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 떠나는 따뜻한 나라로의 항해, 2011 크루즈호가 출항의 닻을 올렸다. 낮에는 갑판 위에서 한가로이 책을 읽고, 밤에는 선상에서의 우아한 파티를, 항구에서는 이국적인 도시 여행을 즐기는 크루즈 여행자의 모습이 차디찬 겨울을 따뜻한 낭만으로 물들인다.
크루즈 룩은 선상에서 즐기는 여행을 위한 옷에서 시작된 만큼 수영복, 쇼츠, 이국적인 패턴의 의상들, 실용적이면서도 청량한 멋을 자랑하는 액세서리 등이 주를 이룬다.
- 1. 플라스틱 체인 목걸이는 입생로랑(Yves Saint Laurent). 2. 패브릭 소재의 웨지힐 슈즈는 미우미우(MiuMiu). 3. 복주머니 형태의 체인스트랩가방은 디올(Dior). 4. 면 소재의 러플 베스트는 입생로랑. 5, 6. 크리스털 장식의 메탈 뱅글과 선글라스는 디올. 7. 시퀸 장식의 면 소재 베스트는 에스까다(Escada). 8. 염색 프린트의 수영복은 구찌(Gucci). 9. 지그재그 패턴의 니트 원피스는 미소니(Missoni).
- 10. 단추 장식의 트위드 카디건은 샤넬(Chanel). 11. 아프리카풍의 기하학적인 목걸이는 마르니(Marni). 12. 깅엄체크무늬의 플라스틱 뱅글은 샤넬. 13. 밀짚 굽의 새틴 스트랩 슈즈는 입생로랑. 14. 플렉스 소재의 뱅글은 모두 프라다(Prada). 15. 밀짚 플랫폼 힐의 가죽 스트랩 슈즈는 프라다. 16. 실크 스카프는 디올. 17. 사과 모양의 귀고리는 미우미우. 18. 캔버스 소재의 클러치백은 마르니. 19. 코르크 소재를 사용한 페이턴트 가죽 클러치백은 입생로랑.
선상 여행을 즐기는 상류층을 위한 옷에서 유래한 크루즈 컬렉션은 이제 리조트 컬렉션, 프리 스프링 컬렉션 등 다양한 이름으로 보다 다채롭게 등장하고 있다. 겨울 홀리데이 시즌인 12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 반짝 출몰하는 이 컬렉션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풍성한 멋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 인기 비결은 분명하다. 먼저, 한겨울에 떠나는 남국으로의 여행이라는 감성적인 테마로 디자인된 옷들은 어떤 컬렉션보다 여유롭고 우아하며 이국적이다. 이는 입는 사람은 물론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 위로 안내하는 기분 좋은 마법을 부린다. 또 짧은 시기에 잠깐, 그것도 한겨울에만 만날 수 있어 희소성과 소장 가치가 크다. 특정 브랜드 애호가라면 봄/여름 컬렉션을 맛보기로 경험하기에도 제격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디자이너 고유의 색깔과 손맛을 보다 웨어러블한 디자인으로 만날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매력이 크루즈 컬렉션의 인기를 날로 치솟게 하고 있으며, 크루즈 라인 출시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마니아까지 낳고 있다.
이제 막 크루즈 컬렉션에 입문했다면 영화 <리플리>의 기네스 팰트로 스타일에 주목하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1960년대 이탈리아 나폴리 섬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상류사회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에는 낮과 밤을 넘나드는 근사한 크루즈 룩이 등장한다. 요트를 타고 항해를 하거나 해변에서 선탠을 즐기는 기네스 팰트로가 주로 입는 꽃무늬 선 드레스와 깅엄체크 수영복, 줄무늬 쇼츠와 카프리 팬츠, 커다란 라피아 모자, 그리고 사교를 위한 파티 룩으로 선택하는 우아한 칵테일 드레스와 턱시도 슈트, 실크 장갑 등의 이브닝 웨어는 고급스러운 크루즈 룩의 표본으로 꼽힌다. 여기에 달콤한 컬러 팔레트와 이국적인 프린트, 울, 코튼, 실크 등의 부드러운 소재, 그리고 여유로운 실루엣의 요소를 더하면 완벽하고도 근사한 크루즈 룩의 기본이 갖추어진 셈이다.
지난 5월, 남프랑스 지역의 작은 항구 마을인 생트로페에서 열린 샤넬 크루즈 쇼는 과거 상류층이 즐기던 크루즈 여행을 제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마호가니 보트 위에서 햇볕을 쬐고있던 모델들이 항구에 내려 테라스 카페 옆을 자유롭게 거니는 장면은 동영상으로 쇼를 감상하던 에디터를 금세 생트로페로 데려다 놓았다. 하늘색, 밝은 핑크색, 민트 그린색 등 파스텔 톤 색상과 어울린 거미줄 같은 얇은 트위드와 하늘거리는 시폰 소재의 아이템은 바닷바람에 사각사각 소리를 내는 것만 같았고 맨발로 걷는 모델의 모습은 여유자적 그 자체였다. 프랑스 영화계의 누벨바그 운동에서 영감 받은 디올의 크루즈 컬렉션 역시 오늘날 파리지엔의 감성을 충실히 담아내고 있다. 브리지트 바르도, 진 세버그, 로미 슈나이더 등 프랑스 여배우들을 현대적으로 오마주한 의상들은 오버사이즈 트렌치코트, 모래시계 실루엣의 칵테일 드레스, 레이스를 단 시프트 드레스, 스리피스 슈트 등으로 탄생했으며, 마치 처음 사교계에 데뷔하는 소녀의 모습처럼 순수하고 사랑스럽게 표현되었다. 셔벗 컬러에 1950~60년대의 실루엣을 가미해 ‘시크 롤리타’ 룩을 완성한 루이비통의 크루즈 컬렉션 역시 보는 것만으로도 매혹적이다. 핑크와 피스타치오색의 꽃무늬 스커트, 하이웨이스트 쇼츠, 팔목 위까지 오는 소매 길이의 서머 코트, 할리우드 디바의 드레스 룸에서 홈쳐온 듯한 자카드 소재의 칵테일 드레스 등은 극도의 여성스러움으로 시선을 압도한다. 하트와 도트 무늬를 적극 활용해 1970년대의 복고적인 무드를 완성한 미우미우컬렉션과 여성스러움의 상징인 진주를 다양한 디자인 모티프로 활용한 모스키노의 컬렉션은 보다 젊고 앙증맞은 크루즈 룩을 제안하며 꿈과 낭만을 선사한다.
반면 구찌의 크루즈 컬렉션은 보다 능숙한 여행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1970년대의 로맨티시즘이 살짝 가미된 밀리터리 룩은 신체의 곡선을 조각하듯 커팅된 완벽한 재단과 어울려 한결 스타일리시하고 당당한 여행자의 분위기를 풍긴다. 특히 불투명한 흙 색깔과 염색 프린트, 섬세한 자수와 시퀸 장식, 호피무늬 등 대범한 디자인 요소가 군데군데 섞여 있어 힘이 넘친다. 마르니의 크루즈 컬렉션은 ‘과장’을 디자인 요소로 활용해 이국적인 멋을 강조했다. 아프리카풍의 그래픽 무늬와 비현실적인 둥근 모양의 주름들, 양말처럼 신는 끈 달린 샌들, 금속 구슬과 벨벳 리본이 주렁주렁 달린 목걸이 등의 기하학적인 아이템은 간결한 실루엣과 대조를 이뤄 더욱 근사하다. 프라다 역시 화려한 프린트 의상과 큼직하고 컬러풀한 주얼리 등 에스닉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방법으로 크루즈 룩의 묘미를 드러냈다.
도심에서도 걸치기 좋은 의상으로 실용성을 높인 크루즈 컬렉션의 등장도 두드러진다. 남성복에서 영감 받은 테일러드 재킷과 플리츠 팬츠, 옥스퍼드 샌들 등으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크루즈 룩을 선보인 보테가 베네타의 컬렉션은 크루즈 라인도 충분히 미니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흰색과 검은색의 메인 컬러 팔레트에 울과 코튼 개버딘, 워싱된 나파 가죽 등 클래식한 소재를 섞어 과장 없는 컬렉션을 선보인 토마스 마이어는 “크루즈 룩의 정수는 움직임의 미학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아이템이 입기 편하지만 그 디자인과 구조는 매우 정밀해 움직임에 따라 실루엣이 변하는 것이죠”라며 크루즈 룩의 묘미를 되짚었다. 메인 컬렉션과는 달리 다양한 실용성을 부여한 입생로랑 컬렉션도 빼놓을 수 없다. 1970년대 아카이브 룩에서 영감 받은 이번 컬렉션은 브라 톱에 잘 재단된 하이웨이스트 팬츠를 매치하는 식의 스타일링으로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아이템의 믹스앤매치 룩을 제안하고 있다. 안토니오 가우디의 건축물과 일본 문화를 테마로 선보인 에스카다의 크루즈 컬렉션 역시 테일러드 룩에 색감과 장식만으로 여행의 멋을 은근히 담아냈으며,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트렌치코트와 테일러드 팬츠 등에 T스트랩 샌들, 라피아 웨지힐 슈즈, 프린트 스카프 등 여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액세서리에만 힘을 실은 스타일링을 선보였다. 낙낙한 실루엣의 점프슈트와 야구 점퍼 등 스포티한 멋을 가미한 3.1 필립 림 컬렉션은 크루즈 룩의 진정한 묘미인 편안한 감성에 충실했다. 겨울 홀리데이 시즌을 위한 매력적인 대안이자 한겨울에 만나는 바캉스 룩의 매력에 빠져보고 싶다면 크루즈 컬렉션이 제격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