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삶의 버팀목이다.
<영화 '밀양(Secret Sunshine)'을 보고> 金寧順
2007년 7월에 개봉된 영화 ‘밀양(密陽)’은 프랑스의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영화이다. 여주인공 신애(전도연 분)가 겪는 영혼의 아픔을 표출해내는 전도연의 내면연기력에 감탄도 컸지만, 영화의 내용에서 받은 종교적인 상념(想念)이 오래도록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라스트 신은 등장한 배우도 없는 구질구질한 마당 한 구석을 오래 동안 고정화면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폴리 병이 나둥그러진 어두운 마당에 고집스레 포커스를 잡고 있더니 그 마당을 배경으로 글자들이 흘러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 (Ending Credit)이 시작되었다. 시시해 보이는 장면일지라도 분명 저마다 지닌 뜻이 뭔가가 있을 터인데,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보아도 그 장면의 의미를 알 수 없었으며 감독의 의중(意中)을 헤아릴 수 없었다. 움직이며 올라가는 글자들 속에서 해독(解讀)한 것은 오로지 이청준의 소설 ‘벌레이야기’를 영화화했다는 정보뿐이었다. 원작소설을 읽고 답을 찾아볼까 생각도 했지만 영화에서 받은 느낌을 흐리게 할 뿐, 그것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닌 듯 했다. 함께 간 남편도 모르기는 나와 마찬가지였다.
며칠 후에 마지막 장면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다시 영화관에 갔다. 대충 보고 있다가 영화가 끝날 즈음에 바짝 긴장하면서 자세히 살펴보니 처음에 갔을 때는 보이지 않던 자그마한 햇빛이 보였다. 어둡고 구질구질한 마당 가운데에 손바닥 만 한 햇빛 두 조각이 뽀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 햇빛의 존재를 확인하니 답답했던 속이 뚫리고 풀지 못한 숙제를 푼 듯이 개운했다. 영화제목이 ’밀양(密陽)이다. 비밀스러운 햇빛(Secret Sunshine)이니 쉽사리 보이지 않을 만도 했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만큼 내 것이 된다’는 말이 맞는지 햇살이 눈에 보이니 비로소 그 장면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신애네 마당에 어느 틈새로 비집고 들어왔는지 햇빛은 두 조각이나 비치고 있었고 핀잔을 놓는 신애를 맴돌면서 돌봐주려고 애타는 종찬(송강호 분)이도 하늘이 보낸 햇빛의 한 조각이며, 신의 은총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영화 줄거리의 시작은 여주인공인 젊은 신애가 교통사고로 떠난 남편의 고향에서 살기 위해 낯 선 곳, 밀양(密陽)으로 어린 아들을 데리고 찾아가는 장면으로 열린다. 남편이 그리워 못 견딜 때에는 거실 긴 의자에서 자던 모습과 코를 골던 남편의 흉내를 내며 마음을 달랜다. 어린 아들이 유괴살해 당하는 참혹한 사건이 불쌍한 신애 앞에 또 일어난다. 모두 잃어 가진 것이 없으니 더 빼앗길 것도 없이 죽지 못 해 사는 상처 입은 영혼은 이웃의 전도로 교회에 다니게 되고 신앙을 통해 치유와 안정을 찾게 된다. 뜨겁게 신을 영접한 신애는 치유를 넘어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려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는데…
아들을 유괴하고 살해한 흉악범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로 면회 간 신애는 뜻밖에 평온한 표정의 살인범을 대하게 된다. ‘이곳에서 종교를 갖게 되어 신(神)에게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 지금은 마음이 평안하다’는 말을 쉽게 하는 죄수를 대하는 신애의 영혼은 또 다시 내동댕이쳐진다. ‘내가 용서를 안했는데, 누가 나보다 먼저 용서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울부짖는다. 아들이 살해되었을 때보다 더 큰 혼란에 빠져, 신에게 반문하며 종교를 부정하게 된다. 관객은 여기에서 ‘고백하고 회개하면 죄의 용서를 받는다’라는 종교적 논리에 저항을 느꼈을 것이다. ‘나쁜 짓하고도 회개하면 용서를 받아?’ 라고.
용서를 받았다고 믿는 사람은 평온하고, 용서하지 못 하는 사람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웠다. 삶은 상대적인 관계이므로 이래저래 감정에 영향을 받으며 산다. 상대의 잘못을 질책하는 마음에 빠져, 나 자신까지도 휘말려 분노의 말로 나를 망가뜨리거나,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지 않을 지혜를 기르고 싶다. 그것은 깊은 신앙의 힘이나, 고도의 자기수양으로 가능하겠지만 꾸준히 노력하여 오늘보다 나은 내일의 나를 발현하고 싶다.
신애의 영혼은 방황과 황폐 속에서 몸부림친다. 신(神)에 대한 반항 심리로 교회의 장로(長老)를 유혹한다. 적극적인 신애의 유혹에 현혹되었지만 일을 저지르기 직전에 분별력을 잃은 남자의 욕정을 버리고 장로의 이성(理性)으로 돌아와 죄악으로부터 자기를 지킨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던 힘 때문일까? 기도로 정신무장이 되면 악으로부터 자기를 방어하는 갑옷을 입는다는 생각을 되새김하였다.
장로를 유혹하여 성행위를 유도하였던 신애는 그 행위에 대한 혐오감으로 심한 구토(嘔吐)를 하는데 그 장면이 매우 인상 깊었다. 성행위는 축복과 사랑 속에서 이루어질 때는 기쁨이 오가며 그 희열(喜悅)은 미적승화(美的昇華)의 경지까지도 이루어내지만, 축복과 사랑에 어긋났을 때에는 불결과 매도(罵倒) 당하는 행위가 되는 서로 반대되는 양면을 공유하고 있는 것을 구토장면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인물을 등장시킨 끝 장면으로는 신애가 미용실에서 긴 머리카락을 자르다가 뛰쳐나와 컷트가 중단되었던 자기 머리모양을 가위를 들고 스스로 다시 바르게 다듬는다. 그 거울 귀퉁이에는 어미 가슴에 묻고 살아갈 아들의 사진이 꽂혀있고 때마침 대문을 들어선 종찬이는 거울이 잘 보이도록 들어주고 있는데, 이 장면은 신애가 삶을 다시 조율하며 새 출발하는 암시가 아니었을까?
‘믿는 자에겐 복이 있나니…’ 언제, 어디서 무슨 바람결에 들은 구절인지는 잊었지만 귀에 익은 이 말이 생각난다. 신애가 영혼 속에 신을 영접하고 신앙을 가졌을 때에는 위안과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회의와 부정 속에서 신을 잃고 신앙을 버렸을 때에는 혼란과 원망하는 마음에 시달려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고 끝내는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했었다.
기도로 신과 교감하며 신을 의지하고 영혼을 맡긴 사람은 용서와 평안을 얻고 악에서 구함을 받는 것을 영화 ‘밀양’속에서 배웠다. 신앙은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아닐까.
첫댓글 신앙은 삶의 버팀목 일수도 있겠네요.
기도로 신과 교감하며 신을 의지하고 영혼을 맡긴 사람은
용서와 평안을 얻고 악에서 구함을 받는 것을
영화 ‘밀양’속에서 배웠다. 잘 감상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