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테라와다 불교신자이신 어떤 분깨 질문을 드렸더니 답변을 해 주셨습니다.
* 저의 질문: 중간 경(A6:61)에는
5. 이렇게 말하자 또 다른 비구가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도반들이여, 정신[名]이 첫 번째 극단이고 물질[色]이 두 번째 극단이며 알음알이[識]가 중간이고 갈애가 바느질하는 여인입니다. ...” 이렇게 나옵니다.
여기서 정신[名]과 물질[色]과 알음알이[識]를 어떻게 이해하면 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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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분의 답변: 주석서를 참고하여 답변해 주셨습니다.
→ 알음알이와 정신-물질이 서로를 조건 짓는 관계이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정신-물질의 중간이라고 설했다고 합니다.
→ 한편, 여기서 '정신-물질'이나 '안의 감각장소-밖의 감각장소'가 대상의 의미라면 (위에서는 재생연결식도 포함되었긴 하지만) 알음알이는
'대상을 알고 업을 짓고 [위빳사나 선업 등으로] 열반으로 이끌어갈 수 있기 때문에' 중간이라고 설하지 않았나 생각도 듭니다.
→ 전체적인 경의 맥락을 보면 이 세 가지 모두가 '상호 조건'으로 (갈애가 주체가 될 때) 윤회를 이어가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 중간(자기 존재 있음의 소멸 등)을 잘 활용(또는 실천)할 경우 열반으로 이끌어가는 것으로도 보이니까요.
→ "지혜로운 자는 양극단을 알고서
중간도 더럽히지 않네."
→ 양극단은 잘 알아야 할 것이고
중간은 (깨끗하게 닦아서) 더럽히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 가령 업을 짓는 알음알이는 악업을 짓지 않고 선업을 닦는 등으로 더럽히지 않아야 하겠지요.
viññāṇaṃ majjheti kammaviññāṇaṃ majjhe, ajjhattikāyatanesu vā manāyatanena kammassa gahitattā idha yaṃkiñci viññāṇaṃ majjhe nāma, manodvāre vā āvajjanassa ajjhattikāyatananissitattā javanaviññāṇaṃ majjhe nāma.
(번역) '알음알이가 중간'이란 '업을 짓는 알음알이'가 중간[이라는 뜻이다.] 안의 감각장소들에서 또는 마노의 감각장소에 의해서 업의 거머쥠이 있기 때문에 이때 [생겨나는] 어떠한 알음알이가 중간이라는 뜻이다. 마노의 문에서 또는 [오문] 전향하는 안의 감각장소를 의지하여 [그 이후에 이어지는 인식과정에서 업을 짓는] 속행(자와나)의 알음알이가 중간이라는 뜻이다.
'더럽혀지지 않는다'는 뜻은 지혜로써 더럽혀지지 않기에
궁극적으로는 [출세간도의 진리와 함께] 감각접촉 등이 소멸하여 더럽혀지지 않음(멸성제)과
중간적인 의미로 깨끗하게 닦아나가 더럽혀지지 않는다(도성제)는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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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중에 다시 ‘숫따니빠따’ : ‘도피안 품’의 ‘메떼야의 질문’에서 대답하신 그 해당부분을 더하여 중간 경(A6:61) 전체 글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해당 글의 주소 복사입니다.)
[출처] '지혜로운 자는 중간에서 더럽혀지지 않는다'|작성자 부유
https://blog.naver.com/k3a3n3g3/223295357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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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어떤 분께서 답변을 해 주시기 전에 제가 생각해본 것인데, 틀릴 가능성이 아주 많으므로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중간 경(A6:61)을 읽으며 생각해 봅니다.
‘숫따니빠따’ : ‘도피안 품’의 ‘메떼야의 질문’에서 설하시기를.
“지혜로운 자는 양극단을 알고서
중간도 더럽히지 않네.
나는 그를 대인이라 부르노니
그는 여기서 바느질하는 여인을 넘어섰노라.”
1. 어떤 비구
“도반들이여, 감각접촉[觸]이 첫 번째 극단이고 감각접촉의 일어남이 두 번째 극단이며 감각접촉의 소멸이 중간이고 갈애가 바느질하는 여인입니다. ...”
(저의 피상적인 생각: ‘감각접촉’과 ‘감각접촉의 일어남’이라는 양 극단을 알면 중간인 ‘감각접촉의 소멸’은 더럽혀지지 않는 것이구나. 즉 양극단을 알면 갈애가 이 두 가지를 기워서 바느질을 하지 못하는구나.)
2. 다른 비구
“도반들이여, 과거가 첫 번째 극단이고 미래가 두 번째 극단이며 현재가 중간이고 갈애가 바느질하는 여인입니다. ...”
(저의 피상적인 생각: ‘과거’와 ‘미래’라는 양극단을 알면 중간인 ‘현재’는 더럽혀지지 않는구나. 즉 양극단을 알면 갈애가 이 두 가지를 기워서 바느질하지 못하는구나.)
3. 또 다른 비구
“도반들이여, 즐거운 느낌이 첫 번째 극단이고 괴로운 느낌이 두 번째 극단이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중간이고 갈애가 바느질하는 여인입니다. ...”
(저의 피상적인 생각: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을 알면 중간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더럽혀지지 않는구나. 즉 양극단을 알면 갈애가 이 두 가지를 기워서 바느질하지 못하는구나.)
4. 또 다른 비구
“도반들이여, 정신[名]이 첫 번째 극단이고 물질[色]이 두 번째 극단이며 알음알이[識]가 중간이고 갈애가 바느질하는 여인입니다. ...”
(저의 피상적인 생각: ‘정신[名]’과 ‘물질[色]’이라는 양극단을 알면 중간에 해당하는 ‘알음알이[識]’는 더럽혀지지 않는구나. 즉 양극단을 알면 갈애가 더 이상 이 두 가지를 기워서 바느질하지 못하는구나.)
* 저는 정신과 물질의 양 극단, 이 두 가지를 갈애가 기워서 바느질한다고 생각했는데, 답변해 주신 그분께서는 정신과 물질과 알음알이, 이 세가지를 갈애가 기워서 바느질한다고 말씀해주셨네요.
*(첨가: 2023, 12, 18, 오전 6시 30분)
- 아위자님의 댓글 말씀을 듣고 생각해보니,
갈애가 바느질하여 깁는 것은 마음과 대상이군요.
그렇다면 '알음알이'와 / '양극단인 (대상에 해당하는) 정신과 물질'을
갈애가 기워 바느질할 테니.
제 생각이 틀렸고, 답변해 주신 분의 말씀이 옳았습니다.
*첨가: 2022, 12,18. 오전 7시 25분)
- 여기서 ‘유신견의 멸滅’이 ‘수다원 과’ 라는 붓다명상mindsati 님의 댓글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중간인 알음알이를 ‘아라한’의 경지라고 본 것이 틀렸다는 것을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도 답변해 주신 분의 말씀이 옳았습니다. 그분의 답변을 인용하겠습니다.
//더럽혀지지 않는다'는 뜻은 지혜로써 더럽혀지지 않기에
궁극적으로는 [출세간도의 진리와 함께] 감각접촉 등이 소멸하여 더럽혀지지 않음(멸성제)과
중간적인 의미로 깨끗하게 닦아나가 더럽혀지지 않는다(도성제)는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 또 다른 비구
“도반들이여,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六內處]가 첫 번째 극단이고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六外處]가 두 번째 극단이며 알음알이[識]가 중간이고 갈애가 바느질하는 여인입니다. ...”
(저의 피상적인 생각: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六內處]’와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六外處]’라는 양극단을 알면 중간에 해당하는 ‘알음알이[識]’가 더럽혀지지 않는구나. 즉 양극단을 알면 갈애가 이 두 가지를 기워서 바느질을 하지 못하는구나.)
6. 또 다른 비구
“도반들이여,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음[有身, 五取蘊]이 첫 번째 극단이고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음의 일어남이 두 번째 극단이며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음의 소멸이 중간이고 갈애가 바느질하는 여인입니다. ...”
(저의 피상적인 생각: ‘有身’과 ‘유신의 일어남’이라는 양극단을 알면 중간에 해당하는 ‘유신의 소멸’은 더럽혀지지 않는구나. 즉 양극단을 알면 갈애가 이 두 가지를 기워서 바느질하지 못하는구나.)
◌ 세존의 말씀
“비구들이여, 그대들 모두가 다 방편적으로 잘 말하였다. ...”라고 하시면서 ...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감각접촉[觸]이 첫 번째 극단이고 감각접촉의 일어남이 두 번째 극단이며 감각접촉의 소멸이 중간이고 갈애가 바느질하는 여인이다. ...”
첫댓글
불교에서 ....... ‘셋’이라는 숫자는 .... ‘心(citta), 意(manas, mano), 識(viññāṇa)’과 관련이 이 있고요 ...........
‘둘’이라는 숫자는 .... <①‘心=意=識’과 ②대상(ārammaṇa)과의 관계>에서 거론되는 숫자입니다.
不貳過님.
얼핏 보면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5개(蓋, 障礙)와 7각지(覺支)’의 관계에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5개(蓋, 障礙)>는 무명의 食(āhāra, =자양분)이고, <7각지(覺支)>는 明(vijjā)의 食(āhāra, =자양분)이라는 점에서 ....... 대부분의 ‘핵심적인 불교용어들’은 ... <‘5개(蓋, 障礙)와 7각지(覺支)’의 관계>에서 언급되는 것들입니다.
예, 아위자님. 말씀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정신[名]과 물질[色]과 알음알이[識]를 어떻게 이해하면 되는지요?//에서는
정신[名]과 물질[色]과 알음알이[識]은
느낌 인식 의도行 촉 작의 등 과 같은
정신들의 식별名(초선정에서 경험함)과 사대에서 파생된 감성물질色의 삼특상과 혐오스럼의 경험등 을 통쳐서 묶은 식별들을 名色의 識에 의미합니다.
이렇게 名色을 정의한 M9<바른 견해경>을 참조바람니다. 이 경전이 곧 축약된 해석이구나!라고 마음에 와 닿지요?
//알음알이와 정신-물질이 서로를 조건 짓는 관계이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정신-물질의 중간이라고 설했다고 합니다.//의 조건 짓는 관계에서,
알음알이識의 有無에 따른 조건으로써 識을 연유로 함께 생겨난 정신-물질의 일어남과 그침滅이라는 조건성의 연기관에 의해서 연기된 법(정신-물질)의 확립을 아는 알음알이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간경도 역시 연기관입니다.
이처럼 정신들의 식별을 그침滅의 중에 의해서 연기된 법의 확립에 설명하는 것이죠.
즉, 중도를 연기된 법의 예시로써 6가지 중에 풀어 쓴 경문입니다. 그래서 유신견의 멸滅이 수다원과 이지요.
안의 감각장소와 밖의 감각장소가 2가지 五문과 意문전향을 포함한 인식과정의 알음알이(육식)를 의미
예, 붓다명상mindsati 님.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네. 선정 사마타를 늘 공부하시면 경문속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에 체득됩니다.
https://youtube.com/shorts/Ku1ZDfV-NCM?si=J7jpRcJ6rTLJUqN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