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서 평론] 한류 1호, ‘노오란 셔쓰의 사나이’의 작곡가 손석우
우리나라 드라마주제가 제1호인 ‘청실홍실’을 비롯해, 60년대 이후 우리 대중음악의 흐름을 바꾼 동시에 진정한 의미에서 ‘한류 1호’라고 평가받고 있는 ‘노오란 셔쓰의 사나이’ 등의 작곡가 손석우.
‘손석우 노래 70 여년의 기록’을 담은 ‘손석우 특별전’이 남이섬에 위치한 노래박물관에서 2014년 9월 4일 개막, 12월 31일까지 열렸다. 또한 우리나라 대중음악계 최고 원로인 95세의 주인공을 직접 모시고 갖는 이 ‘손석우 특별전’은 개인의 기록을 넘어 광복 이후 우리나라 대중음악사를 돌아보는 소중한 전시가 되었다.
이 특별전에는 친필악보와 음반, 그리고 손석우 노래 50선을 들어볼 수 있는 감상 코너와 노래 인생 70년을 담은 다큐멘터리도 상영되었다. 또한 10월 11일 ‘나 하나의 사랑’ 노래비 제막과 더불어 ‘손석우 헌정음악회’도 개최, 권성희 금사향 김상희 안다성 한명숙 한상일 등 ‘손석우 사단’을 비롯해 권성희, 박강수 등이 무대에 섰다. 그 ‘손석우 특별전’ 현장을 돌아보았다.
글 l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 ‘노래 70여 년’에 담긴 ‘인생 찬가 94년’
광복 이후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하며 현 대한민국 대중음악, 즉 K-POP의 원형을 구축했다고 평가받고 있는 작곡가 손석우(孫夕友). 1941년 조선연예주식회사 기타리스트로부터 시작된 그 긴 음악 여정을 따라 가다보면 우리 대중음악사에서 그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시대마다의 변화 요구에 따른 새로운 대안을 제시, 대중음악의 거대한 흐름을 리드, 시대를 이끌었다.
우리나라 드라마 주제가 제1호인 '청실홍실'을 비롯해 60년대 이후 우리 대중음악의 흐름을 바꾼 동시에 진정한 의미에서 ‘한류 1호’라고 평가받고 있는‘노오란 셔쓰의 사나이’ 등...그 뿐인가. 평생 사랑만 하며 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노랫말과 멜로디, 그리고 노래마다의 감성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 감동을 안겨준다.
현재 우리나라 대중음악계 최고 원로인 주인공을 직접 모시고 갖는 ‘손석우 노래 70 여년의 기록 여행’. 우리 대중음악사에 또 하나의 감동으로 기억될 이 ‘손석우 특별전’은 개인의 기록을 넘어 광복 이후 우리나라 대중음악사를 돌아보는 소중한 전시가 될 것이다.
■ 손석우 노래 70 여년의 기록 여행,
‘보편성과 예술성’, 그리고 ‘다양함과 초지일관’의 미학
새롭고 다양한 장르로 대중음악을 리드해온 손석우 선생은 1955년 우리나라 드라마 주제가 제1호인 '청실홍실'을 비롯해 1957년 히트되어 소설과 영화로 까지 제작된 '나 하나의 사랑', 그리고 '꿈은 사라지고', '나는 가야지', '검은 장갑' '모란이 피기까지는' 그리고 60년대의 문을 연 '노오란 셔쓰의 사나이(한명숙)',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최희준)' 등,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았던 작품들을 일일이 열거하기란 쉽지 않다.
당시 우리 가요계에서 찾기 쉽지 않았던 학사가수, 미8군 출신가수, 방송국 전속가수 등 재능이 출중한 가수들이 가요계 전면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손석우 선생에 의해 수준 높은 음악이 만들어졌고 또 만들어야겠다는 열정으로 인해 비로소 가능했다. 선생은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시기에 따라 대략 10년 주기로 작품 성향이 달라졌다고 술회한다.
'청실홍실'을 비롯해 '검은 장갑', '나 하나의 사랑', '꿈은 사라지고' 등을 발표하던 초기의 50년대가 '모색의 기간'이었다면 '노오란 셔쓰의 사나이', '이별의 종착역', '우리 마을', '눈이 내리는데' 등을 발표하던 60년대는 '정착의 시대'.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하던 70년대는 '형식 파괴, 즉 탈피의 시간', 80년대와 90년대 이후는 변신과 더불어 '자유로운 사고의 시대'였다고 회고한다.
■ 작곡가 겸 연주인 김해송과의 만남을 계기로 조선악극단 기타리스트로 활동
“저는 어렸을 때 음악을 하는 환경에서 자라지도 않았고 또 음악을 하겠다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어요. 그런데 제가 목포상업학교 2학년 때 혼자 기타를 익히게 됐어요.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고 또 그런 환경도, 시대도 아니어서 그저 교본을 가지고 혼자 연습했지요. ‘애수의 소야곡’ 같은 노래를 나름대로 연습하곤 했는데 그게 시작이라고 하면 시작이지요.
”본격적으로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36년, 목포공립상업학교 때 오케(Okeh)레코드 전속악단공연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김해송 선생에게서 감동을 받게 되면서부터다.
“1930년 대 초, 오케레코드가 ‘전속예술가 실연의 밤’이라는 타이틀로 전국 순회공연을 했어요. 목포에도 오게 됐죠. 제가 2학년 때인데 그걸 안 보고 넘길 수가 없어 학생 티를 내지 않고 극장에 가서 보았지요. 자연히 기타에 관심이 있어서였는지 자연히 기타리스트에 자꾸 눈이 갔어요. 그 연주자가 바로 작곡가 김해송씨였어요. 다음 날 수업을 마치고 숙소로 김해송씨를 찾아갔지요. 퍽 친절하게 대해주시며 자신의 브로마이드에 사인도 해주셔서 한동안 제겐 귀중한 보물이었죠. 그 후 편지 연락이 계속 됐고 결국 그것이 내가 이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된 셈이죠.”
졸업 후 호남은행에 입사하면서 사회생활에 첫발을 내딛지만 41년 말, 김해송 선생 추천으로 조선연예주식회사에 입사, 음악부 소속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며 백년설의 Okeh 입사기념 신보 '천리정처', '더벅머리 과거' 음반 취입 등에도 참여하게 된다. 그러던 중 1942년, 태평양전쟁 발발로 연예생활 단념하고 하향, ‘상호은행’에 근무하다가 다시 김해송이 이끌던 KPK 악단 입단, 기타리스트로 본격 활동하게 된다. 1948년의 일이다.
■ 6.25 한국전쟁과 손석우, ‘토미와 그 악단’ 멤버로 미군클럽 활동, 연주 겸 작사, 작곡, 편곡 시작.‘꿈속의 사랑’ 발표.
부산피난시절, ‘토미와 그 악단’ 멤버로 미군클럽과 일반무대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며 이재호, 한복남 등과 함께 음반 취입에 참여, 연주 겸 작사, 작곡, 편곡 활동을 시작한다.
남들에 비해 비교적 늦은 나이에 가요계에 들어선 탓에 남들의 뒤를 쫓아가는 것보다 차라리 다른 길을 찾겠다며 기존 대중음악과는 다른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씨앗을 발아, 음악의 꽃을 피운 셈이다.
▲ 한명숙의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 프랑스 3대 샹송가수인 이베뜨 지로가 우리말로 취입한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음반.
“부산 피난 생활 중에는 아직 작품 쓸 때가 아니라 연주로 생활하고 있었죠. 미군부대도 자연히 가게 됐고요. AFKN에서 쉴 새 없이 틀어주는 미국 음악을 하루종일 물처럼, 공기처럼 접하며 그걸 몸에 익히게 됐죠.
그때 ‘메모리북’이라고 있었습니다. 밴드맨들이 외국 노래 멜로디와 코드 네임만 적어가지고 다니는 조그마한 이 수첩이었는데 거기에 ‘몽중인(夢中人)이라는 곡이 있더군요. 그러니까 원어 가사는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그냥 그 타이틀만 가지고 우리말로 ‘사랑해선 안 될 사람...’ 이렇게 써봤죠.”
▲ 원곡: 夢中人(몽중인) - 龚秋霞(공추하)
이 노래가 중국 노래 ‘夢中人’을 번안한 ‘꿈속의 사랑(현인)’이다. 아울러 , ‘눈물의 왈츠' 등을 비롯해 ‘추억의 40계단’, ‘타향일기’ 등을 발표, 창작인으로써 활동을 시작했다.
■ 환도 후 작곡가 박시춘과 손잡고 ‘청춘 고백’, ‘물새 우는 강 언덕’ 등 작사 & 50~60년대의 새로운 대안‘방송가요’
환도 직후 1954년, 서울로 올라와 남산동에 정착하는데 작곡가 박시춘 선생의 집과는 불과 10m 떨어진 곳. 때문에 자주 어울렸던 박시춘 선생으로부터 건네받은 악보의 악상은 손석우 선생의 감성으로 건너와서 ‘청춘고백’이 되었고 ‘물새 우는 강 언덕’이 되었다.
▲ 남이섬 한류 1호 작곡가 손석우 특별전
“박시춘 선생의 구수한 얘기가 듣고 싶어 자주 어울렸어요. 그러던 어느 날 박선생이 악보를 하나 내보이며 가사를 붙여달라는 거예요. 받아보니 타이틀은 없고 군데군데 ‘눈물의 정거장’ ‘이별의 정거장’같은 낱말만 적혀있더군요. 그것이 곧 ‘청춘고백’이고 ‘물새 우는 강언덕’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박시춘 선생은 ‘은방울쇼’라는 걸 하셨어요. 해서 저도 기타리스트로 가담하기도 했었죠.”
아울러 1955년 중앙방송국(현 KBS) 가요방송 지휘자로 활동하며 이후 방송가요작가그룹을 결성, 밝고 아름다운 노래들을 창작, 보급하는 등 ‘방송가요의 새 지평’을 열었다. ‘청춘목장’, ‘소녀의 꿈’ 등을 포함해 ‘오늘 같은 날은’, ‘우리집 합창대’, ‘명랑가족’ 등을 통해 50~60년대 우리 가요계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공로로 1963년 당시 공보부가 제정한 '방송문화상'을 수상했다.
▲ ‘토미와 그 악단’ 멤버들과 함께. 노명석, 김창호, 손석우, 김성천, 엄토미, 이효춘. 1984년.
■ '노오란 셔쓰의 사나이' 원로작곡가 손석우 별세
'노오란 셔쓰의 사나이'를 만든 원로 작곡가 손석우 씨가 2019년 11월 12일 오전 10시께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9세.
1920년 전남 장흥 출생인 고인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한국 대중음악의 태동기를 헤쳐 온 1세대 작곡가다. 최초의 드라마 주제가, 최초의 '한류 작곡가' 등 여러 최초 수식어를 보유한 선구자기도 하다.
첫댓글 노란샤쓰의 사나이 대다했쥬
온나ㄹ라를 들었다 놨다 ㅎ
손석우, 잘 읽었습니다.
손석우 손씨들 알아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