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추골 여름 야생화
장마가 물러가고 더위가 절정인 팔월 첫 주말을 앞둔 금요일이다. 한낮은 야외 활동이 어려워 한밤중 몸을 일으켰다. 새벽이 오도록 두세 시간 책을 펼쳐 읽고 이른 아침밥을 해결하고 네 시 현관을 나섰다. 집에서부터 걸어 다녀올 수 있는 최대치 산책 동선이 용추계곡 정도다. 아파트 뜰로 내려서니 외등이 새벽을 기다리고 가로등이 불을 밝혀 지키는 거리엔 오가는 차량이 없었다.
퇴촌삼거리로 나가니 자투리공원 운동기구에는 주택지에서 나온 노부부가 어깨 근육 펴기를 하고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 천변을 따라 창원천 상류에 해당하는 창원대 앞으로 나가 도청 뒤를 돌아갔다. 창원대 동문 역세권에서 창원중앙역 앞으로 올라가니 철길과 역사는 불빛이 훤했고 마산역에서 출발해 서울로 가는 KTX 첫차 승차 시각이 다가와 승객들이 종종걸음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역사로 갈 일이 없고 비음산 터널을 앞둔 철길 굴다리를 지나 용추계곡 들머리로 향했다. 농원이 위치한 어두컴컴한 길을 따라 등산 안내소를 지나 용추계곡으로 들어섰다. 그즈음 날이 희뿌옇게 밝아오는지라 잠에서 금방 깬 새들이 조잘거렸다. 아카시나무에 붙은 매미와 길섶의 풀벌레들도 울어대 산새들의 소리와 함께 날이 밝아오는 계곡의 아침은 귓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용추고개로 오르는 갈림길의 계곡 들머리엔 바위틈을 비집고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용추정을 지나 용추1교부터 차례로 놓인 교량을 건너 출렁다리에 이르도록 어둠이 걷혀가는 계곡의 야생화들을 살폈다. 간밤은 바람이 없어 고요했고 대기 중 습도가 높았던 관계로 풀잎이 흥건할 정도로 이슬이 흠뻑 내려 있었다. 맥문동 군락지는 이맘때가 절정인 연보라 꽃이 무더기로 피었다.
창원대학 뒤에서 오는 숲속 나들이길이 합류한 용추5교를 지나 우곡사 갈림길 계곡에 이르러 나 혼자 알고 있는 응달 돌너덜의 흰불봉선 자생지를 둘러봤다. 수년 전 태풍으로 계곡 하부가 유실되어 기존 등산로를 폐쇄하고 우회 등산로를 개설했는데 용추계곡에서 한 곳뿐인 흰물봉선이 자라는 곳으로 잎줄기가 온전하게 크고 있었다. 한 달쯤 지나면 하얀 꽃을 송이송이 피우지 싶다.
우곡사 갈림길에서 포곡정을 향해 오르니 너럭바위 쉼터 부근부터 꿩의다리가 피운 엷은 보라색 꽃이 보이길 시작했다. 꿩의다리는 줄기가 꿩 다리처럼 비쩍 말라 길쭉한데 한여름에 꽃을 피우는 야생화였다. 물가 습지를 좋아하는 노루오줌도 엷은 분홍색 꽃을 피웠다. 노루오줌은 지난 유월부터 피기 시작해 이미 시든 꽃대가 있고 뒤늦게 이제 새로 꽃을 피우는 녀석도 섞여 있었다.
용추10교를 지나면서 아직 철이 이르긴 해도 물봉선이 유일하게 한 송이 선홍색 꽃을 피워 눈길을 끌었다. 용추계곡엔 늦여름부터 가으내 물봉선이 꽃을 피운다. 예전에는 군락을 이루었으나 사람들의 발길에 점차 밀려나 근래는 개체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물봉선을 좋아함은 응달 물가에 자라는 꽃이라서다. 사람으로 치면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곳이지 않은가.
공룡 발자국 화석이 있는 너럭바위 근처에 이르자 넝쿨로 뻗어 자란 사위질빵이 눈 결정체 같은 하얀 꽃을 달고 있었다. 그 곁의 지상에는 원추리 잎줄기가 드러누운 채 꽃봉오리를 맺어 주황색 꽃을 피우려 했다. 이슥한 계곡이라 그렇지 도심 주택가 정원이나 낮은 구릉의 원추리는 한여름이면 이미 꽃이 저물었을 때다. 이제 용추계곡에서 한여름에 볼 수 있는 마지막 꽃이 기다렸다.
진례산성 성내 포곡정 부근 바위 더미 아래로 가서 눈여겨 살펴볼 꽃이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의 상사화였다. 봄날에 시퍼렇던 잎맥이 시들고 한여름 잎줄기 없이 꽃대만 밀어 올려 분홍색 꽃이 피는 상사화였다. 이제 막 꽃대에서 피는 상사화는 주황색에 가까웠는데 꽃잎을 활짝 펼치면 분홍색으로 바뀌었다. 군락을 이룬 상사화는 여기저기서 꽃대가 솟으면서 꽃망울을 달고 나왔다. 22.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