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씨 노인을 뵙다
달이 바뀐 팔월 첫날은 월요일로 시작했다. 제주도 부근과 서해상에는 규모가 작긴 했으나 두 개의 태풍이 소멸해가려는 즈음이라 우리나라 전역은 흐린 하늘에 비가 흩날리는 날씨였다. 영남 내륙은 태풍의 직접 영향권이 아니라 트레킹을 나설 행선지를 물색해 두었다가 마음을 거두었다. 무궁화호를 타고 경부선 청도에 닿아 운문사 사리암까지 다녀올까 하다가 후일로 미루었다.
한밤중 잠에서 깨어 책을 몇 줄 읽다가 음용할 약차를 끓여 놓고 새벽에 현관을 나섰다. 아침나절 비가 오질 않아 본래 정한 일정은 아니었는데 텃밭으로 나가 김을 매고 싶었다. 대기 중 습도가 높고 기온이 높아지겠지만 태풍 영향으로 바람이 불어오는지라 체감 더위는 덜 느껴질 듯해서였다. 집에서부터 걸어 도청 광장을 지나 법원에서 사파동 창원축구센터 체육관 곁으로 올랐다.
시청 공한지에 한시적으로 농사를 짓는 이들이 이삼십여 세대 되었다. 이들은 각자 취향 따라 다양한 작물을 정성껏 잘 가꾸었다. 간밤은 흐린 날씨에 바람이 불어와 길섶 풀잎에는 이슬이 내리지 않아 바짓단이 젖지 않았다. 텃밭에 닿으니 날이 희뿌옇게 밝아오는 즈음 작물을 돌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워낙 일찍 서둘러 다른 경작자들은 밭에 나오기는 이른 시간대였다
텃밭에 닿아 채소 이랑 잡초를 뽑아내려고 나섰던 걸음이라 호미를 찾아 손에 들었다. 예상대로 비는 오질 않고 바람이 불어와 그렇게 더운 줄 몰랐다. 간혹 모기와 하루살이가 목덜미에 붙으려고 했지만 그렇게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고추와 가지 이랑에 이어 토마토와 오이 그루터기 주변까지 깔끔하게 김을 매주었다. 그 밖에 들깨와 팥 이랑에도 매줄 잡초들이 제법 되었다.
채소 이랑의 김을 매느라 열중인데 내 머리맡에 웬 노인 한 분이 나타났다. 나는 순간적으로 나에게 경작권을 넘긴 할아버지임을 직감하고 인사를 드렸다. 내가 수년 전 친구네 텃밭을 방문한 기회에 잠시 뵈었던 분이라 그때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지난 사월 하순 이웃에서 텃밭을 가꾸는 친구로부터 할아버지가 고령이라 힘에 버거워 농장 일부를 나에게 경작을 의뢰해 왔다.
그새 석 달이 지니도록 할아버지를 뵐 기회가 없었는데 내가 텃밭을 가꾸고는 처음이었다. 내가 먼저 이름을 밝히니 할아버지는 이 씨라고 했다. 사는 곳은 여쭤보지 않아도 친구가 알려주어 알고 있는 사이였다. 할아버지는 이십 년 전 창원공단의 유력 기업체에서 은퇴 후 줄곧 텃밭을 일구어 전업 농부처럼 살아왔는데 근래 기력이 부쳐 농장 일부에만 더덕과 도라지를 가꾸었다.
할아버지는 땅은 절대로 사람을 배반하지 않는다고 했다. 진정한 농사꾼다운 오랜 세월 연륜에서 묻어나는 이야기였다. 씨앗을 뿌려 가꾸고 돌본 만큼 결실을 거둔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경작권을 넘긴 이후 내가 작물을 열심히 가꾸고 잡초가 맥을 추지 못하도록 하고 있음에 어느 한 편 마음이 드는 듯했다. 그새 내가 가꾼 열무를 뽑아갔고 여물고 있는 콩도 따 가십사 했다.
할아버지는 가을에 심을 감자밭의 이랑을 만들고 밭둑에 무성한 풀을 잘랐다. 나는 나대로 채소밭의 김매기를 마무리 짓고 고구마밭으로 가보니 넝쿨이 뻗는 줄기에서 나팔꽃 같은 꽃이 피어났다. 고구마는 꽃이 귀한 편인데 요즘 개량종은 꽃을 쉽게 피우는 듯했다. 아까 김을 매둔 들깨를 살피니 등이 파란 작은 벌레들이 잎사귀를 갉아 먹어 여남은 마리를 손으로 잡아 처치했다.
채소밭의 김을 맨 뒤 들깻잎에 붙은 벌레는 잡아주고 부추밭을 돌봤다. 할아버지가 묵혀둔 부추밭의 잡초를 뽑고 검불을 치워 부추를 서너 차례 잘라 소중한 찬거리로 삼고 있다. 부추를 자르려고 살펴보니 꽃대가 솟으면서 하얀 꽃망울을 달고 나왔다. 일주일 뒤 입추가 다가오는데 부추꽃은 식물에서 가을이 오는 조짐을 보여주는 푯대였다. 부추를 잘라 가려 담아 텃밭을 내려왔다. 22.08.01
첫댓글 농작물을 가꾸시는 즐거움에
머물다 갑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