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21,9ㄴ-14 천사가 나에게 9 말하였습니다. “이리 오너라.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 10 이어서 그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는,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11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 12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 성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13 동쪽에 성문이 셋, 북쪽에 성문이 셋, 남쪽에 성문이 셋, 서쪽에 성문이 셋 있었습니다. 14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복음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5-51 그때에 45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46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오늘의 묵상
오늘은 예수님의 열두 사도 명단에는 있지만(마태 10,3 참조) 이후 복음서에서 별다른 언급이 없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바르톨로메오 축일입니다. 히브리어로 ‘바르’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르톨로메오는 ‘톨마이’ 또는 ‘탈마이’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순교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은 『황금 전설』을 보면 예수님의 첫 기적인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신랑이 바로 바르톨로메오이고, 인도나 아르메니아에 선교하러 갔다가 체포되어 산 채로 살가죽을 벗기는 참혹한 형벌로 순교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학자들은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이 일어난 장소인 카나와 관련하여, 카나 사람 나타나엘을 바르톨로메오와 같은 인물로 여깁니다. 여기에는 구체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나타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한 이가 필립보이고, 복음서의 열두 사도 명단에 늘 필립보 다음에 바르톨로메오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필립보는 친구 나타나엘을 찾아가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나타나엘은 율법서와 예언서를 열심히 공부하며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고정 관념 때문에 필립보가 이야기하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구약 성경에 나자렛이 언급되지 않았고,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타나엘은 필립보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고 따라와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의 이런 태도를 오히려 칭찬하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선물을 주십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마음의 가죽을 벗겨 진리를 보았기에,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통 속에서도 믿음을 드러낼 수 있던 바르톨로메오 사도입니다. 오늘 미사의 본기도를 다시 바쳐 봅니다. “주님, 복된 바르톨로메오 사도가 오롯한 믿음으로 성자를 따르게 하셨으니, 저희에게도 굳센 믿음을 주소서.”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초등학교 때의 일이 하나 생각납니다. 선생님께 심한 체벌을 당한 기억입니다. 당시에는 체벌이 워낙 보편적이어서 특별한 기억이 될 수 없을 것 같지만, 지금도 기억하는 이유는 그때의 체벌이 너무나도 억울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떠들었다는 이유로 앞에 나오게 했고 엉덩이를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혀 떠들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떠든 것은 분명히 제 옆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떠들었다고 때리고, 억울하다고 항의한 것을 핑계 댄다고 또 때렸습니다. 그래서 그때의 억울함이 지금까지도 가슴 깊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현대 형상소송 체계의 대원칙으로 “100명의 범죄자를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죄의 누명을 쓰게 하는 것이 가장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종대왕도 죄가 무거운지 가벼운지 정확하게 모르면 가벼운 죄에 해당하는 형벌을 주라고 했습니다. 죄를 봐주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키우거나 무고한 죄인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큰 죄인으로 만드는데 너무 익숙한 요즘이 아닐까 싶습니다. 재판이 이루어진 것도 아닌데, 정확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닌데…. 큰 죄인으로 단정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게 만드는 모습을 우리는 많이 봅니다.
판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정의로운 하느님이 지금의 내 모습을 보신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남을 판단하고 단죄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권리는 사랑할 권리만 있습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를 향해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말하면서 필립보가 말하는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음을 표시합니다. 그런데 필립보는 나타나엘을 말로 설득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렇게 말합니다.
“와서 보시오.”
나타나엘은 필립보와 함께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대화를 통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그리고 이스라엘의 임금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자신의 판단을 굽힌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나자렛 출신이라는 생각 때문에, 예수님을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단정을 짓고 그렇게 대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는 필립보와 함께 와서 주님을 볼 수 있었고, 열려 있는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판단도 나타나엘이 보여주었던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자신의 부족한 판단이 전부인 것처럼 단정 짓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는 마음으로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더 큰 일을 보게 됩니다.
사랑은 사소한 것들 속에 있다. 잃게 되었을 때, 가장 고통스러운 건 소소하고 평범한 것들이다(론 마라스코).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좋은 모범.
미국 매사추세츠 윌리엄스 칼리지의 수전 엥겔은 유치원 아이들을 관찰한 실험을 발표했습니다. 실험에서 아이들은 방에 혼자 앉아 한쪽에서만 볼 수 있는 유리를 통해 엄마, 아빠의 모습을 봅니다. 아이의 엄마, 아빠는 탁자 위에 놓인 물건을 가지고 놀거나, 그냥 쳐다보기만 하거나, 아예 무시한 채 다른 어른과 잡담을 나눕니다. 그 뒤 아이들에게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물건을 주었습니다. 결과는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모의 사소한 행동이 아이에게 전염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의성이 높고 호기심이 많은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부모가 먼저 호기심을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책 많이 읽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부모가 먼저 책을 읽어야 합니다. 신앙적인 아이를 원한다면 부모가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만 이런 현상을 보일까요? 아닙니다. 좋은 모범에 대해서는 모두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을 사는 우리의 좋은 모범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더욱더 밝고 희망찬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