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암은 고성군 상리면 무선리 무이산에 있는 암자.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쌍계사의 말사
신라 성덕왕 5년(서기 706년) 의상조사가 창건했다. 창건 이후 이 암자는 수도 도량으로서 많은 고승들을 배출, 산세가 수려하여 삼국시대부터 해동 명승지로 유명하였으며 특히 화랑도 전성시대에 국선 화랑들이 이 산에서 심신을 연마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중창 및 중건의 역사는 전래되지 않는다.
현존하는 암자는 사라호 태풍때 건물이 붕괴된 뒤에 지은 현대식 건물이고, 일반 신도들의 성금으로 1973년에 이 절에서 수도한 이청담(李靑潭)의 사리를 봉안하여 세운 청담 대종사 사리탑이 있다. 석벽에는 문수(文殊), 보현(普賢) 두 보살상이 나타나 있으므로 문수단(文殊壇)이라 이름지었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은 석각이고,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은 두자 일곱치 크기의 목각으로 되어 있다. 기암절벽이 암자 뒷편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산정에 오르면 남해안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크고 작은 많은 섬들의 절경을 볼 수 있는 신라의 고찰이다. 인근에 수태산 보현사가 자리잡고 있고 문수암 입구까지 도로가 포장되어 승용차로 문수암 아래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10분 쯤 가면 된다.
성철은 출가 후 해인사에 귀향, 백련암을 수행처로 삼았을 때까지 40년 동안 전국을 떠돌며 운수납자 생활을 하였다. 그 기간 동안 가장 오래 머문 곳은 파계사 성전암으로, 1955년부터 1964년까지 <10년 동구불출>하였던 곳이다. 그 다음은 1951년부터 5년간 머물었던 통영의 안정사와 주변의 암자들이었다.
성철의 수행처중 한곳으로 고성군 향로봉(香爐峯)중턱의 운흥사(雲興寺)와 연화산 기슭에 있는 옥천사, 그리고 사천의 다솔사도 함께 찾아보았다.
1950년 청담· 법전 등이 봉암사를 나오면서 봉암사결사가 무산된 후 이들과 함께 성철이 하안거와 동안거를 난 곳이 바로 고성 문수암이다. 안정사가 있는 벽발산은 이곳에서 쉽게 볼 수가 있다.
경남 고성군 상리면 무선리에 있는 무이산(武夷山·548.5m)은 통영 미륵산, 남해금산과 더불어 남해안 3대 절경중 하나이다. 이 산의 정상 가까이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곳에 문수암이 있다.
문수암의 앞마당에는 한려수도의 수많은 섬들이 마치 비단을 수놓은 듯 펼쳐지고 있다. 이 섬들의 이름 - 사량도(蛇梁島)· 연화도(蓮花島)· 욕지도(欲知島)· 세존도(世尊島) 등이다. 이를 연결하면 연화세계 즉 부처님이 어디 계신지를 알고 싶으면 세존도로 가 보아라는 뜻이 된다.무이산을 불가(佛家)에서는 청량산(淸凉山)이라고도 부른다. 청량산은 중국 산시 성[山西省] 우타이현[五臺縣] 있는 우타이산[五臺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사천성의 아미산· 절강성의 보타산· 안휘성의 구화산과 더불어 중국 불교4대 명산 중의 한곳인 오대산은 북위(北魏 : 386~534/535) 때부터 청량산(淸凉山)이라고 불렀다. 즉 인간 세계에 행복과 지혜를 주기 위해 헌신하고자 스스로 성불을 연기한 거룩한 분인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살고 있는 장소로 여겨졌던 것이다.
부처님의 여러 가지 덕 중에서 문수보살은 지식과 지혜와 깨달음을 관장하는 보살로 범어로는 만주스리(Manjusri)로 '훌륭한 복덕을 지녔다'는 뜻이다. 문수사리(文殊師利), 묘길상(妙吉祥), 묘음보살(妙音菩薩), 묘덕보살(妙德菩薩), 환희장마니보적불(歡喜藏摩尼寶積佛이)라고도 부른다. 문수보살은 여러 모습으로 나투신다고 하는데, 즉 꿈속에 나타나거나, 그가 사는 성스러운 산의 순례자, 코탄에 불교를 전한 승려 바이로차나, 티베트 불교를 개혁한 아티샤, 중국의 황제로도 화현한다고 한다. 보통 푸른 사자를 타고 부처의 왼쪽에서 보필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에 반하여 하얀 코끼리를 타고 부처의 오른쪽에서 보필하는 모습으로 표현되는 보현보살은 이치와 명상(禪定)과 실천을 관장하는 보살이다.
문수보살을 섬기는 신앙은 당대(唐代 : 618~907)에 크게 성행하였는데, 한국에서의 문수보살 신앙은 643년(선덕여왕 12) 중국에서 귀국한 자장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자장율사는 우타이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불사리와 가사 등을 전해 받고 귀국하여 통도사 등 5대 적멸보궁에 봉안하였다. 또 오대산 중대(中臺)에 적멸보궁(寂滅寶宮)을 건립하였고, 황룡사의 9층탑을 건립하여 문수보살 신앙을 굳건히 하고자 노력하는 등 그 유포에 큰 역할을 했다. 그 중 월정사가 있는 오대산도 중국의 우타이 산과 마찬가지로 문수보살의 상주처(常住處)로서 중시되어 왔으며, 문수보살 신앙은 계속 유행되어 오늘날 많은 사찰의 대웅전에 석가모니불 좌측에 문수보살이 봉안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후대 승려들은 문수보살을 모시는 사찰을 청량산이나 문수산, 아니면 오대산으로 지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수도량으로는 오대산과 강원도의 청평사, 경남 고성 문수사 등을 꼽을 수 있다. 또 전북 고창 문수사가 있는 곳의 지명은 문수면이고 그 뒷산은 문수산이다. 경북 영주에도 문수면이라는 지명이 있고, 강화도에는 문수산성이 있는데, 모두 문수사가 자리했던 곳에서 유래된 이름들이다.
이곳 고성 무이산 문수암은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 쌍계사의 말사(末寺)이다. 688년(신라 신문왕 8) 의상대사는 꿈에서 본 노승(관세음보살)의 현몽에 따라 걸인 모습을 한 두 노인(문수보살과 보현보살)에게 이끌려 무이산을 오르다가 절경에 감탄하여 정상 바로 아래 암자를 지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 법당 뒤 석벽에는 보관을 쓴 문수보살이 천연적으로 드러나 있다. 높이 20m 정도되는 수직 암벽이 세로로 갈라진 틈을 만들었고, 틈새 약 4m 정도 높이에 하얀 불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닥에 발표시가 된 곳에 서서 각도를 잘 맞추어야만 볼 수 있다고 한다.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하고 있다. 의상조사가 남해 보광산(지금의 금산(錦山))으로 기도하러 가던 중, 상리면 무선리에서 유숙하게 되었는데 비몽 사몽간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내일 아침에 걸인을 따라서 보광산보다 무이산을 먼저 가보라”고는 홀연히 사라져 잠을 깨니 꿈이었다. 날이 밝아 과연 한 걸인이 나타났는데, 급히 밥상을 갖다주며 무이산의 주소를 물었더니 무이산에 간다 하기에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걸인을 따라 무이산 중턱에 오르니 눈앞에 수많은 섬들이 떠있고,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에 웅장한 다섯개의 바위가 오대(五臺)를 형성하고 있어 마치 오대산의 중대를 연상하게 하였다. 이때 그 걸인이 중대를 가리키며 "저곳이 내 침소다"라고 말하자 한 걸인이 또 나타나서 두 걸인은 서로 손을 잡으며 바위 틈새로 사라져버렸다. 의상조사는 석벽 사이를 살펴보았으나 걸인은 보이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석벽 사이에는 천연적인 문수보살상만이 나타나 있는 것을 보고 의상조사는 홀연히 깨달은 바, 꿈속의 노승이 관세음보살이고 두 걸인이 문수와 보현 보살임을 깨달았고 의상조사는 무이산을 두루 살펴보고는 “이곳은 족히 사자를 길들일 만한 곳이며 이곳 이야말로 산수 수도장이다” 라고 예찬하고 문수단을 모아서 문수암을 세우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데 지금도 석벽 사이에는 천연의 문수상이 뚜렸이 나타나 보인다.
문수암은 한려수도의 크고 작은 섬들이 쪽빛 바다위에 떠 있는 절경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천혜의 전망대이다. 문수암 뒤에 있는 산은 무이산(武夷山)으로서 불가에서는 청량산(淸凉山)이라고도 한다. 무이산은 꼭대기 부분은 기괴한 암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산 정상에 오르면 한려수도의 도서들이 아름답게 내려다보여 그야말로 환상적인 풍치를 보여준다. 맑은 날에는 멀리 사량도와 지리산도 눈앞에 보인다.
문수암을 오르면 정면 건물이 천불전이다. 문수암(文殊庵)을 둘러싼 아래위와 앞뒤로는 엄청나게 큰 바위들이 자리잡고 있어서 좁은 공간을 활용하였다. 천불전은 암벽위에 조성된 팔작지붕 익공식, 정면4칸 측면 2칸의 2층의 전각이다, 천분의 부처님을 모신 전각.불단과 양쪽 벽에 모두 석가모니부처님 1000분을 모시고 있으며, 주존불은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우 협시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누구든지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전각이다. 삼신불과 삼세불, 천불, 삼천불 등 다불(多佛) 사상의 영향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불경에 따르면 현겁(세상이 개벽하여 다시 개벽할 때까지의 기간)에 구류손불,구나함모니불, 가섭불, 석가모니불 등 1,000명의 부처가 나타나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천불전 중 유명한 것은 직지사 천불전과 대흥사 천불전이다.
문수암의 주법당인 문수전. 콘크리트 건물의 법당은 1975년 중건됐고, 정면 3칸에 측면 2칸, 팔작지붕이며, 익공식 공포를 하고 단청이 되어 있다. '문수암'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문수(文殊)보살상이 나타나 있는 기암절벽 앞에 자리한 법당은 남해안 한려해상국립공원의 크고 작은 많은 섬들이 내려다 보이는 절경을 볼수 있는 곳이다. 입구 계단에는 석등이 2개 있으며, 사자상이 하나 있다. 법당 뒤의 석벽은 의사대사가 이곳에 절을 짓게한 일등 공신이다. 법당 안에는 관세음보살이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으며, 주존불 바로 옆에 문수보살이 유리곽 안에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양쪽으로 지장보살과 문수동자가 자리하고 있다. 문수동자는 사자를 타고 있는데, 뒤로 유리벽을 통해 석벽이 보인다. 문수보살상은 작은 유리곽 안에 안치하였다. 문수보살상은 화려한 보관을 쓰고 버들가지가 꽂혀 있는 정병을 손에 잡고 앉아 있다. 청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동자상. 문수보살이 암벽 사이로 사라졌다는 설화가 깃든 암벽이 문수동자상 뒤로 보인다.
지장보살과 지장탱 - 지장보살은 중생들이 죽은 후에 육도윤회나 지옥에 떨어지는 고통에서 구원해주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하고 그의 권속들을 거느리며 시왕들이 배치되어 있다.
신중탱은 천 위에 그려졌으며 천룡이 크게 부각되어 중심에 서있고 왼쪽 발 앞에 제석천이 합장하고 있다. 무장한 신장들과 모란과 연꽃가지를 들고 있는 천녀, 많은 성중들이 대치되어 가득차게 그려져 있다.
문수암 독성각은 현판은 없는 맞배지붕 익공식. 불화는 없고 나반존자만 모셔져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 바위 위에 건물을 지었으며, 남해앞바다가 가장 잘 보인다. 독성 - 독성은 스승 없이 혼자 깨달음을 얻은 성자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나반존자라 하는데 본래 부처의 제자로 아라한과를 얻은 뒤 부처의 수기(授記)를 받았다. 그 후 남인도 천태산에 들어가 말세가 되면 중생의 복덕을 위해 세상에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반존자를 모신 전각은 우리나라에만 있다고 한다. 후불탱화로는 독성탱을 모시며 배경은 천태산으로 나무와 숲이 무성하고, 나반존자가 석장을 짚고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고성 보현암 문수암에서 남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보현암 입구에 모셔진 석가모니불과 좌우협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상. 뒤쪽 석벽에는 진리의 법신인 비로자나마애불이 모셔져 있다. 약사전. 약사여래불좌상
보현암 약사전에 봉안된 약사여래불 -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10항하사수(갠지스강의 모래알 수)의 국토를 지난 곳의 동방 정유리광세계(유리로 만들어진 국토)를 다스리는 부처님이며 약사유리광여래불 또는 대의왕불이라고도 한다. 중생의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하며, 재화(災禍)를 소멸하고, 의복, 음식 등을 만족하게 해주시며 손에는 약함(약항아리)를 들고 있다.
문수암을 둘러싼 아래위와 앞뒤로는 또 엄청나게 큰 바위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 옛날 남해 보광산(금산)으로 가던 의상에게 관세음보살이 꿈에 나타나 거지를 따라 무이산에 가보라고 했고 아침에 일어나 거지를 따라 무이산 꼭대기에 갔더니 동행한 거지가 또 다른 거지와 함께 손뼉을 치고 웃으며 암벽 사이로 사라졌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자연스레 흘러내린 문수·보현상이 암벽에 나타났는데 여기에 암자를 짓고 문수암이라했다
고성 운흥사에서 출가하고 옥천사에서 득도했다고 알려진 청담선사의 부도비
진행경로: 선동마을 버스정류장 - 선동마을 - 무선저수지 - 문수식당 - 무이산 등산로 입구 - 문수암 - 무이산 정상 - 임도갈림길 - 보현사 약사전 -약 3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