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을까. 몇달 째 써온 미국대선 기사를 좀 신선하게 써보려 해도 밥상 자체가 워낙 그 밥에 그 나물이라 입맛 돗구기가 정말 어렵지요.
유세장의 정치인들은 일관성있게 보여야 하기 때문에 같은 이야기를 계속해야 하지만, 기자들은 매일 새로운 것을 써야 하니까 뭔가 다른 것을 찾아야 합니다. 정치인과 기자는 이래서 숙명적으로 서로 다른 생각을 하게 되어 있나 봅니다.
이번 대선과는 크게 상관없지만, 최근 미국 대통령들 중에는 주지사 출신들이 많다는 점이 생각나서 그런데....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까지 민주·공화 할 것 없이 요즘은 주지사 출신들이 백악관을 장악해왔습니다. 주지사를 하면서 한 주를 이끌어본 경험이야말로 대통령이 되기 위한 최적의 학교라고들 하지요.
또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미국 대통령이란 워싱턴에서 닳고 닳은 정치인들이 하기에는 너무나 거친 일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워싱턴과 멀찌감치 떨어진 지역에서 마음껏 정치적 포부를 펼쳐 성공한 지방 정치인이 대통령의 꿈을 안고 중심부를 향해 진군하는 것이지요.
권력의 심장부에 산다고 자부하는 워싱턴 사람들 눈에 다른 지역은 다 ‘주변부’입니다. 보스턴에서 뉴욕, 워싱턴으로 이어지는 미국 동북부에 사는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미국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다른 주 사람들은 또 여기에 별 관심없습니다. 자동차 타고 세 시간만 가보면 그 지역 신문들은 다 자기동네 이야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주처럼 하원의원 수가 많은 주가 미국정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꽤 큽니다.
그런데도 워싱턴에서는 캘리포니아를 ‘저 먼 서부 지역’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도 이 중심부는 열려 있어서 끊임없이 주변부의 인재들을 흡수합으로써 정치적 건강성을 유지합니다. 워싱턴 터줏대감들이 패기만만한 촌놈을 데려다 대통령으로 실컷 부려먹는다고도 할 수 있지요.
여기서 ‘촌놈기질’이란 ‘촌티’가 아니라 일종의 ‘야성’을 말합니다. 늘 중심부에서만 살아온 인재들은 똑똑하고 경험많으나 뺀질뺀질하고 겁이 많아서 돌파력이 약하지요.
그냥 워싱턴 터줏대감으로 대우받으며 평생 편하게 살 수 있는데
뭐하러 당선될지 말지, 4년 할지 8년 할지도 모르는 힘든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방의 어딘가에서 한번 큰 승부를 해본 정치인들은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더 못갈 이유가 없다’고 밀고가는 배짱이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워싱턴 출신 정치인이란 없습니다. 상원의원이나 하원의원 출신들도 다른 주에 정치기반을 두고 있지요. 그러나 이들은 의회에서 활동하면서 이미 워싱턴 정치의 세례를 받기 때문에 소위 ‘촌놈기질’은 주지사 출신들에 비해 떨어집니다.
주지사 출신 대통령들의 존재는 커다란 대륙을 차지한 이 덩치 큰 나라에서 이뤄지는 정치의 중심과 주변부의 상호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이건이 당선됐을 때는 캘리포니아 사단이, 클린턴이 승리했을 때는 아칸소 사단이 워싱턴으로 진군했지요. 지금은 부시 대통령을 따라 들어온 텍사스 출신들이 워싱턴에서 큰 입김을 뿜어냅니다. 정권이 바뀌면 이들 상당수가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그들 중 일부는 워싱토니안의 일부로 흡수됩니다.
워싱토니안들은 이들을 ‘촌놈’이라고 비웃으면서도 사실은 그들로부터 촌놈의 야성과 패기와 새로운 시각을 충전받습니다. 물론 주변부 정치인들이 중앙으로 쳐들어왔다고 해도 워싱턴 터줏대감들은 이들이 ‘시골’서 하던대로 하도록 그냥 두지는 않습니다. 호되게 워싱턴의 예법을 가르치지요.
클린턴 부부는 정말 가혹하게 단련을 받았습니다.
힐러리가 의료보험개혁을 해보겠다고 위원장을 맡았을 때
워싱턴 사람들은 "아칸소 촌에서는 주지사 부인이 나서서 공직에도 슬며시 끼어들었을지 모르지만
워싱턴에서는 안통한다구"라면서 야단법석이었지요.
클린턴 부부는 그때 일을 두고두고 얘기하며 서운해합니다.
제가 관찰한 워싱턴 내부의 정치세력들간의 관계는 단순화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면 좋겠지만, 실력이 안돼서.... 그냥 참고만 하세요.) --------------------------------------------------------------------------
대통령 <---- 시민단체
<---- 싱크탱크
사법부 <---- 언론
<---- 외국(대사관/외교관)
의회 <---- (로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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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부-입법부-사법부라는 삼권분립을 유지하는 기본 기관 이외에도, 시민단체, 싱크탱크, 언론, 외교가가 워싱턴에서 정책이 이뤄지는 과정에 참여하고 개입하는 그룹들입니다.
이들은 행정부와 의회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하고,
비판기능을 발휘하면서 워싱턴 정치의 맥박이 뛰는 것을 도와줍니다.
이들은 사실 대통령 길들이기에 나서는 주역들이기도 합니다.
돈은 정치자금의 형태로 정치인들에게 직접 수혈되기도 하지만, 시민단체 싱크탱크 등으로 유입돼 정책 아이디어로 재생산된 후 정치권으로 유입되기도 하지요.
로비스트들은 자신들의 아이디어 그 자체를 갖고 있다기보다는 어떤 집단의 이해를 전달하는 ‘기능’이 중요하기 때문에 괄호 안에 넣었습니다. 언론의 경우는 자기 의견과 색채를 갖고 있기도 하지만, 이 모든 집단들의 의사소통 통로 역할을 합니다.
대통령을 국민들 입맛에 맞는 쓸만한 일꾼으로 만들기 위해서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매질은 가혹합니다. 한국에서도 청와대가 언론의 ‘악의적인 보도’를 자주 문제삼는데, 악랄하게 물고 늘어지기로 따지면 미국언론들이 더 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백악관에서는 아예 그러려니 한다는 거지요. 소위 지나칠 정도로 비판적인 보도에 대해서, 또는 어떤 소문에 대해서 백악관은 ‘당신들의 의도가 나쁘다’고 열내면서 감정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대개는 부인하거나 반박하는 걸로 냉랭하게 끝납니다.
어차피 각자의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므로 그 기본 기능까지 뒤흔들며 싸우지는 않습니다.
언론 뿐 아니라 서점에 가보면 더 한데, 올해만 해도 50여권의 부시 대통령 관련 책이 쏟아져 나왔지요. 제목도 다 “나는 부시가 싫어”, “부시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 등등 별별 책들이 다 있습니다.
예전에 어느 기자가 부시에게 이런 책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부시 대통령은 “당신들은 내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 한 일이 없다고 하지만, 보시다시피 내가 책 장사에 얼마나 기여를 했소?”라고 웃고 말더군요. 케리가 대통령이 되어도 아마 똑같은 일을 겪을 겁니다.
이런 걸 보고 있으면 정말 무신경한 강심장에 맷집 좋은 촌놈 아니면 미국 대통령 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아마 여기까지 읽으시고 ‘그래서 부시가 된다는 말이냐’고 열내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이 글은 부시나 케리를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몇년 동안 본 워싱턴 정치 관찰기를 쓴 겁니다. 그리고 이번 대선에서는 부시가 현직 대통령으로서 재선에 나섰다는 점이 주지사 출신이라는 점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번 대선은 흔히들 말하는 “역사가 어떤 기준이 될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이 대부분 들어맞지 않는 선거입니다.
그 사례는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쓰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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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꼭 대통령이나 정치인이 아니라도 저는 일하다가 만나는
'촌놈기질'을 가진 사람을 좋아합니다.
겉으로는 세련돼 보이지만 알고 보면 허구한날 잔머리 굴리다가 제꾀에 제가 넘어가는 사람보다는
좀 투박해도 진국인데다 위기상황에 정면돌파할 배짱이 살아 있는 촌놈기질에 마음이 갑니다.
여기 블로그에도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필자가 있는데
읽고 있으면 대문에서 벨도 누르지 않고
중간에 노크도 없이 안방으로 쳐들어오는 기세로 글을 쓰지요.
'뭐야, 예의도 없이 이렇게 마구 쳐들어오다니'라고 불평하기도 전에
이미 감동해버렸기 때문에 그냥 웃게 됩니다.
그런 돌파력이 촌놈기질 아닐까요.
미국대륙 횡단은 나중에 한번 해보기는 해봐야겠어요.
그러려면 체력단련을 해야 할텐데 걱정이네요.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고 있습니다.
확실하게 추운 것도 아니고 으슬으슬하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구름이 잔뜩 긴 워싱턴 날씨는 정말 싫습니다.
이번 겨울을 날 재미있는 일을 찾아야겠어요.
지난 번 엄살에 격려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주엔 좀 더 글을 많이 쓸지도 모르니까 자주 놀러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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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레이건이 당선됐을 때는 캘리포니아 사단이, 클린턴이 승리했을 때는 아칸소 사단이 워싱턴으로 진군했지요. 지금은 부시 대통령을 따라 들어온 텍사스 출신들이 워싱턴에서 큰 입김을 뿜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