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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리 유적(益山 王宮里 遺蹟)
왕궁리 유적은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의 명칭은 오래 전부터 이곳에 왕궁이 있었다는 데에서 유래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곳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여 금마저(金馬渚)라 지칭되었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 금마군(金馬郡)으로 개편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금마군에 소속되었으나, 근대 행정개편시에 금마면과 왕궁면으로 분리되었다.
왕궁리 유적에 관한 유래는 마한 기준도읍설, 백제 무왕천도 및 별도설, 안승 도읍설, 후백제 견훤도읍설 등 다양하다. 이러한 여러 가지 설을 확인하기 위하여 1976년 및 1977년도에 부분적인 시굴조사가 시행된 후, 1989년도에 이르러 본격적인 전면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유구들은 크게 3시기로 구분되는데, 첫째 백제 말경에 해당되는 유적, 둘째 통일신라 초기 유적(성벽), 셋째 통일신라 초기-말기 경에 해당하는 유적(사찰) 등이다. 발굴조사에 따른 실제 유적의 존재 시기와 성격은 많은 진전을 보게 되었다. 초창기 유적의 성격은 출토유물 등을 통해서 유적은 왕실이나 관부와 관련된 유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으며, 가장 늦은 시기의 유적은 사찰과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마한과 관련한 설 및 후백제 견훤 도읍설은 뚜렷한 근거가 없는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백제 말기의 유적은 현존한 5층 석탑을 중심으로 한 북편의 동서 석축과 석탑 남측의 동서석축 및 주변의 많은 건물지가 해당된다. 그러나 백제 말기와 통일신라 초기의 건물지는 사실상 구분이 거의 어려운 상태이다. 이러한 까닭은 백제가 멸망하였으나 건물은 그대로 계속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초기 건물지는 총 6기가 조사되었다. 건물지 중 탑의 서편에서 가장 잘 남아 있는 건물지는 정면(동서) 13.55m, 측면(남북) 11.28m 규모였다. 건물의 칸수는 정면 9칸, 측면 5칸이 확인되었다. 이 건물지의 내부는 중앙에 한 변이 6.3m 크기의 정방형(正方形) 방 2개를 두었다. 이 2개의 방 사이는 2.5m 정도의 복도와 비슷한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이들 방의 사방에는 벽체의 기초기설이 대부분 남아 있었다. 이 벽체부 기초는 작은 돌과 기와편 등으로 섞어 쌓은 것이었다. 또 이 벽체 사이사이에는 초석이 중심거리 1.5m마다 배치되어 있었다. 각 방의 한 변에는 초석이 4개씩 놓여 있다. 왕궁리 유적 초기 건물의 특징은 초석하부에 적심석을 따로 마련하지 않고 초석을 바로 놓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초석의 배치는 건물지의 하중에 따른 다른 배려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다른 백제 말기의 유구로는 석탑의 남측 및 북측석축이 있다. 석축은 총 연장 길이 143m 정도이며 최고 2m 이상 높이로 쌓았으나, 지금은 잘 남아 있는 곳이 높이 0.85m 정도에 불과하다. 석축에 사용되었던 석재는 직사각형으로 다듬어 정교하게 쌓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석축은 바닥 층에 1-2단 정도 남아 있을 뿐이며, 부분적으로는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곳도 있다. 석탑의 북측 석축은 동서 165m 정도 조사되었다. 이 석축은 통일신라 사찰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석축 앞을 탑 주변까지 매몰하여 평지로 만들었다. 이 석축의 하부인 구지표층에서는 중국 수(隋)시대의 청자연화문병편이 출토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유적은 현존하는 성벽이 대표적인 것이다. 이 성벽은 직사각형으로 구축되어 있다. 성벽의 규모는 남~북 길이 493.44m, 동~서 길이 235m이다. 성벽의 너비는 3m내외로 전체적으로 비슷하다. 성벽의 구조는 아직 전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남성벽 동서 양측에 정면 11.45m 규모의 동·서문지가 드러났고, 서성벽에서도 정면 8.6m 내외의 서문지가 조사되었다. 남성벽의 중심부에서도 중문지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이 성벽의 안팎은 너비 0.8m 정도의 부석시설(敷石施設)이 드러났다. 이 부석시설은 성벽의 내측면에 있는 곳, 외측면에 있는 곳, 내외측 양면에 있는 곳 등이 확인되었다. 이 부석시설의 설치는 성벽과 접한 상태여서 성벽보호를 위한 기능이 주목적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의 건물지는 가장 이른 시기의 건물지와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데, 백제 말경의 건물을 지속하여 사용하거나, 필요시 개증축하였을 것으로 헤아려진다.
통일신라시대 초기~후기의 유적은 사찰터이다. 사찰터는 토층과 출토유물 등에서 가장 늦은 시기에 지어져 가장 늦게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현존하는 5층 석탑은 이 사찰과 관련된 유적의 유물이다. 사찰의 중문지는 심한 파괴로 흔적을 확인할 수 없었으나, 건물의 배치는 남쪽으로부터 석탑, 금당지, 강당지가 차례로 나타났다. 석탑은 주변에 대한 정밀한 조사결과, 창건 당시 조성된 것이 아닌 후대에 다시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회랑은 처음부터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사찰 중심건물과 함께 존속되었던 유적은 강당지, 서편에 2기의 건물지와 석탑 동편에서 조사된 건물지 1기 및 통일신라 후기의 와요지(瓦窯址)이다. 5층 석탑은 지대석을 맨 밑에 놓고 단층기단으로 조립하고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 별석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탑 양식은 백제의 미륵사지석탑이나 정림사지석탑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기와가마터(瓦窯址)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2개가 동~서로 나란히 조성되었다. 위치는 석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40m 동편에 자리잡고 있다. 이들 와요지는 크기나 형태, 내부 출토유물 등으로 보아 동일시기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가마의 구조는 앞인 남쪽에 넓고 움푹 패인 회구부가 자리잡고, 차례로 화구부, 연소실, 소성실, 연통순으로 구성되어있다. 연통부는 파괴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천장은 대부분 무너져 내려 벽체가 가마 내에 쌓인 채 확인되었다. 측면 벽체는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화구부의 이맛돌과 붓돌은 2기 모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가마의 구조는 반지하식으로 일반 통일신라시대의 양식과 동일하며, 기와와 함께 등잔이나 완, 도가니 등이 함께 출토된 점으로 보아 작은 토기를 동시에 구웠을 가능성이 있다.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백제시대부터 통일신라 후기까지 유물이 다양하게 출토된다. 백제시대의 유물로는 기와류, 토기류 등이 대부분이다. 백제 기와류는 수막새, 인장기와, 평기와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수막새는 연화문수막새와, 태극문수막새, 소문수막새가 출토되었다.
연화문수막새는 공주와 부여지역에서 흔히 보이는 7세기경의 볼륨이 낮고 여린 듯한 문양과, 미륵사지에서 많이 출토된 드림새가 작은 복엽단판의 고운 수막새, 연꽃잎의 가장자리가 하트형태와 비슷하게 처리된 것 등이다. 태극문수막새는 공주 공산성 및 부여 부소산성 등지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다. 문양은 세 종류가 조사되는데, 중앙에 작은 듯한 둥근 자방을 배치하고 편평한 드림새에 4조의 곡선의 양각선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배치하는 것, 볼륨이 크고 주연부로 가면서 점차 가는 문양을 역시 등간격으로 4분하여 곡선으로 처리한 것, 자방을 중심으로 연화문과 볼륨 있는 문양을 겹치게 하여 4분하여 곡선으로 처리한 것 등이다. 소문수막새는 출토 유적이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부여의 부소산성을 제외하면 거의 확인이 어렵다.
인장기와는 도장을 기와 제작시에 찍은 것으로서, 판독은 ‘수부, 전부갑와, 전부을와, 사조, 미사, 과지, 기유, 상부(首府, 前部甲瓦, 前部乙瓦, 巳刀, 未斯, 戈止, 己酉, 上部)’ 등이다. 이들 인장기와의 내용은 백제 행정지역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 것과, 최고의 관청기관을 지칭하는 것, 간지를 의미하는 것 등으로 확인되었으나 명확한 뜻은 알 수 없는 것이 더 많다.
백제토기는 대형항아리, 전 달린 토기, 뚜껑, 바리, 시루 등 다양하다. 이들 토기중 대부분은 파편이 많지만 기형과 태토의 질은 부여 부소산성에서 출토된 것에 비하여 손색이 없다. 이는 기와와 함께 국가가 관장한 가마에서 구워 부여 및 왕궁리 유적으로 동시에 공급하였을 가능성을 높게 하는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기와류는 수막새, 암막새, 명문와, 평기와 등이다. 막새는 복엽단판연화문 수막새, 복엽중판연화문 수막새, 당초문 암막새, 괴운문 암막새가 출토되었다. 이들 막새는 대부분 금당지와 강당지에서 출토되었다.
명문기와는 문양을 타날하는 도구에 함께 새겨 압인되는 것이 대부분이나, 기와 성형시 건조전에 가는 철사나 나뭇가지 등으로 눌러 쓴 것도 있다. 이들 명문은 ‘대관사, 대관관사, 관궁사, 정역, 풍도사전…, 삼백…,(大官寺, 大官官寺, 官宮寺, 丁易, 風道使前…, 三百…)’등이다. 이들 명문의 내용은 사찰 이름, 숫자 등이 확인되었으나,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출토유물 중에는 중국 수(隋)나라시대의 청자연화문병편과 남북조(南北朝)시대의 백자 박산로편이 출토되어 주목된다.
백제왕궁박물관
백제왕궁박물관은 왕궁리유적에서 발굴·출토된 문화유산을 보존·전시하고 그 중요성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2008년 왕궁리유적전시관으로 처음 문을 열었다. 왕궁리유적은 고대 동아시아 왕궁의 구조와 모범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2015년 7월 8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 역사 유적지구로 등재되었다. 2020년 세계유산 보존관리 사업의 일환으로 왕궁리유적전시관 리모델링 및 ICT 체험관 증축사업이 추진되어 2022년 8월 상설 및 기획전시실, 3D영상관, 왕궁의 서가, 백제왕궁가상체험관, 백제왕궁발굴체험실 등을 갖춘 백제왕궁박물관으로 새롭게 거듭나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상설전시실
1부. 백제왕도 익산
옛 문헌,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는 백제 무왕(600~641)이 익산으로 천도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발굴조사를 통해 익산이 왕궁과 사찰, 왕릉, 방위시설 등 고대 수도의 필수 요건들을 모두 갖추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수도를 뜻하는 수부(首府) 명문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수부首府’는 왕실과 중앙 관청을 나타내는 글자로, 익산 백제왕궁에 중앙행정기구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2부. 왕궁의 건축
백제왕궁은 1989년부터 진행된 발굴조사 결과 백제 무왕때 왕궁을 건립하여 운영하다가 후대에 왕궁의 중요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사찰을 건립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왕궁터에서는 궁장왕궁의 담장, 왕이 정사를 돌보거나 의식을 행하던 정전 건물지, 공방, 정원과 후원, 화장실, 부엌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밖에도 ‘수부首府’도장을 찍은 기와, 토기, 금과 유리제품, 중국의 청자 조각과 조경석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발굴조사를 통해 익산이 왕궁과 사찰, 왕릉, 방위시설 등 고대 수도의 필수 요건들을 모두 갖추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왕궁의 수막새 : 삼국시대 기와는 왕궁이나 관청, 제사 시설, 사찰 등 국가적으로 중요한 시설에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수막새는 목조건축 지붕의 기왓등 끝에 사용하는 기와로 목조건물을 비와 바람으로부터 보호하고 건물을 장식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왕궁에서는 연꽃무늬 수막새, 무늬 없는 수막새, 바람개비무늬 수막새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 중 잎의 형태가 하트 모양인 8엽의 연꽃무늬 수막새가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합니다.
3부. 왕궁의 구조
첨단 디지털 기술이 적용된 몰입감 있는 영상을 통해 무왕의 꿈과 만날 수 있는 공간입니다.
4부. 왕궁의 생활문화
백제 왕궁에서 확인된 화장실, 정원, 부엌, 공방 등 다양한 유적을 통해 당시 왕실의 생활문화와 기술, 국제 교류의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왕궁의 화장실 : 백제왕궁에서 백제 대형 화장실유적 세 곳이 확인되었습니다. 화장실유적 공동화장실로, 구덩이 안에 오수가 일정한 높이로 차게 되면 수로를 통과하여 궁장 밖으로 빠져나가는 위생적이고 과학적인 구조입니다. 발굴 당시 구덩이 안에서 참외 씨, 굴 껍데기, 뒤처리용 막대기와 회충·편충 알 등이 발견되어 화장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화장실유적은 백제인들의 식생활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일본의 고대 화장실과 비교할 수 있는 귀한 자료입니다.
왕궁의 정원 : 백제왕궁에서 백제정원유적이 확인되었습니다. 정원은 왕이 휴식을 취하거나 사신 등을 접대하는 공간입니다. 정원은 독특한 돌과 장대석, 강자갈을 이용하여 장식한 중심 시설과 수조, 경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정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바위나 산, 강과 같은 자연경관을 작은 규모로 재현하였다는 점에서 자연 친화적인 정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원을 꾸미는 데 사용한 조경석 중 *어린석魚鱗石은 중국에서 들여온 것으로, 정원을 꾸미기 위해 돌을 수입할 만큼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석魚鱗石: 물고기 비늘을 닮았다고 하여 어린석이라 부름
왕궁의 공방 : 백제왕궁에는 왕실에서 필요한 귀중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공방유적이 확인되었습니다. 공방유적에는 불에 탄 흙, 숫돌, 슬래그 등과 함께 금속과 유리 원료를 녹이는 도가니 300여 점이 출토되었습니다. 백제 공방에서 출토된 금제품은 다양한 가공 기술로 제작하였으며, 용도에 따라 금·은 합금의 차이를 자유롭게 조절하기도 했습니다. 7~8세기 일본 종합공방유적인 아스카이케유적에서도 왕궁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한 도가니와 생산 제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두 나라 사이에 유리 제작 기술의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왕궁의 부엌 : 백제왕궁에는 음식을 만들거나 조리와 관련 있는 물건을 보관하는 부엌 유적이 확인되었습니다. 부엌 유적에는 불을 피우는 부뚜막, 식자재와 조리 도구를 보관하는 공간, 식기류를 씻는 공간으로 보이는 배수로가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불에 그을려 검붉게 변한 벽체화 많은 양의 숯, 철제 솥, 음식을 담는 항아리와 병이 나왔습니다. 왕궁의 부엌은 고대 주방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입니다.
왕궁의 토기 : 백제에는 중국과 고구려 식기의 영향을 받아 청자완을 본뜬 형태의 그릇과 전달린토기, 굽달린사발이 많이 만들어집니다. 백제왕궁에서는 전달린토기, 굽달린사발, 접시, 항아리, 변기모양 토기, 등잔, 벼루 등 다양한 종류의 토기가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전달린토기와 굽달린 사발은 고은 흙을 엄선해서 모양과 크기를 균일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에 신분이 높은 이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그릇으로 백제 도성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습니다.
왕궁의 도장을 찍은 기와 : 왕궁에서는 기와의 표면에 도장을 찍은 기와가 60여 종류 넘게 확인되었습니다. 도장 내용을 보면 백제의 행정구역 명칭, 연대, 생산자 이름, 상징적인 기호 등 다양합니다. 기와 생산 과정이나 검수 과정에서 생산지나 생산자, 생산연대, 기와의 사용처 등을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5부. 왕궁에서 사찰로
백제왕궁은 백제 말 또는 통일신라 초기에 탑·금당·강당을 갖춘 사찰로 변화하게 됩니다. 사찰 터에서는 ‘왕궁사’, ‘대관관사’, ‘관궁사’ 등의 사찰 이름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고 있어 사찰의 이름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왕궁에서 사찰로 변하게 된 이유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무왕이 익산 쌍릉에 모셔지면서 무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王宮寺 글자 새긴 기와가 대표 유물입니다.
익산 왕궁리 오층 석탑
국보 지정(등록)일 : 1997년 1월 1일
소재지 :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산80-1번지
시대 : 고려시대
익산 왕궁리 오층 석탑은 마한 시대 도읍지로 알려진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곳에 있는 석탑이다. 1단의 기단 위로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수리하여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탑의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 삼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석탑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 팔각기둥과 네모난 돌들 사이는 흙을 다져서 메웠는데 이 속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발굴 중에 기단 각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조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으며,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층부터 5층까지 탑신부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에는 다시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지붕돌은 얇고 밑은 반듯하나,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로 치켜져 있으며,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각 층 지붕돌의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다른 돌을 끼워놓았다. 5층 지붕돌 위에는 탑머리 장식이 남아있다.
익산시 왕궁리유적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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