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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다시 서장으로 가다
날이 밝자 장염은 황보장천을 찾아갔다. 사천성을 통과하는 상단이 있다면 소걸도 동행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허허헛! 다행히 삼 일 후에 북경으로 가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지요?"
"사실은 제게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제자를 먼저 사천성 성도로 보내려고 합니
다."
황보장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혼쾌히 승낙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한 사람을 더 데리고 가는 것으로 준비를 시키겠습니다. 그런데 장 대협은 어디로
가시는지 제가 알아도 되겠습니까?"
황보장천이 웃으며 슬쩍 물어보았다. 아무래도 장염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
이다. 수많은 무림인들은 물론 형님도 장염이 어디로 갔는지 반드시 물어볼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오늘 손님을 맞아보면 알게 되겠지요."
"아, 네, 오늘 오시기로 한 손님이 계신가 보지요?"
"하하핫! 그건 아닙니다만, 왠지 오늘 저를 찾는 손님이 계실것 같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장 대협께서는 필요한 것을 말씀만 하십시오."
"다른 것이 아니라, 오늘은 상대가 누구든 무조건 제게 안내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어떤 손님이라도 장 대협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장염이 저렇게 까지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저렇게 까지 미리 당부를 하는 것으로 보아 결코
평범한 손님은 아닐 것이다.
'대체 어떤 손님이 오길래 저러는 것일까?'
그러나 어떤 손님이든 자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다. 장염이 돌아가자 황보장천은 총관을 불러 장염의
당부를 다시 전해주었다.
정오 무렵 황보세가를 찾은 뜻밖의 손님이 있었다. 낮 근무를 서던 이사는 한 라마승이 다가오자 섬뜩
한 느낌을 받았다. 바로 지난해 있었던 혈마사의 마승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라마승은 망설임없이 이사
에게로 다가왔다.
'설마 그들이 쫓겨난 지 몇 달 되었다고 다시 귀주성에 나타날까?'
이사가 억지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스님께서는 어쩐 일이시오? 탁발 중이시라면 안채에서 일하는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셔야겠소."
이사의 기대와 달리 라마승이 어눌한 한어로 대답했다.
"빈승은 장염 대협을 만나보러 왔소이다."
"헛! 그러시오? 들어오시구려."
처음에는 조금 경계하던 이사가 대뜸 문을 열자 수호존의 얼굴에 살짝 긴장이 스쳐 지나갔다. 혈마사의
일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라마승을 이렇듯 의심없이 안으로 인도하다니! 그러나 이미 호랑이 입까
지 뛰어들었으니 갈 때까지 가야 한다.
이사가 라마승의 앞에 서서 걸으며 중얼거렸다.
"허, 거참! 댁은 운도 좋소. 마침 오늘 아침 장 대협이 손님을 무조건 안으로 모시라고 했기에 망정이지....."
"나무아미타...."
수호존이 들릴 듯 말 듯 염불을 외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장천사라더니 자신이 올 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앞일을 내려다본다면 혈마사의 준비를 알지도 모른다.
'장천사가 과연 혈마상에서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함정을 피해 갈 수 있을까?'
혈마사를 떠나올 때만 해도 장천사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왠지 지금 그
자신감이 조금 허물어져 감을 느꼈다. 그러나 장천사는 서장에서 생명을 마칠 것이다. 왜냐면 이번 일엔
ㄴ 바로 혈라마께서 직접 관계되었기 때문이다.
'한생한 강쪼라마(큰 바다와 같은 지혜의 스승, 티벳 어로 관세움보살) 께서 하시는 일이니...'
본래 라마교의 이단인 혈마사는 환생한 진정한 라마가 혈라마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백 년
에 이르는 동안 혈라마는 단 한 차례도 그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별채에 이른 이사가 굵직한 음성으로 외쳤다.
"장 대협, 라마승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안에서 두런거리던 소리가 멎었다. 그리고 잠시후 소걸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스님께서는 들어가시구요, 아저씨 ,스승님께서 이제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아달라고 하시네요."
"알겠다. 분명히 이제는 손님을 들이지 말라 이거지?"
이사는 소걸이 고개를 끄덕이고 방에서도 별다른 소리가 없자 대문을 향해 바삐 걸어갔다. 돌아가는 이
사의 발검음이 가벼웠다. 별채와 대무의 거리가 상당한데 다리 품 팔 일이 줄어든 것이다.
소걸은 한동안 중년의 라마승을 무례할 정도로 살펴보다가 안채로 뛰어갔다. 스승님이 바깥바람을 쐬다
가 오라고 했으니 오늘은 황보세가를 돌아다녀 볼 참이다. 도사와 중이 만나 무슨 할 얘기가 있는지 몰
라도 어차피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장염이 문턱을 넘어 들어오는 수호존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먼 길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뜻밖의 인상에 수호존이 머뭇거리다가 합장을 했다.
"나무아미타혈, 마하륵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다행히 혈라마의 도우심으로 장 대협을 쉽게 찾았소."
"..........."
장염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의 호의를 본 수호존은 한순간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장
염과 혈마사는 이제 공존할 수 없는 관계다 비록 마하륵께서는 원치 않으셨지만 순리를 거스를 수는 없
는 노릇이다.
"마하륵과 스승이신 반야승께서 이단을 설파하시다가 토굴에 갇히셨소이다. 새로 선충되신 주시는 귀하
도 본 적이 있는 혈마륵이시오. 빈승은 양쪽 모두를 따르는 편이라.... 무고한 희생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예까지 왔소. 미하륵과 반야승께서는 장 대협의 도움으로 토굴에서 나오기를 바라고 있소이다."
"마하륵의 스승이시라면 노라마가 아니십니까?"
"그렇소. 반야승께서는 일찍이 장 대협에게 오행혈마인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고 하셨소."
장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인연이 닿았던 혈마사의 두 라마승이다. 신앙은 다르다 해도 인간적으
로 배울 점이 많았던 두 사람이라 장염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스님께서 어려운 걸음을 하셨습니다."
"아니오, 다만....."
"말씀해 주십시오."
"혈라마께서 중원의 원정이 실패로 끝난 것은 그 두 분의 이단 신앙 때문이라고 하시며....."
"설마...?"
"그렇소이다. 강쪼라마의 환생 기념일인 삼월 십오일에 희생 제물로 드려질 것이오."
장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단지 토굴에 갇힌 것이라면 모를까 제물로 바쳐질 것이라면 시간이 얼마 없
는 셈이다. 비록 강호에 오행혈마인이 셋이나 남아 있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 어디 있는지 알 도리가 없
다. 그렇다면 잠시 시간을 내서 서장에 다녀오는 것이 나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혈마사를 찾아가 두 분을 구해내겠습니다."
"나무아미타혈......"
수호존은 결코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상대에 대한 최선의 예우라고 생각했다. 거짓말에 '
속아주어 고맙다' 는 말보다 염불 소리가 더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해 주었다. 그것이 신의와 협기로 죽
어갈 상대에게 향한 자신의 진심인지도 모른다. 그 마지막 염불을 끝으로 수호존은 황보세가를 떠났다.
수호존이 떠난 후 장염은 오해도록 명상에 잠겼다. 수호존의 이야기는 모두가 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두 현자에게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는 느낌은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그 위기는 그 두 사람과
자신을 포함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행혈마인을 만나본 장염은 아직도 오행혈마인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 어려웠다. 그들은 미친
듯 보였지만 이성이 있었고, 자기의 의지도 살아 있었다. 과거 혈마사 앞에서 생활하던 때에 찾아온 노
라마는 오행혈마경은 우주의 이치며 내공술이라 했다. 대체 그것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기에 멀쩡한 사
람을 초인으로 만들며, 또한 이성을 상실케 하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서장에 가야 한다.
모든 질문의 답은 서장의 혈마사에 있는 것이다.
수호존과의 만남이 있은 지 삼 일째 되던 날, 장염은 곤히 자고 있는 소걸을 흔들어 깨웠다.
"이제 그만 일어나거라."
"아우웅, 스승님, 해도 안 뜬걸요......."
"하핫! 해야 언제고 우리 마음속에 있지 않으냐."
"제자의 해는 아직 멀었습니다."
"너와 말장난하고 있을 틈이 없구나. 네가 늦게 일어나면 준비 할 것이 없어 너만 손해다."
소걸이 눈을 비비며 억지로 상체를 일으켰다. 아무래도 스승이 그냥 깨우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승님, 또 여행을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 이제 네가 나의 마음을 다 아는구나."
"이렇게 이른 새벽에 어디로 가죠?"
"세수를 하고 오면 알려주마. 설마 그 얼굴로 사천성까지 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사천성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소걸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하늘은 과연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 자
리를 박차고 일어난 소걸이 번개처럼 마당으로 내달았다. 그리고 장염이 숨 두어 번 내쉴동안 벌써 고양
이 세수를 마치고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허어! 이 녀석, 사천성에 꿀단지라도 묻어두었나. 가자기 호들갑은......"
"키키킥! 제가 원래 사천성을 좋아하거든요."
"그러냐?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너는 당분간 혼자 있을 수 있겠느냐?"
"무슨 일이 있나 보죠? 제자는 당연히 혼자 있어도 무서움을 타지 않습니다."
"더욱 잘됐다. 너는 조금 후에 상인들과 함께 사천성으로 떠나게 될 것이다."
"헉! 스승님은 안 가세요?"
"나는 서장에서 볼일을 마친 후에 사천성으로 갈 것이다."
소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장염을 바라보았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난단 말인가! 이것
은 혹시 스승이 자신을 떼어놓기 위해 부리는 수작 같은 게 아닐까?
"무엇이 그리 걱정이라고 인상을 찌푸리느냐?"
"저... 스승님, 어린 제자는 사천성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염려 말거라. 사천성 성도에 사천제일루라는 객점이 있다. 그곳에 가서 헌원일광이라는 분을 찾아라.
그분께 이 서찰을 가지고 가면 잘 대해주실 게다."
장염이 곱게 접은 서찰을 소걸에게 내밀었다. 서찰을 받아 든 소걸ㅇ ㅣ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대충 구겨
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 녀석아, 그렇게 해서 혹시 잃어버리길도 하면 어쩔 셈이냐?"
"어이구, 걱정도 팔자시네요. 제자가 이래 봬도 품 안에 들어온 것은 한 번도 밖으로 내돌린 게 없는
사람이네요."
"그래? 어디 두고 보자.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은 원숭이라더라."
"아, 참, 염려 마시라니깐요. 저는 나무 같은 데는 안 올라가요."
장염이 미덥지 못하다는 얼굴로 소걸을 노려보았지만 눈에 꿈쩍하지 않았다.
'천성이다, 천성'
마침내 포기한 장염이 사천제일루의 일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곳이 가 있는 동안 사
고를 칠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요리 사부나 헌원일광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점
인데 어느 쪽이 더 대단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 * *
비룡금쇄진 안의 명인은 요즘 들어 극심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시기적으로 필요한 물품을 구하러 나
가야 할 때가 되었다. 이전 같으면 기쁜 마음으로 진을 빠져나갈 판인데 지금은 아니다. 왠지 감옥 같던
진법이 아늑하게만 느껴졌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진법 밖의 세상이 두려워졌다는 것과 같았다.
'그럴 리가 있나.... 내가 두려움을 느끼다니....'
명인은 천하제일인이 되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비룡금쇄진을 깨고 나갈 일만 벼르고 있
었는데 세상에 나가기도 전에 불안을 느끼고 있다니! 이번에 다시 출진하게 되면 세상을 한바탕 흔들어
놓고 오리라.
"소장주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문밖에서 비룡장의 총관인 천외비룡 마룡의 음성이 들렸다.
"알겠소. 곧 나가리다."
마룡의 음성을 듣는 순간 또다시 가슴이 철렁했다. 이 불안의 기원은 대체 무엇일까? 명인이 애검인 묵
검을 허리에 비끄러맸다. 그제야 다시 패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조금 흔들렸던 자신감이 가슴을 두
근거리게 만들었다.
방문을 나서자 마당에 도열한 비룡장의 무사와 일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무사 열 몀에 일꾼 이십 명
이니 도합 삼십 명이 장원을 나가는 것이다. 언제나 이 숫자를 잘 세어두어야 하는 것은 진 속에 남겨두
는 사람이 없어야 했기 때문이다.
멀찍이 서 있던 비룡장주 명오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아들 명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나가고 들어
올 때마다 불안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길 떠나는 아들을 근심 어린 표정으로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명인이 부친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후에 몸을 돌렸다.
"가십시다."
명인이 짧게 말한 뒤 비룡금쇄진의 생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톱니바퀴처럼 정해진 순서에 따라 걸음을
옮겨야 한다. 그리고, 그 걸음을 내딛는 위치는 게절과 시간에 따라 조금씩 변화했다. 다른 때보다 더욱
조심스럽게 명인은 진식을 뚫고 나갔다.
검령산에서 나온 명인과 비룡장 무사들은 사흘 동안 돌아다니며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였다. 한 번씩 나
올 때마다 구입하는 물품도 새로웠지만 강호의 소식을 듣게 되는 것도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
번에 듣게 된 소식 중에는 명인에게 충격적인 것이 하나 있었다.
"소장주, 그 오행혈마인이라는 것이 뭔지 모르지만 대단히 비쌉니다그려."
마룡의 말이 끝나자 주변에 서 있던 무사 하나가 떠들어댔다.
"하하핫!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 비룡장의 손에 걸리기만한다면 일 년은 그냥 놀고 먹을 수 있겠는걸
요."
"와하하핫!"
떠들썩하게 웃어 젖히는 무사들을 둘러보는 명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어쩐 일인지 너무 갑작스럽게
오행혈마인에 대한 경계가 전 무림을 흔들고 있다. 자기의 생각처럼 오행혈마인은 혼자가 아닌 것이 확
실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들이 이렇게 무림인들의 이목을 끌게 될 줄이야!"
'아니, 어쩌면 내가 귀주성을 들었다가 놔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장소라는 사람이 마교에서 큰일을 벌였던 것이나, 장경선이라는 사람이 무림맹에서 사고를
치고 달아난 것은 자기가 하려는 일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귀주성에서 그들보다 먼저 무공을 사용했어도 오행혈마인이란 것이 밝혀져 무림의 공적
이 되었을까?'
등줄기를 타고 오싹한 소름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면 대체 오행혈마인은 왜 생겨난 것일까? 비록 마
경을 터득하여 천하제일이 되어도 사람들에게 무림 공적으로 몰릴 것이다. 은밀하게 마공을 익히는 자들
이 많으나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무림공적은 아니다.
어떤 이는 한 지방의 패주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문파를 창설하여 뜻하는 대로 세상을 좌우했다.
그런데 왜 유독 오행혈마인은 인간이 아닌 것으로 낙인찍혀 무림의 공적이 되어야 하는가! 알려지지 않
은 마공 중에는 인간의 심장을 먹으며 연공하는 것도 있으며, 더 나아가 음기를 취하기 위해 수백 명의
여인을 살해해야 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무명을 떨쳐 사파의 지존으로 대접받았다.
'그것은 처음부터 우리가 제거될 대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대체 어느 미친 작자가 이 같은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그제아 명인은 자신이 빠져나올 수 없
는 그물에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비룡장을 벗어나 무림을 흔들어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자기 무덤을 파는 꼴이다. 마경을 익힐수록, 그리고 익
혀서 강해질 수록 죽음은 더욱 가까이 있는 셈이다. 한참 동안 멍한 얼굴로 서있던 명인이 어두운 얼굴
로 돌아섰다.
"준비를 하시오."
마룡이 깜짝 놀란 얼굴로 명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룡장을 나온 이래 먼저 돌아가자고 한 적이
없는 소장주이다. 돌아갈 시간이 되면 뭔가 미진한 것이 남은 듯 꿈지럭거렸고, 그래서 늘 자신의 마음
을 졸이게 했다. 그런데 지금 철이 들었는지 스스로 돌아가자고 독려하는 것이다.
'쩝..... 이제는 무림이 조용하여 조금 더 눌러 있다가 돌아가도 되는데.....'
그러나 소장주의 명은 지엄한 것이니 어찌 다른 말을 입에 올릴 것인거! 마룡이 무사와 짐꾼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소장주께서 돌아가자고 하시니, 서둘러 짐을 꾸려라!"
객점 안뜰에 물건을 모은 뒤 그 숫자를 세어본 마룡은 모든 점검이 끝나자 명인에게 보고했다.
"소장주, 물건과 사람이 모두 틀림없습니다. 언제라도 하명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즉시 장으로 돌아가겠소. 쉬지 않고 움직일 것이니 뒤쳐지는 자가 없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명인이 수하들의 뒤를 따르며 중얼거렸다. 이제 돌아가면 다시 비룡금쇄진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
러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나가게 된다면 평생 강호를 떠돌며 유랑하리라.
'결코 비룡장 명인의 이름으로 귀주성을 들락거리지는 않겠다.'
과거에는 감옥처럼 여겨 불평했지만 지금은 비룡금쇄진이 고맙기만 했다. 비룡장의 절진을 감히 누가
뚫고 들어올 것인가! 이제는 세상이 잠잠해질 때까지 다시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명인이 어금니를
악물고 굳게 결의하고 있을 때다.
귀양을 벗어나 검령산 방향으로 향하던 수하들이 한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 자기보다 겨우 십여 걸음
앞서 가던 사람들이 고개를 넘는 순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뿐이 아니다. 일꾼들이 끌던 수레와
지어 나르던 짐들도 보이지 않았다. 관도 위로 불어오는 바람은 그대로인데, 마치 홀로 다른 세상에 던
져진 것 같았다.
휘이이잉!
명인이 눈앞으로 흩날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소리쳤다.
"마 총관! 무슨 일인가! 다들 어디로 사라진 거냐!"
그러나 아무 데서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삼십 명의 수하들은 마치 바다에 빠진 것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명인의 눈에서 살기가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방금 지나온 길 저편에서 다가오는 일단의 기세를 느꼈다.
백여 명의 무림인들이 마치 퇴로를 차단하듯 뒤를 막아서고 있는데, 하나하나가 고수 아닌 자가 없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무리들의 앞에 서 있던 세 사람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본좌는 천년마교의 수호사령 검귀라 한다."
"나는 순찰영주 귀도신영이다."
"혈수서생 이면수."
각자 짤막하게 말을 마친 세 사람이 관도로 넓게 퍼졌다. 그리고 다시 그 뒤를 백여 명의 마인들이 촘
촘하게 늘어섰다. 긴장한 명인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서는 순간, 정면의 땅속에서 한 사내가 솟구쳐 올랐
다.
쏴아아아!
땅속에서 올라오는데 마치 바닷물이 가라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것은 환청인가!'
얼마 후 사내가 지면에 버티고 서자 주변의 마인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무림지존! 제천혈마!"
"만세! 만세! 만세!"
명인은 자신의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를 들었다. 비룡장으로 돌아가 나오고 싶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저 사내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무심한 하늘은 그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오늘..... 다시는 진 밖으로 나오지 않겠다고 다짐한 오늘... 저자를 만나다니.'
제천혈마 장소가 다가오며 능글맞게 말했다.
"지난 삼 일 동안 그대의 뒤를 따라다니며 내 눈을 의심했다. 왜 명문정파의 후계자가 마공을 익히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뭐 나름대로 사연이 있겠지."
"내 수하들은 어찌했는가?"
장소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이 아래에 깊이 모셔두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번거로운 일을 시키지 못하거든, 공자가 그랬다던가?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 맞나?"
"무고한 생명을 생매장하다니, 미쳤구나!"
"크하하핫! 이거 왜 이러실까? 그대 입에서 무고한 생명이라는 말이 나오면 안 되지. 귀주성에 머물며
재미있는 소문을 들었거든. 몇 해 전까지 한 달에 한 명 꼴로 처녀들이 사라졌다면서? 다행히 기연을 만
난 모양인데, 우리끼리는 협객인 척하지 말자구."
이미 잡아놓은 먹이라고 생각한 듯 장소는 느물거리며 명인을 살펴보고 있었다. 명문정파의 잘 나가는
후계자가 왜 이런 저주받은 마공을 익혔을까? 그 생각을 하니 아랫배에서 웃음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
다.
'그놈이 그놈이지. 정파와 사파의 씨가 따로 있던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명인의 오행지기는 화기가 분명하다. 자신이 수기와 토기를 모았으니 화기가 어떨
지 알 수 없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자아, 이제 순서대로 해야쥐. 어디 한번 덤벼볼 테냐? 그냥 심장을 내줬으면 좋겠는데."
명인이 오른손으로 묵검을 꺼내 지면과 수평이 되게 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수하들의 복수는 해주고 싶
었다. 물론 그것이 인간에 대한 자신의 이율배반적인 동정심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오행지기 화염천!
사방에서 지면을 뚫고 불기둥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사방에서 일어난 불꽃은 마교 고수들과 장소의 몸으로 옮겨 붙었다. 마치 거대한 산불이라도 일어난 듯
불길은 거침없이 번져 나갔다.
"크아악!"
"으악!"
상상할 수도 없는 화기에 휩쓸린 마교 고수 이십여 명이 재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모두 천마대의 마
인들로 이 자리에서 무공이 가장 약한 자들이었다.
장소가 불의 벽을 두르고 있는 명인에게 달려가며 벼락같이 소리쳤다.
"이제 그만 내놓아라!"
그 순간 명인의 두 발이 땅 밑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뿐 아니다. 명인의 주위에 형성되어 있던 불기둥
이 치치칙 소리와 함께 사그러들었다. 장소가 오행지기 공령수로 화기를 잠재우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게 피어 오르던 불길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으으....."
명인은 모든 공력을 두 다리에 쏟아 부었지만 소용없었다. 불길이 걷히자 하반신이 흙에 잠긴 명인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때 바람같이 나타난 장소가 명인의 두 손을 일검에 베어버렸다.
'크윽!"
명인의 얼굴에 절망이 가득 차 올랐다.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이제 죽게 된 것이다. 마공을 익혀 천하
에 적수가 없다. 여겼건만, 장소 앞에 서니 자신은 어린아이같이 보잘것 없었다. 이것이 오행지기 하나와
둘의 차이란 말인가!
"슬퍼 말아라. 너와 나는 하나이니,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장소가 다가와 속삭이며 명인의 심장 어림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곧 장소의 손끝이 명인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콰드득.
"끄아아아아!"
명인이 끔찍한 고통 속에서 뽑혀 나가는 자신의 심장을 바라보았다. 온몸에 넘치던 공력은 이미 느꺼지
지 않았다. 이렇게 덧없는 것이 인생인줄 알았다면 질투와 욕심도 버렸을 것이다. 흐릿해지는 명인의 눈
앞에 어린 시절의 광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기고 지는 것이 대체 무어라고.......'
명인의 거친 호홉이 잦아드는가 싶더니 얼마 못 가 땅 밑으로 가라앉았다. 명인을 삼킨 땅이 다시 딱딱
하게 굳기 시작했다. 장소가 근처에 발산했던 오행지기를 거두어들인 것이다. 장소가 오행지기를 거두어
들였음에도 수하들은 다가오지 않았다. 마지막 의식이 남은 것이다.
장소는 광기 어린 눈빛으로 아직도 펄떡이는 심장을 바라보았다. 이제 다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찾아
오리라! 그러나 그 아픔은 끝이 아니라 더 큰 능력을 얻게 하는 밑걸음이 될 터이다.
'크흐흐.... 고통없이 얻어지는 영광은 없다.'
잠시 후 장소는 참혹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서 뒹굴기 시작했다. 명인의 한을 풀어주려는 듯 땅이 폭
발하며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퍼퍼퍼펑!
귀양에서 검령산으로 가는 길목에 다시 바위와 흙이 녹아 기이한 형상을 이루어 놓았다. 사람들은 근처
의 흑룡담에 살던 만 년 묵은 용이 승천하며 남긴 자국이라 말했다. 공교롭게도 용이 승천하던 날 비룡
장의 식솔들도 함께 사라졌기에 사람들은 '흑룡이 그들을 데려갔다' 고 수군거렸다. 그 흉측한 모양은 한
동안 사람들의 관심을 끌다가 서서히 잊혀져 갔다.
* * *
서장에 들어선 장염은 그날 더욱 붉게 물든 진성을 보며 탄식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어쩔 수 없는 노
릇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늘의 뜻대로 변해갈 뿐이다. 지금 다시 사라진 한 사람이 장경선이든 혹
은 또 다른 오행혈마인이었든 자신과는 인연이 닿지 않은 것이다.
'적지 않은 시간을 기다리며 찾았으나 나에게서 멀어졌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지금은 나와 인연이
닿지 않는다는 것일 게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그동안 만났던 오행혈마인은 장소와 제갈위기, 괴도사, 그리고 장경선을 포함해 모
두 넷이나 된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의 오행지기도 없애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능력이 있고 없음
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서장에 접어든 지 이미 열흘이 지났으니 삼월 오일이다. 열흘후면 두 사람의 현자가 제단에 세워질 것
이니 이제부터는 혈마사의 일만 생각하기로 했다.
'이번 기회에 오행혈마인의 신비를 풀어봐야겠다.'
보통 사람이라면 짧은 시간에 오행혈마인과 같은 절세고수를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공력은
전대미문의 경지였고, 단전이 파괴되어도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 새벽이 되도록 생각해 보았지만 아
무래도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답을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서장에서 바라본 밤하늘은 중원보다 더 하늘에 가까운 듯했다. 그래서 사람들도 하늘을 닮은 것일까?
다시 여행하는 서장은 복잡한 인간사와는 달리 정겹기만 했다. 만나는 사람들은 여전히 거칠지만 활기있
게 살아가고 있었고, 차가운 공기는 상쾌했다.
다음날 장염이 서장의 동부지역 마을을 지날 때였다.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늙은 라마승을 묶어
돌로 쳐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그 라마승이다. 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묵묵히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 그의 초연함에 호기심이 생긴 장염은 즉시 쳥명검을 뽑아 들었다.
어의통검의 묘! 풍산검기!
장염이 청명검의 검신을 살짝 흔들자, 사방에서 태산도 허물 듯한 바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휘이이잉!
"태풍이 몰려오고 있다!"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직 방목하던 가축들이 근처에 방치되어 있으니 서두르
지 않으면 안 된다. 한떼의 사람들이 돌풍을 피해 흩어지자 그 자리에는 사지가 결박당한 라마승만 남겨
지게 되었다.
장염이 청명검을 빈 들판으로 휘두르자 돌풍도 들판으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돌풍에 눈
도 뜨지 못하고 있던 라마승이 큰 소리로 외쳤다.
"오! 형제여! 그대는 부처님께서 보내어 이리로 온 게 틀림없다! 그대에게 전할 법보가 있으니 나를 풀
어다오!"
라마승의 곁에 다가선 장염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나는 도를 닦는 사람이라 그대의 부처님과는 아직 대면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네, 형제여. 지금 나를 풀어주면 우리 부처님이 그대에게 전하는 법보를 받을 수 있을 것이
네."
"마을 사람들이 나에게 죄를 물으면 어찌합니까?"
늙은 라마승이 즉시 대꾸했다.
"형제에게는 빠른 두 다리가 있으니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가면 된다오."
한마디로 자신을 풀어주고 달아나라는 얘기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늙은 라마승에 대한 궁금증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죄가 있으니 잡힌 것이 아닙니까?"
"허허헛! 형제여, 죄가 있다면 하늘이 돌풍으로 저들을 물리치셨겠는가!"
장염이 웃으며 늙은 라마승의 결박을 풀어주었다. 라마승은 묶였을 때의 초연함은 다 어디로 갔는지 풀
리자 마자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뜻과는 달리 허둥대기만 하는 발걸음으로 보아 무공을 익
히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장염이 느긋하게 따라붙으며 물었다.
"당신의 부처님께서 제게 준다던 법보는 무엇입니까?"
그제야 늙은 라마승은 장염을 다시 바라보았다. 늙은 라마승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젊은이는 한인
이며 무공을 익힌 사람이었다. 이 근방에서 무공을 익힌 한인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데 젊은이는 제법 유창한 서장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한참 달리던 늙은 라마승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이르자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헉헉, 형제는 ..... 헉헉, 이곳 사람이.....아닌데......헉헉, 말을 .....헉헉, 참 잘하시는구먼."
"하하하! 숨 쉬시는 것을 보니 곧 열반에 드시겠습니다."
"헉헉... 무슨....헉헉, 그런 섭섭한 ....헉헉, 말을......."
늙은 라마승은 숨넘어갈 듯 헐떡이면서도 꼬박꼬박 대꾸했다. 장염은 그 모습이 안쓰러워 호홉이 진정
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궁금한 것은 그때 가서 물어도 되는 것이다. 삼월이라 하지만 고원의 날씨는
아직도 한겨울과 다르지 않아 혹독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움직임을 멈추자 금세 살갖을 에일 듯한 냉기
가 몰아쳐왔다.
장염이 걱정 어린 눈으로 늙은 라마승을 바라보았다. 자기야 무공으로 단련되어 걱정이 없었으나 늙은
라마승도 이 추위를 견딜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장염의 기우에 불과했다. 본래부터 서장에서 고행을
하던 라마승이라 이 정도의 추위는 시원한 바람에 불과했다. 나무 둥치에 걸터앉아 한동안 숨을 고르던
늙은 라마가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제에게 솔직히 말하지. 사실 나는 뵌포의 백본진류파 라마라네."
"..........."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서장에 널린 수백 개의 사원이 뵌포의 라마사원이다. 장염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본 늙은 라마승이 다시 발했다.
"나는 백본진류파라고 말했네."
"네, 잘 들었습니다. 탁발을 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늙은 라마승의 벌어진 입으로 겨울바람이 밀려들었다. 이 젊은 구원자는 백본진류파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형제여, 내가 사람들에게 죽을 뻔한 이유를 말해 주었던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그럼 들어보게."
자칭 뵌포 라마라고 칭하는 늙은 라마승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왔다.
"탁발하러 들어간 집에서 한 사람이 하늘에 비는 소원을 듣게 되었네. 멀리서 양젖을 짜고 있는 아가씨
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저 여자를 갖게 해주십시오' 라고 빌더군. 그 소리가 나에게 들린 것을 보아 부처
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네. 나는 즉시 여자가 그에게 자발적으로 갈수 있는 주술을 걸어주었다
네. 자네가 아직 젊으니 그 방법은 말하지 않겠네만......."
"술법으로 여자를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내가 죽을 뻔한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여자에게는 이미 남편이 있던 게야. 공교롭게도
하필 그날따라 일찍 돌아온 남편이 우리 셋을 보게 되었네."
"그 자리에 스님도 계셨군요?"
"그렇지.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고 있었거든. 어떤 주문도 그렇지만 남여가 상합하는 것을 본 지도 오랜
만이라, 어느 한쪽도 소홀히 할 수 없었네."
장염이 장탄식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노라마승이 하늘의 뜻을 잘못 안 것이나 네가 노라마승을 구한 것이나 모두가 같은 실수였구나.'
그렇다고는 해도 과연 주문으로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장염이 고개를 돌
려 노라마를 바라보았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늙음 속에 자신이 이전에 알지 못했던 세계가 담겨 있
는 것이다. 그것은 무당파의 법술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우리 뵌포 라마의 백본진류파는 몇 사람 되지 않아 라마승들 사이의 신비라네. 술법은 물론이고 누가
백본진류파인지도 비밀이지."
"그렇겠군요."
상상을 초월한 술법을 지녔으니 그럴 법도 하다. 장염이 새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늙은 라마승의 얼굴
에 미소가 어렸다. 아무래도 조금 더 소개를 해주면 더 존경의 눈으로 봐줄 것이다.
"진정한 술법을 하는 뵌포 라마는 얼마 되지 않는데, 우리는 흑마술과 백마술이란 것을 사용한다네. 내
가 익힌 것은 주로 백마술로, 이미 자네가 들은 대로 좋은 일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이지."
"그것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형제여, 모르는 소리 말게. 흑마술을 익힌 흑본마류파의 얘기를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 걸세."
"............"
좌우를 살피던 늙은 라마승이 마른침을 꼴깍 삼킨 후 은밀하게 속삭였다.
"라마승들 사이에서 흑본마류파에 대해서는 말하는 것은 금기시되네만..... 나도 술법을 하는 뵌포니 한
마디 해줌세. 그들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 깊은 감옥에 가둔 뒤 굶어 죽인다네. 사람이 죽으
면 어찌 되겠나? 썩어 액체가 되겠지? 흑본마류파의 뵌포 라마들은 그 썩은 액체를 몸에 발라 죽지 않
는 술법을 터득한 자들이라네."
장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것은 가히 강호의 극악한 사파들이나 할 짓이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
면 어째서 뵌포 라마승들은 흑본마류파들을 그냥 두는 것일까?
"형제의 표정을 보니 라마승들이 왜 그들을 그냥 두고 있냐고 묻고 있구먼. 허허허, 서장에서는 사람과
죽음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다네. 모두가 '삷과 죽음 그 이후에 무엇이 있는가?' 알기 위해 수행할 뿐이지.
그것이 어떤 식의 수행이든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네. 게다가 흑본마류파의 본포 라마들이 너무 강해서
이 문제에 관여한 사람치고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는 것도 커다란 이유지."
"포답랍궁에서도 그대로 두고 있는 건가요?"
"그들도 힘이 없기는 마찬가지라네. 흑본마류파의 흑마술에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들이 그 정도나 대단합니까?"
"허허헛! 형제여, 흑마술의 최고 경지에 이른 적멸존자는 몇백 년 전의 사람인데 아직도 죽지 않고 살
아 있다고 하네. 그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것이기에 우리는 그를 그저 '음름' 이라고 부르
지. 자네도 그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그저 '음음' 이라고 하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음음' 은 지금쯤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요?"
"글쎄, '음음' 이 무얼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오직 귀신뿐일게야."
"............"
늙은 라마승이 흠칫 몸을 떨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흥에 겨워 너무 많은 말을 하고 말았군. 그나저나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 탁발은 그만두고 다
시 산으로 올라가 세상에 내려오지 말아야겠어."
".............."
말을 마친 늙은 라마승은 장염이 인사를 하기도 전에 훌쩍 떠나 버렸다.
"허, 거참, 백본진류파의 뵌포 라마라.... 그러고 보니 아직 노라마의 이름도 묻지 못했군."
장염은 늙은 라마승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았다. 그런데 어쩐 일일까? 흑마술의 뵌포 라마를 떠올리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유랑을 하며 중원과 변경을 다 둘러보았지만 이런 신기한 얘기는 처음이다.
역시 세상은 넓고 알지 못하는 것 투성이다.
'그나저나 그 적멸존자라는 자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몇백 년을 살았다고 했으니 이미 인간이라 부르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오래 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그의 눈에는 인간이 어떤 존재로 보일까? 사람을 죽여 그 시체를 이용한다고 하니 사람
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르던 장염이 다시 서쪽으로 이동했다. 늦어도 내일쯤이면 혈마사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제사가 임박하면 감시가 대단할 테니, 그 이전에 두 라마승을 구해내야 했다.
장염이 사라진 자리로 세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 * *
주지의 방에서 자고 있던 혈마륵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그것은 몇 번이고 들은 바 있
던 혈라마의 음성이었다.
"혈라마시여! 말씀하옵소서!"
혈마륵의 머리 속 깊은 곳에 울리는 음성이 있었다.
"장천사라 불리는 장염이 왔다. 때가 되었으니 제물을 망자의 산으로 인도하라."
나.무.아.미.타.혈.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장염이 혈마사에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설마 혈라마께서 두 노라마를 망자
의 산으로 데리고 가라고 할 줄은 몰랐다. 혈마륵은 자리에서 일어나 날이 밝도록 명상에 잠겼다. 그리
고 새벽 여명이 밝아오자 아침 법회에 참석한 라마승들에게 말했다.
"혈라마께서 말씀하시길를 장천사 장염이 왔다고 하신다. 죄인들을 망자의 산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망자의 산이라는 말이 떨어지자 혈승들 가운데 부들부들 떠는자도 있었다. 망자의 산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이며, 혈라마의 법체가 머무는 곳이다. 망자의 산은 서장에서 죽음의 의미이다. 지금까지 망자의 산
에 발을 디딘 자는 반드시 죽었기 때문이다.
수호존이 조심스럽게 혈마륵에게 물었다.
"혈마륵이시여, 두 노라마를 그곳으로 모시게 되면......."
혈마륵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망자의 산에 오른 자치고 살아난 자가 없으니 그 두 노라마도 십중팔구
죽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장염을 없앨 생각만 했지 두 노라마가 죽을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러나 어
찌하랴! 이미 혈라마께서 결정하신 일이니 그저 관대한 처분을 기다릴 뿐이다.
"이제 와 어쩌겠느냐. 이미 혈라마께서 그렇게 결정하셨으니 따를밖에.... 두 분의 노라마를 살리고 싶으
면 독경이나 부지런히 하고 있거라. 혈라마께서 들으시고 살려주실지 모를 일이니 말이다."
말하는 혈마륵이나 듣고 있는 수호존 모두의 표정이 어두웠다. 아무래도 두 노라마도 이번 일로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존경하는 노라마라 하여도 혈라마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다. 혈라마는
이미 인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첫댓글 즐독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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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삷과 죽음 그 이후에 무엇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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