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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2년 6월 15일 금요일 예수 성심 대축일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더욱 공경하며 묵상하는 날이다. 성체성사와 연관되어 있기에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낸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때부터 일반화되었고, 1856년 비오 9세 교황 때 로마 전례력에 도입되었다. 한국 천주교회는 1995년부터 해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내 오고 있다.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의 행복을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지금도 성체성사를 통하여 은총을 베풀고 계십니다. 예수 성심의 깊은 사랑을 묵상하며 미사를 봉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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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요한 19,31-37)
One soldier thrust his lance into his side,
and immediately blood and water flowed out.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성장을 도와주셨다.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지파마다 청하는 것을 다 들어주셨다. 그분은 결코 모른 체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연민과 동정으로 계속 다가가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은 거룩한 분이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를 선택하신 분은 주님이시다. 복음의 일꾼으로 삼으시고자 택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 안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를 사람들에게 알리게 하셨다. 이제 모든 이는 주님의 이끄심으로 굳건한 신앙인이 될 것이다. 바오로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셨다. 군사들은 확인하러 왔다. 하지만 이미 숨지신 것을 알았기에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에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다. 그러자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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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자식은 부모의 고통을 알게 될 때 성숙해집니다. 부모의 아픔을 보고 자란 자식은 쉽게 벗나가지 않습니다. ‘가족애’는 미움과 사랑 때문에 울어 볼 때 싹을 틔웁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모두 어른인 것은 아니지요. 고통의 옷을 입어야 어른이 됩니다. 남을 위해 아픔을 겪어 본 사람이라야 어른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몸은 어른인데 생각은 ‘어린애’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어려움’을 피해 다녔기 때문입니다. 고뇌가 없으면 성숙도 없고 발전도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어린이의 신앙’으로 남게 됩니다. 작은 고통에도 휘청거리고 기도와 성사 생활에서는 불평을 내세웁니다. 힘들다고 보채고, 주지 않는다고 투정 부리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해야 변화를 만납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예수 성심 성월’을 제정했습니다.
주님이신 그분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모욕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무죄하신 분께서 그토록 황당한 일을 당하셨습니다. 억울함의 극치입니다. 그런데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참아 내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불평하고 외면하려 들면 더욱 모르게 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마음을 더욱 깊이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분을 기억하며 ‘나의 십자가’를 끌어안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들
-이준석 신부-
한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사랑 받는다’라고 느낄 때 나를 사랑해주는 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제안하는 대로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말들 중에 ‘사랑’이라는 단어만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도
드물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대방에게 요구하고 집착하고
결국 내 것을 찾으려하는 속성이 인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실한 사랑은 일종의 검증을 거쳐야 합니다. 가장 확실한 검증은
‘희생’입니다. 스스로를 소진시켜가면서 다른 이의 참다운 이익을 도모하는
사랑은 결코 거짓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로부터 그러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옆구리에서 솟아나온 물과 피로
우리를 다시 나게 하셨고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 사랑을 받아 누립니다. 물로 상징되는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는 깨끗하여지고, 피로 상징되는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양식을
받아먹고 기운을 차립니다. 그리고 그분처럼 살기로 다짐합니다.
‘희생’을 동반한 진정한 사랑, 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사랑 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사랑’,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그분의 성심입니다.
두려움의 바다에 나를 던져버리기
- 임순연 수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에 잠기고자 교회는 6월 한 달을 예수 성심 성월로 기억하고 성경을 통하여, 성가를 부르며 예수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분의 피와 땀, 창에 찔리신 옆구리의 피와 물에서 그 절정을 이룹니다.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 복음에서 군사 하나는 이미 숨지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름으로써 그분의 죽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옴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 이후 교회의 역할을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를 이루는 교회에서 힘을 얻는 우리는 생명과 사랑을 나누셨던 그분의 삶을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온 생애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전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순간 하느님 나라를 이어가기 위한 성사를 이루십니다. 이제 나를 통한 복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제 몸이 없습니다.
당신의 몸밖에는,
그분에게는 손이 없습니다.
당신의 손밖에는,
그분에게는 발이 없습니다.
우리의 발밖에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눈을 통하여
연민 가득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발로 뛰어다니시며 선을 행하십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의 손으로 우리를 축복하고 계십니다.
- 예수의 데레사
아낌없이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십자가를 통해 드러내셨고 지금도 쏟아주고 계신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에 잠기는 예수 성심 성월이 되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심장의 사랑
-김찬선신부-
언젠가 수녀원에 가서 성탄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수녀님들 말고도 몇 가족이 있어서 미사를 드리고
같이 축하 다과를 하였는데 그 중 한 아이가 저에게
“거룩하시다가 무슨 뜻이에요?”하고 느닷없이 묻는 것이었습니다.
갑작스런 질문에 대답을 하느라 끙끙댔던 기억이 납니다.
그 뒤에 정리한 생각은 이렇습니다.
거룩한 것은 수평적 차원과 수직적 차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수평적 차원에서 거룩한 것을 얘기하면
거룩한 것은 ‘남다른’ 것입니다.
여느 것들과는 다른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남다름이 요즘 젊은 사람들처럼 그저 튀기 위함이 아닙니다.
만일 그러한 남다름이라면 그 또한 속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것은 신적인 면에서 남다른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함의 수직적 차원입니다.
사실은 하느님만이 거룩하신데,
그래서 거룩함은 모두 하느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가는 하느님께 노래하고 하느님을 노래합니다.
성당은 하느님만을 위해 쓰이는 공간입니다.
성작은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때만 쓰이는 잔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당연히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이고
그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한 마디로 얘기하면 사랑의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마음일지라도 여느 사랑과 다릅니다.
그것은 근심하는 사랑,
그것은 무거운 짐을 대신 지는 사랑,
그것은 영악하지 않고 알고도 져주는 바보 사랑,
그것은 자기의 상처로 다른 이의 상처를 낫게 하는 사랑,
그것은 한 마디로 십자가 위에서 창검에 찔린 심장의 사랑입니다.
머리의 사랑이 아니고,
감성의 사랑이 아니고,
심장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서로의 사랑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이 사랑은 지상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이 사랑은 하늘을 향합니다.
이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을 같이 바라보고
이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을 같이 흠모하고
이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을 향해 같이 나아갑니다.
서로를 바라보고 연모하던 풋사랑의 연인들이 부부가 되어
온갖 풍상을 같이 맞고
서로의 짐을 나눠 지고
마침내 같이 하느님을 바라보고
같이 하느님께로 향해 가는 것,
이것이 성심의 사랑이 아닐까,
이 새벽 묵상해봅니다.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
-전삼용신부-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저는 사람의 ‘마음’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자동차의 엔진이 생각났습니다.
로마에서 저희 교구 차로 운행하는 오래된 자동차가 있습니다. 20만 킬로를 뛰었으니 폐차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 그런 차입니다.
차가 점점 힘이 없어져서 정비소에 맡겼더니 엔진이 수명이 다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오일이 잘 돌지 않아 중요한 부분들이 마모되어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중고 엔진을 얹도록 했는데 어찌 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엔진은 한 번 나빠지면 스스로 좋아지는 법이 없습니다.
자동차의 엔진은 기름을 연소하여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사람의 심장과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 뇌 다음으로 마지막으로 죽는 것이 심장이라고 합니다. 심장이 뛰지 않으면 사람이 완전히 죽은 것이듯이 엔진이 고장 나면 자동차가 완전히 죽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죽으면 영혼은 죽고 육체만 걸어 다니는 산송장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마음이란 자동차로 말하면 엔진과 같은 영혼의 심장입니다.
론지누스라는 백인대장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릅니다. 그 옆구리를 지나 창은 심장을 관통합니다. 예수님의 심장에서는 피와 물이 나왔습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물은 성령님입니다. 자동차의 엔진도 기름이 있어야 하고 심장도 피가 있어야 하듯이 영혼도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는 마음 안에 성령님이 계셔야합니다. 성령님의 열매가 사랑입니다. 성령님 없이는 사랑의 열매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충만하셨습니다. 그래서 온전한 사랑을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는 그 분이 피를 흘리셨다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피는 생명, 즉 당신의 모든 것을 인간에게 주실 정도로 완전하게 사랑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만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죽으시고 당신의 모든 것, 즉 생명과 성령님을 인간에게 주셔서 인간이 새로운 마음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신의 마음이 그만큼 완벽하게 성령의 에너지를 연소시켜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엔진이 고장 나면 기름을 아무리 퍼부어도 제 힘을 발휘 할 수 없게 됩니다.
즉, 누구를 아무리 용서하고 사랑하고 싶어도 그것이 잘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둘째 치고 용서도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이는 내 마음이 고장 나서 성령의 에너지를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미워하는 것 때문에, 용서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힘든 것을 알면서도 용서가 안 되는 것은 그 사람이 그만큼 큰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의 마음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먼저 나의 마음을 예수님의 심장처럼 완전하게 작동하도록 수리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나에게 아주 작은 잘못을 하는 사람까지 용서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새로운 마음을 갖고 예수님의 마음처럼 사랑으로 불타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아빌라의 데레사는 사랑으로 불타는 심장을 갖고 싶어 기도하였더니 천사가 불화살로 그 분의 심장을 찔렀고 정말 죽어서도 심장엔 불화살에 그을린 자국이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자동차의 엔진이 고장 나면 정비소에 맡겨야 하듯이, 심장이 작동을 안 하면 의사를 찾아가야 하듯이 나의 마음도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을 때는 당연히 그것을 고치고 바꾸어 줄 수 있는 분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다윗은 우리야를 살해하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그 죄를 뉘우치는 시를 지은 것이 시편 51편입니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죄와 허물을 깨끗이 씻어 줄 것을 청하는 동시에 새로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내 안에 만들어 주시고 굳센 영을 내 안에 새롭게 하소서.”
즉, 우리 안의 엔진, 즉 영혼의 마음을 새롭게 만들어 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시고 그 안에 새로운 영을 넣어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차로 말하면 엔진을 바꾸어 주고 기름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란 뜻입니다. 고장 난 엔진으로 혼자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우리 마음을 만들어주시는 하느님께 항상 더 예수님의 성심 닮은 마음과 충만한 성령님을 부어주시기를 청해야겠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심장 살과 피를 영하는 영성체 때에 그분의 심장과 영으로 우리 마음을 바꾸어 주십사 청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미어지는 마음
-상지종신부-
상대방과 대화를 할 때, 가끔씩 제가 상대방 자리에 앉아서 저 자신이 제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행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경우 어떤 때는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좋은 쪽으로 대화나 행동을 이끌어주기에 어떤 때는 의식적으로 이렇게 하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말하고 행동하는 저 자신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선명하게 제 자신을 보았던 경우도 꽤 있습니다. 상대방의 귀와 눈으로 말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거짓말을 하거나 위선적인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거짓말을 하거나 위선적인 행동을 할라치면 말하고 행동하는 주체로서 제 자신과 상대방의 자리에 앉아서 주체인 저를 바라보고 있는 객체로서의 제 자신이 충돌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금은 이러한 체험을 자주 못합니다. 사제로서 살아가면서 이러한 체험들이 일상적인 것이 된다면, 형제 자매들과 서로 다른 삶의 방식에서 오는 차이들을 극복하고 더욱 진솔하게 만날 수 있을텐데, 알게 모르게 뱉어내는 권위적인 말이나 행동들을 자제하고 정말 흉허물 없는 만남을 가질 수 있을텐데,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좀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씩 예수님의 입장이 되어서 제 자신을 돌아보곤 합니다. 복음 묵상을 하다보면 이러한 경우들이 가끔씩 생기지요. 그 내용이야 어쨌든 값진 체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저만 말하고, 저만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인간적인 한계이겠지만, 예수님의 자리에 앉아 예수님께 드리는 제 말과 행동을 듣고 보는 체험은 이러한 인간적인 한계를 뛰어넘게 해줍니다.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렇게 힘없이 죽어가신 예수님께 뭐라고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어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는 제 자신을 봅니다. 겉으로는 분명 제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지만, 십자가에 달려서 저를 바라보고 계시는 예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 축쳐진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 손이 찢어지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두 팔이 힘을 줄 수밖에 없는 상태, 심장을 누르는 압박 때문에 마지막 숨 한번 고르게 내쉴 수 없는 상태에서 저만치 아래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저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보다는 예수님의 찢어지고 미어지는 마음을 더 절실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저만의 불온한 느낌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제가 느끼는 예수님의 이 찢어지고 미어지는 마음, 저를 향해 한숨을 내쉬시며 안타까워 하는 마음을 제 안에 담고 싶습니다. 바로 이 마음이 저와 예수님을 하나로 이어주고 있기 때문이여, 저에게 더 간절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님의 이 마음이 저를 움직여 제가 다른 이를 향해 쉼없이 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병사들이 와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의 다리를 차례로 꺾고 예수에게 가서는 이미 숨을 거두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는 대신 군인 하나가 창으로 그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
<신부님의 딱 한 가지 나쁜 습관>
-양승국신부-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이자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사제로 산 횟수가 점점 늘어감에도 불구하고 사제로서 가장 본질적인 목표인 성화(聖化)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반성합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 더욱 깊이 뉘우치며, 더욱 강하게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매달리는 하루를 살아야겠습니다.
사제 성화의 날을 맞아서 사제가 성화(聖化)된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무엇보다도 성화(聖化)된다는 것은 거룩하게 된다는 것, 세상 그 한가운데 살아가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는 한 송이 연꽃처럼 산다는 뜻이겠지요. 거룩함의 원천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매일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정화의 길을 걷는다는 것, 그래서 혼탁한 세상 한가운데 존재하면서도 또 다른 예수님으로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이 사제 성화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제 역시 아무리 성덕이 뛰어나고 다방면에 걸쳐 유능하다하더라도 하느님 앞에 나약하기 그지없는 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매일 육화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매일 영하는 그분의 살과 피로 인해, 매 순간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축복으로 인해 거룩하고 굳센 사제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제 성화의 날을 맞아 자연스럽게도 저희 부족한 신참내기들의 모범이 되어주신 몇몇 선배 신부님들의 삶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여러 신자들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오랜 세월 주로 시골에서 많이 사목하셨던 신부님의 사연이지요. 신부님께서는 당시 모든 본당 신자들이 한결같이 싫어하는 습관을 한가지 가지고 계셨는데, 아무리 고치라고 부탁드려도 절대로 말을 듣지 않으셔서 신자들 속이 꽤나 상했답니다.
신부님의 불치병은 "딱한 사람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병"이었습니다. 한끼 구걸을 위해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던 거지들이 많았던 시절, 신부님이 머무시던 사제관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또 하필 신부님이 숟가락을 막 들려할 때 거지들은 문을 두드렸습니다. "오늘만은 절대로 안 된다"는 식복사 아주머니께 신부님은 거의 사정하다 시피해서 거지들을 자신의 식탁에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렇게 겸손하게 그렇게 가난하게,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시던 신부님께서 어느 날 홀연히 이 세상을 떠나셨지요.
후임 신부님을 위해 사제관을 정리하던 신자들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부님의 침실에는 평소 입고 다니시던 옷가지 몇 벌 밖에 없었습니다. 사제관의 거실에는 평소 신부님이 보시던 책들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또 한 분 세월이 흘러도 잊지 못할 신부님이 계십니다. 그 스페인 신부님은 제 뇌리에 사제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강하게 각인시켜주셨습니다. 그분은 외국에서 잠시 공부하던 시절, 저희 사제들을 위한 기숙사 공동체 원장신부님이셨지요.
일흔이 훨씬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70명이 넘는 저희 다국적 사제들-이국 땅에서 나름대로 고생하던-을 위해 하루 종일 헌신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신부님은 언제나 저희들 곁에 계셨습니다. 사무실을 노크할 때마다 한번도 허탕친 적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저희보다 먼저 성당에 도착하셔서 진지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고, 한마디라도 유익한 말씀을 전해주기 위해 언제나 공부하셨습니다.
형제들이 아플 때, 고민거리가 있을 때, 힘겨워할 때 마치 친아버지처럼 바로 곁에서 지켜주셨고 위로해주셨고, 조용히 도와주셨습니다.
너무나도 소탈하고 너무나도 정이 많던 신부님이셨기에 식사시간마다 서로 그분 옆에 앉으려고 경쟁을 했습니다.
한 사제가 성화된다는 것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춰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 사제가 성화된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가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거부하지 않고 그들의 친구가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하루 저희 사제들을 위해 기도 많이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제들이 받았을 때 가장 고맙고 소중한 선물은 다른 무엇에 앞서 기도의 선물입니다. 사제들은 신자들이 열심히 바치는 기도를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사제 성화의 날을 맞아 특별히 가까이 계시는 신부님들, 인연을 맺었던 신부님들, 병고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어려움 중에 계시는 신부님들을 위한 열렬한 기도 부탁드립니다.
<군인 하나가 그 옆구리를 찌르니,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
-박상대신부-
이곳 산청 성심원에서 봉사활동 사흘째를 맞이한 오늘은 예수성심대축일이다. 오늘 축일은 예수님의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자는 의도에서 그리스도의 성체성혈대축일 다음 첫 금요일에 지낸다. 1856년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로마교회 전례력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으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게 되었다. 1995년부터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오늘 예수성심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정하고 사제들이 자신의 복음선포와 성사거행의 직무에 더욱 충실히 임할 수 있도록 권고하였다.
예수성심대축일은 이곳 산청 성심원의 생일(生日)이라 경사가 겹쳤다. 산청 성심원은 한센병 환우요양시설(성심원)과 한센병 장애요양시설(성심인애원)을 갖추고,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소외된 한센병 환우들을 치료하고 보호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 안에서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1959년 6월 19일 금요일(예수성심축일)에 설립되었다. 설립자는 작은형제회(프란치스꼬 수도회) 이태리 리구리아 관구 소속으로 1955년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진주 옥봉성당 주임으로 일하던 코스탄죠 쥬뽀니 신부이다. 현재 이곳에는 한센병 환우 350여명과 55명의 직원, 8명의 작은형제회 수도자와 10명의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수도자들이 살고 있다. [주소 : 경남 산청군 산청읍 내리 100 ☎(055) 973-6966/ Fax 973-6967)]
한센병(나병, 癩病, Leprosy, Hansen’s disease)은 의학적으로 “나균(癩菌)의 감염에 의해 발생하는 만성 육아종성 염증질환”을 말하며, 감염력이 제일 약한 제3종 전염병에 속한다. 나병은 유사이래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지만(구?신약성서 참조), 나병의 원인이 되는 나균(癩菌)이 1873년 노르웨이 태생 한센(G.H.A. Hansen, 1855-1832)에 의해 발견됨으로써 나병을 한센병이라 칭하게 되었고, 종래의 나병에 관한 모든 부정적인 견해들이 단번에 불식되었다. 한센병은 통상 호흡기, 위장, 피부를 통해 감염되나, 상처를 입은 피부를 통해서만 감염된다고 보는 입장이 통설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환자들의 치료와 봉사에 종사하는 사람 중 감염된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학자들은 한센병의 근원지로 이집트, 인도, 중국 등을 지목한다. 이들은 고대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하지만, 덥고, 인구가 조밀하고, 빈곤자들이 모여 살며, 큰 강을 끼고 있어 홍수의 범람과 습기가 많아 비위생적이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하면 전세계 한센병 환우 수는 1천60만명으로 추정되며, 우리나라에는 현재 항나제 투약중인 요치료자가 대략 14,120명에 이른다고 한다.
오늘 44회 생일을 맞은 산청 성심원의 모든 식구들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드리며, 하느님 성심의 불타는 사랑이 이곳 환우들에게는 삶의 위로가, 환우들을 위해 함께 살아가는 봉사자들에게는 수고의 위로가 되길 기도드린다. 하느님에 대한 인간 이성의 통찰과 학문적 연구는 그분의 외적인 실존만을 파악할 뿐이다. 하느님의 내적 실존의 신비는 사랑이다. 사랑은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다.(에페 3,19) 하느님의 내적 신비가 사랑이라는 것은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익히 밝혀진 사실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걸음마를 가르치고, 팔에 안아 키워주고, 매어주며, 묶어 이끌고, 젖먹이처럼 들어올려 볼에 비비기도 하며, 허리를 굽혀 입에 먹을 넣어주고, 죽을 것을 살려주시는”(호세 11,3-4) 그런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때가 차서 세상에 파견된 성자를 통하여 결정적으로 계시되었다. 아들의 성심 안에서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이 살고 계신다. 그 사랑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창에 찔리심으로써 피와 물을 쏟으신 것이다.(34절) 예수성심께서 쏟으신 피와 물은 세상을 구원하는 성사이며 세상에 생명을 주는 성사이다. 그 사랑이 이제는 우리의 사랑을 기다린다. 우리의 사랑은 아낌없이 내어주는 불타는 성심에 대한 응답으로써 확고한 믿음과 의심 없는 신뢰와 깨끗한 봉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 성심(聖心)"
-이수철신부-
예수성심의 사랑은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처와 아픔, 희생이 따르는 현실적 사랑입니다.
연애 때의 낭만적 꽃 같은 사랑이 아니라,
결혼 이후의 산전수전 시련 중에 익어가는 열매 사랑과 같다 하겠습니다.
오늘 문득 묵상 중에 떠오른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성심 안에 환히 드러났습니다.
오늘은 예수성심 대축일이자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예수성심 안에 환히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기리는 날이자.
모든 사제들이
예수성심의 사랑을 지니고 거룩하게 살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오늘 1독서의 호세야 예언자를 통해서도
하느님 사랑이 실감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역시 순탄한 사랑만은 아닙니다.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르는,
사람들에게 많이도 상처받고 고통 받는 사랑입니다.
아마 자녀 문제로 큰 아픔을 겪고 있는 부모님들,
이런 하느님의 마음을 잘 이해하실 겁니다.
무한한 인내의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의 무한한 연민의 반영입니다.
겨울, 봄, 여름의 추위와 더위 등 온갖 시련 중에 익어가는 열매이듯이,
온갖 시련과 고통 중에 익어가는 사랑의 열매들입니다.
낭만적 꽃 사랑이 끝나면 열매 사랑으로 익어가는
기나긴 인고(忍苦)의 여정이 있을 뿐입니다.
온갖 시련을 겪어가며 성숙하는 사랑이요, 연민의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통해 우리는 예수성심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만납니다.
하느님의 위로와 구원을 체험합니다.
사랑의 깊이에서 위로와 치유, 생명의 하느님을 만납니다.
마침내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고,
우리도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예수성심은 연민의 바다와도 같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
바로 예수성심의 사랑과 생명을 상징합니다.
예수성심의 샘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생명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우리 마음을 예수성심의 사랑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11,29ㄱㄴ).”
아멘.
새벽을 열며
저는 6남매 중의 막내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저에게 식구가 많아서 좋았겠다고 말씀들을 하십니다. 그러나 지금 어렸을 때를 떠올리면 분명히 외로움을 느끼면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 위의 형, 누나들과 나이 차이가 좀 있거든요. 그래서 형, 누나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같이 놀 사람이 집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옆집에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셔서 더욱 더 혼자 지낼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혼자서 지내다보니 혼자 노는 방법을 찾게 되더군요. 물론 지금처럼 컴퓨터가 있던 시대도 아니었기 때문에 혼자 지내는 것이 상당히 어려울 것 같지만, 혼자 노는 방법도 상당히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지요. 흙장난, 공놀이, 딱지치기, 강아지와 놀기, 책읽기 등등……. 혼자서 놀 수 있는 것들은 생각보다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지금 신부가 되어 이 어렸을 때의 체험이 제 자신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신부이기 때문에 혼자일 때가 많고, 또한 그 혼자 지내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를 알기에 혼자 있어도 전혀 외롭지가 않거든요.
따라서 저의 체험을 통해서 요즘 놀 거리가 없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심심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의 심심함은 외로움인 동시에 조그마한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축복의 시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고통과 시련이 이런 것이 아닐까요? 즉, 고통과 위기 그리고 시련의 시간이 오히려 내게 있어 축복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긴 예수님의 고통, 수난, 죽음을 통해서 우리들의 구원이 이루어졌음을 기억할 때, 나의 고통과 시련을 가져오는 하나의 희생이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장기나 바둑을 둘 때, 하수와 고수를 결정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몇 수 앞을 내다보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수가 고수의 그 깊은 뜻을 알 수 있을까요? 그 깊은 뜻을 알 수가 없기에 패배를 하는 것이고, 나중의 결과를 통해서 ‘역시 고수구나’라는 소리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들 삶의 진정한 고수는 우리들이 믿고 따르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처럼 바로 앞의 일만을 바라보는 하수의 모습을 취하지 않으시고, 대신 몇 수 앞을 내다보시면서 우리들을 가장 좋은 길인 참된 행복의 길로 이끌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고수이신 주님을 조금이라도 닮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행동으로 그 말씀을 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마치 내가 고수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주님의 이끄심을 반대하고, 내 뜻을 주님의 뜻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성심대축일을 맞이하는 오늘, 예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주님처럼 진정한 고수가 되기를 소원하여 봅니다.
사제성화의 날인 오늘, 자신의 본당 신부님을 위해 기도합시다.
빠다킹신부
용기가 필요한 사랑의 표현
-이봉하수사-
어떠한 사건에 있어서 증인이 없는 경우 해당 사건은 미궁에 빠지거나
사건 해결에 장시간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건을 처리하는 사람들은
최대한 많은 증인을 확보한 상태에서 하나하나 기록하고 해결해갑니다. 그러나
세상에 어느 사건이든 증인이 없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성장과정, 죽음과 부활 사건 안에도 많은 증인들이 있습니다. 그 증인들은 당시의
명망가들이 아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지만 간혹 예수님의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 중에서도 바른 증언을 한 사람이 있었음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골고타 언덕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생생하게 목격한 사람은
군인들입니다. 당시의 사회구조상 군인들도 백성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군대라는 특수 집단의 속성상 권력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사건 앞에서는 자의반 타의반 바른 증언이 아닌 위증을 하였을 것이지만, 복음에
나오는 군인은 이름 없는 증인으로 등장합니다. 또한 그 사람의 증언이 성경에
기록되고 ‘증언’이 ‘참되다’라고 반복을 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모순된
증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존재와 예수님에 대한
증인들 중 이름을 남기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에 대하여 말 한마디 잘못해서 자신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군인의 용기와 증언은 오늘 우리 주위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강민구 목사-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등 세 가지 상을 받은 영화 ‘크레쉬(crash)’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현대인들의 삭막한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충돌(crash)을 ‘소통’ 가능케 하는 ‘만남의 장’으로 보는 시각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은 한 열쇠수리공이 딸아이가 총을 무서워하며 늘 두려움에 떨자 자기가 어렸을 때 엄마에게 물려받았다는 투명망토를 딸에게 입혀주며, 그것을 입으면 어떤 총알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딸아이는 그제야 안심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빠가 총을 든 괴한에게 위협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자기는 투명망토를 입었으니 괜찮다고 하며 아빠를 지키기 위해 뛰어들며 말합니다. “아빠, 내가 지켜줄 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결국 그 아이의 행동으로 인해 아빠는 물론 괴한까지도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똑같은 투명 망토를 보면서도 그저 꾸며낸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도, 혹은 하나의 장난감으로 받아들일 수도, 아니면 진지하게 자신과 가족을 구할 수 있는 방패막이로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비록 똑같은 것이라도 누구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줄 수 있는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이지요.
예수께서 돌아가시자 군사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고자 그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고,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피와 물을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흘리신 피와 물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군사들에게는 죽음을 재확인하는 증거이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군중에게는 예수님도 그저 나약한 인간일 뿐이며 자신들의 결정이 옳았음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이름 모를 어떤 사람에게는 별다른 의미도 없는 그저 그런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때 예수께서 흘리신 피와 물은 내 죄를 사하시는 용서의 샘물,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는 생명의 샘물, 거듭난 사람답게 살게 하시는 성령의 샘물입니다. 나는 누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정상천 신부 -
오늘 우리는 엄청나게 중요한 대축일을 기념합니다. 예수성심대축일이자 동시에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모든 축일들이 고유의 축일로 기념하게 되는 데에는 역사와 유래가 있게 마련인데, 예수 성심대축일은 1856년에 교회의 전례력에 도입되기 시작하였고, 1969년 이래로 오늘날 기념하고 있고 축일로 정착하게 됩니다. 아울러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1995년부터 사제 성화의 날로 제정하였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예수성심대축일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강조하고 속죄의 사상이 강하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보속의 정신이 아니라 성부께서 인류에게 보여 주신 놀라운 사랑에 대한 감사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성심대축일은 주님의 의지,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주님 마음의 계획, 주님 사랑의 불을 간청하는 의미가 부각되었습니다. 즉 예수가 당신의 전 인격의 표현이며 동시에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최고의 사랑의 표현인 우리 인간들을 위한 마음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오늘 들은 복음을 통해서 철저한 인간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은 ‘군사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고,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복음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 성심을 묵상하면 무엇이 연상이 되십니까?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 보여주신 철저한 사랑 등이 우선 떠올려집니다. 이것을 다시 말해본다면, 인간을 위해 보여주시는 최고의 모습, 최고의 사랑, 더 이상 어떤 방법으로 그분의 사랑을 증거해 보이는 방법이 없을 정도의 사랑 최절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으로서 자신의 창조물인 인간이 비록 죄가 많으면서도 극진히 사랑하시는 그런 모습을 십자가상의 방법을 통해서 보여주시고, 이제 더 이상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그런 분이십니다.
짤막한 예화 하나를 소개한다면, 어떤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목욕탕 가는 것을 즐거워하셨고, 매주 한 번씩은 꼭 아들과 함께 목욕탕에 가야지만 해야 할 일을 한 것처럼 느꼈습니다. 아들이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잘 따르고 해서 곧잘 목욕탕에 갔었지만, 아들은 성인이 되어가면서 점점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 섭섭했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의 의사를 존중해줘야겠고 강제로 목욕탕에 가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답답한 아버지의 마음을 아들은 이해하기가 만무합니다.
이처럼 아버지는 자신의 사랑을 모두 다 쏟아 자녀에게 주고 싶지만 그 방법과 한계가 아들이 성장할수록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이것이 인생이 흘러가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은 2000년이 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있는 시간동안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엄청난 세월을 답답해하고 계심을 느끼게 해주는 예화입니다.
우리는 이 축일을 지내면서 사람이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먼저 기도하고 계셨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바탕은 바로 그분께서 우선 나를 위해 일하고 기도하고 계셨고, 앞으로도 먼저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실 것임이 그 기도의 바탕이어야 합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에서 나온 것처럼 그분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먼저 알고 계시니, 긴말을 되풀이하기보다는 그분과 함께 생활한다는 것이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사실로 다가옵니다.
- 이회진 신부-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낭만파 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낭만파라고 해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꿈과 이상적인 시를 지었던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바이런은 행동하는 신앙인이었고,
자유를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내어 놓는 열정을 가진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러시아가 확장 정책으로 오스만투르크, 지금의 터키를 침략했을 때
러시아의 침략 전쟁에 맞서 싸우는 자유의 편에 서서 싸웠고,
결국 이 전쟁의 와중에 전사하였을 만큼 자유에 대한 신념이 강한 행동주의자였습니다.
이런 바이런은 본래 신학생이었습니다.
바이런이 신학생이었던 시절 일화 중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에 관해 논하라”는 시험이 있었는데,
시험 문제가 나오자마자 다른 학생들은 열심히 시험 답안지에 무엇인가 쓰는데
바이런은 창밖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교수님은 처음에 바이런이 머리속으로 먼저 어떻게 쓸 것인가
논리적으로 정리하고 있는가 보다 생각하였죠.
그런데 한참을 지나도 여전히 바이런은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왜 그런지 궁금해서, 혹시라도 먼저 뭔가 써 놓은 것이 있나
그의 곁에 가서 살짝 답안지를 보았지만 답안지에는 분명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하나 둘 씩 학생들이 답안지를 제출하고 나가기 시작하는데
바이런이 드디어 뭔가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쓰지 않고 답안지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답안지를 교수님에게 제출하고는 나가 버렸습니다.
그 답안지에는 이렇게 쓰여졌다고 합니다.
“물이 술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졌다.”
교수님은 그에 최고 점수를 주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성심 대축일을 기념하며 요한이 복음 중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마지막 장면을 묵상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로마 병사들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예수님의 옆구리에서는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요한 복음은 전합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물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고,
피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또한 물은 이 세상 모든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고,
피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바이런이 “물이 술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지도다”라고 한 것은
인간의 마음 안에 들어온 하느님의 사랑을 그렇게 이야기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우리가 알게 될 때
그 사랑이 핏빛 열정으로 죽음마저 불사한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에 젖어들 때
우리가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저 그 분의 사랑에, 그분의 마음에 감사하는 것,
그저 그 분의 뜨거움 앞에 얼굴 붉히며
염화미소의 한 순간을 보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며
그분의 사랑을 마음으로 들이마시며 당신이 사랑이 우리를 물들이길 청합니다.
“주님, 당신으로 저를 채워주소서. 아멘.”
-이인옥-
얼마전, 저는 친정어머니를 졸지에 잃는 줄 알았습니다.
폐에서 자라고 있는 양성 종양을 제거하기 위한 수술을 하는 도중
임파선에 전이되어 있는 여러 개의 종양을 새로 발견했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고서 폐암 4기인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밀 검사결과는
다른 기관으로 전이가 되는 특이한 양성종양으로 판명이 되었습니다.
세계적으로 1950년대 최초 발견된 이후로
현재까지 학회에 11번째로 제 어머니가 기록되면서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폐 절제 수술 후에 고여드는 물과 피를 빼내기 위해 어머니는
한동안 옆구리에 호스를 달고 계셨습니다.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와 옆구리의 절개선
그리고 거기에 줄줄이 매달린 주머니를 보면서
예수님의 처참한 상황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피와 물!
그런데 죽음을 예감하며
사선을 넘나드는 그 고통 속에서도
어머니의 걱정은
남겨진 자식들의 장래를 더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아, 그것이 ‘어머니’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돌아가신 시어머님이 대장암 말기로 중환자실에 계실 때.
정신이 왔다 갔다 하시는 혼미함 속에서도
당신의 골치를 가장 많이 썩였던 자식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쟤가 높은 담장 위에 위험하게 서있다. 내려오라구 그래라”
하시면서 자주 헛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그런 어머님 모습 속에서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은 바로 나를 보고도 저런 마음이시겠구나 싶었습니다.
그 마음이 들자마자 눈물이 쏟아졌고
그 이후, 어머님을 살리기 위한,
아니, 목숨을 연장시키기 위한 저의 마음과 손길을
성령이 이끌고 계시다는 사실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피와 물을 쏟고 계신 예수님.
예수님도 당신 자신의 고통보다는
당신을 버리고 도망가 버린 제자들.
당신을 조롱하고 있는 무지한 백성들.
당신을 때리고 찌른 적대자들
가장 부실한 자녀들의 장래를
가장 많이 걱정하시고 계십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피와 물을 쏟으면서도
그 피로 그들의 죄를 씻기시고
그 물로 그들을 정화시키시려고
수난의 길을 자처하신 것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예고했고
백성들이 해마다 초막절을 지내며 기다려왔던
성전 오른편에서 샘솟는 생명의 물은
바로 예수님 당신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고통과 수난으로 만들어진 물과 피였습니다.
2독서에서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분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우리는 죽었다 깨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지극한 부모님 사랑 안에서
그분 사랑의 그림자를 어렴풋이 맛 볼 따름입니다.
예수 성심이여.
무지하고 부실하기 짝이 없는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