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셋과의 전투 후에 다윗은 다시 군사를 모읍니다. 하지만 이 군사들은 싸우기 위한 군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기 위한 군사들입니다. 다윗은 바알레유다(기럇 여아림과 같은 곳)에서 언약궤를 보관하고 있던 아비나답의 집에서언약궤를 가지고 옵니다. 처음에는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싣고 옵니다.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수레를 몰고옵니다. 다윗과 온 족속은 온갖 악기로 연주하며 갑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실은 소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뛰어 그만 언약궤가 미끄러졌습니다. 웃사는 그것을 붙잡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잘못함으로 인해 죽게 하십니다(1-8). 본래 하나님의 언약궤는 아무나 만져서도 안되고 아무나 옮겨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옮기는 방법을 이미 알려주셨습니다(민4:15). 제사장들이 잘 싸 놓으면 그것을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메어야 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새 수레에 싣고 오던 방식은 블레셋이 언약궤를 돌려 줄 때 했던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방식으로 궤를 옮기기 원하셨습니다. 다윗은 이 일이 있은 후 언약궤를 일단 오벧에돔의 집에 둡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이에 다윗 다시 언약궤를 모시고 옵니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메게 합니다. 그리고 이전의 죄에 대한 제사(아마도 속건제: 하나님의 성물에 대해서 죄를 범했을 때 드리는 제사)를 드린 후에 온 힘을 다해 춤을 추면서 앞서 갑니다. 다윗이 베 에봇을 입은 것은 겸손의 표현과 동시에 참된 왕이신 하나님 앞에 예를 갖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성문에 들어 올 때 이렇게 천한 모습, 낮은 모습으로 춤을 추며 들어오는 다윗을 보고 미갈은 상당히 격조 낮게 평가했습니다(16). 드디어 다윗은 궤를 미리 준비한 성막 가운데 둡니다. 그리고 번제(완전히 태워드리는 제사로 전적인 헌신과 충성을 의미)와 화목제(하나님과 관계 회복을 감사하는 제사)를 드리고 온 백성에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 백성들에게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한 덩이씩 나누어 주어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17-19). 그리고 이 기쁜 날에 자기의 가족들에게 축복하기 위해서 들어올 때 미갈은 다윗 왕이 겸손한 옷을 입고 춤을 춘 것에 대해서 비하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고 그것보다 더 낮아 보일지라도 미갈에게는 높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20-21). 사울의 딸 미갈이 생각하는 왕은 백성 위에 군림하며 하나님 앞에서도 권위를 내세우는 왕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런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참 왕이 하나님이시고 자신은 단지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왕에 대한 미갈의 개념은 바로 아버지 사울이 가지고있던 왕의 개념입니다. 미갈에게 자녀가 없는 것은 이런 잘못된 왕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방식으로 섬김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의도가 좋을지라도 그 과정과 방식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이방인들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방식으로 살고, 당신을 대해 주시길 원하십니다. 다윗은 처음에 여기에 실패 했지만 후에는 정정하여 하나님의 방식으로 궤를 모시고 왔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이런 겸손한 모습은 흠모할 것이 없어 보이게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때때로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에 실패하거나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하나씩고쳐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그분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지 않고 내 생각대로 모시고 있는 것은 없는지 날마다 우리를 살펴야 합니다. 그렇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늘 하루도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을 살피며 부족한 것들을 발견하고 고쳐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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