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너에게 내려진 더없는 축복이자 동시에 더없는 불행이기도 하다. 그것은 세상에 내려진 더없는 축복이자 동시에 더없는 불행이기도 하다. 그것은 세상을 행복으로 차게 할 수 있고 동시에 세상을 공포로 가득하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양 극단에 선 너에게 내려진 그것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가는 바로 너의 선택이 좌우한다.
이것이 절대지각(Absolute preception)이다.
미드가르드력 기원전 4년.
「결국 그분은 그런 선택을 하신 겁니까.」
「…무지몽매한 저 하계의 인간들이 본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선택은 결국 옳을 것이네.」
검은 로브의 남자는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을 빌려보면 그런 '무지몽매한' 자들이 본다면 이들이 있는 장소가 좀 낯설다고 여길 수도 있을법한 그런 묘한 장소에서 그들은 대화하고 있었다. 회색의 타일로 둥그렇게 구성된 상당히 넓은 바닥, 그리고 그 경계면에서는 횃불 108개가 불타고 있었다. 그런 바닥의 색감은 우울한 회색빛 파스텔톤으로 채색된 하늘과 매치되어 썩 잘 어울리는 듯 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들기에는 주위의 분위기가 지나치게 무거웠다. 회색 망토로 온 몸을 감싸고 후드를 쓴 남자가 검은 로브의 남자에게 다시금 물었다.
「…다른 선택은 없는 겁니까.」
「없네.」
검은 로브의 남자는 그것 외에는 아무런 길도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회색 망토의 남자는 격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 길은 결국 파멸의 길로 이어질 뿐입니다! 어떻게 시네르님은 그런 '그분' 을 말리지 않으시지 않을 수 있으셨습니까! 그런 어처구니 없는 방법, 아무리 에테르 차원이…….」
그러나 남자의 말은 거기서 끊기고 말았다. 검은 로브의 남자가 소리쳤다.
「그분의 선택은 옳을 것이네! 그 옛날 하르마게돈 때도, 그리고 지금의 라그나뢰크에도 그분의 선택은 결국 항상 옳았네. 난 확신하네. 자네, 루디에르. 그분의 선택이 틀린 것을 본 적이 있던가? 결국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지금까지 존재해오지 않았었나?」
「바로 지금입니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아실텐데요. 저의 절대지각을 말입니다.」
시네르는 침묵했다. 확실히 그로서도 이것만은 무시할 수 없었다. 데 루디에르(de Rudiere). 세인트(Saint)와 다크니스(Darkness). 극단에 선 두 디바인 파워(Divine power). 그리고 로에(신)들은 이 디바인 파워 중 어떤 것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두 파로 나뉜다. 그것이 자의이든 타의이든. 뭐, 타의로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죽거나 추방당할 뿐이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도 계층이 있듯, 신들 중에서도 그 두 디바인 파워의 근원지인 두 신을 일컬어 절대신이라 한다… 가 하계의 인간들이 알고 있는 로에에 대한 단편적 지식 중 하나였다.
그러나 실은 로에들은 자신의 정신적 단계를 고양시킨 사이킥 파워(Psychic power)에 가까운 마나(Mana)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히 마나라고 얘기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 이유는 꽤 복잡하다. 간단히 말하자면 세인트와 다크니스, 그 둘 중 로에 자신이 속한 쪽에 따라 그 자신의 마나도 세인트나 다크니스의 성향을 띄기 때문이다. 어쨌든 데 루디에르에 대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그는 로에 중에서도 굉장히 특별한 존재에 속한다. 일단은 하나 이상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데 루디에르. 모든 것을 아는 자, 방랑하는 자, 현자라는 뜻을 지닌 칭호. 이것은 그가 지닌 그만의 고유한 능력, 바로 절대지각으로 인한 칭호였다.
절대지각 - 말 그대로 초지각(超知覺)을 뜻하는 것이었다. 보통의 지각능력을 훨씬 상회하는, 그것의 몇 배 또는 수십배의 지각능력이 바로 절대지각이라 불리는 데 루디에르의 고유한 능력이었다. 심지어는 가까운 앞일까지도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한……. 그리고 그는 그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해 로에로서의 상당한 위치에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절대지각은 시네르가 속한 다크니스의 절대신 - 루겐과 루디에르가 속한 세인트의 절대신 하르칸도 인정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한 시네르가 꺼림칙해하는 것도 이것이었다. 시네르는 한참 동안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말했다.
「…좋네. 그렇다면 자네가 원하는 것, 자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자네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보게.」
루디에르는 단숨에 말했다. 망설일 것이 없었다. 생각하고 있던 것, 확신하고 있던 것을 말하는 것인데 무얼 망설이겠는가?
이드그라실력 서기 996년 - 라드리페아력 440년.
그 옛날, 로에들이 존재했던 시대는 미드가르드력으로 계산한다. 특히 대다수의 로에들이 살아있었던 시대는 미드가르드력 기원년. 그러나 미드가르드력이 서기 1년으로 넘어오면서 로에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학계는 고대의 기록이나 여타 다른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것을 라그나뢰크의 영향으로 규정지었다. 다른 이름으로 '신들의 황혼' 이라고도 불리는 라그나뢰크는 그 옛날, 정말 아득한 옛날인 하르마게돈 때 자그마치 70%가 죽어버렸던 로에들을 완전히 전멸에 가깝다시피 몰아갔다. 이것이 사건인지 한 시기를 나타내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르마게돈 이전엔 로에들의 수가 약 1천을 헤아릴 정도였고, 세인트와 다크니스의 일종의 로에의 하급 계층에 속하는 천사와 악마들은 지금은 상상할수조차 없는 숫자지만 합쳐 3만 가량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르마게돈 이후 천사와 악마들은 역시 합쳐 약 2천밖에 남지 않았고, 생존한 로에들은 약 3백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역시 하나의 사건을 뜻하는지 하나의 시기를 뜻하는지 그 의미가 애매모호한, 그리고 일어난 이유 또한 애매모호한 라그나뢰크를 거치며 현재 로에들은 극소수밖에 남지 않게 되었고 - 10명 이하일 것으로 추정 - 천사나 악마 또한 50개체 이하일 것으로 추정된다. 미드가르드력 서기 1년부터는 이전에는 라그나뢰크를 전후해 생겨났지만 로에들에 밀려 하급종족으로나 여겨지던 인간들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때는 아직 로에들의 영향이 끼쳤지만, 미드가르드력 서기 50년 후로는 그것마저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아직 초기 수준에 머물러 있던 문명의 발달, 그리고 오랜 시간 후 전국시대가 열리고 그 혼란스러운 상태는 이드그라실력 시대가 열리고 나서까지 상당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약 4백 50년 전, 라드리페아의 초대 황제 데카르드 대제와 대륙을 놓고 경합하던 헤르티아 왕국의 성왕- 헬리오스가 암살당하며 그로부터 10년 후, 저 대륙 끝의 반도국가, 고려를 제외한 대륙에 남은 모든 군소국가들을 정복한 데카르드 대제가 그때만 해도 왕국이었던 라드리페아를 통합해 라드리페아 제국으로 선포하며 라드리페아력 시대가 열리고,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그로부터 440년이 지난 시기이다.
- 칼 레흐츠, [르네상스] 中 발췌.
휘이잉.
차가운 겨울 바람은 극도로 싸늘해진 내 몸을 한차례 훑고 지나갔고, 난 다시금 몸을 떨어야 했다. 흔히 볼 수 있는 고아들의 경우처럼 옷을 계절에 맞지 않게 여름 하복만 입거나 아니면 아예 입지 않거나 그런것도 아니었다. 분명 옷을 얇긴 하지만 그래도 제대로 갖춰 입긴 했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 아무 갈 곳이 없다는 그러한 상황은 날 육체적인 추위만이 아닌 정신적인 빈곤함, 싸늘함마저 느끼게 하고 있었다.
주위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폐허도 있는건 있는거니까 정정해야할지도. 고려의 저 남쪽의 광주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다. 물론 개경만큼은 아니지만 광주 역시 상당히 큰 도시였다. 그런데 그 도시가 완전한 폐허가 되어 있다는 건 국가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 사건' 이 일어난지 며칠이 지나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그러나 이상했을 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사건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뭐냐고 내게 묻지 말라. 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일이니까. 글쎄… 단지 기억이 나는 건 찬란한 광염(光炎)이 일어나며 단번에 이 주위가 광채로 뒤덮이며 그 뒤는 마치 도시 전체가 연소된 것처럼 생겨난 폐허가 있었다는 것 뿐…….
즉, 목격자는 나 이외에는 전무하단 얘긴데, 그나마 나조차도 제대로 목격하지 못한 일이니 민간 차원에서는 할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국가적 차원에서는 할 수 있느냐고? 글쎄……. 힘들 것 같다. 기껏해야 약간의 의연금 지급 뿐인데, 도시에 있던 사람들이 몽땅 죽어버렸으니 그것도 불필요하고, 그렇다고 이런 도시에 누가 와서 살려 할 리도 없겠고…(보나마나 마귀의 도시니 귀신들린 땅이니 하며 멀리하겠지. 한동안은 아무도 안올 것 같다……) 잠깐, 그렇다며 나는?
순간 난 오한과도 같은 한기를 느꼈다. 물론 갑자기 추위가 사라졌다가 다시 휭 몰아닥친건 아니고, 그 추위 그대로인 상태에서 다시금 한기를 느꼈다는 것이다.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런 인기척도, 심지어는 아무런 동물도 존재치 않았다. 이런 곳에서 있기 마련인 쥐들의 움직임도, 뱀도……(아 참. 겨울잠자러 갔겠구나. 근데 얘네들은 무사할까?). 아무것도, 그야말로 주위는 고요 그 자체였다.
바스락.
반사적으로 난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홱 돌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다. 그러나 내 귀에는 들렸다. 참 이상했다. 내겐 어떤 신비한, 그러한 것이 있는 것일까? 허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어떤 것이라도 좋았다. 지금 이 장소에 있는 존재는 극도로 추위에 떨고 있는 나 혼자뿐이란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고, 난 내 자신에 실소하며 웃었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그때였다.
"뭘 그렇게 웃냐."
"……!"
사람?
난 당장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정말이었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남루한 옷이지만, 그러나 검푸른 색과 회색, 그리고 검은 색이 조화된 비교적 짜임새있게 잘 된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이윽고 그는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정말로 야인(野人)이었다. 손질하지 않은 장발도 그런 느낌을 주었지만 진짜 그러한 생각을 하게 만든 계기는 다듬어지지 않은 형용할 수 없는 존재감으로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그 자신, 그 자신이었다. 위압감을 주는 그러한 어떤 존재감, 이것을 기(氣)라 하던가? 그는 내게 말했다.
"날 보고 무엇을 느꼈나?"
…뭐지.
난 잠시 그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까닭을 생각해 보았지만, 그냥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다듬어지지 않은 존재감으로 주위를 가득 채우며 압박하듯이, 그러한 마치 야인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어찌 보면 말문이 막힌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또 다르게 보면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그런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는 박장대소했다.
"하, 하하하핫!!!"
"왜… 웃으십니까?"
그는 터져나올 수 없는 웃음을 멈출 수 없다는 듯 한참이나 계속 웃었다. 난 어리둥절하여 그의 그러한 모습을 계속 주시하고만 있었다. 그 뒤에도 한참동안 웃음을 멈추지 않던 그는 날 보며 말했다.
"좋은 감각을 가지고 있구나. 그래, 이 정도면 충분히 검을 익힐만 하다. 네 이름은 뭐냐?"
내 이름?
"현… 류현(柳炫)입니다."
"류현, 그래. 좋은 이름이구나. 어디 딱히 갈 곳이 있는게냐?"
"…그렇다면 좋겠지만."
"흐음, 그렇단 말이지?"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뭔가, 뭔가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의 예민한, 날카로운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에게는 어떤 알 수 없는 고뇌가 느껴진다고. 그러던 와중 돌연 그런 정적상태를 깨고 그가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좋아! 그럼 나와 함께 가자. 난 기파랑(箕破浪)이라고 한다. 앞으로 네게 해동검도(海東劍道)를 가르치게 될 사부이지. 난 원래 웬만해선 제자를 잘 받지 않는다. 허나 네 그 극한의 감각은 바로 정신의 완성. 신검일체를 넘어선 심검일체를 목표로 하는 해동검도에 바로 필요한 것이란 생각이 들어 내린 결정이다. 그럼, 잘 해 보자꾸나!"
"네? 아… 네."
"자, 그럼 출발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현아."
"……."
"…현아."
"……."
"녀석아!"
이런 제기랄! 난 바로 내 앞에 사신과도 같은 모습으로 서 나를 표독스럽게 노려보는 사부의 모습에 전율해야 했다. 하루 6시간. 곧 하루의 1쿼터를 차지하는 해동검도. 그 시간에 존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짓이나 다름없는 것. 그런데 바로 그! 그것도 단 15분을 남겨놓은 시점에서 멍청하게 졸아버리다니! 난 내 실수에 멍해진 나머지 헤 하고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사부는 그것을 내가 아직도 반쯤 정신이 헤롱헤롱한 상태라는 증거로 판단한듯 했다. 그리고 사부는 황송하게도 목검을 치켜듬으로써 내 추측을 확신으로 바꿔주시는 일을 하셨다. …따닥!
"경쾌한 소리군요."
"그래, 이제 좀 정신이 말짱해진것 같냐?"
"정신은 돌아온것 같은데 육체가 말을 듣지 않는군요."
"허, 그것 참 심각한 문제군. 하지만 내가 해결책을 알고 있는데, 가르쳐 주리?"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요."
따다다다닥!! …오, 젠장. 4년동안 이젠 너무 들어서 질려버릴 정도다. 대체 이게 뭐냐고요!! '지금 난 굉장히 화가 난 상태며, 필요하다면 당신에게 따질 수도 있다' 라는 의미를 가득 담은 얼굴로 난 사부를 응시하며 시선을 굳히려 노력했지만, 아쉽게도 사부에게는 그런 게 통하지 않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 내 결정적인 실수였다. 사부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 특유의 기분나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호오, 지금 지은 그 건방진 표정은 뭐냐? 감히 이 사부에게 도전이라도 해보겠다는 것이더냐? 류현!"
"…왜요?"
난 내 이름을 부르는 사부에게 그렇게 퉁명스레 대답했고, 사부는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내게 다가와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 - 는척을 하며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은근하게 말을 꺼냈다.
"현이 넌 말이야. 최고의 검사, 이 해동검을 완성할 수 있는 소질이 있어. 너의 그 예민한 감각능력은 이 해동검도가 지향하는 정신의 완성에 딱 맞는단 말이야. 그런데……."
따닥!
"문제는 게으르단 말이다. 그래! 모든 것의 문제는 바로 게으름이지! 반대로 얘기해보면 바로 이 성실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란 말이지! 근데 현이 네녀석은 왜 바로 성공의 문으로 나갈 수 있는 열쇠를 집지 않고 헤메고 있는거냐!"
호오.
"사람이 일부러 헤메는거 봤습니까 사부? 몰라서 헤매죠!"
"이 녀석이 어디서 말대꾸를 꼬박꼬박 해!!"
"자, 잠깐만요!"
막 목검을 대각선 방향으로 치켜들던 사부는 내 다급한 손짓에 목검을 쥐고 있던 손을 멈췄고, 그 사이 난 잠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 원체 무슨 할 말이 있는것도 아니었으니까 - …….
"……."
…사부는 다시 목검을 스윽 치켜들었다. 그리고 바로 정면으로 내려쳐지는 목검! 우아악!! 사람 살려!! 난 순간 사부의 목검에 맞아 헤롱거리며 바닥에 풀썩 쓰러지는 내 모습이 떠올랐고, 그 순간 엉겁결에 입에서 말이 제멋대로 튀어나와버렸다.
"대, 대련으로 해요!"
사부의 목검이 바로 내 이마 앞에서 딱 멈췄다.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난 잠시 안도했지만, 순간 내가 내뱉은 말이 어떤 것인지 깨닫곤 경악했다. 아아아아악!! 안돼에에에!!
그것은 내 결정적인 실수였다. 사부에게서 해동검도를 배워온지 장장 4년. 처음 쌍수검법 13번을 마스터한 직후 난 사부와 대련을 하게 되었고, 결과는 4합만에 나가떨어짐. 처음 대각선으로 내려쳐지는 사부의 검을 점프동작으로 막고 원래 반바퀴 도는 점프를 한바퀴 빠르게 돌아 곧바로 역으로 검을 왼쪽 대각선에서 빠르게 아래로 그은것까진 좋았는데, 그때 사부가 발을 길게 뻗어 공중에서 다리를 걷어차버리고 자세가 흐트러진틈을 타 횡단일검으로 가볍게 마무리해 그대로 어이없이 끝나버렸던 것이었다.
그리고 심상검법 4번까지 마스터한 뒤에도 결과는 뭐 별볼일없었고, 예도검법 9번 마스터 후에도 결과는 조금 나아졌을 뿐 비슷했다. 본국검법 마스터후에는 상당한 진전이 있었지만 역시 결과는 패. 그러나 쌍검을 마스터한 후에는 비교적 붙어볼만 했지만, 그때 난 지금까지 사부가 날 상당히 봐주며 대련에 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양손을 모두 사용해 전력을 다해 공격에 나섰지만 사부는 순식간에 폭풍같이 몰아치며 외수로 쌍검을 든 날 단숨에 제압해버렸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천강을 마스터했다.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 천강이야말로 해동검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검법이었다. 이것을 마스터하는데만 거의 일년이 걸렸다. 쌍수검법을 마스터하는데 채 반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해봤을 때, 하루수련시간 6시간이란 사실을 고려해봤을 때 - 비록 엄청난 완성도를 사부가 요구하느라 수련의 진전이 늦긴 했지만 - 그야말로 굉장한 것이었다.
천강을 수련할 때 난 놀라운 경험을 했다. 잠시였지만 검에 푸른 기운이 맺힌 것이었다. 사부는 그것을 검기(劍氣)라고 했다. 천강에 이은 참선을 완전히 마스터하게 되면 이 검기를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있게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그런 날은 내게 까마득할 뿐이었다. 그리고 검기는 그날 이후로 내 검에 더이상 맺히지 않았다.
에엣, 내가 지금 왜 이런 생각을! 이제 닥쳐올 무시무시한 세기의 대결에 집중해야 하는데! 난 내 볼을 툭툭 쳤고, 허리에 매여진 가검의 검자루를 꽉 잡았다. 그때의 폐허 속에서 사부를 처음 만났을 때가 14살.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은 18살.
사부가 나왔다.
사부는 목검을 쥔 채 날 바라보았다. "그래, 준비는 다 됐냐?" 난 씨익 웃었다.
"물론이죠."
"좋아, 류현. 오늘이 바로 나와 너의 6번째 타이틀매치가 되는구나. 그동안의 전적은 5전 전패였지? 어디, 오늘은 얼마나 되는지 보자꾸나!"
"제가 이길 겁니다!"
"좋아, 좋은 패기다 류현! 자, 그럼 시작해볼까?"
"하앗!"
난 기합을 내지르며 발도(發刀)후 사부에게 내달리며 횡단일검했다. 그러나 사부는 위로 펄쩍 뛰어오르며 바로 내게 검을 내리찍었다. 훗!
"광자베기를 생각하셔야죠 사부!"
광자베기에서는 횡단일검 후 검을 오른쪽 대각선으로 올리게 되어 있다. 그러나 난 거꾸로 검을 오른쪽 밑 대각선으로 내린 후 단번에 왼쪽 어깨쪽으로 올려그었다. 대상은 사부의 다리!
"소리칠 여유도 있는걸 보니 제법 는 것 같구나!"
파밧!
사부의 검과 내 검이 강하게 충돌했다. 서로의 검은 튕기며 나와 사부는 뒤로 한걸음 물러났고, 곧 견적을 취하며 스텝을 밟으며 서로의 궤적을 따라 빙빙 돌기 시작했다. 눈치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사부는 그럴 것이다. 그 말을 증명이나 하듯, 딴생각을 하고 있는 내게 사부는 바로 외수자세를 취하며 왼쪽에서 정면으로 검을 흩뿌리듯 휘둘렀다. 으악!
카강! 경쾌한 소리와 함께 사부는 검을 거두며 다시금 물러났다. 난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솔직히 그건 내 엄청난 반사신경으로 인해 막은 것이었다. 난 그 사실을 자각하며 자신감을 가지려고 애쓰며 동시에 선공을 취했다.
"하아앗!!!"
오른발 스텝을 밟으며 왼쪽 다리에서 오른쪽 어깨로 올려긋기! 다시금 스텝을 밟으며 한바퀴 빙글 돌며 횡단일검 후 바로 검을 등에 붙이고 정면베기! 왼발 앞으로 하며 외수로 잡고 오른손에 들린 검으로 찌르기 후 검끝을 역으로 아래로 향하게 하여 강하게 오른쪽 밑에서 왼쪽 어깨로 흩뿌리듯 그은 후 그 상태에서 검을 마치 조천세처럼 위로 향하게 하여 왼손으로 잡아 오른손을 다시 고쳐 쥔 다음 대각선 내려베기 후 올린 다음 다시 대각선 내려베기, 그리고 정면베기! 본국과 천강의 한 과정이었다. 사부는 그 동안 수세로 전환한 채 어떤 카운터도 먹이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사부라도 이 상황에서는 그러지 못한다. 그리고 정면베기 후, 난 점프동작을 취했다. 그런데…….
"푸읍!!"
"헛점이 많다 아직! 쌍수검법때 걸린 걸 지금도 걸리다니, 수련이 부족하구나 현아!"
제, 젠장……! 제대로 걸려버렸다. 쌍수검법 13번 마스터 후 사부와 대련할때 끝내기로 맞았던 그 공격! 한바퀴 도는 빠른 점프시 다리를 얻어맞아 자세가 흐트러지고 횡단일검으로 강하게 옆구리를 강타당하는 그 기술! 간단하지만 잘못하면 치명타가 될 수 있는 그런 기술이었다. 다행히 내가 순간적으로 검을 빠르게 그어 막을 순 있었지만, 검등에 강타당한 옆구리가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리고 간신히 견적자세를 잡긴 했지만, 거의 일어서지 못할 정도의 강한 통증이었다. 사부는 혀를 차며 말했다.
"자, 마지막 공격이 될 터이니 잘 받아보거라!"
그, 그렇게는 못해…….
"……!"
순간 난 사부가 할 공격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외수로 검을 잡고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어깨의 대각선으로 올려베고 단숨에 점프동작으로 빙글 한바퀴 돌아 검을 다시 양손으로 잡고 강한 정면베기! 확실히 피니쉬가 될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었다. 이 공격을 제대로 지금 상태에서 맞는다면 난 며칠동안은 일어서지도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내 놀랍도록 예민한 감각이 그것을 정확히 마치 그리는 듯이 알려주고 있었다. 난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틀었다.
"……!"
왼쪽 아래에서 올려벤 검이 사부의 검과 충돌했다. 다만 난 검날이었고 사부는 검면이었다. 그러기에 당연히 사부의 검이 주춤, 밀렸고 난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점프동작으로 사부보다 반박자 빠르게 전환, 한바퀴 빙글 몸을 공중에서 틀어 역시 점프동작으로 막 전환해 몸을 트는 사부의 등을 혼신의 힘을 다한 강렬한 왼쪽 대각선 내려치기 공격으로 어깨에서부터 내려그어 가격!! 천강의 마지막 동작이었다. 사부는 뼈를 정통으로 얻어맞았는지 어깨를 쥐고 풀썩, 주저앉았다. 나 역시 전신의 힘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부는 날 보며 힘없이 웃었다.
"축하한다 현아. 이젠 가라."
"네?"
"너에게도 목표가 있을 것 아니냐. 날 꺾었으니 이젠 나가도 좋다. 그만하면 이제 웬만한 놈들쯤은 네 상대가 되지 못할 거다. 참선검법은 네 스스로 익혀나가도록 해라. 너라면 할 수 있다. 방금 내 공격을 예측한 그 초감각이 널 도울게다. 네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빠르게 검을 마스터한것도 그 때문이다."
"사, 사부……."
난 말을 잇지 못했다. 사부는 편안하게 웃었다. 마치 할 일을 다 한 자의 홀가분한 그러한 표정 같은……. 난 사부의 그 표정을 영원히 잊지 못했다.
- 일단은 목표를 세우고 행동하거라. 무엇이든 좋다. 다만 세운 목표는 반드시 이루도록 해야 한다. 너의 목표는 무엇이냐?
르네상스, 조금은 길게 끌어야겠죠. 안타리아까지만 끌어도 좋으련만, 헤; 리미트 설정과 조금 연관이 있습니다.
=리카르트=
p.s : 이곳에 나오는 해동검도 설정은 약간의 지식과 홈페이지에 명시되어 있는 검법명을 참고로 한 것으로, 실제의 해동검도와는 거의 연관이 없습니다 -_-; 외수는 없어진 검법으로 알고 있는데 나오더군요; 음음, 장백검법도 없고요. 쌍검과 천강, 참선은 존재여부를 모르지만; 어쨌든 있는것으로 알고 쓰겠습니다. 검법도 쌍수검법 약간을 제외하고는 연관성이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창작이에요 창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