로 네잎 클로버를 아홉개나 찾았답니다. 그래서 혹시나 해서 로또 복권을 샀는데 꽝이었어요.
드디어 대선배님의 책이 나오는 군요.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글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나 글 쓰는 여자야!' 어떤 재목으로 선보일지 선생님의 책이 기대 됩니다. 저도 선생님의 글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작가가 쓰는 글은 다르긴 하네요. 출판 기념회 기다리겠습니다.
별 일 없이 사는 그 하루가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이제는 피부로 느낍니다.
개점 휴업 상태인 책 엮기에 힘을 쓰셔야죠. 하하.
카페 알록에 오셨는데 하필 제가 없는 날이라서 저도 서운했습니다.
다음에는 꼭 같이 해요.
별 일이 많으신데
글이 정말 차분해서, 정말 별 일 없는 것처럼 느껴져요.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도 어제처럼 아침이면 일어나고 일하고, 시간 되면 집에 돌아오고 ... 이렇게 별 일 없는 날들이 소중하더라고요.
곧 나올 책 기대합니다.
밤하늘에 별처럼 일이 많으시구만요. 저도 책 기대합니다.
세상에 책을 내놓으려고 고민이 많으시네요. 당연히 쉽게 나올 수 없는 것 아닌가요?
그래도 욕심을 조금 내려놓으면 고민이 그만큼 작아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