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 C형 여자, ‘2R’ 밴드 생활기
written by. 벨르비아
[5] 설의, 엘의, 다정의, 어머니의 마음.
수업시간, 창가를 가만히 바라보던 설이 나직이 웃는다. 그 날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나와 버렸지만 이렇게 다시 생각나고 잊혀지지도 않는 것이 이상할 따름이다.
벌써 3주 째. 그간 그 이상스러웠던 밴드고 음악이고 모두 잊어보려 했지만, 책을 펴면 보이는 건,
노래하는 자신의 모습과 검은색 음표가 다닥다닥 그려진 악보 뿐.
수업이 끝나고 종례시간. 교생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모두 들뜬 기분이었지만, 설은 침체된 마음을 들띄울 수 없었다.
“조용, 조용! 오늘은 선생님이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 알고 싶으면 조용히 좀 해.”
출석부로 교탁을 탕탕 내리치는 선생님의 모습. 교생의 모습이라 할 것 없이 굉장히 익숙해보였다.
평소 그녀를 잘 따르던 아이들이라 입을 꾹 다물고 그녀에게로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혹시…2R 아는 사람?”
말끝을 길게 늘이며 말하는 그녀에게 아이들이 일제히 웃어댔다.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냐며,
이 근방에서 가장 잘나가는 밴드 이름을 모를 리가 있겠냐며.
하지만 설은 ‘2R’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표정이 확 굳었다. 왠지 모를 불안한 느낌. 뭘까.
“아하, 많이 유명한가보네. 좋은 소식은. 2R이 우리 학교 축제 때 공연을 하러 온답니다.”
웃으며, 들떠서 말하는 그녀의 미소가 기분 좋지 않았다. 오히려 싫었다.
설이 다니는 ‘아벨 여고’는 이름부터가 약간 특이한 감이 있었고, 해마다 ‘종음제’라는 축제를 실시해왔다.
그 축제가 어찌나 아름답고 컸던지 주위에서 평판이 자자할 정도였다.
설에게 종음제가 반갑지 않은 것은 3년간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원망스러웠다. 처음 그들을 만난 순간부터가 잘못된 시작이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을 달래 왔건만 대체 무슨 연이 이리 끈질긴지 또다시 만남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 * *
조용한 독서실 공기를 설은 좋아했다. 공부벌레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래서가 아니라
조용한 장소의 사각거리는 펜 소리가 좋았던 것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 공기가, 그 소리가 좋기는커녕 짜증이 났다. 공부도 되지 않았다.
자신이 놀라웠다. 칸이 작은 공책에 쓰여 진 건, 처음 보는 노래 가사였다.
오늘따라 예뻐 보이는 내 모습을,
오늘따라 좋아 보이는 내 모습을,
오늘따라 깜찍해 보이는 내 모습을,
그 애가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
언제부터 인걸까.
상큼한 레몬 사탕과 같이,
달콤한 초콜릿과도 같이,
쫀득한 딸기 젤리와 같이,
그 애의 모습은 환상적인 무엇으로,
나에게 다가왔지.
신기했던 게 아니야.
처음 봐서 신기했던 감정이 아니야.
오래부터 느껴왔던 편안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두 눈이 살며시 감겨.
두 팔을 뻗고 두 다리를 뻗고
그렇게 잘 하겠다 다짐했건만,
뻗고 뻗은 팔다리는 뻣뻣할 뿐이었어.
날 보며 살며시 웃음 짓는,
널 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지.
나도 모르게 쥐고 있던 사탕을
너에게 건넸어.
오늘따라 예뻐 보이는 내 모습을,
오늘따라 좋아 보이는 내 모습을,
오늘따라 깜찍해 보이는 내 모습을,
그 애가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
언제부터 인걸까.
상큼한 레몬 사탕과 같이,
달콤한 초콜릿과도 같이,
쫀득한 딸기 젤리와 같이,
그 애의 모습은 환상적인 무엇으로,
나에게 다가왔지.
Sugar, 달콤한 너와의 그것.
Salt, 짜디짠 너와의 그것,
Slender, 상큼한 너와의 그것.
처음은 두렵겠지만,
너와 함께라면
난 괜찮아.
한숨을 내쉬었다. 두근두근 가슴이 뛰고, 온몸이 전율로 휩싸이는 느낌을 이루 말할 수는 없었다.
뛰쳐나갔다. 한 손에 그 공책을 꼭 쥐고서.
* * *
“아~ 오늘은 또 뭘 먹으면 좋을까나.”
깍지 끼운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고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연습실 밖으로 나오던 류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손에는 분홍색 공책을 쥐고 어깨를 떨고 있는 설의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말하고 뛰쳐나가버린 지, 대체 얼마나 되었던가.
그 결심 굳힌 그녀의 모습을 머릿속에 각인 시키고 서서히 잊어가고 있을 무렵이었는데,
어찌 면목 없이 다시 찾아와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어버리는 걸까.
“설아?”
말이 없는 그녀를 간단히 일으켜 세웠다. 그녀가 가벼웠음이었을 수도 있었겠으나,
역시 그 여릿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어도 그는 남자였다.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고개를 들게 하여 보니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다.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그녀의 손목을 이끌고 연습실로 데리고 들어가려고 하자,
고개를 휙휙 저으며 슬쩍 웃으며 손을 빼내려 한다.
‘왜’라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류에게 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 곳에 찾아온 것이 얼마나 염치없는 일인 줄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음에.
계속 그런 설을 끌어당기며 들어가자 보채자, 설도 더 이상 못 이기겠다는 표정으로 끌려 들어간다.
연습실에서 장난을 치고 있던 멤버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로 쏠린다.
아니, 자칫 잘못 말할 뻔 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멤버들, 엘, 실드, 스틱과
저번에 엘에게 호되게 혼나고 연습실에서 쫓겨난 다정도 그들과 함께였다.
사이좋은 그들의 모습에 어색히 웃어 보이고 나가려하자 그녀를 가로막는 류의 팔과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엘의 목소리.
“뭔데? 염치도 없이 말이야.”
차가웠다. 오한이 느껴져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를 것만 같았다. 류가 살짝 얼굴을 구기더니 다시 웃으며 신나게 말한다.
“아이, 왜 그래. 야, 이 다정. 너 이제 가. 네가 그랬잖아. 만약 설이가 돌아온다면 뒤끝 없이 나가겠다고.
이제 설이가 돌아왔으니, 우리 팀의 임시 보컬 따위 필요 없어. 혹시라도 곤란한 사정 생기면 부를 테니까.”
그런 미소를 지으며 저리도 얼음장 같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설에게 놀라움을 한가득 안겨주었다.
그녀의 등을 밀어내며 유리문을 활짝 열어젖히고는 손을 두어 번 흔들더니 문을 닫아버린다.
“다정이 데려와.”
그렇게도 그녀를 싫어해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자체도 불쾌해하던 엘의 입에서 자연스레 ‘다정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그에 놀라 그녀는 한 발자국 그에게서 물러난다. 그런 그녀를 보며 엘이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는다.
“임시 보컬이라니? 어엿한 우리 팀 보컬인데. 멤버들을 인정해주지 않는 보컬 따위는 없어도 그만이야.”
시니컬한 모습이었다. 오랜만이었는데. 뒤돌지 않았다. 두 눈 가득히 차가운 엘과 스틱, 실드의 모습이 들어왔고,
곤란한 표정의 류의 모습도 한 가득이었다.
다정이 유리문을 열고 화가 난 표정으로 또각 구두로 소리를 내며 걸음을 이쪽으로 옮긴다.
“아.”
신음소리였다. 방심하던 터라 바닥에 풀이 강한 바람에 쓰러지듯 쓰러져버리는 설.
왼쪽 볼이 얼얼했다. 붉게 올라온 그녀의 볼을 보며 모두가 인상을 찡그렸다.
다정이 설에게 손찌검을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귀싸대기를 때렸다.
“네가 뭔데 또 내 자리를 너에게 줘야 하지? 저번에도 그따위 수모를 당했단 말이야! 너 때문이잖아?”
잔뜩 화가 나서는 발악을 하는 다정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연습실로 굉장히 우아해 보이는 중년의 여인이 발걸음을 했다. 올림머리와 잘 어울리는 연분홍빛 정장,
그에 걸 맞는 구두와 손가방, 그리고 액세서리까지.
그녀의 옆에는 검은 정장을 입고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딱딱한 표정과 자세를 유지하고 서있을 뿐이었다.
“은 설. 너 지금 여기서 뭐하는 짓이야, 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