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51:20에 나타나는 ārabbha에 대한 의견
'비구들이여, 밖으로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대해서
계속해서 흩어지고 계속해서 방해받는 열의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밖으로 흩어진 열의라 한다.
Yo, bhikkhave, chando bahiddhā pañca kāmaguṇe ārabbha anuvikkhitto anuvisaṭo –
ayaṃ vuccati, bhikkhave, bahiddhā vikkhitto chando.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으로 흩어지고 혼란되는 의욕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밖으로 산란된 의욕이라고 한다.'
사전적 설명에 의하면 ārabhati에서 유래되었고
명사형으로는 ārambha(the beginning, attempt)가 있고
[불변사]의 ārabbha는 'beginning with, referring to, about'라는 의미랍니다.
이 단어의 기본적 의미는 '시작'과 관련되어 있지만
[불변사] 용례에서는 '~로부터 시작하여, ~을 대상/쪽/방향으로, ~에 대해서'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그래서 위 구문에서 'pañca kāmaguṇe ārabbha'는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들을[남/복/대] '대해서/대상으로/방향으로/쪽으로'[불변사]
(흩어지고 혼란되는 의욕이다) ---라는 의미이지
'前5境(色聲香味蜀)이 5욕락의 시작이다'라는 의미이거나
'5욕락이 慾界의 시작지점'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A6:63 [kathā. 514]
세상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감각적 욕망이 아니라
의도에서 생긴 애욕이 감각적 욕망일 뿐이라네.
아름다운 것들은 세상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뿐
지자는 여기에 대한 욕구를 길들이노라.
Saṅkapparāgo purisassa kāmo
Nete kāmā yāni citrāni loke,
Saṅkapparāgo purisassa kāmo
Tiṭṭhanti citrāni tatheva loke,
Athettha dhīrā vinayanti chandanti.
생각을 통해서 생긴 애욕이 인간의 감각적 욕망이니
세상의 다채로운 대상들은 감각적 욕망이 아니로다.
생각을 통해서 생긴 애욕이 인간의 감각적 욕망이니
세상의 다채로운 대상들은 그냥 그렇게 머물 뿐이어라.
슬기로운 자들은 그것에 대한 의욕을 길들이노라.
이상과 같이 前5境(色聲香味蜀)은 名色이 아닐 뿐 아니라 慾界의 시작지점도 아닙니다.
즉 <~from ~to>에서 우리들의 언어 감각으로는 from이 아니라 to로 이해하는 것이 쉽습니다.
이와 유사한 용례는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예를 들고 올 필요도 없지만
이미 반복적으로 소개한 몇 가지만 다시 소개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런 제게 세존을 생각하면서 환희심이 생겼습니다.
' 오, 참으로 이런 법들에 능숙한 분은 세존이시고 선서이시다. '라고.
tassa mayhaṃ, bhante, bhagavantaṃyeva ārabbha sati udapādi —
‘ aho nūna bhagavā, aho nūna sugato! yo imesaṃ dhammānaṃ sukusalo ’ ”ti.
* 세존에 대하여 (' 다음 '과 같은) 기억이 생겨났습니다. -
' 오, 참으로 이런 법들에 능숙한 분은 세존이시고 선서이시다. ']
[' ...... 깨달은 분[佛]이시며, 세존(世尊)이시다.' 라고.
난디야여, 그대는 이와 같이 여래를 대상으로 안으로 마음챙김을 확립해야 한다.
iti kho te, nandiya, tathāgataṃ ārabbha ajjhattaṃ sati upaṭṭhāpetabbā.
* 內로 여래에 대하여 '이와 같이' (=
' ...... 깨달은 분[佛]이시며, 세존(世尊)이시다.' 라는) 기억을 확립해야한다.]
[tassa mayhaṃ, bhante, tasmiṃ samaye
mussateva bhagavantaṃ ārabbha sati,
mussati dhammaṃ ārabbha sati,
mussati saṅghaṃ ārabbha sati.
세존이시여, 그러면 그때
세존에 대한 저의 마음챙김은 흐리멍덩하게 되고
법에 대한 저의 마음챙김은 흐리멍덩하게 되고
승가에 대한 저의 마음챙김은 흐리멍덩하게 됩니다.
*mussati:[mus + ya] forgets; passes into oblivion]
[disvāna bhagavantaṃyeva ārabbha sati udapādi —
“ imāni kho tāni rukkhamūlāni pāsādikāni pasādanīyāni appasaddāni appanigghosāni
vijanavātāni manussarāhasseyyakāni paṭisallānasāruppāni,
yattha sudaṃ mayaṃ taṃ bhagavantaṃ payirupāsāma arahantaṃ sammāsambuddhan ”ti.
보고는 세존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 이 나무 밑은 아름답고 멋있고 조용하고 소음이 없고 한적하고 인적이 드물고
그 아래에서 한거하기에 좋다.
전에 우리는 이런 곳에서 아라한이시고 정등각자이신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는 했다. ”]
이와 같이 불수념(佛隨念-buddhānussati)을
念佛(념불) 혹은 佛(세존)에 대한 念(기억)[bhagavantaṃ ārabbha sati]으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즉 念佛이든 佛隨念이든 모두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라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댓글로 남긴 의견입니다.
" 地의 地자性에 의해~ 내지
一切의 一切性에 의해 경험하지 않고 名色이라는 방식으로 경험한다는 의미이지요?
그렇다면 一切에 포함되는 意 혹은 法도 名色이라는 방식으로 경험한다는 의미입니까?
또한 무색계의 마노도 명색이라는 방식입니까?
아마 M49의
'땅에 내재된 땅의 특질로 체득할 수 없는 그것을 최상의 지혜로 알아'
yāvatā pathaviyā pathavattena(~sabbassa sabbattena) ananubhūtaṃ tadabhiññāya ...라는 말씀은
'地의 地자性(pathavī+ta ~
一切의 一切性)에 의해 경험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그 (空性)을 自내證하여'.... 라고 읽을 수도 있지 싶습니다. "
tad를 (空性을) 주석의 설명처럼 解脫과 연계시키는 것도, 가능은 하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