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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관제집회·저항집회·종교집회…‘남산 집회 음악당’
서울에 살면서 등잔 밑이 어둡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조금만 이동하면 즐길 수 있는 명소가 가까이 있음을 뒤늦게 깨달을 때이다.
벚꽃이 필 봄철에 가장 편리하게 벚꽃의 장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 남산순환도로이다. 가을이 되면 정동길의 낙엽 밟기가 너무 짧아 아쉬워진다면 충무로나 남대문시장에서 남산순환버스를 타고 곧장 남산으로 올라가면 정동길은 맛보기에 불과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 지리에 어둡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남산타워에 올라가서 마치 김정호가 된 기분으로 한강을 경계로 남북으로 형성된 서울의 전체모습을 보면 지리에 대한 개념이 확실히 정리될 것이다.
이것은 남산이 풍수지리적으로 천하명당이라는 풍수의 기운을 완성하는 안산의 기능을 하는 지형이라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정작 서울에 오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남산은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구경하러 가는 곳 정도로 시시하게 생각하고 잘 가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마치 가까운 가족의 마음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제대로 모르는 것과 같다.
이런 조용한 산책과 완상의 공간인 남산이 한때는 떠들썩한 집회의 공간이었고 야외에서 음악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었음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1970년대까지 선거철이 되면 대형선거유세의 공간은 지금 장충동 국립극장 아래쪽에 있었던 장충공원이었다. 거기에서 몇만 명의 청중을 동원했느냐가 선거의 대세를 판가름하는 기준이었다.
남산에 집회의 공간은 또 있었다. 회현역에 내려서 남대문시장에서 소월길을 따라 올라가면 백범광장이 있다. 요즘은 서울성곽으로 복원되어 있는 그 자리가 장충공원보다는 조금 작은 집회의 공간이었는데 그곳이 바로 1963년에 건립되었던 한국 최초의 야외음악당인 남산음악당이 있던 자리이다.
백범광장 전체를 잘 살펴보면 마치 언덕에 대형 택지를 조성하듯 사각형으로 북돋워진 땅을 축대가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자연지형이 아니라 무언가 큰 건물을 지으려고 산 위에 조성한 부지인 것이다.
이 부지는 1950년대 후반에 국회의사당이 지금의 태평로에 있는 서울시의회 별관건물에 임시로 들어서 있을 때 국회의사당을 건립하기 위해 조성된 것이다. 1959년 기공식까지 했지만 4·19혁명으로 중단되었다. 그 이유는 국회가 행정부와 사법부를 내려다보는 자리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후 국회의사당은 1975년 여의도에 건립되었다.
서울시는 1960년대에 들어서서 남산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제1단지에 아동공원, 제2단지에 야외음악당, 그리고 제3단지에 산책도로와 분수를 설치하여 서울시민의 문화와 여가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공원으로 재단장하게 된다.
한양대 총장인 김연준 씨가 희사한 3000만 원 중 700만 원을 들여 완성한 이 남산음악당은 안병의 씨가 설계를 담당하여 1962년 8월 10일에 착공하여 근 1년 만인 1963년 8월 5일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 야외음악당은 셸형 무대와 2층 부속건물로 되어있는데 무대는 높이 20m, 깊이 40m, 넓이 26m에 건평이 96평이나 되며 2층 부속건물은 1층 116평, 2층 193평이다. 이 부속건물 안에는 1층에 악기실, 사무실, 지휘자실, 단장실, 로비, 창고, 화장실, 2층에는 70평의 거대한 연습실, 13평의 악보실이 있고 무대 밑에는 남녀샤워실, 창고, 피아노실 등이 있어서 음악실로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야외공연장을 건설한다는 경험이 없었던 당시에도 무대에서 100m 떨어진 곳에서도 음향이 이상적인 잔향시간을 갖고 전달되게 하기 위하여 상당히 공사에 신경을 썼다. 반사벽이 완전 반사할 수 있도록 셸은 후부 30㎝, 윗부분 20㎝의 콘크리트로 건설하고 그 위에 모르타르를 바르고 무대 바닥은 반사 흡음을 막기 위해서 2중 바닥을 깔았다.
한편 관객석 대지 약 700평 위에 잔디를 깔아 만들고 통로는 자갈을 깔아 약 4000명에서 1만 명까지 청중을 수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듬해에는 음악당 옆에 경양식 식당도 만들고 음악감상실 등의 건물도 세울 계획을 수립했다.
그 모양이 참으로 생소하고도 재미있다. 마치 조개껍질을 속이 보이도록 우뚝 세워놓은 모습으로 야외음악당의 무대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미국의 신시내티시의 야외음악당을 모방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특이한 형태의 구조물은 1963년이라는 시간을 고려해보면 첨단 우주선 모양의 동대문 디자인플라자의 형태만큼이나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당시에 어느 대학의 교수는 남산음악당의 형태가 괴물이 아가리를 딱 벌리고 있으니 굿을 해서 괴물을 몰아내야 한다고 거부감을 표현한 적도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이 모양은 이미 서울에서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과거 경희대의 노천극장의 무대가 바로 이 셸 모양으로 만들어졌었다.
캠퍼스가 무척 아름다웠던 경희대는 사촌형님이 다니던 대학이라 어린 시절 형님의 안내로 구경한 일이 있었는데 야외극장이라고 하는 건물이 지붕도 없고 조개껍질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모양을 닮아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대중음악에 관심을 갖고 과거의 신문을 조사하다가 1955년의 평화신문의 기사가 눈에 띄었다. 1955년 5월 27일 미국의 NBC교향악단을 한국에서 초청하여 연주회를 가졌다. 그 장소가 시청 앞에 임시로 설치된 야외무대였는데 그 모양이 바로 남산음악당과 같은 셸 모양이었다.
이 기사를 보고 이런 생소한 셸형 야외무대에 대한 의문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1955년이면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미국의 문화가 한국사회에 표준으로 통용되기 시작하던 때이니만큼 당시에 없던 새로운 공법이나 건물형태는 미군의 기술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이 구조물은 당시에는 근대화된 한국사회를 상징하는 시설이었기에 화려한 도시 서울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던 과거의 영화에 영상으로 그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1964년 김기덕 감독의 영화 <맨발의 청춘>에 신성일과 트위스트김이 남산음악당을 뒤에 배경으로 두고 남산을 내려오는 장면이 잠깐 나온다. 가장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영화는 1974년 이만희 감독의 영화 <태양 닮은 소녀>이다. 이 영화는 많은 부분이 남산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는데 주인공인 신성일과 문숙이 데이트를 하는 곳이 남산음악당이다. 주차장에서 진입로를 따라가다가 꽃시계를 지나 남산음악당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자세히 영화에 담겨져 훌륭한 영상기록자료의 역할을 한다.
남산음악당 진입로의 꽃시계는 1969년 7월 31일 신진자동차 사장의 기증으로 완공되었다. 415만 원의 비용을 들여 시침 2m, 분침 1.5m, 초침 2.5m의 대형시계를 설치하여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종소리를 녹음해서 매시간 들려주었다. 이 꽃시계가 서울에 설치된 이후 전국적으로 붐이 일기 시작하여 1970년대에 전국 18개소에 설치가 되었다. 급기야 내 고향인 부산의 용두산공원에도 1973년에 설치되어 포토존으로 각광받았다.
남산음악당은 야심 찬 출발과는 달리 그 이후에 제대로 쓰이지 못했다. 우선 시설물들이 문제가 있었다. 개관한 지 1년도 못되어 비가 새고 금이 가서 빈축을 사게 되었고 시공이 잘못되어 연주 시 소리가 잘 전달되지 못하여 화음이 흩어지는 결과가 발생하여 음악인들의 외면을 받게 된 것이다. 그것은 1963년에 20회, 1964년 16회, 1965년 4회, 1966년 3회로 점점 줄어든 연주회의 횟수가 증명해주고 있었다.
줄어든 연주회를 대체한 것은 각종 정치와 종교집회였다. 청소년선도 범시민대회, 소련체코침공규탄 궐기대회, 납북어부송환 궐기대회, 부활절기념 연합예배, 9·28 수복기념식, 납북KAL기탑승자 송환촉구 시민궐기대회 등이었다.
특히 선거철이 오면 대형 선거유세의 장소로 이용되었는데 1967년 4월 22일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윤보선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의 남산음악당 앞에서의 유세는 그 절정이었다. 집권여당은 야당의 후보에게 축대가 무너질 우려가 있다느니 음악인들의 정서에 반하고 난간이 많아 추락 위험이 있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때때로 집회를 자의적으로 불허하기도 했다.
정치적 공간으로 이용되던 남산음악당은 1970년대에 유신정권에 저항하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1973년 4월 22일 남산야외음악당에서 벌어진 부활절 예배사건이 그것이다. 서울 제일교회의 목사 박형규는 부활절 연합예배에 모인 10만 군중 속에 ‘민주주의 부활은 대중의 해방이다’ 등의 내용이 적힌 전단을 뿌리고 시위를 주도했다. 이후 박형규 등 4명은 내란예비음모로 구속되었다.
문화행사의 장소로도 이용되었는데 광복기념 시민의 밤, 어린이 백일장, 시민위안 DBS 그랜드쇼, 시민의 날 기념 시민위안공연, 건전가요 보급운동 등이 그것인데 그 절정은 1969년 7월 16일 미국 최초의 달착륙 우주선 아폴로 11호가 발사되던 날이었다. 주한 미국대사관은 남산음악당에 가로 8m, 세로 6m의 초대형 TV수상기를 설치하고 아폴로 11호가 발사되는 오는 7월 16일부터 지구로 귀환하는 7월 25일까지 10일간 인공위성의 중계를 통해 일반시민에게 공개 관람토록 계획을 세웠다.
무려 5만 명의 시민이 구름같이 모여 세기의 여명을 여는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보았고 아폴로 11호가 폭음을 내며 대지를 박차고 떠날 때 시민들은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다. 2002년 월드컵 축구경기를 시청 앞 광장에서 TV를 통해 밤을 새우며 관람하던 문화가 이미 1969년에 미국의 주도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본래의 목적과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던 남산음악당은 1980년 5월 17일 1100만 원의 예산을 들여 셸 구조의 시멘트 구조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300여 평의 잔디공원을 조성하며 완전히 철거된다. 서울시가 내세운 이유는 설계의 잘못으로 음향이 흩어지고 위치가 도심이어서 주의를 통행하는 6만여 대의 차량소음으로 시끄럽고 인근 국립 및 시립도서관의 면학분위기를 해친다는 것이었다.
철거의 이유를 살펴보면 남산의 주변 환경이 남산음악당 준공 당시와는 많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1969년부터 남산터널이 개통되기 시작했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남산 주변에 시민아파트들이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1970년 남산어린이회관까지 건립되어 남산음악당의 연주회와 행사소음이 시민들의 불편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개발의 압력이 거셀 수밖에 없는 도심지의 중심인 남산에 소음유발공간을 건립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이것에 대해 당시에 언론에서는 단견, 졸속, 무계획한 행정의 결과라고 질타했다.
이러한 졸속 처사는 계속 이어졌다. 남산음악당을 철거하고 조성한 잔디광장마저 5개월이 못 되어 또다시 철거되었다. 서울시는 서울타워에 갈 시민들이 타고 온 차량들의 주차를 위해 잔디광장을 철거하고 아스팔트로 포장하여 2000여 평의 광장을 주차장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남산음악당이 건립되고 철거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지난 시절 한국사회에서 진행되어왔던 정치가 문화를 압도하며 좌지우지했던 과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10년 후도 내다보지 못하고 진행되는 도시개발은 환경을 급속도로 변화시키고 문화공간의 존재 이유를 완전히 없애버린다.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지난 20세기에 한국은 문화 분야에서 어설픈 모습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서 한국은 문화적으로 과거와 달리 많이 성장했다. 클래식 음악인들이 세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고 뮤지컬이 한국의 중산층들에게 대세로 자리 잡았고 케이팝(K-POP)이라는 대중음악으로 세계에 트렌드를 발신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전당과 같은 훌륭한 실내공연장도 있고 시민들의 정치적 문화적 열기는 서울시청광장에서 새로운 문화적 난장으로 전개되고 있다. 남산음악당이 없어졌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더 이상 없을 것 같다.
김형찬 / 대중음악평론가
첫댓글 글을 읽어보니
야외음악당 참 사연도 많네요 만
남산동.명동에 살던 제기억엔
식물원옆쪽으로 남산 오르는 길에서 형부언니들이랑 부추전 맛나게 먹었던 일이..
맥콜이랑 함께한 쏘맥도 배웠고
그후엔
음악당 오르는 계단에서
가위바위보하던..
누구랑인지는 전혀 깜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