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애터마을을 지나
칠월이 가는 마지막 날은 평소 산행을 함께 다닌 벗과 근교 트레킹을 나섰다. 오키나와 근해에서 서해상으로 북상한다는 태풍 간접 영향으로 제주도와 남녘 해안엔 강수가 예보되었다. 이른 아침 대방동에서 북면 온천장으로 가는 농어촌버스를 타기 위해 반송 소하천을 따라 나가 원이대로에서 벗이 타고 온 버스에 합류 충혼탑 사거리와 명곡 교차로를 지나 굴현고개에 이르렀다.
버스에 내리니 고갯마루 북녘에 해당하는 백월산 일대 산자락은 겹겹이 운무가 걸쳐져 한 폭의 수묵 담채화를 보는 듯했다. 몇몇 오리고기 식당이 차지한 굴현고개 산마을에서 고속도로와 최근 개통된 구룡산터널 진입 도로를 지나 지개리로 내려섰다. 구부정한 논둑과 개울을 지난 대한마을에 이르니 행정 당국이 시민들에게 분양한 텃밭에는 잡초와 함께 여러 가지 작물이 자랐다.
대한마을에서 한수마을과 고암마을을 거쳤다. 벼농사를 짓는 논이 전혀 없고 산비탈은 모두 단감 과수원이었다. 승산마을에 이르니 북면 초등학교 승산분교장이 나왔다. 승산분교장에서 산모롱이를 돌아가니 잉애터마을이었다. 잉애는 잉아(孕兒)의 토박이말로 아이를 배는 자궁과 같은 형상의 마을이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경주 건천 여근곡과 유사한 지형이라 불리는 지명이다.
마을 어귀를 들어서니 새벽부터 잔뜩 흐렸던 하늘에는 성근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구룡산이 백월산으로 건너가는 잘록한 길목에서 산세가 여성 음부 모양의 산자락에 여남은 가구가 사는 동네가 잉애터였다. 아마 우리나라 지명에서 아이 밸 잉(孕) 자가 들어간 마을로는 유일하지 싶다. 요즘처럼 저출산 시대에 풍수를 대입시켜 출산을 장려할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마을이었다.
잉애터를 지나면서 성근 빗방울 피해 주인장이 자리를 비운 농막에 올라가 벗이 가져온 담금주를 비웠다. 농막에서 내려와 텃밭을 일구는 한 아낙을 만나 얘기를 잠시 나누었다. 마산에 살면서 가끔 들린다는 아낙은 잡초를 제압해 농사를 잘 지었다. 부추밭의 부추를 잘라 놓고 고구마 이랑의 넝쿨을 들추어 김을 매고 있었는데 여름철 텃밭 농사는 잡초와의 전쟁이 문제라고 했다.
아낙과 헤어져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니 행적구역이 창원 북면에서 동읍 화양이었다. 화양은 동행하는 벗이 교장으로 재직하는 학교와 가까웠다. 고개를 내려서니 가지를 가득 따 놓은 한 할머니를 만나 인사를 나누었더니 곁의 오이를 가져가십사 했다. 텃밭 농사가 잘되어 가지와 오이가 넘쳐 처리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저 가져오기 미안해 천원 권 지폐 석 장을 손에 쥐어 드렸다.
처음 뵌 할머니가 고맙게 주신 오이와 가지를 챙겨 들고 벗이 근무하는 초등학교로 갔다. 벗은 한 달 후 그곳 학교에서 퇴직을 앞두었는데 교장을 중임까지 해서 원로교사로 남든지 명예퇴직하든지 해야 해 팔월 말 임기 종료와 함께 선택한 결정이었다. 내가 작년까지 거제에서 가꾸었던 봉숭아 씨앗을 분양받아 교정 곳곳에 심어 꽃이 피니 알록달록한 꽃 대궐을 이루어 놓았다.
벗은 횃불 맨드라미 꽃씨도 모종을 심어 놓아 학교 들린 걸음에 옮겨 심을 작정을 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과 같았다. 나는 맨드라미 모종 심을 자리의 잡초를 뽑아주고 벗은 모종을 뽑아와 일정 간격으로 가지런히 줄을 지어 심었다. 비가 연방 올 올 듯해 물을 주지 않아도 되었으나 땅이 척박해 며칠 새 두엄을 넉넉하게 뿌려주길 당부했다.
맨드라미 모종을 심은 뒤 회화나무 아래 평상에서 남겨둔 담금주를 마저 비우고 교정을 나서니 빗방울이 굵어져 우산을 받쳐 썼다. 차량이 통행하는 포장도로를 비켜 화목마을에서 새로 뚫는 우회 지방도 미개통 구간을 걸어 동읍 사무소까지 갔다. 요기를 때울 식당이 여의하지 않아 용잠삼거리까지 진출해 돼지국밥집에서 맑은 술을 잔에 채워 비우고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탔다. 22.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