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군이 되어 대구부터 장진호까지 싸운 한국 경찰
9월 8일, 대한민국 정부와 국군 지휘부는 모두 부산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내무부 장관은 경찰이 대구를 버릴 순 없다며 경찰 인력을 대구로 집결시켰다.
한편, 한국 경찰 전원은 UN군에 배속되어 UN군의 눈과 귀가 되었다.
한국 경찰은 북한군이 변장하고 UN군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고 지리에 어두운 UN군을 도왔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대한민국 국군이 낙동강 동부전선인 다부동으로 이동하자,
서부전선의 함안지구를 지키기 위해 전남, 전북, 경남에서 살아남은 경찰관들로 구성된 경찰부대 전원이 미군과 함께 북한군 4개 사단에 맞서 함안지구를 지켰다.
UN군에 배속된 경찰 중에 지금의 경찰 특공대 같은 부대가 따로 편성됐다. 그들은 '경찰 화랑부대'로 불렸다.
화랑부대는 미 해병대가 받는 군사 훈련을 받았다.
경찰 화랑부대는 미군 소속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
화랑 부대 등의 경찰관들은 서울 탈환과 원산 상륙작전에 참전하였으며, 경기도 안양, 수원 비행장 탈환 작전에 투입됐다. 그리고 UN군과 함께 압록강 부근까지 북진했다.
북진하는 미 해병대 1사단 소속의 한국 경찰관들은 중공군을 장진호에서 만났다.
미 해병 1사단의 2개 연대는 장진호 서쪽의 유담리로 진출했다.
1950년 11월 27일, 산비탈 중턱에 진지를 구축한 미 해병 1사단 5연대 3대대의 대대장 로버트 태블릿 중령은 '경찰 화랑부대'가 운용하는 기관총 진지를 최전방에 전진 배치했다
미 해병1사단 5,7연대(한국 경찰 포함)는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을 막아내며 장진호 전투의 분수령이 된 유담리 전투에서 중공군을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유담리의 미 해병 1사단 5연대 3대대장이었던 로버트 태블릿 중령은 한국 경찰의 영웅적인 희생 덕분에 지휘본부로 진격하던 중공군을 확실히 저지하였다고 평가했다.
11월 27일~12월 11일, 2주간 혹한 속에서 미 해병대와 함께 싸우며 살아 남은 한국 경찰관들은 중공군의 파죽지세를 뚫고 무사히 흥남에 도착했다.
위 사진은 미 육군 7사단 소속으로 활약한 ' 경찰 화랑부대'의 대대장, 박정준 총경의 철모다. 그의 철모 옆은 총탄이 뚫고 지나간 흔적이 있다.
박정준 대대장이 지휘한 경찰 화랑부대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편성된 부대였다. 인천상륙 후, 서울 탈환작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한국의 '경찰 화랑부대'는 중국 국경과 맞닿는 혜산진까지 북진했다.
장진호 전투의 통역장교였던 이종연 변호사는 이런 말을 남겼다.
"경찰은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부모형제들이 인민군한테 총살당했어도 정신력으로 싸운 경찰이었다. 한국 경찰은 진짜로 멋있게 싸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