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임 정하기
결제 걸망은 무겁다. 한 철 지내낼 살림살이를 대충이라도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행각할 때의 걸망보다도 부피가 더 크다. 장삼과 가사. 발우는 꼭 갖추어야 하는 비구육물에 든다. 속옷 한 벌과 갈아입을 승복 한 벌이 더 필요하다. 묵직한 결제 걸망을 멜 때마다 한 철 알차게 공부하겠다는 각오가 새롭다.
머무르던 곳을 떠날 때마다 왜 자꾸만 망설여지는지 모르겠다. 한 곳에 안주하고 싶은 본능이 해가 갈수록 심해지는 듯하다. 그리고 방일과 타성의 무서움을 알고 있다. 그것이 언제나 내 떠남을 무겁게 하기 때문이다. 홀로 떠날 때의 홀가분함에 익숙해지려면 떠나는 연습을 거듭해야 할 게다.
해인총림은 종정 성철 스님의 덕화로 더욱 빛난다. 법보 종찰로서 이백여 명의 대중이 수행하는 곳. 그래서 총림이다. 공부하는 스님들로 숲을 이루었다는 뜻이다. 수행자는 산을 닮는다. 해인사에 사는 스님들은 성격이 불같이 급하고, 무슨 일을 해도 앞뒤가 똑 부러진다. 앞산과 뒷산이 화산의 형국이기 때문이다. 흔히 해인사를 대표적인 남성 사찰로 꼽는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다른 처소에 살다가도 해인 산문에만 들어서면 기운이 살아난다. 그러고 보면 내 성미도 꽤 급한 편일 성싶다. 개성이 강한 스님들이 모인 곳이라 때로는 시끄러운 일도 생긴다. 그래도 젊은이는 해인사에 살아야 제대로 수행하는 것 같다고들 한다. 또 해인사만큼 객을 대접하는 곳도 드물다.
방 짜는 날 저녁에 비로소 대중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구참들을 빼놓고는 대개가 낯익은 스님들이다. 법랍이 쌓이는 만큼 알고 지내는 반연도 많아지는가 보다. 방이란 한 철 지내면서 맡게 될 소임을 말하는 것이다. 먼저 대중을 통솔할 열중을 모시고 다음으로 규율을 다스릴 청중을 뽑게 되는데, 이 같은 대중 소임은 대개 구참 스님들의 몫이다. 아무나 섣불리 맡겠다고 나설 수 없는 게 대중 소임, 사실 한 철 정진 분위기는 소임자의 수완에 달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따라서 공부의 흐름을 잘 아는 노련한 구참자가 제격이다.
소임이 참 많다. 어렵고 힘든 아래 소임은 탁자 및 하판들의 몫이다. 내가 맡은 소임은 다각, 공양 뒤에 차와 과일을 내놓는 일로서 대개 첫 철을 지내는 초참들이 맡는다. 때로는 대중을 시봉한다는 생각으로 여러 철 지낸 스님들이 힘든 다각 소임을 자원할 때도 있다. 대중 처소에서는 말없이 보살행을 실천하는 이같은 스님이 많다.
처음 들어보는 낯선 소임도 있다. 마호는 대중들의 옷 손질을 도우려고 풀을 쑤는 소임이고,
요원 소임은 바느질을 준비하는 일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명등, 화대는 불을 다스리는 소임이고, 욕두, 수두, 정통 같은 소임은 물과 관련된 일을 한다. 저마다 맡은 소임을 제 일처럼 해내기 때문에 정진하는 일에 불편한 점은 없다. 대중을 생각하면 자기 소임에 소홀할 수가 없다. 좌차는 법랍 순으로 정해진다. 초참인데도 법랍을 따지다 보니 중좌를 차지하게 되었다. 여러 철 지낸 스님들보다 윗자리에 앉게 되었으니 정말 미안한 일이다.
법랍 순으로 자리를 정하는 것보다 안거수를 기준으로 하여 자리를 정하는 게 옳을 것 같다.용상 대덕들이 다 모인 곳, 텅 비었던 선실엔 벌써부터 공부 열기가 대단하다.
출처 ; 현진 스님 / 삭발하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