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폭탄 투하 사건들
군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폭탄 투하 사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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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전은 현대 항공기가 존재하기 전부터 있었다.
1,000년 전 중국의 군대들은 불 까마귀라고 알려진 불에 타는 연과
파편들을 적들에게 불 비처럼 내리기 위해 사용했다.
그 후로, 연에서부터 열기구 그리고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위에서부터 더 큰 피해를 입히기 위해 사용되었다.
20세기는 그 이전 혹은 이후의 어느 시대보다
더 많은 공중전 전술이 있었다.
무인 드론과 위성 감시 시스템의 출현으로
B-52 폭격기와 전투기의 시대는 끝났을지언정,
그때가 공중전이 최고로 활발했던 때 라고 주장할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만, 약 270만 톤의 폭발물이
목표물 위로 비행하는 비행기에서 투하되었고,
표적 시스템을 갖추지 않아 그 부수적인 엄청난 피해가 입증되었다.
거의 백만 명의 시민 사망자가 연합국과 추축국 모두에 의해 시행된
무차별적인 폭격에 의해 발생했다.
다른 사건들은 역사의 그늘에 남아 있는 반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파괴적인 원자 폭탄과 같은
사건들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어떤 폭격이 지금까지 가장 파괴적이었을까?
이 갤러리에서 알아보자.
역사상 최초의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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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형태로든 폭탄은 수세기 동안 존재해 왔지만,
공중전과 폭발물의 결합은 1911년
이탈리아-터키 전쟁에서 처음 출현했다.
이탈리아 군대는 수많은 터키 목표물에 폭탄을 투하하기 위해
모노플레인과 비행선을 사용했다.
미팅하우스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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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폭격은
1945년 3월에 있었던 미국의 도쿄 폭격이었다.
이 폭격은 불과 몇 달 후에 일본에 투하될
원자폭탄들보다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미팅하우스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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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팅하우스 작전이라고 알려진, 이 작전은 자그마치
279대의 보잉 슈퍼포트리스 폭격기들로 구성된 작전으로
도쿄의 저녁 하늘을 어둡게 만들었다.
미국의 폭탄들은 일본의 대도시를 평평하게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약 13만명의 민간인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노숙자로 만들었다.
히로시마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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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미국 공군에 의해 자행된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폭격들은
물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공격이었다.
이러한 실존적인 힘의 거대한 본보기는 일본의 도시 히로시마에서 발생했다.
히로시마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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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놀라 게이라는 별명을 가진 보잉사의 슈퍼포트리스 폭격기는
도쿄의 종말적인 폭격으로부터 불과 5개월 후인 1945년 8월 9일
히로시마 상공을 통과했다.
"리틀 보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 폭탄은 2만 명의 일본 군인들과
최소한 10만 명의 민간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나가사키 원폭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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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3일 후, "팻 맨"이라고 알려진 두 번째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팻 맨은 일본 남부 도시를 파괴하며 약 8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그 중 극히 일부만이 일본 군대의 일원이었다.
나가사키 원폭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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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그리고 몇 년 후, 두 폭탄 모두 방사선의 광범위하고
장기적인 영향으로 점점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갔고,
암 발병률을 치솟게 했으며,
다음 세대의 무수한 선천적 결함을 유발했다.
고모라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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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폭탄테러에 앞서 유럽의 많은 도시들이 폭격을 당했다.
독일 함부르크의 경우 고모라 작전으로 파멸이 찾아왔다.
고모라 작전은 1943년 7월 영국과 미국의 연합 공군에 의해 펼쳐졌다.
이 도시는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고, 최소한 37,000명의 시민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 해 여름 함부르크의 유난히 건조한 기후는 연합군의 방화 폭탄을
무서운 속도로 퍼져나가게 했고, 전면적인 화염 폭풍을 만들었다.
블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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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악명 높은 나치 독일의 전격전은 2차 세계대전뿐만 아니라
모든 역사에서 가장 오래 끈 폭격 중 하나였다.
폭탄들은 1940년 9월부터 1941년 5월까지 정기적으로
영국의 수도에 떨어졌다.
블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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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츠의 첫 날인 9월 7일부터 시작하여,
런던은 거의 57일 연속으로 가차 없이 폭격을 당했다.
그러나 런던의 포괄적인 방공호 시스템 덕분에, 비교적 낮은 수의
40,000명의 목숨이 8개월의 기간 동안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리츠는 2백만호 이상의 민간인 집들을
포함하여, 런던의 거대한 지역들을 파괴했다.
드레스덴의 화염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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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이 취한 가장 논란이 많은 작전 하나는
1945년 2월 드레스덴 화염폭탄 사건이다.
주로 민간인이 많이 사는 도시였던 드레스덴은
독일 작센 주의 수도 역할을 했는데, 현대 학자들은 드레스덴이
어느 정도까지 군사적 목표물로 여겨질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드레스덴의 화염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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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일반적으로 합의된 수치는 사상자 수를 약 25,000명으로 추정하지만,
화염 폭격으로 인한 정확한 사망자 수는 현재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사실상 이들 모두가 민간인 사망이었다.
베를린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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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은 전쟁 과정 내내 폭격을 당했다.
영국 공군 (RAF) 폭격기들이 1943년 11월부터 1944년 3월까지
몇 달 동안 독일의 수도로 내려왔다.
비록 나치의 대공부대가 RAF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비행기들을 격추시켰지만,
여전히 수십만 채의 집들을 포함하여,
도시의 많은 부분을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포르츠하임의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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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대항한 가장 성공적이고 파괴적인 RAF 폭격 작전은
1945년 2월에 작은 도시인 포르츠하임을 목표로 했다.
포르츠하임은 당시 독일 보석상들과
시계장인들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RAF 정보에 따르면, 전쟁에 사용되는 정밀한 도구들의
생산 기지가 되었을 가능성 때문이었다.
포르츠하임의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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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이 장인들의 작업장이었다고 믿어졌던
이 도심의 90%가 RAF에 의해 파괴되었다.
17,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마을의 인구는 1939년에 수만 명에서
1945년에 수십 명으로 떨어졌다.
충칭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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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에서는, 초기의 폭격도 흔한 일이었다.
가장 무자비한 작전들 중 하나는 일본 공군에 의해
중국의 전시 수도인 충칭에서 실행되었다.
비록 충칭은 전쟁 내내 정기적으로 폭격을 당했지만,
1939년에 많은 파괴가 일찍 일어났다.
세계 2차 대전과 중일 전쟁에 도달할 때까지,
이 도시의 30,000명이 넘는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게르니카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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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일어난
유럽의 몇몇 주요 폭격 작전중 하나는 1937년 스페인 내전 중에 일어났다.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에 맞서 싸우는 다양한 반파시즘 저항 파벌들의
소통의 중심지인 바스크의 게르니카 마을은 아돌프 히틀러와
베니토 무솔리니의 도움을 받은 프랑코의 공군에 의해 폭격을 당했다.
사망자는 2,000명이었고, 그 중 400명이 일반 시민으로 추정된다.
작전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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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으로 공중 폭격의 유용성이 완전히 입증된 후,
냉전 기간 동안 아시아에서 치러진 많은 대리 전쟁중에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
베트남 전쟁의 결정적인 폭격과 캄보디아 내전의 폭격은
1969년과 1970년 사이에 미국 공군에 의해 수행되었다.
작전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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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메뉴(Operation Menu)라는 이름의 미국의 캄보디아 폭격은
사회주의 북베트남군과 공산주의 베트콩의 전초기지를 목표로 했다.
작전 메뉴는 파괴적인 기술로 악명 높은 거대한 B-52 슈퍼포트리스 폭격기의
승인된 첫 번째 사용을 낳았다. 정확한 사상자 수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지만,
약 4,000명의 캄보디아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한다.
작전 프리덤 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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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메뉴 이후 뜨거운 반응을 얻은 것은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파괴적인 작전 프리덤 딜이었다.
리차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직접 명령한 이 작전은
베트남 전쟁에서 가장 공격적이고 무차별적인
미국 작전들 중 하나로 기억된다.
작전 프리덤 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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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 비행기들과 폭탄들이 사용되었고,
얼마나 많은 사상자들을 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들은
수십 년간의 집계에도 정확히 집어내기는 여전히 어렵다.
그러나 민간인 사망자 수는 10만 명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충격적인 숫자는 이 작전에 대한
닉슨 행정부의 태도에 의해 뒷받침된다.
전 대통령은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에게
"폭격기들이 모든 것을 타격하기를 바라오.
나는 큰 비행기, 작은 비행기, 도움이 될만 한 모든 것을 사용하기를 원해요.
그들에게 약간의 쇼크을 주기 시작합시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크리스마스 폭탄 투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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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베트남의 국경선 안에서, 미국은 라인배커 작전 2를 시행했다.
서양에서는 크리스마스 폭탄 테러라고도 알려진 것으로,
미국은 12월 19일과 12월 29일 사이에 이 작전을 이끌었다.
크리스마스 폭탄 투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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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베트남 수도 하노이와 그 주변에 있는 전략적인 목표물들에 대한
"최대의 파괴" 작전으로 묘사된 크리스마스 폭격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인구가 많은 도시를 향한 가장 큰 폭격이었다.
많은 군사적인 목표물들이 미국 공군에 의해 무력화되었지만,
이 작전은 또한 거의 2,000명의 베트남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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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론의 출현과 대중화 이전인 20세기의
마지막 주요 폭격 작전 중 하나는
1998-1999년 코소보 전쟁 동안 일어났다.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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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의 알바니아인 인종청소를 끝내기 위해 나토군은
1,000대의 항공기를 이 지역에 투입하여 유고슬라비아군이
코소보를 떠나기로 합의할 때까지 이 지역을 폭격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