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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2년 6월 14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마태오 5,20ㄴ-26)
whoever is angry with his brother
will be liable to judgment,
and whoever says to his brother,
‘Raqa,' will be answerable to the Sanhedrin,
and whoever says, ‘You fool,' will be liable to fiery Gehenna.
말씀의 초대
열왕기 상·하권은 사울과 다윗으로 시작된 군주제가 이어진 기원전 971-561년까지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한다. 군주제에 기만당하여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하고 나서야, 백성은 하느님의 정의로 되돌아온다. 특히 엘리야는 바알 신이라는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을 극적으로 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결국 아합 임금과 백성은 하느님께 되돌아오고, 왕국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랜 가뭄에 단비를 맞게 된다(제1독서). 주님께서는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신다. 먼저,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살인의 원인과 뿌리를 없애라고 하신다. 곧, 가까운 형제자매들에게 싫은 감정을 품거나 무관심하지 말고, 가장 하찮은 잘못, 특히 성까지도 내지 말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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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십계명 가운데 제5계명은 ‘사람을 죽이지 마라.’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굳이 목숨을 끊지는 않더라도, 말이나 행동으로 특정한 사람을 죽음보다 더 모진 쪽으로 몰고 갈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세례 받지 않고 성당에 다니지 않으면 아무런 이해관계나 애증의 관계에 놓이지 않을 사람들이, 성체를 모시고 한 형제자매로 여기면서도 원수처럼 지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럴 때마다 참으로 서글프기 짝이 없습니다.
신앙 공동체는 서로 사랑하며 살자는 사람들의 모임 한가운데에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도 주님마저 멀리하면서 서로 성내고 미워하며, 미친놈이라고 욕을 하거나, 주먹다짐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1코린 13,5)라고 하였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사랑이신 주님을 닮아 사랑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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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의롭지 못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 역시 의롭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의로움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늘 긍정보다는 부정에 익숙합니다. 약자들의 입장은 별로 고려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은 정의를 주장하지만 공감을 얻지 못합니다. 오히려 율법에 매달린 사람으로 비쳐집니다. 우리에게까지 답답함이 느껴집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라고 하셨을 겁니다.
사람에게는 육체적 나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나이도 있습니다. 육체의 나이는 한 해가 지나면 자동으로 한 살 먹지만, 영적 나이는 자연법칙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몸은 어른인데 정신은 어린이인 사람이 많습니다.
바리사이들도 그랬습니다. 율법 준수는 강조하였지만 약자를 배려할 줄 몰랐습니다. 율법에는 정통했으나 율법의 정신에는 약했습니다. 주님 보시기에는 아직도 어린이였던 셈입니다. 우리 곁에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고 높은 지위에 있으나, 영적으로는 아직도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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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지향한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다섯 번째 계명은 형제애까지 넓혀져야 한다고 이르십니다. 형제들이 모두 바보나 멍청이로 보이는 사람에게는 그의 주변이 지옥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형제가 아니라 바보나 멍청이만 있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에게는 결코 귀찮고 지저분한 행려병자가 없었습니다. 그분에게는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함께 있는 형제와 자매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지옥에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천국에 살고 있습니까?
형제에게 분노하는 사람
- 김기곤 신부-
인간의 분노에 대하여 성 프란치스코는, 그것은 곧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침해’?라고 권고한다. 성인의 이 권고는 본디 분노란 생의 주권자인 하느님의 권리이기에 인간의 분노는 이런 하느님의 권리를 빼앗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 근거로 성인은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12장 19절의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라는 말씀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신적 분노의 정당성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바로 하느님의 본질에서 비롯된다. 곧 하느님께서는 선 자체시기에 악과 공존하실 수 없고, 또한 사랑 자체시기에 사랑의 거부를 용인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분노는 악을 향한 대항이며, 사랑의 거부에 대한 표출이다. 이 때문에 성경에 예수님께서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셨고?(마태 23,?1 이하; 요한 3,?36)? 또 사랑을 거부한 이들에게 분노하는 하느님?(마태 25,?41 이하)?으로 소개되고 있다.
한편 인간의 분노는 무시당함 또는 자기주도권의 강한 표출이자 ‘자기애’?의 발로다. 따라서 인간의 분노는 근본적으로 삶의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음을 부정함이며, 이 때문에 프란치스코 성인의 권고대로 분노는 하느님의 주권을 침해한 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죄에 대한 판결 또한 삶의 원 주인인 하느님한테 받아야 한다. 그러고 보면 형제를 보고 분노하는 사람은 재판에 회부될 것이라는 오늘 복음은 분노에 대한 윤리적 평가를 넘어 최후 심판 때 하느님 앞에 서게 될 우리 자신에 대한 신앙적 심판을 미리 그리게 하는 말씀이다.
과연 그분 앞에 서 있는 나는 분노에 대한 주님의 심판에서 자유로울 만큼 형제들에 대한 주님의 주도권을 온전히 긍정하는가?? 각자는 진지하고 솔직하게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먼저 화해를 청하기
-강우현 신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처럼 각 개인은 사회 구성원들 간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위치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잘 이어가도록
노력을 하지만 때로는 이해 부족으로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상처 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관계가 불편해집니다. 그 불편함이 지속될수록 서로를 향한 원망과 비방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 골이 깊어지다가 상처를 준 사람과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불편한 마음은 무엇보다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화를 내거나 바보라고 욕하거나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서로 비방하고 미워하면서
형제적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결코 성숙된 삶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하다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뜨리지 않도록 먼저 화해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화해는 인간관계의 회복이자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로잡아 주는 것입니다.
자존심만 세우다 상대방에게 상처 준 그 마음을 화해를 청해 풀어 버리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하느님의 참된 사랑을 나누고
기쁨으로 채워가는 생활을 누렸으면 합니다.
화해하지 못한 사람은 미사를 봉헌할 수 없다?
-김기현신부-
송봉모 신부님이 ‘용서는 곧 화해다.’ 라는 오해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상대방을 용서했다고 해서, 용서한 사람을 찾아가 굳이 ‘나는 당신을 용서했습니다.’라고 말하거나, 관계를 재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일방적인 행위이고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화해는 용서가 이루어진 다음에 생각할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화해는 쌍방의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갈등을 겪고 상처를 주고받은 두 사람 중, 어느 한 쪽이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거나 마음을 열지 않고 있을 때는 아직 화해할 시기가 아닌 겁니다. 요셉이 이집트 재상으로 있을 때, 왜 형제들을 다섯 번이나 돌려보내었습니까? 요셉의 형들이 아직 화해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야 비로소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형제들과 화해하게 됩니다.
이렇게 화해가 어렵고 힘든 것인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화해를 먼저 하고 오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신자들은 이런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누군가와 화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 화해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러면 미사를 봉헌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을 잘 읽어보면, 잘못을 한 쪽이 어느 쪽입니까? 바로 ‘나’ 일 때입니다. 내가 나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음에도 태연하게 미사를 봉헌하려고 할 때입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
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화해를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 쪽이 바로 ‘나’일 때,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곧 잘못을 저지르고도 태연하게 하느님 앞에 나서려는 모습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합당한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가 미사를 봉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매일 또는 시간을 내어 양심성찰을 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그 날 있었던 일을 죽 돌아보십시오. 무심코 내뱉었던 말이나 의식하지 않았던 행동들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갈등을 겪는 상황을 만들어 냈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겁니다.
스스로의 잘못을 깨달았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자존심도 상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겠지만, ‘미안해’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도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 ‘미안해’ 라는 말을 거의 안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서 살면서 ‘미안해...’ 라는 작은 한 마디가 참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동기간의 갈등을 겪거나 상처를 주고받았을 때,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갈등이 풀리는 것은 대단한 행동이나 말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내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해’ 라고 말하는 것이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첫 걸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 양심성찰을 해 봅시다. 그리고 내가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인정하고 ‘미안해~’ 라고 말해 봅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양승국신부-
<왜 내 안에 그 ‘몹쓸 인간’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 무리한 요구를 우리에게 하고 계신다는 느낌입니다.
“형제에게 절대로 성내지 마라.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바보라고 부르지도 마라. 최고의회에 넘겨질 것이다. 멍청이라고도 부르지 마라.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평소에는 성인군자 같은데, 한번 ‘욱’하는 마음의 불길이 솟구치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는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심호흡과 더불어 단 1분만 마음을 가다듬었어도 될 일인데, 그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일은 평소에 따놓은 점수, 그 한 번에 다 까먹습니다. 내가 많이 오버했구나, 하는 생각에 평상심에로 돌아가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주 마음을 다스릴 일입니다. 특히 화가 솟구치는 순간, 그 감정을 긍정적으로 표출할 줄 아는 자기만의 방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수행자의 당부처럼, 흔들리는 마음 앞에서도 “조용히 생각하십시오. 생각을 조용히 하십시오.” 그 어떤 외부로부터의 충격에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야말로 성덕에 도달하는 지름길임이 분명합니다.
다음의 일화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두 승려가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을 바라보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한 사람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우겼고, 다른 사람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6祖 혜능이 말했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오. 다만 당신들의 마음일 뿐이오.’”(존 CH 우, ‘선의 황금시대’ 참조).
분노의 원인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 내면의 불안정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 내면이 평화롭고, 고요하며, 안정되어 있다면 그 어떤 외부로부터의 억압이나 무시, 소외 앞에서도 자유로울 가능성이 있습니다.
쉽게 화가 나고, 또 자주 우울해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욕심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욕심을 버리고, 기대로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비웠다는 마음조차 한번 비워보십시오. 뜻밖의 평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찾아올 것입니다.
올라서려고만 발버둥치지 말고 가장 밑바닥까지 한번 내려가 보십시오. 가장 미천한 일은 언제나 내 몫이려니 마음먹어보십시오. 마음이 홀가분해질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사람은 자기가 마음먹은 만큼만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큰 욕심을 버리고, 지나친 기대도 버리고 아주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기 시작하면, 의외로 삶이 편안해지기 시시작합니다.
한 착한 수련자 형제가 이런 생각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수도생활, 저는 너무 잘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수도원에 들어와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어찌나 행복한지, 나 혼자만 이렇게 행복해서 되나, 하는 걱정과 죄송스러움을 안고 매일을 살아갑니다. 돌아보면 하느님께서는 제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셨는지, 모든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매일 하얀 백지 같은 또 다른 오늘을 선물로 주십니다. 여유 있게 기도할 기회를 주십니다. 형제들과 담소할 수 있는 기회, 기쁜 마음으로 노동할 수 있는 기회, 천진난만한 얼굴로 뛰어놀 수 있는 기회, 저를 성장시키기 위한 선물이 분명한 형제들과 함께 살게 해주신 하느님께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강도 높은 수업, 집중적인 양성과정이 계속되는 팍팍한 수행생활에 힘겨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순간순간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살아가는 형제다 보니 단조로운 수도생활, 모든 것을 공유하며 사는 데서 오는 불편함, 인간관계 안에서 오는 갖은 상처 앞에서도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화는 상대방에게 발산하지만 머지않아 그 화는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와 또 다른 상처를 입힙니다. 화를 내는 자신을 괴롭힙니다. 고통이 지속됩니다.
결국 ‘마음 바꾸기’ 작업이 필요합니다. 왜 하루 종일 내 안에 ‘참 나’가 살지 못하고 그 몹쓸 ‘인간’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까? 자기 내면의 주인공, 내 감정의 주체는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설 수 있도록 언제나 지지하시고 격려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분노의 표출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면 끝도 없는 고통과 상처만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무거울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기도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지겠습니까? 인간관계가 제대로 형성되겠습니까? 건강이나 제대로 챙기겠습니까? 그 상태에 머무는 순간은 결국 불붙는 지옥에서 고생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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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심리학자가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먼저 늘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아이를 아주 재미난 장난감이 가득한 방에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그 아이는 처음에는 장난감을 가지고서 신기해하면서 놀았지요. 하지만 하나의 장난감을 15분 이상 가지고 놀지 못하면서, 결국은 이렇게 말하면서 방을 나오더랍니다.
“이건 모두 재미없어요. 내게 더 재미있는 것을 주세요.”
이번에는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아이를 말똥 통이 들어있는 방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아이는 말똥 통을 보면서 깜짝 놀라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와! 말똥 통이 있는 것을 보니, 근처에 말이 있겠네? 재미있겠다.”
좋은 쪽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이는지를 말해주는 실험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마음과 가슴은 항상 좋은 가능성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각종 조건과 이유를 들어서 나쁜 쪽으로 그리고 부정적으로 바라볼 때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 결과 실제로 나쁜 일만이 내게 다가오더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저의 식사를 준비해주시는 자매님이 아침 일찍 나오시지 않기 때문에, 아침은 제가 직접 상을 차려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습니다.
사실 갑작스런 약속으로 자매님이 준비해놓고 가신 전날 저녁 식사를 하지 못했거든요. 따라서 저는 아침에 전날 준비된 상에 놓여있는 음식들을 먹으려고 했지요. 그런데 반찬 뚜껑을 여는 순간에 심한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날씨가 더워서인지 음식이 상한 것이지요.
음식 상한 냄새가 결코 좋지 못하지요. 그러면서 괜히 부정적인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명연아, 왜 이렇게 칠칠치 못하니? 저녁을 못 먹으면 냉장고에 음식을 넣어 두어야지. 바보같이 음식을 상하게만 만들고……. 그런데 왜 이렇게 음식은 쉽게 상하는 거야?’
바로 그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상한 음식에서 냄새가 나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요? 저는 그 상한 음식을 그냥 먹었을 테고, 탈이 났을 것입니다. 그 음식에서 ‘제가 상했으니, 드시지 마세요.’라고 냄새로써 경고를 했기에, 먹지 않을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조금만 바꿔 생각하면 무슨 일이든지 긍정적인 마음을 간직할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긍정적인 마음보다는 부정적인 마음이 먼저 드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 당시의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정말로 열심히 살았지요.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그 모습을 그 누구도 따라 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보다도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지금도 이 말씀은 계속 이어집니다. 세상의 보통 사람들처럼 나쁜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을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생각과 긍정적인 생각으로 주님의 뜻을 철저히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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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하는 자녀
- 김선오 신부-
저는 아이들 70여 명과 함께 직업전문학교 기숙사에서 삽니다. 매일 함께
운동하고 기도하고 식사하고 고민을 나누고 살다 보니 모두 소중한 친구이지만
유독 더 호감이 가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바로 제 마음을 ‘헤아려주는’
아이들입니다. 아이들끼리 싸우고 나서 말을 안 할 때 제가 둘을 부르면 서로
어색하게 있다가도 어떤 아이는 제가 설득하기 전에 ‘신부님이 마음 아플까봐’ 먼저
상대방에게 손을 내밉니다. 나중에 그 아이에게 물어보면 제가 모든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미사를 통해 영적인 밥을 이웃과 나누어 먹습니다. 한 밥상에 앉아 서로
불편한 관계로 밥을 먹을 때에 하느님 아버지 또한 무척 마음 아파하십니다.
왜냐하면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먼저 화해를 청하는 자녀는 아버지가 보시기에
얼마나 예쁠까요? 그 사람이 좋아서, 이해가 가서 화해를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분의 아버지를 함께 모시고 그 아버지가 마음 아파하시니까 우리는 화해를
청하는 것입니다. 화해와 용서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고
그 마음을 헤아리는 자녀를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더 어여삐 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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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나누는 일
- 박혜원-
산에 미친 사람이 있다. 그분은 틈만 나면 여행을 떠난다. 길에 나설 때는 눈썹조차 떼어놓고 싶다고 한다. 여행 중에는 지니고 있는 물건이 짐스럽다. 그래서 여행길엔 가진 것을 나누게 된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오는 순간, 우리는 다시 치졸할 정도로 내 것을 움켜쥐고 쌓아두려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하다. 그런데 이런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아름다운 글을 본 적이 있다.
“저도 무언가 드리고 싶은데 별로 가진 것이 없습니다. 무얼 내놓을까 궁리하다가 가장 쉬운 것을 생각했습니다. 제가 가끔 돈 백만 원이 없어 가슴 졸이며 애태울 때가 있었는데 혹시 급하게 그 정도의 돈이 필요하신 분이 있으면 빌려드리겠습니다. 빌려드리긴 하겠지만 갚으라는 말씀은 한 번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드리는 것이니까요.”
‘주식회사 드림’이라는 카페에 실린 글이다. 자본의 힘으로 움직이는 주식(株式)회사가 아니라, 주님의 방식으로 운영되는 주식(主式)회사다. ‘드림’을 주제로 삼아, 지금 내게 맡겨진 것을 어떻게 하면 본디 주인에게 잘 돌려드릴 수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고, 그 생각을 실천하고자 하는 회사다. 그저 나누는 모임이다. 책도 나누고 물건도 나누고 돈도 나눈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댓글 중에 있는 또 다른 사람의 글이다.
“돌던 돈이 멈추면 그땐 제가 내놓을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나누는 일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속된 우리로서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나의 것이라고는 전혀 없이 떠돌아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소유에 대한 꿈조차 꿀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뒤돌아보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그때가 진정 자유로웠던 것 같다. 아예 ‘내 것은 없다.’는 생각 자체가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를 누리게 했다.
인생은 잠시 머물렀다 가는 여행길인 것을…. 그럼에도 우리 인간은 변화하는 덧없는 것에서 영원한 것을 찾으려 든다. 그러나 이 땅 위에 내 것은 없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주인일 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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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일 신부-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날에는 올바름이 무엇인지, 참된 올바름이 있긴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만큼 저마다의 처지에서 각자의 상대적 시각이 팽배해 있다고 보아집니다. 그래서 일치라는 것이, 화해라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다고 보아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하느님이 바라시는 올바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실천해야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올바름, 그것은 바로 의로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의로움이란 무엇입니까? 워낙 그 의미가 심오하기에 한마디로 규정하기에는 충분하지 않겠지만 그것은 관계성 안에서의 올바름을 뜻하리라 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의 올바름이라고 보아야할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의 올바름이 하느님 앞에서의 올바름과 곧바로 연결되기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더욱 능동적으로 실천하여 나가라고 다음 말씀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이 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 예물을 바쳐라.” 상대적 시각에서 본다면, 내가 누구를 원망한 것이 없기에 올바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의로움이 형제가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면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로움은 나 혼자만의 옳음을 지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의로움이란 나와 상대방 사이라는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이것이 다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관계성으로 확장되어감을 뜻하지 않나 싶습니다. 한 가정 안에서 보면, 부모님은 자식들을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자식들이 서로 옳고 그름으로 일치가 되어 있지 않다면, 부모는 누가 옳고 그르다는 그 사실보다 서로 일치하지 못한다는 점에 더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우리의 의로움도 모두가 하나로 일치되어 하느님 사람으로 연결 지어지는 의로움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나와 너가 일치하여 하느님과 연결 지어 의로움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되도록 끊임없이 살피고 다듬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좀 전에 형제가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면, 화해하라 하셨는데, 나의 옳음의 방식이 형제가 나를 원망하도록 만든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려 합니다. 그래서 설령 내가 형제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해도 나의 옳음이 선택한 길이 때로는 형제의 옳음의 방식에 있어서는 원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자신이 아무리 옳다고 생각하는 길이라 해도 하느님 보시기에는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기에, 이것은 관계성 안에서 화해해야 하는 상황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옳음은 모두를 살리시는 옳음입니다. 나의 옳지 않음과 의롭지 못함도 당신의 사랑을 더욱 크게 볼 수 있는 도구로 쓰십니다. 이것은 태초부터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부족함이 없는 한결같은 사랑이시기에, 가능한 것일 겁니다. 사람이 어떻게 변해도 끝내 당신의 사랑 안에 있는 자녀로써 보고 계신다는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당신의 사랑에 우리가 일치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기에 의로움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그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눈이 사람을 보시는 하느님의 눈과 닮으려 함이 의로움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닮으려함이 의로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닮으려는 열망으로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에게 나의 옳음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옳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 화해가 하느님께 바치는 우리의 참된 예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 화해는 하느님 사랑에 일치하기 위하여 우리가 마지막까지 답해야할 사랑의 한 닢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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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양승국신부-
<신앙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구기동에 사는 고정원입니다. 당신의 손에 우리 어머니와 사랑하는 처, 4대 독자인 아들이 죽었습니다. 사회의 잘못된 현실에 그 책임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부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으로 살아가시며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만약 사형을 당하면 나도 그날이 사형 날입니다. 판사님 절대로 죽여서는 안 됩니다. 가족을 대표해서 용서를 빕니다.”
위 글은 5년 전 연쇄살인범 유영철씨에 의해 노모(85)와 부인(60), 4대독자인 아들(35)까지 모두 잃은 피해 당사자인 고정원 루치아노 선생님께서 쓴 글입니다. 똑 같은 내용의 편지를 한 통은 탄원서 형태로 판사님에게, 또 다른 한 통은 유영철씨에게 보내졌다고 합니다.
고선생님이 처음부터 이런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범인을 잡으면 아무 이유도 없이 단란한 가정을 파탄시킨 그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복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범인도 죽이고, 저 또한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죠. 이런 생각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 했습니다.”
그런 그분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엄두도 못 낼 용서의 마음을 갖게 된 건 세례를 받게 된 후부터였습니다. 불교 집안이었던 고선생님은 아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 ‘함께 성당에 나가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3년 전 7월 세례를 받았습니다. 영세 후 고선생님에게 서서히 ‘용서해야겠다’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답니다. 이후 ‘유영철도, 또 나도 살아야하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뒤론 사형제도 폐지운동에 적극 나서게 됐다고 합니다.
“제 가족을 죽였다고 해서 또 다른 생명이 인위적으로 꺾이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을 뉘우칠 기회를 주어야지요.”
고선생님은 ‘신앙을 가지지 않았으면 용서를 못했을 것’이라며 ‘아직까지 이런 아빠의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딸에게도 이 마음을 이해해 달라고 전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사형폐지를 촉구하는 모임에 참석했을 때 멀찍이 뒤에서 고정원 선생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그간 참으로 견디기 힘든 세월을 보낸 고선생님이셨습니다.
입장을 한번 바꿔놓고 생각해보십시오. 병으로 가족이 세상을 떠나도 가슴은 미어질 듯 아픕니다. 그런데 연쇄살인범의 손에 아무런 잘못도 없이, 한 명도 아니고, 부인을 포함해서 세 명이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저 같았으면 도저히 그 충격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 가정을 완전히 요절내버린 그 사람을 도저히 용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선생님은 그를 용서한 것입니다. 그냥 용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용서하셨습니다. 용서한 것뿐만 아니라, 사형만을 면하게 해달라고 판사님께,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간곡히 청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신앙의 소유자이십니다.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복음을 온 몸으로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헬렌 프리진 수녀님의 강의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가끔씩 먼저 떠난 아들이, 아내가, 노모가 생각나셨는지 자주 손수건을 꺼내 드셨습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진심으로 존경스러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와 화해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웃이 우리에게 준 상처에 대해서 분노하고, 욕하고, 죽어도 용서 못할 때,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나 안정, 천국은 없다고 단정하십니다.
우리 마음이 분노로 가득 찰 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을 때, 얼마나 미운지 도무지 용서가 안 될 때, 그 순간 우리의 뇌세포는 정상작동이 안됩니다. 아이큐도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상황판단 능력이 떨어집니다. 한 마디로 이성을 잃습니다. 그러한 상황은 살인까지도 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든 크게 한 발 물러날 것을, 크게 양보하고 용서할 것을 강경하게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용서, 말은 쉬운데, 정말 어렵고도 어려운 과제입니다. 참으로 머나먼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용서가 필요합니다. 그냥 용서가 아니라 고선생님과도 같은 완전한 용서, 복음에서 요청하는 참된 용서, 조건부의 용서가 아니라 100% 용서가 필요합니다.
용서가 없는 곳에 내적인 평화도 자유로움도 없습니다. 용서가 없는 곳에 신앙생활도 하느님 체험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결국 용서만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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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자제력
-김찬선신부-
저를 보면 확실히 나이를 먹을수록
욕을 잘 내뱉고 성도 잘 냅니다.
어렸을 때 재미로 친구끼리 욕한 것 외에는
일생 욕이라고는 입에 올린 적이 없고
군대에서도 욕을 한 적이 없는 저였는데
얼마 전부터 욕을 쉽게 합니다.
T.V를 보다가, 길을 가다가 쉽게
‘저런 나쁜 놈!’,
‘저런 놈이 있나!’ 등의 욕이 나옵니다.
처음에는 어떻게 내입에서 욕이 튀어나오지 하고 깜짝 놀랐는데
지금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전보다 더 제 안에 미움이나 화가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밖으로 튀어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미움이나 화가 별거 아니기에 밖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며
편하게 저의 속내를 밖으로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점점 자제력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자제하는 것도 하나의 힘이기에
나이를 먹을수록 자제력이 떨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하겠지요.
그러니 의지적 힘으로 나있는 성을
누르거나 누그러뜨리려 해서는 안 되고
아예 성이 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성이 나면 성을 내고
화가 나면 화를 내는 것이 건강하고 정상적입니다.
화가 나면 화를 내야지 누르면 화병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살인하지 않는 것은 물론
성도 내지 말고
욕도 하지 말라는 말씀도
의지적 자제력을 발휘하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사랑의 자제력을 지니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성이나 화는 자기 뜻대로 안 될 때 생기는 것이기에
성이나 화가 나지 않으려면 근본적으로
이 자기중심성을 버려야 하고
이렇게 자기중심성을 사랑으로 버릴 때
우리는 성나지 않고 욕을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온유하고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성내지 않고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기 때문입니다(고린토 전 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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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세상을 구원하는 의인 한 사람
-경규봉 신부-
엘리야는 가르멜 산에서 바알의 예언자와 대적하여 승리한 다음 그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 후 그는 아합 왕에게 비가 오리라고 예언하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비를 내려주시기를 간청한다. 하느님께서는 의인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비를 내리신다.
창세기 18장 이하를 보면 주님께서 소돔이란 도시를 멸망시킨 이야기가 나온다. 소돔 사람들은 야훼께 못할 짓만 하는 아주 못된 사람들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온갖 죄악으로 가득차 있는 그 도시에 유황불을 내려 멸망시키신다.
그런데 그 도시를 멸망시키기 전에 하느님께서는 먼저 의인 아브라함을 만나셨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저 도시 안에 죄 없는 사람이 열 사람이 있다면 죄 없는 열 사람을 보시고 그들을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하고 청하자 하느님께서는 “그 열 사람을 보아서라도 멸하지 않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런데 그 도시에는 열 사람의 의인이 없었기에 멸망당하고 말았다. 겨우 살아난 사람은 롯과 그의 가족뿐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롯의 아내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아서 소금 기둥이 되었고, 롯의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한 후 아버지와 잠자리에 들었던 사람이다. 롯 역시 의롭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 도시는 멸망되었다.
즉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한 까닭은 그 도시에 의인 열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며, 열 사람의 의인은 죄악이 가득한 도시까지도 멸망에서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 한 사람이 그의 가족을 구할 수 있고, 마을 구하며, 나라까지도 구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엘리야 시대에 왕을 비롯하여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에 빠졌고 하느님께 죄를 지었다. 그러한 죄로 인하여 나라에 가뭄이 극심했고, 백성이 굶주림에 빠졌다. 그런데 엘리야 한 사람으로 인하여 그들은 우상숭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극심한 가뭄에서 벗어나 살 수 있게 되었다. 한 사람 의인 엘리야로 인하여 전체 이스라엘이 구원된 것이다. 의인 한 사람, 그는 비록 세상에서 고통 받고 박해받을지라도 그로 인하여 세상은 구원의 길을 걷는다.
오늘 이 세상에 수많은 죄와 악이 범람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이처럼 살 수 있는 까닭은 한 사람의 의인이 우리 가운데 함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그를 어여삐 보시고 그의 기도를 들으시어 온갖 죄악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어여삐 보시기 때문이다.
의인 한 사람은 그처럼 소중하고 고귀하다. 누가 바로 그 의인인가? 누가 그러한 의인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의 주님이요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인이시다. 세상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기워 갚는 의인이시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와 같은 의인의 삶을 살도록 초대하신다. “너희는 나를 스승 또는 주라고 부른다. 그것은 사실이니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옳다. 그런데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3-15)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세상의 죄와 악을 보면서 주위의 여러 가지 상황을 원망하고 탓하기보다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는 한 사람의 의인이 되자. 엘리야처럼, 우리 주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을 굳게 믿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내 가족을 구하고, 내 이웃을 구하며, 내 민족과 나라, 세상을 구원하는 의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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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것보다 나은 새 것이 나오면...
-김두진 신부-
새로운 것이 나오면 옛 것은 종종 사라지곤 합니다. 불과 7, 8년 전만 해도 현대인의 생활필수품이라면 삐삐라고 하는 호출기가 있었습니다. 호출기를 옆구리에 차고 다니면서 연락을 주고받아야 문화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요즈음은 호출기를 가지고 있으면 오히려 문화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취급당합니다. 그리고 호출기의 자리를 대신해서 이제는 핸드폰이라는 휴대전화가 필수품이 되면서 목에 걸고 다니거나 가방에 넣어 다니면서 필요할 때 전화를 하고 받지 않으면 사람 취급도 못 받습니다.
항상 옛 것보다 나은 새 것이 나오면 옛 것은 그 의미를 잃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도 그러합니다. "사람을 죽이면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단순한 법조문이 이제는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새 계명으로 대체되어, 형제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완성한 사랑의 법, 사랑의 계명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러한 새 계명, 사랑의 계명은 분명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말씀처럼, 사람의 목숨을 해하면 재판을 받아야 하는 단순한 계명이 아니라 이제는 주님께서 하신 사랑을 본받아 사랑해야 하는 적극적인 계명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사랑 법은 자신을 십자가형에 처하고 자신을 채찍직한 사람을 용서하고 용서를 청하는 기도를 하는 용서의 법이며 화해의 법입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다가가 용서를 빌고 상처를 싸매 주어야 하고 상처를 받았다면 용서 청하는 상대방을 용서해 주어야 하는 화해의 법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모든 영광을 누리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되셔서 자신의 몸과 피를 제물로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우리를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들어 높인 이유이며 예수님의 사랑 법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 법을 새로운 계명으로 받아들이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루어 나가야 할 계명이며 삶의 모습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새로운 사랑의 계명을 받고 형제를 만나는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과 피를 바쳐 하느님과 우리를 화해시켰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바쳐 이웃 형제와 화해하고 화해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미사 때 모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용서와 화해를 전하는 사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러할 때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이 우리 안에서 빛을 발하고 그 빛을 통해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가게 될 것이며, 우리 또한 예수님을 닮아가는 은총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그저께 오랜만에 자전거를 탔습니다. 전에 자전거를 타다가 손을 다쳐서 한 달 넘게 자전거를 탈 수가 없었거든요. 따라서 웬만큼 손도 나았고, 이렇게 좋은 날씨에 해안 도로를 신나게 달리고 싶은 마음에 자전거를 타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문득 지난번의 사고가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방에 들어가서 전에 선물로 받은 자전거 헬멧을 머리에 쓰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처음 써 본 새 헬멧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시간이 지나면서 머리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선물 주신 분이 분명히 큰 헬멧이라고 했는데 이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제 머리 탓을 하게 되더군요. 전에부터 머리 크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나는 이 헬멧도 못쓰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저에게 맞지 않는 헬멧이라고 단정을 내렸던 것이었지요.
집에 돌아와서 헬멧을 벗어서 원래 있었던 케이스에 담았습니다. 그 안에서 저는 무엇인가를 하나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헬멧 안에 있는 머리 보호대에 붙이는 스펀지가 따로 분리 되어 있는 것이었어요. 즉, 머리 아픈 것에 대비해서 제 머리 큰 것만을 탓했었는데, 사실은 그 자그마한 스펀지 하나를 붙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처음 그 헬멧을 선물로 받았을 때, 그 안에 스펀지가 있길래 이것은 무엇에 쓰이는 것인지가 정말로 궁금했었지요.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네요.
자그마한 스펀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스펀지입니다. 그런데 제 머리가 아프지 않으려면 반드시 있어야만 했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 계명을 더욱 더 심화시켜서 말씀하시지요. 즉, 살인을 하는 것만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형제에게 화를 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자 역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하시지요. 바로 별 것이라는 말 한 마디, 아무것도 아니라는 행동 하나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것과 같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혹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작은 계명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지요. 그래야 주님 앞에 완벽하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떨까요? 작은 계명도 철저히 지키면서 주님 앞에 완벽하게 나아가고 있나요? 조그마한 스펀지 하나가 제 머리를 아프지 않게 하는 것처럼, 작은 계명도 어기지 않으려는 나의 노력 하나가 나를 구원으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사람은 절대로 포기하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머리와 입이 아닌 가슴으로
-이봉하수사-
세상 사람들은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일상 안에서 서로 싸우는 일도 없을
뿐더러 마음에 상처 같은 것도 주지 않고 매일 매일 천국 같은 삶을 살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도생활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기에 때로는 큰소리도 나고
때로는 얼굴을 붉히며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인들과는 다른 점이 있다면 매일 거행되는 미사와 기도생활 덕분에 미움의
시간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어떠한 잘못 앞에서도 용서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결코 쉽지 않은 것이 인생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아니 가능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이웃과 자신에게 잘못하고 실수하며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은 방법으로도 용서를 청하고
또 용서를 할 수 있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그와는 무엇인가 달라야 한다고 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기도와 함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화해하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체면 때문에 혹은 마지못해 대충 용서하고 용서받으며
화해하는 것이 아니라 깔끔하게 용서하고 화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바로 오늘 밤, 이 세상에서 지내는 내 마지막 날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자기 죄를 뉘우치지는 않습니다.
진심으로 자기 죄를 뉘우치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당신 자비로 용서하십니다.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김지영 신부-
◆아끼는 차에 흠이 나면 정말 속이 상한다. 아무리 조심해도 자동차엔 어느 틈엔가 흠집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흠집은 대부분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작은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자기는 엄청 신경을 쓰지만 다른 사람은 잘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은 그 흠집을 10센티미터밖에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크게 보이는 것이다. 앞으로 혹시 자동차에서 흠집을 발견하게 되면 3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다시 한번 보면 좋겠다. 그러면 거의 보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3미터 떨어진 곳에서 보이지 않는 흠이라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상처도 같다. 우리는 자신의 들보는 잘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를 탓하는 경우가 얼마나 잦은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구약을 율법을 뛰어넘는 새로운 차원의 복음적인 시각을 제시하시면서 인간관계의 내적인 중요성을 강조하신다. 자기 형제를 ‘바보’·‘멍청이’라고 하는 사람은 크게 벌받을 것임을 강조하시는데, 죄에 대한 벌의 개념보다는 근본적인 인간관계의 쇄신을 제시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을 미움과 분노로 채우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다. 우리는 사랑하기보다 용서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하느님의 본질은 사랑이며 동시에 용서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 흠없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해야 하겠다.
성내지 마라.
-강영구신부-
+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그대에게
성당 앞뜰에 장미꽃들이 우아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습니다.
가시로 무장한 가지 끝에 저렇게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봉오리가 맺힌다는 것이 신기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장미나무에 장미꽃 피고, 찔레나무에 찔레꽃 피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자비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너의 아픔과 슬픔을 나의 것으로 삼고, 너의 행복을 함께 기뻐하며 동체자비(同體慈悲)를 실천합니다.
온유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따뜻한 손길로 이웃을 어루만지고 너그러운 가슴으로 형제들을 품어줍니다.
사랑의 꽃, 자비의 꽃을 피우는 나무는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가슴 속에 탐욕(貪慾)을 품고 있는 사람이 도둑질(偸盜)을 하고,
가슴 속에 음욕(淫慾)을 품고 있는 사람이 사음(邪淫)하게 됩니다.
가슴 속에 미움과 증오심을 품고 분노로 이글거리는 사람이 목숨을 해치게(殺生) 됩니다.
지금 살인(殺人)하지 않지만 가슴 속에 미움과 증오와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은 예비 살인자입니다. 가슴 속의 증오와 분노가 행동으로 표출되면 살인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겉모습이 성인군자(聖人君子) 같을지라도 가슴 속에 탐욕과 증오와 어리석음이 가득하다면 당신은 예비 살인자요 예비 도둑이요 예비 사기꾼입니다.
스승 예수께서 형제에게 성을 내지마라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편지는 좀 무겁군요. 맑고 밝은 마음으로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기도하는 마음으로 언어의 집을 짓는 사람들
-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1열왕 18,41-46 (엘리야가 기도하지 하늘이 비를 내렸다.)
복 음 : 마태 5,20-26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으로 알고 어떤 경우에도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 믿으며, 또 그렇게 희망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 누구나 한 번은 심판관으로서의 하느님을 맞을 수밖에 없지요. 심판관으로서의 하느님은 참으로 엄하신 분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복음 같은 경우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얼마나 잘 살아야 하는지를 섬뜩하리만치 엄격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못마땅해 하시고 늘 야단치셨던 사람들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었는데 오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20)
그런데 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아주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십일조는 물론이고 한 주일에도 몇 번씩 단식을 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 삶의 중심에 놓고 살려고 애를 썼던 사람들이지요. 물론 잘못되고 편협한 율법의 해석으로 예수님께 야단도 많이 맞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보다도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지요. 또 지은 잘못에 대해서는 끝까지 물으신다고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5,26)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아주 엄한 심판관으로서의 하느님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마태5,21)는 말씀을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는 말씀과 동일하게 놓고 가르치고 계시지요. 살인이라면 우리는 단지 사람을 물리적으로 해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고 또 실정법도 그 정도에서 죄 값을 묻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살인을 단지 물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이며 마음에 관한 것까지도 그 대상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폭력적인 언어,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까지도 갚아야할 죄라는 것이지요.
좀더 구체적으로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5,22)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자리에 욕 안 해보신 분 있으신가요? 아마 거의 다 해보셨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나 또 지금도 가끔 감정이 격할 때는 마음이나 언어로써 지금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그 정도는 나도 모르게 저지르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지옥행이라는 것입니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특히 언어적인 폭력에 대해서 아주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며 보복하고 싶어하는 감정이나, 함부로 내뱉는 언어적인 폭력들이 우리 생활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감출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이거나 상처를 오래 가게 하는 것은 물리적인 폭력보다는 정신적인 폭력일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두 사람이 험한 말을 하며 치고 받고 싸웠다고 합시다. 심하게 싸워서 한 사람이 전치 5주의 상처를 입고 병원에 5주 동안 입원하는 일이 벌어졌을 때 한두 달이면 육신의 상처는 없어지지만 싸우면서 주고받았던 말들은 50년이 지나도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무서운 것은 물리적인 폭력보다는 증오하는 마음이며 또 언어로써 내뱉는 폭력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아주 단호하게 이것까지도 책임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 내면의 감정과 정서는 언어로써 표출이 됩니다. 그런데 그 표현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이지요. 살아가면서 우리는 너무 쉽게 말을 내뱉고 책임질 생각도 안 할 뿐더러 제대로 감당하지도 못합니다. 함부로 쉽게 하는 말이 보이지 않는 흉기가 될 수 있지요. 말에 대한 경고의 말은 인류 역사의 세월만큼이나 오래 되고 그 양 또한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집회서 5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중상꾼으로 불리지 않도록 하고 네 혀로 올가미를 놓지 마라.?(집회5,14)
하지만 혀로 사람을 잡는 일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습니까?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지요. 반대로 말 한마디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쉽게 천 냥 빚을 지기도 합니다. 또, 집회서 28장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매에 맞으면 자국이 남지만, 혀에 맞으면 뼈가 부러진다.?(집회28,17)
말로 입히는 피해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이지요.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불화는 물리적 폭력에서가 아니라 언어 폭력에서 비롯되지요. 형제지간에 갈등이 심화되어도 몸싸움을 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대부분 험한 말로 심각하게 싸우지요. 생각만 해도 벌떡 일어나는 말들로 상처를 주고받고는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저는 본당 공동체를 사목하면서 신자들을 해치고 상처를 주며, 그 공동체를 혼란에 빠뜨리고 힘들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바로 ?말?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갈등은 혓바닥에서 기인한다는 겁니다. 악의 뿌리인 혀가 결국 사람을 잡는 것이지요.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상대방에게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상처를 주고, 말한 본인은 곧 잊고 말지만 상대방의 가슴에는 그 말이 평생 남아서 미움의 감정으로 힘들게 살아가게 하는 그 어리석음이 모두 ?말?을 통해 자행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대부분 언어로써 드러나고 결정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내 일생을 ?배?라고 볼 때 내 일생을 조정하는 방향을 잡아주는 키가 바로 ?혀?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혀가 어떻게 방향을 잡아가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죽음의 바다로 내몰기도 하고, 반대로 생명의 바다로 안내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이 있고 사람을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수없이 쏟아놓은 말들 중에는 사람을 살리는 말이 많습니까? 죽이는 말이 더 많습니까? 혹시라도 내 말 때문에 상처를 받고 죽음의 바다로까지 내몰린 이웃이 있다면 중앙 법정에 넘겨지고,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 말씀은 특히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말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하기를 바라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 <말을 위한 기도>를 소개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 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더러는 다른 이의 가슴속에서
좋은 열매를 맺고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내 언어의 나무
주여, 내가 짓는 언어의 나무에도
멀고 가까운 이웃들이 주고 간
크고 작은 말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둥근 것, 모난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향기로운 것, 반짝이는 것
그 주인의 얼굴은 잊었어도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와 함께 머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내가 할 말은
참 많은 것도 같고 적은 것도 같고
그러나 말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살이
매일매일 돌처럼 차고 단단한 결심을 해도
슬기로운 말의 주인이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날마다 내가 말을 하고 살도록
허락하신 주여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해
먼저 잘 침묵하는 지혜를 깨우치게 하소서
헤프지 않으면서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유쾌하고
과장하지 않으면서 품위 있는
한 마디의 말을 위해
때로는 진통 겪는 어둠의 순간을
이겨내게 하소서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집을 짓기 위해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도를 닦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하소서
언제나 진실하고 언제나 때에 맞고
언제나 책임 있는 말을 갈고 닦게 하소서
내가 이웃에게 말을 할 때는
하찮은 농담이라도
함부로 지껄이지 않게 도와 주시어
좀더 겸허하고
좀더 인내롭고
좀더 분별있는
사랑의 말을 하게 하소서
내가 어려서부터 말로 저지른 모든 잘못
특히 사랑을 거스르는 비방과 오해의 말들을
경솔한 속단과 편견과 위선의 말들을
주여, 용서하소서
나날이 새로운 마음
깨어있는 마음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 언어의 집을 짓게 하시어
해처럼 환히 빛나는 삶을
노래처럼 즐거운 삶을
당신의 은총 속에 이어 가게 하소서. 아멘.
도 닦는 마음으로 말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시인은 ?말?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말이 상처받은 마음에 새로운 살을 돋게 해주는 치유의 말, 또 미움과 증오의 마음에 화해를 샘솟게 하는 말, 그리고 절망과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말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살리는 언어와 사랑의 마음을 지니도록 노력하는 오늘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화->바보->미친놈" : 점층적 가중처벌
-박상대 신부-
사방이 어둑해지자 어느 랍비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 높은 담을 애써 넘어 들어온 도둑은 랍비의 정원에서 몰래 감자를 캐내어 포대에 담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감자를 가득 채운 포대를 매고 가려는데 글쎄 너무 많은 감자를 담았던지라 무거워 쩔쩔매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광경을 창가에서 지켜보고 있던 랍비, 급히 방을 나가 도둑이 자루를 매고 집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기척을 듣고 달려온 집사가 이 장면을 보고 이해할 수 없다며 주인의 행동을 나무랐다.
랍비는 집사에게 "그가 도둑이라 하여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와야 하는 의무를 면제받지는 못한다" 하고 말하였다. 누가 보아도 어리석긴 하지만 과연 랍비의 의로움은 칭찬 받을만하다.
예수께서도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0절)는 말씀으로 오늘 복음을 시작하신다. 이 시작은 단순한 가르침의 시작이 아니다. 예수께서 드디어 구약의 중심율법에 참된 정의의 칼을 대기 시작하신 것이다.(마태 10,34 참조) 이 정의의 칼은 율법의 일점 일획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정신과 그 참뜻을 도려내어 밝혀줄 것이다.
산상설교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의 육화(肉化)로 말미암아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到來)했음을 선포하시고, 하느님 나라에 요구되고 통용될 새로운 헌법(憲法)을 선포하신다. 모세의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의 헌법이라면(출애 19-24장),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새로운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 안에서 살게 될 백성을 위한 헌법이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산상설교의 주된 내용은 두 가지로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그 나라가 요구하는 율법의 참된 정신을 선포하는 것이다.
전자(前者)의 내용으로는 진복선언(5,3-12)과 주님의 기도(6,9-13)를 손꼽을 수 있겠고, 후자(後者)의 내용은 산상설교의 그 나머지 부분에 속한다.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하느님께서 성자를 통하여 이루어 주셨다. 그러나 그 나라 안에서 살게 될 백성의 자격은 백성 스스로가 취득해야 한다.
여기서 자격(資格)이란 상태(狀態)적 위치나 지위가 아니라 상황(狀況)적 행위를 말한다. 그 자격은 "선택받음"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얻는 것이다. 그것도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삶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20절)
마태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더 옳게" 사는 방법을 우선 6개의 대당명제(5,21-48)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설명한다.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된다.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밝히는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비록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에 빠져 율법의 참된 정신을 곡해하긴 했지만 세부적인 규정에 이르는 모든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는 점은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하느님나라에 들기는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보다 "더 옳게" 사는 것이 요구되고, "더 옳게" 산다는 것이 율법의 세부규정을 더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다.
6개의 대당명제는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疏薄)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은 살인을 금하고 있다. 살인자는 재판에 회부된다.(출애 20,13; 신명 5,17) 그러나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형제에게 "성"(화)만 내어도 그를 재판에 부치신다. 뿐만 아니라 "바보"라는 욕하는 자는 중앙법정에, 나아가 "미친놈"이라고 욕하는 자에게 "지옥불"을 선고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살인과 성냄이 같은 처벌인 재판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며, 살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살인을 초래할 수 있는 행위들에 점층적으로 더 무거운 처벌이 선고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해진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5계명을 심화하여 함께 살아가는 어떠한 형제나 자매에게도 화를 내거나 분노하지 말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 이 가르침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한 마디로 어렵다. 마태오는 자기 공동체에 분노와 욕설이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 나아가기 전에 즉각적인 화해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화를 내다보면 쉽게 욕설이 튀어나오는 법이다. 욕설을 뱉는 자도 그렇겠지만 듣는 자의 기분은 더 나쁘다. 점잖은 욕설이나 기분 좋은 욕설은 없다. 화는 욕설을, 욕설은 주먹을, 주먹은 상처를 불러오고 급기야는 남의 생명을 상하게 한다. 살다보면 화낼 일도 많다. 그러나 화를 내면 거의 본능적으로 욕설이 튀어나오는 것이 문제다. 화가 치밀어 오르면, 화를 내기보다 침을 한번 삼켜보자...........◆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전례중심)> : † 주님의 율법 해석 : 사후조치가 아닌 사전예방†
오늘복음도 율법에 연관된 말씀이 계속되도 있는데, 이 내용들은 율법에 대한 해설서, 또는 예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주님은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기본전제를 깔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지키고 있던 율법 정신이나 그 실행의 의미는 너무나도 형식적이고 외형적이었습니다. 오로지 문자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할 뿐, 그 율법의 문자 속에 내재하는 하느님의 뜻을 살피지 못하는 그들의 삶 행태였습니다.
그들의 율법해석이나 재판 과정은 매우 근시안적이고 배타적이었습니다. 율법을 조문대로만 해석했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처벌로 다스렸습니다. 회개의 가능성이나 용서라는 것을 전혀 고려치 않았습니다. 그냥 무섭고 엄격할 뿐이었습니다. 울타리를 쳐놓고 그 속에서만 얽메이게하는 금지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율법 해석과 판단은 범위가 좁고 관용이란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작 한다는 짓이 긴 기도를 하고 나서 과부의 집을 빼앗거나 간음하다가 들킨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율법 적용은 죄를 지은 사람의 내면은 전혀 보지 않고 외적인 상태만 보고 판결했습니다. 피상적이고 냉정할 뿐 한 치의 여유도 인정도 사정도 보지 않았습니다. 마치 지금 우리나라 검경이나 법관들이 하는 짓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율법 해석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권위 있는 새로운 해석이었으며 율법을 약화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시킨 것이고, 외면의 세계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의 세계를 읽으신 것이었습니다. 무조건 단죄와 처벌이 아니라 회개와 용서의 기회를 주시며, 죄의 근본적 원인을 제거하시는 방향으로 법을 해석하셨습니다. 죄악에 대한 근원적인 접근부터 막아내시려는(사전예방) 의지가 예수님의 참된 율법 완성의 목표였습니다.
오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해석을 하시고 계신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살인만을 철저히 막으려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인의 동기가 되고 말미가 되는 분노와 미움부터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미움과 분노를 쌓게되면 결국 살인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내다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속의 분노와 미움 없이 실수로 저질러진 살인은 하느님 앞에서 살인이 안 된다는 법 해석도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법 이론은 내적인 것이며 인도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법은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펼치려는 지향이 중요한 것이지 결코 하느님의 두려운 심판을 보이자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곧 이웃 사랑의 법과 같은 것입니다. 이웃과 사랑을 나누고 평화스럽게 지내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첩경임을 분명히 하시고자 하는 것이 율법의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 그리워 사랑 받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들이 서로 화목하고 일치하는 가운데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사상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법 해석입니다.
'형제를 가리켜 바보, 미친 놈'...하고 욕하는 것이 바로 살인 행위의 동기가 된다는 것은 결코 심한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서로 자기만 잘 났고 남은 못 났다고 생각하는 데서 온갖 시비와 암투가 벌어지고 그것이 심하면 살인으로 이어지는 것이 세상일입니다. 남의 잘못을 꼬집어 내고 그것을 동네방네 퍼뜨리고 잘못한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주 망신을 주어서 매장시켜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생각은 바로 살인이나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하신 말씀은 우리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인가에게 바보, 멍청이, 미련한 놈, 못된 사람 등으로 매도하며 흉보고 비난함으로써 어떤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면 하느님 앞에 예물을 즉 기도를 드릴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욕을 주고 상처를 준 그 사람에게 용서를 청하기 전에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남을 욕하고 비난하며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은 그 사람과 화해 또는 용서를 청하지 않고는 하느님께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율법정신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에서 출발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