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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1 / 믿어야 감사하게 됩니다 (수6:15-16)
오늘은 한국 교회가 정한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그런데 추수감사절이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유래된 말이 아닙니다. 영국 국교회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해 온 청교도들에 의해 지어진 이름이고 성경적으로 보자면 구약에서의 추수감사절은 이름이 다릅니다. 정확하게는 ‘초막절’이라고도 하며 또한 ‘수장절’이라 하기도 합니다.
우선 초막절이라 함은 히브리어로 ‘하그 수콧’이라 해서 ‘하그’는 절기라는 뜻으로, 이때 모든 유대인은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초막 생활 즉 텐트를 치고 생활했던 것을 기념하여 일부러 집 밖에 초막을 치고 머물면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념했던 날입니다.
또한 이때는 농사와 관련하여 이스라엘의 늦추수 때와 맞물려 있었기에 ‘하그 아시프’라 해서 양식을 거두어들이게 하신 하나님께 추수에 대한 감사 제사를 드렸던 날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초막절이든 혹은 수장절이라 할 때면 구원의 감격과 더불어 추수의 감사를 하나님께 돌리는 특별한 때이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일 년에 세 번 필수적으로 성전에 나와야 하는 절기로 유월절, 칠칠절과 더불어 초막절 곧 수장절을 지켜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추수감사절을 설명할 때면 농촌 지역 이외의 곳에 사는 교인들 중에는 ‘우리는 농사를 짓지도 않는데 추수 감사를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생각엔 어떠신가요? 추수 감사를 하자 하면 뭘 추수했기에 뭘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오해가 있어선 안 될 것이, 교회가 추수 감사 주일을 지키고자 할 때면 강조하는 포인트가 ‘추수’가 아니라 ‘감사’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랬기에 명칭은 추수 감사라 할지라도 이 절기는 광부도 어부도 지켜야 하고 회사원이나 자영업자도 추수 감사에 참예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추수감사절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기념하고 또한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회복하는 데 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이렇게 말씀드리면 대개의 교인들이 그제야 뭘 감사할지를 찾으려 하거나 감사해야 할 것이 뭐가 있을지를 떠올려 보려고들 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하자고 할 때면 무얼 감사하실 것이며, 어떻게 감사하시려는지요?
이전에 배운 내용 중에 우리가 복을 말할 때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세상의 물질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계심’ 자체가 복이라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마찬가지로 감사를 말할 때도 세상적인 감사와 성경이 말씀하는 감사는 개념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성도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면 세상적인 감사의 개념으로만 접근하다 보니 감사할 게 없다 싶거나 감사한다 해도 억지 감사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뭘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감사의 진짜 의미는?
성경에서 감사하라고 할 때는 감사의 대상이나 조건이 ‘결과가 아니라 원인’에 있다는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무엇 무엇 때문에 감사하다.’고 할 때 그리스도인에게는 앞의 ‘무엇 무엇’에 해당하는 것이 ‘되어진 결과’가 아니라 ‘되게 하는 원인’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뭘까요?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 ‘되게 하는 원인’은?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이제까지 여러분이 신앙적으로 배웠고 믿어왔던 것을 되돌아볼 때 인생에서 안 되는 걸 되게 하시고, 없는 걸 있게 하시는 분이 누구시라고 했던가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사전적인 뜻으로 전능이란 말은 ‘어떤 일이든 못하는 것이 없이 모두 능함’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못하는 것이 없다.’ ‘모두 능하다.’는 점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할 때면 우린 ‘전능하신’이라는 말 대신 ‘되게 하시는’이라는 말로도 쓸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전능하신 하나님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고 그렇기에 우리 인생에서 만사에 되게 하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한다면 그게 바로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성경에서 또는 교회가 감사하라고 할 때 우리가 ‘무엇 무엇 때문에 감사하다’고 하려면 우리는 세상에서의 되어진 결과가 아니라 무엇 무엇을 되게 하는 원인 곧 되게 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따라서 비단 추수감사절 날만이 아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매 순간을 진정 감사하는 성도로 살아가려고 하면 우리에겐 언제든 하나님은 되게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감사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감사해야 할 제목은 어떤 순간에서든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가 매번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붙들고 살아올 수 있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나에게서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 되어 주신 것에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어떤 순간에서든 하나님이 되게 하신다는 믿음 하나로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린 감사절을 맞아 ‘두 가지의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는 이 순간까지 나와 함께 계셔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며, 둘째로는 힘들고 속상했던 순간들 중에도 믿음 하나 붙들고 여지껏 견뎌 온 자기 자신에게도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나에게 감사하자는 말이 다소 생소하게 들리실지는 몰라도 생각해 보시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렇다고 모두에게서 되게 하시는 역사를 베푸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뭔가요? 결국 우리에게 하나님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이 있어야만 하나님도 믿음 대로 역사해 주시는 겁니다.
이렇게 본다면 낙심되는 모든 순간들과 좌절되고 속상한 모든 형편 중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놓치지 않고 어려웠던 시간들을 버텨온 여러분 자신에 대해 여러분 스스로를 대견해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사하라고 하면 하나님께 먼저, 그리고 여러분 스스로에게도 감사하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추수 감사의 진정한 의미는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여야 하는 동시에 그런 하나님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믿어 온 자신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누구라도 진정한 감사를 하기 위해서는 전능하신 하나님 곧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만 감사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이는 역으로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믿어야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린 감사하는 삶을 위해서라도 믿음으로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이, 감사한 삶을 누리기 위해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가 믿음으로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믿음은 부딪혀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부딪혀 본다’는 말은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진짜 믿음이 있으려면 우리의 ‘믿음에는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하박국 2:3절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고 하셨다면 우리가 이 말씀을 믿는다는 게 뭘까요?
응하실 것을 믿는다면 ‘기다리는 행동’이 뒤따라야 그게 진짜 응하실 것을 믿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야고보 사도도 말하기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믿으면 행하는 겁니다. 그렇게 행하다 보면 감사하게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이스라엘은 드디어 광야를 떠나 가나안의 첫 성인 여리고를 점령하기 위해 전진해 나갑니다.
돌아보면 40년 전, 당시 출애굽 1세대들은 가나안을 빤히 보는 곳까지 왔다가도 이미 가나안을 차지하고 있는 강대한 일곱 대적의 위세에 눌려 ‘적이 너무 세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 하나님도 너무하셨다. 모세의 잘못도 크다. 결국 우린 죽으러 왔던가?’ 등으로 여건 타령만 하다 결국엔 40년을 광야에서 떠도는 인생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허구한 날 신세타령, 환경 타령, 조건 타령, 남 타령만 하게 되면 되는 게 없습니다. 설령 내가 원하는 대로는 되지 않을지라도 언제든 하나님이시라면 나를 위한 일들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을 수 있어야 되는 것도 있게 됩니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이, 믿음은 내가 나를 믿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감사한 날들을 살기 위해서라면 믿음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것!’ 이것이 믿음이건만 간혹 사람들은 믿음을 선택적인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래서 어떨 땐 ‘믿습니다!’라고 하다가도 또 어떨 땐 못 믿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력은 연습을 반복할수록 쌓이듯이 믿음도 자꾸 행할수록 강해집니다.
다시 본문을 보세요. 여리고 성을 정복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뭔가 공격적인 작전을 지시하시거나 역사하시는 게 아니라 백성들에게 그저 성을 뱅뱅 돌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첫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시받은 대로 하긴 해야겠기에 혹시나 하는 맘으로 조심스럽게 여리고로 접근합니다. 그러면서도 ‘혹시라도 적군이 우리가 오는 걸 알고 어디 숨어서 기습하면 어떡하지?’라든가, ‘하라고 하시니까 해보긴 한다만 이렇게 성만 뺑뺑 돈다고 뭐가 될까?’처럼 안 될 것 같다는 온갖 생각들이 다 듭니다.
그런데 결과를 보면 어떤가요?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활 한번 쏘지 않고, 칼 한번 뽑지 않았어도 여리고 성이 그들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하나님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늘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목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반드시 무너지게 하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 믿음대로 된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진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이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했던 행동이 있었기에 성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겁니다. 여리고 성을 점령했던 이스라엘을 보며 ‘해보니 되더라!’는 신앙 체험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살아가는 중에 이런 체험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그것들이 우리 안에서 확고한 믿음으로 축적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도 보면 열두 해를 혈루증 앓던 여인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각종 병자를 고치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여인은 ‘예수님이시라면 내 병도 고쳐 주실 텐데.’라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단지 생각일 뿐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인이 생각합니다. ‘그래! 일단 부딪쳐나 보자.’ 그리곤 이어 행동합니다. ‘예수님께 가자. 예수님이 내 병도 고쳐 주실 것이다.’
결국 이런 여인의 행동이 그녀의 믿음이 되었고 그 믿음대로 여인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병 고침 받은 열 명의 문둥병자는 또 어땠습니까?
‘예수님이시라면 우리의 문둥병도 고치실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생각이 믿음이 되지는 못합니다. 결국 문둥병자들은 행동하기로 합니다. 예수님께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만난 예수님을 향해 ‘예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저들이 예수님을 향해 일어난 행동, 그리고 예수님께 간청하며 외친 행동, 그런 행함 들이 결국엔 그들의 믿음이 되어 당시 천형이라 여겨졌던 문둥병도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성경에서의 각종 기적과 이적 그리고 응답받은 체험들을 보며 “해보니 되더라.”는 믿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되면 그다음부터는 어떤 일에서든지 ’해보면 될 거다!‘라는 믿음의 당당함을 가지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이런 행함이 믿음이 될 것이기에 그 믿음이 여러분의 인생을 감사의 자리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이렇듯 무엇이든지 행하지 않으면 결과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신앙의 길에서는 행동하는 믿음이 앞서야 축복이 뒤따라옵니다.
예전에 지레 겁먹고, 포기하고, 낙심하여 하나님을 불신했던 출애굽 1세대들을 보면 인간적이 생각과 손익 계산이 앞서다 보니 행함이 받쳐 주질 못했고, 행동하질 못하니 믿음대로의 은혜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에 반해 지금의 2세대는 그들의 믿음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그들에겐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행동하는 행함이 있었습니다.
이런 ‘말씀대로 행동함’이 있고, 없고가 복 받지 못했던 1세대와 복 받은 2세대의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다시 신약을 보면 밤새 고기잡이를 했으나 허탕 친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이후로 그가 어찌 행해야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이때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어서라기보다는 단지 ‘말씀대로 해보기는 하겠습니다.’라고 했던 그의 행함이 믿음으로 인정받았고 그랬기에 행한 대로 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매사에 믿음으로 행동할 때를 놓치지 않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더 나빠지겠느냐?’ ‘노력하든, 안 하든 어차피 안 되는 일 아니더냐?’는 식의 담대함으로, ‘그러니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으니 기도를 행해보자.’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으니 기다림을 행해 보자.’라고 하게 되면 그런 저와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은 그 행함 들을 믿음으로 여기셔서 우리에게도 감사할 일들을 되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결국 감사와 기쁨과 복은 우리 각자의 믿음을 타고 오는 것이고 그 믿음은 우리의 행함을 통해 하나님께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의 지시를 받는 하인을 생각해 보세요.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게 하인입니다. 그랬기에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 같은 건 없었습니다.
물통에 물을 퍼다 담는 건 시키지 않아도 어차피 하인들이 해야 할 일이었고 잔칫집에서 손님들에게 물 떠다 주는 등의 시중도 역시나 하인들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다만 평소와 다른 게 있었다면 그날만큼은 그걸 하라고 하신 분이 예수님이셨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늘 하던 일이고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행했던 그날엔 그들의 행동에 기적이라는 역사가 뒤를 이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대답해 보세요. 해당 본문에서 이 좋은 포도주가 어디서 났느냐는 질문에 하인들이 뭐라고 했을까요?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만 했을 뿐입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제부턴 여러분도 내가 믿는 하나님은 되게 하시는 분이시란 것을 철석같이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는데, 우린 어땠나요?
하지 말라는 근심은 잘하면서도 하라는 믿음은 잘 하지 못하며 살아오지는 않았는지요?
‘하지 말라 하신 것을 하니 안 되더라.’가 당연한 결과입니다. 반면에 ‘하라고 하신 것을 해보니 되더라.’가 바로 우리가 감사하기 위한 믿음인 것이고, 추수감사절을 맞아 우리에게 진정으로 있어야 할 감사입니다.
다시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의 행함의 결과로 성이 무너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린 압니다. 인생의 여리고 성을 점령하는 것은 내가 아니란 것을.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야 할 감사한 일들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고, 행함으로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되게 하시니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매일매일이 감사한 날들이 되게 하기 위해 나에게 있어야 할 ’행동하는 믿음‘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찾고, 그걸 행함으로써,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여러분의 사는 날들을 늘 감사로 채워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