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안ubf11월 넷째주 주일메시지
누가복음 5장 강해 6부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말씀 누가복음 5장 37-39
요절 누가복음 5장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우리는 누가복음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새술을 주셔서 우리를 기쁘게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새포도주인 성령을 마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어 가고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성령은 새포도주다.)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예수님은 아주 이해하기 쉬운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들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않습니다. 새 포도주는 지속적으로 발효가 일어납니다. 새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으면 발효가 일어나 낡은 가죽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져 포도주를 버리고 낡은 부대도 버립니다. 야구에서 한번에 두 타자를 아웃시키면 더블플레이라고 합니다. 더블 플레이를 당하듯이 포도주도 부대도 다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새포도주는 무엇일까요? 새포도주는 성령이십니다. 성경에는 성령을 술에 비유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제자들이 성령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새술에 취하였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합니다.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의 술에 취하라는 말입니다. 성령은 술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술에 취하면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고 기쁨이 오듯이 성령도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나는 내 마음에 기쁨의 강물이 흐르는 것으로 성령이 충만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술은 사람을 취하게 하듯이 성령도 사람을 취하게 합니다. 취하는 것은 의식을 초월하게 하는 것입니다. 술에 취하면 자의식이 사라지고 사람이 속에 있는 말을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가 더 친해집니다. 성령에 취해도 속 깊은 이야기를 하게 되게 서로를 더욱 가깝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술과 다른 점이 있어 그냥 술이라고 하지 않고 새술이라고 합니다. 술은 사람을 방탕하게 합니다. 노상방뇨하게 하고 큰 소리를 질러도 부끄러운 줄 모릅니다. 술에 취하면 본능에 따라서 행하므로 서로 싸우거나 음란의 죄를 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술은 건강도 해칩니다. 그러나 성령에 취하면 더 도덕적이 되고 거룩해집니다. 성령은 이성을 초월하지만 사람을 더 합리적이 되게 합니다. 성령에 취하면 사람이 더 건강해집니다. 우리를 중독시키는 것은 다 우리를 술처럼 취하게 하는 것입니다. 겜이나 마약이나 도박은 우리를 취하게 만듭니다. 이런 것에 중독되면 우리를 황폐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에 취하면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의 술에 취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새술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에게 성령을 받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 성령의 새술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의 새포도주를 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유대교 전통과 관습은 낡은 가죽부대다)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7절을 다시 보면 사람들은 새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새포도주는 성령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낡은 가죽부대는 무엇일까요? 낡은 사고방식으로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대교의 전통과 관습을 의미합니다. 성령을 유대교의 전통과 관습에 담을 수 없습니다. 당시에 유대교는 많은 전통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지켜야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걸어가는 거리, 들고가는 무게들이 정해져 있습니다. 안식일에는 불도 피우지 못합니다. 엘리베이트 버튼도 누르지 못합니다. 갈릴리 호텔에서는 바깥에서 층수를 누르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누르면 함께 타고 가기 위해서입니다. 응급환자가 아니면 안식일에 병을 고치지 못합니다. 밥을 먹을 때는 손을 씻어야하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갔다오면 샤워를 해야합니다. 부모에게 드려야하는 것도 하나님께 드렸다고 고르반하면 안 드려도 되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였습니다. 이런 전통과 관습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판했습니다. 왜 안식일에 병을 고치나? 안식일에 밀이삭을 비벼 먹는가? 왜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나? 왜 금식하지 않나? 끊임없이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유대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새로운 전통과 관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복음의 새술을 유교의 전통에 담을 수 없습니다. 성령은 율법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습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킵니다. 겉을 깨끗이 하기보다 속을 깨끗이 합니다. 성령을 유대교의 전통에 담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새술을 유교나 불교나 샤머니즘의 낡은 가죽부대에 담을 수 없습니다. 유교는 머리를 자르지 않는 것이 효입니다. 그렇다고 상투하면서 예수님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믿고 머리를 잘랐다고 부모에게 엄청 매를 맞았습니다. 유교는 제사를 지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제사 지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는 조상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신에게 절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제사를 지내지 말고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저는 예수 믿고 제사지내지 않는다고 엄청 혼났습니다. 불교는 부처상을 모시고 향을 피우고 그곳에 절을 합니다. 기독교에도 예수님의 상을 만들고 그곳에 절을 하고 예배당에 향을 피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사머니즘은 나무 하나 함부로 베지 못하고 돌하나 제대로 음직이지 못합니다. 이사가는 날, 결혼하는 날 모든 것에 손이 없는 날에 해야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아무 때나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으면서 불안하여 점쟁이를 찾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무당이 변화되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분 이야기로는 그분 고객의 20프로가 크리스천이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무당을 찾아가는 사람들에게 진노하십니다. 우리 기독교는 이런 유교 불교 샤머니즘의 낡은 가죽부대에 담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으면서 이런 종교와 타협하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기독교도 버리고 다른 종교도 버리고 다 버리게 됩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은 새로운 기독교문화를 만들어가야합니다.
(새부대는 새로운 문화이다.)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새술은 새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새부대는 바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문화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화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성령이 새로워지듯이 문화도 항상 새로워져야합니다. 이런 문화가 굳어지면 그것도 낡은 가죽부대가 됩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가톨릭은 낡은 가죽부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낡은 전통과 관습을 고집하였습니다. 교황의 말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절대적이었습니다. 성경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되었는데 이것을 자국어로 번역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신부만이 성경을 읽고 해석하게 하여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고자 하였습니다. 그 당시 성경을 번역하고 읽었다고 불에 태워죽였습니다. 바비도라는 소설이 그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기도도 할 수 없고 성직자들이 써준 기도문을 읽어야했습니다. 이렇게 낡은 가죽부대가 되니까 터져서 개신교가 나온 것입니다. 개신교가 나오면서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여 모든 사람이 읽게 되었습니다. 신부만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평신도 성경을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개신교도 낡은 가죽부대가 될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목회자가 특권화됩니다. 신학교를 나온 목사만 말씀을 전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목회자만 선교사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예수 믿은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십니다. ubf에서 처음에 평신도 목자 선교사가 나오자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평신도가 말씀을 전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교회가 많이 있지만 지금은 평신도가 목회를 하는 것이 본질아라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임사역자는 평신도가 목회를 하도록 돕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전임사역자로 살기가 어렵자 개척하는 목회자들이 일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ubf는 수양회 때나 때로는 주일날도 평신도들이 말씀을 전하게 합니다. 우리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교회에서는 혁명적인 것입니다. 요즘에는 교회도 평신도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고 있습니다. 특히 공산권 이슬람권에는 평신도로 가지 않으면 선교사로 갈 수 없습니다. 세상의 문화도 시시각각으로 새롭게 바뀌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본질에 어긋나지 않으면 우리는 이런 문화에 대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가져야합니다. 성령의 새술을 새로운 문화에 담아야합니다. 미국에는 1960년대 히피문화가 있었습니다. 청년들이 맨발로 다니고 발가벗고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이들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갈보리채플의 척스미스 목사는 이들을 환영하고 영접하였습니다. 이들이 변화되어 많은 목회자들이 되었습니다. 지금 세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마트폰 세대, 유튜브 세대가 나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귀신이라고 멀리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스마트폰이나 유튜브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선한 사람이 사용하면 선이고 악한 사람이 사용하면 악이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용하여 복음을 받고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이번에 서울 오륜교회에서 다니엘 세 이레 기도회를 전국적으로 만이천 교회 40만 성도가 참여하였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유튜브 영상입니다. 저도 카페에 말씀을 올려서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성경을 언제나 어디서나 가르칠 수 있습니다. 지금 유튜브에도 메시지를 올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매체에 개방적이되 하나님 안에서 선택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합니다. 새부대는 이런 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사 그들에게 세계 선교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유대이즘에 매여서 헌부대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수장격인 베드로는 이방인과 식사하는 것도 거북해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헌부대가 되어었습니다. 그러자 이방문화에 대하여 열려 있는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세계선교의 새부대입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의 문화나 새로운 시대의 문화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면 헌부대가 되어 버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새부대가 되지 않으면 버림 받는다는 각오로 새부대가 되기 위해서 투쟁해야합니다.
(묵은 포도주는 이 세상의 복음이다)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포도주를 원하는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묵은 것이 좋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묵은 포도주를 먹다 보면 그 맛에 입맛이 길들여져 새포도주를 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묵은 포도주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아닌 지상의 세속적인 복음입니다. 사람은 예수님 때나 지금이나 세속적인 복음을 원합니다. 이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지상 메시야를 원했습니다.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독립시켜주시고 병을 고쳐주시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고 세계를 정복하는 세계 최고의 나라를 만들어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의 복음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고 그곳에서 부활하여 영생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세상의 세속적인 복음을 맛보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은 무력하고 어리석은 메시야이라고 생각하여 천국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을 믿고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기를 원합니다. 성공하고 번영하고 건강하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의 삶은 잠깐입니다.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잠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갖지 않습니다. 우리가 미국으로 이민가고자 하면 한국에서 집사고 차사고 돈쓰는 것을 절제합니다. 미국에 가서 살 준비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갈 것을 믿는다면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힘쓰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서 얼마나 큰 상을 받고 영광을 받을 것인가에 집중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삶은 검소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며 주님과 주님의 양들을 위해서 시간과 물질을 씁니다. 가난한 이웃을 돌봅니다. 묵은 포도주와 같은 이 세상에서 맛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새포도주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묵은 포도주를 버리고 새포도주를 마시기 원하십니다. 이 세상의 묵은 포도주는 결국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삶이 잠깐인 것을 알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야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마음 속에 체험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야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고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묵은 포도주와 같은 이 세상의 복음을 버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영접하지기를 기도합니다.
(결론 이 세상은 꿈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성령의 새포도주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성령의 새포도주를 공급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묵은 포도주를 버리고 성령의 새포도주를 마셔야합니다. 세상적인 즐거움은 묵은 포도주입니다. 돈버는 즐거움, 연애하는 즐거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즐거움은 묵은 포도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성령이 주시는 영원한 즐거움이 새포도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즐거움이 새포도주입니다. 우리는 묵은 포도주를 버리고 새포도주의 맛을 즐겨야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즐거움을 찾아야합니다. 새하늘과 새땅의 즐거움을 찾아야합니다. 어떤 분이 아주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꿈에서 돈을 많이 주웠습니다. 그는 돈을 줍다가 깨면 허망해서 울었습니다. 그는 다음부터는 꿈에서 돈을 주운 후 돈을 더 줍지 않고 그 돈으로 맛있는 것을 사먹고 깨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실제 꿈에서 먹고 깨어나니 그래도 전보다 나았습니다. 우리의 현재 삶은 일장춘몽과 같은 허망한 것입니다. 돈만 모으다가 하나님 나라에 가면 얼마나 허망할까요? 꿈 같은 이 세상에서 돈은 적당히 벌고 돈을 쓸 줄 알아야합니다. 쓴 것만이 남습니다. 자신과 이웃을 위해서 돈을 써야합니다. 특히 우리가 갈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돈을 써야합니다. 하나님의 상급과 칭찬을 받기 위해서 돈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기쁨을 맛보며 살아야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령의 새술에 취해서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살다가 모두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아멘 한마디) 성령은 하나님 나라를 주신다.
누가복음 5장 강해 6부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말씀 누가복음 5장 37-39
요절 누가복음 5장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천안ubf11월 넷째주 주일메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