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인산가에서
열대야가 지속되는 팔월 첫째 주말이다. 간밤은 연례행사로 갖는 대학 동기의 모임으로 함양 인산가에 머물렀다. 인산가는 광복 전 함경도 출신 김일훈이 서부 경남에 정착해 죽염을 굽고 독특하게 개척한 비방으로 현대 의학 바깥에서 화타나 허준에 비길만한 인물이다. 그는 함경도 홍원 태생으로 광복 후 혼란기 남녘으로 내려와 제도권 의학계가 아니면서 의성으로 알려진 분이다.
인산 김일훈의 부친은 조선 후기 강원도 통천 군수를 지낸 이였다. 통천은 현대가 창업주 정주영의 고향으로 그분은 해방 직후 공산주의 치하가 마음에 들지 않아 가출하다시피 소를 몰아 남녘으로 내려와 세계적 기업 ‘혼다이’를 이루어 3세대까지 이른다. 그와 버금해 북쪽에서 내려온 유명한 분이 전통 비법으로 자녀와 손자 세대까지 가업을 잇는 이가 인산가를 창업한 김일훈이다.
무릇 한약재는 구증구포한다고 알려져 있다. 아홉 번 구워 아홉 번 말려낸 건재가 비로소 약성을 발휘한다는 뜻이렷다. 이는 단순한 천일염을 대나무 마디 통속에 집어넣어 가마에 쌓아 장작불로 아홉 번을 구워 정제해 낸 죽염이다. 죽염은 단순한 식재료가 아닌 불치의 병을 낫게 하는 신비의 영약으로도 통한다. 함양 삼봉산 기슭의 인산가는 김일훈이 사후에 묻힌 곳이기도 했다.
대학 동기들은 40여 년 여름과 겨울 두 차례 모임을 가져왔지만 코로나 덮쳐와 3년 만에 얼굴을 만났다. 친구들은 울산에 셋, 함양과 대구와 통영에 하나, 그리고 창원에서 둘을 합쳐 여덟 가족이다. 우리는 대학 졸업과 동시 총각 시절부터 방학이면 친구의 고향 집을 차례로 순례한 이후 매년 두 차례 모임을 가져왔는데 지금은 체벌 용어가 어색하지만 ‘회초리’라 이름을 붙였다.
결혼 이후 부부가 함께 만나왔고 불어난 식구인 자녀들도 동행해 함께 야영하거나 콘도에 지내기도 했다. 이제 성년이 된 자녀들은 자립해 떨어졌고 부부만 단출하게 만나는데 근래 나는 혼자 길을 나서 면목이 없다. 울산의 한 친구도 이번에 아내 간병차 요양병원에 머물러 내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우리 지역이 아닌 수도권이라 문병이나 위로를 나눌 처지가 못 되어 유감이었다.
우리는 삼봉산 자락 인산가에서 반갑게 만나 그간 밀린 안부를 나누고 문화관에 여장을 풀어 놓고 읍내 식당으로 가 저녁 식사 자리를 가졌다. 여덟 명 회원 부부 가운데 한 가족이 빠졌고 혼자 온 이가 내 말고 통영의 친구였다. 통영 친구 아내는 사업차 서울 일정이 잡혀 불가피한 사정이었다. 오리고기를 구워 운전자가 아닌 이는 나와 같이 맑은 술을 부담 없이 여러 잔 비웠다.
저녁 식후 인산가 숙소로 돌아와 연장전이 펼쳐졌다, 윤번제로 총무를 맡은 통영 친구는 전어회를 마련해 아이스박스에 술과 같이 채워왔더랬다. 다인실 숙소에서 식탁이 없어도 빙글 둘러앉아 제철 생선회가 넉넉히 마련되어 식도락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시간이 이슥해지자 부녀들은 각자 숙소로 가고 나도 무너져 잠들었지만 새벽엔 먼저 일어나 숙소 뒤 인산동천을 산책했다.
호텔에서 차려진 조식으로 간밤 숙취의 속을 풀고 느긋한 시간을 보내면서 매장의 인산가 죽염을 샀다. 숙소에서 함양 읍내 상림으로 차를 몰아가니 뙤약볕에도 불구하고 우리 일행 말고도 숲을 찾아온 이들을 여럿 만났다. 상림에는 최근 최치원을 기리는 역사관이 들어서고 지역 특산물인 산양삼 매장도 보였다. 우거진 숲길을 걸으니 연꽃을 비롯한 여러 기화요초도 눈길을 끌었다.
회원들은 점심 자리를 갖기 위해 사전 예약된 수동 천변의 어탕 맛집으로 이동했다. 식당으로 드니 구미가 당겨지는 참게메기매운탕이 차려져 있어 운전대를 잡지 않는 나는 맑은 술을 잔에 채워 반주까지 들었다. 점심 식사와 함께 못다 나눈 정담이 오가고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집으로 흩어지며 작별 인사가 오갔다. 나는 창원에서 함께 간 친구 차에 동승해 고속도로를 달려왔다. 22.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