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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화약(剪須和藥)
수염을 잘라 약에 섞는다는 뜻으로, 윗 사람이 아랫 사람을 자기 몸처럼 아낀다는 의미로 일컫는 말이다.
剪 : 자를 전(刀/9)
須 : 수염 수(頁/3)
和 : 화할 화(口/5)
藥 : 약 약(艹/15)
출전 : 신당서(新唐書) 卷93 이정`이적열전(李靖`李勣列傳) 外
이 성어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아끼는 말로 사용되는데, 당(唐)나라의 융성을 이끈 태종(太宗)과 명신 이적(李勣)의 일화에서 연유한다.
신당서(新唐書) 이적열전(李勣列傳)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적은 충성심이 대단한 했으며, 태종은 국가대사를 그에게 위임하곤 했다.
勣既忠力, 帝謂可託大事.
당시 이적이 병이 났다. 그런데 의원이 말하기를, "수염을 태운 가루를 약재로 사용하면 치료할 수 있다"고 했다.
嘗暴疾, 醫曰: 用須灰可治.
그러자 태종이 자기의 수염을 잘라 약으로 쓰게 했다. 병이 나은 이적은 즉시 태종에게 머리에 피가 나도록 절을 하며 사죄했다.
帝乃自翦須以和藥.
及愈, 入謝, 頓首流血.
태종은 말했다. "나는 사직을 위해 한일이다. 너무 사죄할 필요가 없다."
帝曰: 吾為社稷計, 何謝為.
(唐書/卷93 李靖`李勣列傳 第18)
◼ 貞觀政要/卷02 李靖
李靖,京兆三原人也。大業末,為馬邑郡丞。曾高祖為太原留守,靖觀察高祖,知有四方之誌,因自鎖上變,詣江都。至長安,道塞不通而止。高祖克京城,執靖,將斬之,靖大呼曰:「公起義兵除暴亂,不欲就大事,而以私怨斬壯士乎?」太宗亦加救靖,高祖遂舍之。武德中,以平蕭銑、輔公祏功,歷遷揚州大都督府長史。太宗嗣位,召拜刑部尚書。貞觀二年,以本官檢校中書令。三年,轉兵部尚書,為代州行軍總管,進擊突厥定襄城,破之。突厥諸部落俱走磧北。北擒隋齊王暕之子楊道政,及煬帝蕭後,送於長安,突利可汗來降,頡利可汗僅以身遁。太宗謂曰:「昔李陵提步卒五千,不免身降匈奴,尚得名書竹帛。卿以三千輕騎,深入虜庭,克復定襄,威振北狄,實古今未有,足報往年渭水之役矣。」以功進封代國公。此後,頡利可汗大懼,四年,退保鐵山,遣使入朝謝罪,請舉國內附。又以靖為定襄道行軍總管,往迎頡利。頡利雖外請降,而心懷疑貳。詔遣鴻臚卿唐儉、攝戶部尚書將軍安修仁慰諭之,靖謂副將張公謹曰:「詔使到彼,虜必自寬,乃選精騎賫二十日糧,引兵自白道襲之。」公謹曰:「既許其降,詔使在彼,未宜討擊。」靖曰:「此兵機也,時不可失。」遂督軍疾進。行至陰山,遇其斥候千餘帳,皆俘以隨軍。頡利見使者甚悅,不虞官兵至也。靖前鋒乘霧而行,去其牙帳七里,頡利始覺,列兵未及成陣,單馬輕走,虜眾因而潰散。斬萬餘級,殺其妻隋義成公主,俘男女十餘萬,斥土界自陰山至於大漠,遂滅其國。尋獲頡利可汗於別部落,餘眾悉降。太宗大悅,顧謂侍臣曰:「朕聞主憂臣辱,主辱臣死。往者國家草創,突厥強梁,太上皇以百姓之故,稱臣於頡利,朕未嘗不痛心疾首,誌滅匈奴,坐不安席,食不甘味。今者暫動偏師,無往不捷,單於稽顙,恥其雪乎!」群臣皆稱萬歲。尋拜靖光祿大夫、尚書右僕射,賜實封五百戶。又為西海道行軍大總管,征吐谷渾,大破其國。改封衛國公。及靖身亡,有詔許墳塋制度依漢衛、霍故事,築闕象突厥內燕然山、吐谷渾內積石二山,以旌殊績。
◼ 이적(李勣, 594~669)
이세적(李世勣)은 자가 무공(懋功)이고, 조주(曺州) 이고(離孤) 사람이다. 본래 성은 서씨(徐氏)이며 위남(衛南)에게 빈객 생활을 했다. 집안이 부유하여 종들이 많았으며, 항상 수천 종(鍾)의 곡식을 쌓아 두고 있었다.
세적은 그 아버지 개(蓋)와 함께 베풀고 빌려 주는 것을 좋아했으며, 두루 나누어 줄 때에는 친한 이나 그렇지 않은 이를 차별하지 않았다.
수(隋) 대업(大業) 말년에 위성(韋城) 적양(翟讓)이 도적이 되었는데 세적의 나이 십 칠 세로 가서 적양을 좇았다. 적양에게 유세하여 말하기를, "공의 고을은 약탈하기에 적합지 않습니다. 송(宋), 정(鄭) 나라 상인들의 회합이 어하(御河) 중에서 열리기 때문에 그곳은 배가 끊이지 않으니, 그곳에 가서 탈취하시면 자본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적양이 세적의 말을 옳다고 여겨, 공선(公船)을 위협하여 재물을 빼앗아, 이로부터 군대가 크게 정비되었다.
이밀(李密)이 옹구(雍丘) 지역으로 망명하자, 세적이 준의(浚儀)인 왕백당(王伯當)과 함께 적양에게 유세하여, 이밀을 추대하여 우두머리로 섬겼다. 기이한 계책을 내어 왕세충을 격파했다. 이밀이 세적을 우무후대장군(右武候大將軍)과 동해군공(東海郡公)으로 임명했다.
이때를 당하여 하남(河南)과 산동(山東) 지역에 홍수가 나자, 수(隋)의 임금이 굶주린 백성들로 하여금 여양창(黎陽倉)의 곡식을 먹도록 조처했는데, 관리들이 제때에 곡식을 풀지 못하여, 하루에도 죽는 자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세적이 밀에게 유세하여 말하길, "천하의 어지러움은 굶주림에서 비롯됩니다. 지금 만약 여양(黎陽)의 곡식을 탈취하여 병사들을 모집 한다면, 큰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밀이 휘하의 병사 오천 명을 세적에게 주고, 학효덕 등과 더불어 하수(河水)를 건너 여양을 습격한 뒤, 그곳에 남아 지키고 있도록 하였다.
여양 창고를 열어 식량을 나누어주니, 열흘 만에 모여든 병사가 일만 명에 이르렀다. 우문화급(宇文化及)이 병사를 이끌고 북상(北上)하자, 밀이 세적으로 하여금 곡식 창고를 지키도록 하였다.
세적은 두루 참호를 파서 스스로를 방어하였고, 화급(化及)이 공격해 오자 세적이 지하도를 이용해 나가 싸우니, 화급이 크게 패배하여 병사를 이끌고 달아났다.
무덕(武德) 2년에 이밀이 조정으로 귀순 하였는데, 그의 영토가 동으로는 바다에 까지 이르고 남으로는 강(江)지방까지, 서로는 여(汝)지방, 북으로는 위군(魏郡) 지역에까지 이르렀는데, 세적이 이를 통솔하니 귀속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장사(長史) 곽효각(郭孝恪)에게 일러 말하길, "많은 백성과 영토는 모두 위공(魏公)의 소유입니다. 내가 만일 이들을 헌납한다면, 이는 주인의 패배를 이롭게 이용해 나의 공으로 삼는 것이니, 제가 수치로 여기는 바입니다" 라고 하고는, 곧 군(郡)과 현(縣)의 호적을 조사하여 구두로 밀에게 보고하고는, 밀 스스로 임금에게 상주할 것을 청했다.
사신이 도착했는데 고조(高祖)가 표(表)를 올리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기자, 사신이 세적의 생각을 보고했다. 임금이 기뻐하며 말하길, "충직한 신하로구나" 라고 하며, 조서를 내려 여주총관(黎州總管)을 배수하고 내국공(萊國公)으로 봉했다.
성씨(姓氏)를 하사하여 임금의 혈족으로 속하게 하고, 조(曺)로 옮겨 봉했다. 또 최상등급의 전답 50경(頃)을 주었다. 세적의 아버지 개(蓋)를 제음왕(濟陰王)으로 봉했는데, 굳이 사양하자, 서국공(舒國公)으로 고쳐 봉했다.
조서를 내려 세적으로 하여금 하남(河南)과 산동(山東) 지역의 병사를 총지휘하여, 왕세충을 막게 했다.
밀이 반역죄로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임금이 사신을 보내 밀의 죄상을 들추어 보이게 했다. 세적이 밀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자 하니 임금이 허락했다. 세적은 밀을 위하여 상복을 입고 장례기간이 끝나 탈상했다.
얼마 있다가 두건덕(竇建德)에 의해 함정에 빠져 아버지를 인질로 맡겨 두고 다시 여양땅을 지키러 가게 되었다.
3년 만에 스스로 혐의를 풀고 돌아왔다. 진왕(秦王)을 좇아 동도(東都)를 정벌할 때에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동쪽으로 땅을 다스림이 호뢰(虎牢)에 까지 이르렀고, 정주사병(鄭州司兵) 심열(沈悅)을 항복 시켰다. 건덕을 평정하고 세충을 포로로 잡아 군대를 정비하고 돌아 왔다.
진왕은 상장군(上將軍)이 되고 세적은 하장군(下將軍)이 되어 둘 다 황금갑옷을 입고 군용수레를 타고서 종묘에서 승리를 고했다. 아버지 개 또한 명주로부터 배구(裵矩)와 함께 입조(入朝)하여 본래의 관직을 회복 받았다.
또 임금을 좇아 유혹달과 서원랑을 격파하고 여러 차례 좌감문대장군(左監門大將軍)으로 옮겨졌다. 원랑(圓郞)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임금이 세적을 하남(河南)지역 대총관(大總管)으로 임명하여 그들을 평정케 했다.
조군왕(趙郡王) 효공(孝恭)이 부공석을 평정할 때에, 세적을 파견하여 보병 일만 명을 거느리고 회수(淮水)를 건너 수양(壽陽)지역을 정벌케 하고, 강(江) 지역 서쪽의 성벽을 공격하자, 풍혜량(馮惠亮) · 진정통(陣正通)이 차례로 무너지고 공석은 평정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자 병주도독(幷州都督)을 배수하고, 실제 봉읍 구백 호를 하사
했다. 정관(貞觀) 3년에 통막도(通漠道)의 행군총관이 되어 운중(雲中) 지역을 벗어나 돌궐과 싸워 돌궐족을 몰아냈다. 병사를 거느리고 이정의 군대와 통합했다.
세적이 이에 말하길, "힐리(詰利)가 만일 사막을 건너 구씨(九氏) 족에게로 도망가면 잡을 수가 없게 되고, 우리가 만약 군비를 대략 갖추어 그들에게 진격하면 싸우지 않고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정(靖)이 크게 기뻐하며 자기와 뜻이 합치된다고 여기니, 이리하여 계책이 결정되었다. 정이 군대를 이끌고 밤중에 출발하니 세적이 군사를 출동 시켜 뒤를 좇았다.
힐리가 사막으로 도망가고자 하였으나, 세적의 군대가 미리 사막 입구에 주둔해 있었으므로 건너지 못했다. 이에 추장이 부락 오만을 거느리고 세적에게 항복해 왔다.
임금이 세적에게 광록대부(光祿大夫)를 배수하고 병주(幷州) 대도독부 장사(長史)로 가게 했다. 부친상이 끝나 탈상하고 환궁하자, 영(英)으로 옮겨 봉했다. 병주를 다스린 16년 동안 위엄 있고 엄숙하다는 칭송을 들었다.
임금이 일찍이 말하길, "양제(煬帝)는 인재를 선발해 그로 하여금 변방을 지키도록 하지 않고, 중원 땅을 수고롭혀 긴 성을 쌓아 이로써 오랑캐를 방비했다.
지금 짐은 세적을 등용해 그로 하여금 병주를 지키도록 하였는데 돌궐족이 감히 남침하지 못하니, 능력 있는 관리가 성(城)보다 훨씬 낫도다" 라고 하였다.
세적을 불러들여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삼고자 했는데, 궁궐에 도착하기도 전에 설연타(薛延陀)의 아들인 대도설(大度設)이 팔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이사마(李思摩)를 침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임금이 조서를 내려 세적을 삭방도(朔方道)의 행군총관으로 삼으니, 날쌘 기병 육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도설청산(度設靑山)을 격파하고, 명왕(名王) 한 명을 목베고 포로 오만 명을 사로잡았다. 이 공로로 세적의 아들 중 한 명이 현공(縣公)으로 봉해졌다.
진왕(晉王)이 황태자가 되자, 세적에게 첨사(詹事)를 배수하고 우위솔(右衛率)을 겸직하게 하였으며, 얼마 후에는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이 되게 했다.
임금이 말하길, "우리 아이가 동궁(東宮)으로 즉위하는데, 그대가 오랜 장사(長史)였으므로 궁궐 일을 맡기는 것이니, 폄점을 당한다고 의심하지는 마시오" 라고 했다.
세적은 충성을 다 바쳤고, 임금은 그에게 큰 일을 맡길 만 하다고 생각했다. 일찍이 급작스러운 병에 걸렸는데, 의원이, "수염을 태운 재로 치료할 수 있다" 라고 하자, 임금이 곧 스스로 자기의 수염을 잘라 약에 섞도록 했다.
병이 낫자 세적이 입궐하여 임금에게 감사를 드리는데, 머리를 수 없이 조아려 피가 흘렀다. 그러자 임금이, "나는 나라를 위하여 한 일이니 무에 감사할 것이 있나?" 라고 말했다.
그런 후에 세적을 궁궐에 머물도록 하고 연회를 벌렸다. 임금이 좌중을 돌아보며 말하길, "짐이 가족을 생각해 보면, 어려서부터 고아로 그대를 바꿀만한 사람이 없다. 공은 옛날에 이밀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어찌 짐을 저버리리요?" 라고 했다.
세적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인하여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려 맹세했다. 이윽고 세적이 대취(大醉)하자, 임금이 친히 옷을 벗어 세적을 덮어주었다.
임금이 병이 들자 태자에게 일러 말하길, "너는 세적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없다 이제 내가 일로써 세적을 내칠 테니, 내가 죽은 후에 곧 그를 복야(僕射)로 임명하거라. 그러면 세적은 필시 목숨을 바쳐 너를 섬길 것이다" 라고 했다. 그리고는 세적을 첩주도독(疊州都督)으로 임명했다.
고종이 즉위하자, 세적을 불러들여 낙주자사(洛州刺史)와 낙양궁(洛陽宮) 유수(留守)를 맡도록 임명하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동중서문하(同中書門下)로 진급 시키고, 조정의 기밀에 참여케 한 뒤 마침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임명했다.
영휘(永徽) 원년(元年)에 복야(僕射)직을 그만두기로 청하자 허락했다. 그러나 여전히 개부의동삼사의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케 했다. 영휘 4년에 칙명을 내려 사공(司空)으로 진급 시켰다.
애당초 태종 때에 이미 능연각에 세적의 초상화를 그려 놓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고종이 다시 그의 형상을 그리도록 명령을 내리고는 직접 서문을 썼다.
또 작은 말을 타고 동쪽 누대와 서쪽 누대를 출입 할 수 있도록 하고 하급관리로 하여금 하루 한 사람씩 이세적을 배웅하고 전송하게 했다.
임금이 무소의(武昭儀)를 황후로 세우고 싶어 하였는데, 대신들의 반대로 두려워 결정치 못하고 있었다. 임금이 이세적과 장손무기, 우지녕(于志寧), 저수량 등을 불러 의논하려 하였는데, 세적이 병을 핑계로 입궐치 않았다.
훗날 임금이 이세적을 불러 말하길, "장차 무소의를 황후로 세우고자 하였는데, 종묘 대신들이 모두 반대를 하는 바람에 그만 두어야겠다" 라고 하였다.
이세적이 답하기를, "이는 폐하의 집안 일이니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 볼 필요가 없습니다." 임금이 마침내 뜻을 결정하고 왕씨 황후를 폐했다.
총장(總章) 2년에 죽었으니, 86세였다. 임금이 말하길, "이세적은 윗사람을 받듦이 충성스러웠고 부모를 섬김이 효성스러웠으며 삼조(三朝)를 거치는 동안 과오를 범한 적이 없었다. 성품은 청렴하고 신중했고 집안 살림에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러니 이제 세상을 떠남에 분명 집안에 남은 재산이 없을 것이다. 유사(有司)는 그의 장례비용을 넉넉히 마련해 돕도록 하라" 라고 하고는 눈물을 떨구었다.
광순문에서 초상을 치르며 칠일 동안 정사를 살피지 않았다. 태위(太尉)와 양주대도독(揚州大都督)을 증수하고 시호를 정무(貞武)라 했다. 보물을 주고 소릉에 장사지냈다.
음산(陰山), 철산(鐵山), 오덕건산의 형상을 본뜬 무덤을 만들어 그의 공적을 드러냈다. 장사 지내는 날, 임금은 황태자와 함께 미앙궁(未央宮) 고성(古城)에 행차하여 눈물로 그를 보내며 뭇 관리들로 하여금 고성 서북쪽까지 전송케 했다.
처음에 이세적이 여양(黎陽)의 곡식 창고를 탈취했을 때에, 이세적에게로 와서 식객 노릇 하는 이들이 많았었는데, 고계보(高季輔)와 두정륜(杜正倫)도 그 중 하나였다. 또 호뇌(虎牢)를 평정할 때에는 대위(戴胃)를 얻었다.
모두 명신(名臣)이 되니, 세상 사람들은 이세적이 사람을 잘 알아본다고 여겼다. 낙양을 평정하고 단웅신(單雄信)을 포로로 잡았는데, 그는 이세적의 옛 친구였다.
그러자 이세적은 단웅신의 재주와 무력을 임금께 알리고 또 말하길, "만일 금고형으로 사형을 대신해 주신다면 반드시 보은(報恩) 할 것입니다. 청컨대 관직을 주고 속죄케 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였는데, 임금이 허락지 않았다.
이에 울부짖어 통곡하며 넓적다리를 베어 친구에게 먹이며 말하기를, "삶과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다. 이제 나의 이 살은 너와 함께 흙으로 돌아간다" 라고 하였다.
친구의 아들을 거두어 양자로 삼았다. 천성이 우애로워 그 누이가 병에 걸리자, 일찍이 스스로 죽을 끓이고 자기 수염을 태워 먹이곤 하였다.
누이가 그만 두라고 말하자 답하기를, "누님은 병이 많고 저도 또한 늙었으니, 비록 자주 죽을 끓여 드리고자 한들 몇 번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세적은 군대를 부리는데 지략이 뛰어나, 적군을 헤아려 변화에 대처하는 것이 모두 그때 그때의 상황에 꼭 맞았다. 남의 장점을 들으면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반드시 공을 아랫사람들에게 돌렸다. 금이나 비단을 얻으며, 다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자기 개인을 위하여 저축해 두지 않았다. 드러나 법을 지키는 것은 매우 엄하였기 때문에, 병사들이 그를 위하여 쓰임을 당했다.
일에 임하여 장수를 선발할 때에는, 용모가 뛰어나고 순후하며 복스럽게 잘생긴 이들을 골라서 보냈다. 혹자가 그 까닭을 물으면 답하기를, "박명(薄命)한 사람은 더불어 공명(功名)을 이루기에 부족하다" 라고 했다. 이세적이 죽으니, 병사들이 모두 울었다.
병이 계속된 이래로, 임금과 황태자가 약을 하사하면 먹었지만, 가솔들이 의원을 부르려 하면 허락지 않았다.
여러 아들들이 굳이 약을 올리면, 매번 말하기를, "나는 산동(山東)의 농사꾼으로서 삼공(三公)의 지위에 올랐고 또 나이도 팔십을 넘겼으니 이는 천명(天命)이 아니겠느냐! 생사는 하늘에 달려 잇는 것이니, 어찌 의원에게 가 살기를 구하리요?" 라고 하였다.
동생 필(弼)은 처음엔 진주자사(晋州刺史)로 있었는데, 이세적이 병이 들자 불러서 사위경(司衛卿)으로 삼고 형을 보살피도록 했다.
이세적이 문득 말하길, "내가 조금 차도가 있는 듯 하니, 술자리를 마련해 즐기자꾸나" 라고 하고는, 이에 음악을 연주하고 연회를 베풀고 자손들을 모아 아래에 늘어서게 했다.
장차 연회가 끝나려 하자, 동생 이필에게 말하였다. "내가 죽을 때에는 유언을 하고 싶다. 그러나 슬픔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을까 염려되니, 지금 이 한번으로 결별하겠다. 내가 보아하니, 방현령, 두여회, 고계보 등은 모두 애써 그들의 가문을 일으켜 세웠고 또 후손들에게 물려주기를 바랬었는데, 모두 불초한 자손들에 의해 무너졌다. 나의 자손들을 이제 너에게 맡기니, 너는 신중히 살펴서 언행을 삼가지 않거나 나쁜 무리와 사귀는 자가 있으면 곧 매질하여 죽이고 두루 알리거라. 그리하여 후인들로 하여금 마치 내가 방현령이나 두여회를 비웃듯이 나를 비웃게 하지 말라. 내가 죽으면 베포 포장한 뚜껑 없는 수레에 관을 싣고, 평상복을 입혀 염하고 그 위에 관복을 덮거라. 만일 죽어서도 지각이 있다면, 이 조회 복을 입고 돌아가신 고종 폐하를 받들어 알현하기를 바라노라. 부장품으로는 오직 대여섯 마리의 모조 말을 만들어 아래에 휘장을 두르고, 검은 머리에 흰 비단 치마를 입은 인형 열 개를 중간에 세우도록 하고, 다른 것은 좋게 하지 말라. 첩들은 남아서 자식을 양육하고자 하는 이만 허락하고, 나머지는 내보내거라. 장례가 끝나면 너는 우리 집으로 이사 와서, 어리고 약한 이들을 잘 보살피도록 하라. 만일 내 말을 어긴다면, 내 시체를 다시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는 다시 말하지 않았다. 이필 등이 그 말을 따랐다.
이세적은 본래 이름이 세적(世勣) 이었는데, 고종 때에 이르러 태종의 이름자와 같은 글자인 세를 휘(諱)하여 적(勣)이라고 명명했다. 후에 고종의 묘당에서 함께 제사 지냈다.
▶️ 剪(자를 전)은 형성문자로 翦(전)의 속자(俗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칼도(刀=刂; 칼, 베다, 자르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前(전)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剪(전)은 ①자르다 ②끊다, 베다 ③깎다 ④멸망시키다(滅亡---) ⑤제거하다(除去--), 없애다 ⑥가위 ⑦깃에 붙인 화살,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필요치 않은 것을 잘라서 없애 버림을 전제(剪除), 쳐 부숨 쳐서 멸함을 전멸(剪滅), 자르고 갊을 전마(剪磨), 촛불 심지의 불똥을 잘라냄을 전촉(剪燭), 나무를 벰을 전벌(剪伐), 나무나 풀의 싹을 잘라 냄을 전아(剪芽), 옷감을 마름질 함을 전재(剪裁), 가위로 베어 버림을 전절(剪截), 말갈기를 깎음을 전종(剪鬃), 가위로 옷감이나 종이나 머리털 따위를 자르는 기구를 전도(剪刀), 풀을 베고 뿌리를 캐내다는 뜻으로 미리 폐단의 근본을 없애 버림을 일컫는 말을 전초제근(剪草除根), 수염을 잘라 약에 섞는다는 뜻으로 윗 사람이 아랫 사람을 자기 몸처럼 아낀다는 의미로 일컫는 말을 전수화약(剪須和藥) 등에 쓰인다.
▶️ 須(모름지기 수/수염 수)는 ❶회의문자로 湏(수)는 통자(通字), 须(수)는 간자(簡字), 鬚(수)는 동자(同字)이다. 머리 혈(頁; 머리)部와 彡(삼; 무늬, 빛깔, 머리, 꾸미다)의 합자(合字)이다. 얼굴에 있는 털의 장식(裝飾)으로, 턱수염을 뜻한다. 쓰다의 뜻으로 쓰는 것은 需(수)의 차용(借用)이다. ❷회의문자로 須자는 '모름지기'나 '틀림없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須자는 頁(머리 혈)자와 彡(터럭 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須자는 본래 '수염'을 뜻했던 글자였다. 須자의 갑골문을 보면 턱수염이 난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고대 중국에서 수염은 남성의 상징이면서도 성인의 증표였다. 그래서 수염이 자라기 시작하면 누구나 당연하게 수염을 기르려 했다. 須자가 '수염'이라는 뜻으로 쓰이다가 후에 '모름지기'나 '틀림없이'라는 뜻을 갖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남자가 수염을 기르는 것은 당연하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須(수)는 ①모름지기(사리를 따져 보건대 마땅히) ②틀림없이 ③결국(結局) ④마침내 ⑤드디어 ⑥반드시 ⑦잠깐 ⑧본래 ⑨원래 ⑩수염 ⑪마땅히 ~해야 한다 ⑫반드시 ~하여야 한다 ⑬필요하다 ⑭기다리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꼭 소용되는 바가 있음을 수요(須要), 천한 여자를 수녀(須女), 마땅히 알아야 함을 수지(須知), 논병아리를 수라(須蠃), 입직한 벼슬아치가 긴급한 일이 생겼을 때에 잠시 동료와 입직을 바꾸는 일을 수자(須資), 꼭 필요로 함 또는 없어서는 아니됨을 필수(必須), 반드시 필요한 것을 요수(要須), 수염을 쓰다듬음을 날수(捋須), 상어의 수염을 어수(魚須), 관청이나 공공단체의 비용을 공수(公須), 비첩을 달리 이르는 말을 여수(餘須), 꼭 필요로 하는 모양이나 없어서는 아니 되는 모양을 필수적(必須的), 반드시 배워야하는 교과 또는 학과를 필수과(必須科), 만기가 됨을 기다리지 아니함을 불수만(不須滿), 여러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불수다언(不須多言),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수레에 실을 만큼의 책을 읽으라는 말을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 아우에게 비록 허물이 있더라도 모름지기 큰소리로 꾸짖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제수유과수물성책(弟雖有過須勿聲責) 등에 쓰인다.
▶️ 和(화할 화)는 ❶형성문자로 惒(화)는 통자(通字), 咊(화)는 고자(古字), 訸(화)와 龢(화)는 동자(同字)이다. 음(音)을 나타내는 禾(화)와 수확한 벼를 여럿이 나누어 먹는다는(口) 뜻을 합(合)하여 '화목하다'를 뜻한다. ❷형성문자로 和자는 '화목하다'나 '온화하다'하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和자는 禾(벼 화)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禾자가 '벼'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口자가 더해진 和자는 먹고살 만하니 '화목하다'와 같은 식으로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갑골문에서는 龠(피리 약)자가 들어간 龢(화할 화)자가 쓰였었다. 龢자는 피리를 그린 龠자를 응용한 글자로 피리 소리가 고르게 퍼져나간다는 의미에서 '조화롭다'를 뜻했었다. 여기서 禾자는 발음역할만을 했었다. 하지만 금문에서 부터는 소리의 조화를 口자가 대신하게 되면서 지금의 和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和(화)는 (1)관악기(管樂器)의 한 가지. 모양의 생(笙)과 같이 생겼는데, 십삼관(十三管)으로 되었음 (2)합(合)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화하다(서로 뜻이 맞아 사이 좋은 상태가 되다) ②화목하다 ③온화하다 ④순하다 ⑤화해하다 ⑥같다 ⑦서로 응하다 ⑧합치다 ⑨허가하다 ⑩모이다 ⑪화답하다 ⑫양념하다 ⑬나라의 이름(일본) ⑭합계 ⑮악기(樂器)의 한 가지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화합할 협(協), 화목할 목(睦),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싸움 전(戰)이다. 용례로는 다툼질을 서로 그치고 풂을 화해(和解), 서로 뜻이 맞고 정다움을 화목(和睦), 화목하여 잘 합하여 짐을 화합(和合), 시나 노래에 서로 응하여 대답함을 화답(和答), 온화하고 순함을 화순(和順), 날씨가 바람이 온화하고 맑음을 화창(和暢), 마음이 기쁘고 평안함을 화평(和平), 급박하거나 긴장된 상태를 느슨하게 함을 완화(緩和), 평온하고 화목함을 평화(平和), 서로 잘 어울림을 조화(調和), 날씨가 맑고 따뜻하며 바람이 부드러움을 온화(溫和), 교전국끼리 싸움을 그만두고 서로 화해함을 강화(講和), 서로 어울려 화목하게 됨을 융화(融和), 성질이 부드럽고 온화함을 유화(柔和), 서로 친해 화합함을 친화(親和), 화창한 바람과 따스한 햇볕이란 뜻으로 따뜻한 봄날씨를 이르는 말을 화풍난양(和風暖陽), 남과 사이 좋게 지내되 義를 굽혀 좇지는 아니한다는 뜻으로 남과 화목하게 지내지만 자기의 중심과 원칙을 잃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화이부동(和而不同),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부드러운 기운이 넘쳐 흐름을 이르는 말을 화기애애(和氣靄靄),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단비가 내린다는 뜻으로 날씨가 고름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화풍감우(和風甘雨), 음과 양이 서로 화합하면 그 기운이 서로 어우러져 상서를 냄을 일컫는 말을 화기치상(和氣致祥), 우레 소리에 맞춰 함께한다는 뜻으로 자신의 뚜렷한 소신 없이 그저 남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을 의미하여 일컫는 말을 부화뇌동(附和雷同), 거문고와 비파 소리가 조화를 이룬다는 뜻으로 부부 사이가 다정하고 화목함을 이르는 말을 금슬상화(琴瑟相和), 서로 뜻이 맞지 않아 일어나는 충돌 또는 둘 이상의 음이 같이 울릴 때 서로 어울리지 않고 탁하게 들리는 음을 일컫는 말을 불협화음(不協和音), 겉으로는 동의를 표시하면서 내심으로는 그렇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동이불화(同而不和), 곡이 높으면 화답하는 사람이 적다는 뜻으로 사람의 재능이 너무 높으면 따르는 무리들이 적어진다는 말을 곡고화과(曲高和寡), 국민의 화합과 나아가 인류의 화합을 지향한다는 뜻을 일컫는 말을 조민유화(兆民有和) 등에 쓰인다.
▶️ 藥(약 약, 뜨거울 삭, 간 맞출 략/약)은 ❶형성문자로 薬(약)의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초두머리(艹=艸; 풀, 풀의 싹)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樂(악, 약)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藥자는 '약'이나 '약초'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藥자는 艹(풀 초)자와 樂(노래 악)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樂자는 거문고와 같은 현악기를 그린 것으로 '풍류'나 '즐겁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몸이 아픈 것은 분명 즐겁지 못한 상태를 뜻한다. 그러니 '즐겁다'라는 뜻을 가진 樂자와 艹자의 결합은 약초(艹)를 먹고 다시 즐거운(樂) 상태로 되돌아 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藥(약, 삭, 략)은 (1)병(病)이나 상처(傷處) 등을 고치거나 예방하는 작용을 하는 의학적(醫學的) 물질(物質). 먹거나 바르거나 주사(注射)하거나 함. 물약, 가루약, 고약, 탕약(湯藥) 등이 있음. 약품(藥品) (2)화약(火藥) (3)사기 그릇이나 구두 따위 물건에 윤을 내기 위하여 바르는 물질. 유약(釉藥), 구두약 따위 (4)의약, 농약, 시약(試藥) 따위를 두루 이르는 말 (5)술, 아편(阿片) 등의 결말 (6)비유적으로 몸이나 마음에 이롭거나 도움이 되는 것 등의 뜻으로 먼저 약 약의 경우는 ①약(藥) ②약초(藥草: 약으로 쓰는 풀) ③구릿대(산형과의 여러해살이풀) ④구릿대의 잎 ⑤작약(芍藥: 작약과의 여러해살이풀) ⑥사약(賜藥: 임금이 독약을 내리다) ⑦독(毒) ⑧아편(阿片) ⑨화약(火藥) ⑩담, 금원(禁苑) ⑪고치다, 치료하다, 약을 쓰다 ⑫독살(毒殺)하다 그리고 뜨거울 삭의 경우는 ⓐ뜨겁다(삭) ⓑ더운 모양(삭) ⓒ뜨거운 모양(삭) 그리고 간 맞출 략의 경우는 ㉠간을 맞추다(략) ㉡조미(調味)하다(략) ㉢양념한 젓갈(젓으로 담근 음식)(략)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약제 제(劑)이다. 용례로는 양약을 파는 곳을 약국(藥局), 한약을 지어 파는 곳을 약방(藥房), 약의 품질을 약품(藥品), 약의 효험을 약효(藥效), 약으로 씀을 약용(藥用), 가운데 손가락과 새끼손가락 사이의 손가락을 약지(藥指), 약제가 되는 물건을 약제(藥物), 조제하거나 또는 사용할 수 있게 만든 약재를 약제(藥劑), 약이 되는 풀을 약초(藥草), 먹어서 몸에 약이 된다는 샘물을 약수(藥水), 약재를 넣어서 빚은 술을 약주(藥酒), 약제에 관한 학문을 약학(藥學), 약풀을 심어 가꾸는 밭을 약원(藥園), 약을 담은 종지를 약종(藥鐘), 농작물에 해로운 병균이나 벌레, 잡초 따위를 없애는 데 쓰는 농약(農藥), 몸을 보하는 약을 보약(補藥), 서양의 의술로 만든 약을 양약(洋藥), 한방에서 쓰는 약을 한약(韓藥), 신령스럽게 효험이 있는 약을 영약(靈藥), 온갖 약을 백약(百藥), 약을 먹음을 복약(服藥), 화학 분석에서 어떠한 물질의 성분 및 그의 양을 알아내는 데 쓰이는 약품을 시약(試藥), 이를 닦는 데 쓰는 약을 치약(齒藥), 의료에 쓰이는 약품을 의약(醫藥), 의약을 제조함 또한 그러한 약제를 제약(製藥), 달이어서 먹는 한약을 탕약(湯藥), 작고 둥글게 만든 알약을 환약(丸藥), 병에 알맞은 약제를 투여함을 투약(投藥), 약 상자 속의 물건이라는 뜻으로 자기의 수중에 있어서 필요하면 언제든지 쓸 수 있는 물건을 일컫는 말을 약롱중물(藥籠中物), 무슨 일이나 빠짐없이 끼임 또는 반드시 끼어야 할 사물을 일컫는 말을 약방감초(藥房甘草), 약과 돌바늘 같은 말이라는 뜻으로 사람을 훈계하여 나쁜 점을 고치게 하는 말을 약석지언(藥石之言), 약석이 무효라는 뜻으로 약이나 치료도 효험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약석무효(藥石無效), 죽은 뒤에 약방문을 쓴다는 뜻으로 이미 때가 지난 후에 대책을 세우거나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말을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뜻으로 충언은 귀에 거슬린다는 말을 양약고구(良藥苦口), 좋다는 약을 다 써도 병이 낫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백약무효(百藥無效), 함박꽃 선물이라는 뜻으로 남녀 간에 향기로운 함박꽃을 보내어 정을 더욱 두텁게 함을 이르는 말을 작약지증(勺藥之贈), 치료약을 구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일이 만회할 수 없을 처지에 이른 것을 이르는 말을 불가구약(不可救藥), 증세에 맞게 약을 써야 한다는 뜻으로 문제의 핵심을 바로 보고 대처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대증하약(對症下藥), 약을 쓰지 아니하여도 병이 저절로 나음을 일컫는 말을 물약자효(勿藥自效), 백 가지 약 중에 으뜸이라는 뜻으로 술을 좋게 이르는 말을 백약지장(百藥之長), 창자를 썩히는 약이라는 뜻으로, 맛 좋은 음식물과 술을 이르는 말을 부장지약(腐腸之藥)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