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영락없이 나는 이곳에 있다
나는 이제 이 안에서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한다
지하철에서 내려 긴 통로를 걸을 때
계단을 올라가면 입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입구를 지나 새로 열리는 세계가 아니라
다시 반복되는 영원의 길들이었다
(중략)
슬며시 누르는 슬픔이
영혼 속의 물곰치 한 마리로 헤엄친다
- 허수경 '지하철 입구에서' 일부
출근길과 퇴근길이 아니더라도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만 같은 서늘한 기분이 드는 날들이 있다. 침잠하는 골방, 슬픔은 발신인 없는 익명으로 들이닥친다.
영원히 나의 침대로 귀가하지 못할 것만 같아서 삶은 때로 가늠할 수 없다.
길을 걷지만 길이 아니라고 느껴질 때엔 이 시를 기억해보자.
'영락없이' 이곳에 있어도 애인 같은 물곰치 한 마리가 있지 않던가. 녀석의 못난 표정을 가만히 살피면서 오늘도 이 길을 함께 걸어가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