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곬의 수행자, 원진 스님
제주도는 바람의 섬이다. 아열대의 기후로 겨울에도 거의 얼음이 얼지 않는 따뜻한 곳이지만 옷 속을 파고드는 바람 때문에 몹시 추운 곳이다. 특히 가난한 수행자의 얇은 옷깃에는 더욱 추위가 심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어느 한 때를 나는 제주도에서 산 적이 있다. 햇수로 삼 년, 겨울만 세 번을 제주도에서 보냈다. 이때 나와 같이 토굴 생활도 하고, 서로 다른 절에 살 때에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만나면서 지낸 스님이 있다.
해인사 백련암 성철 큰스님의 시봉인 원진 스님이 그 분이다.
원진 스님은 나보다 나이가 십 년 정도는 더 연장이었다. 체구는 작았지만 몸이 날렵했다. 성격이 날카로우면서도 매우 다정다감했다. 나에게는 특히 잘해 주어서 인간적으로 원진 스님에게 내가 느낀 정은 무척 깊었다. 제주도는 섬이라 아무래도 육지와는 다른 데가 있었다. 사람들과 외떨어진 곳에 혼자 남았다는 외로움이 항상 떠나지 않는 곳이다. 자주 만날 수 있는 도반도 없었다. 그런 곳에서 원진 스님과 나는 서로 마음이 통하고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도반이었다.
비록 나이 차이는 있었지만 그건 문제되지 않았다.
외로운 것만큼이나 우리는 가난했다. 당시의 사찰은 지금같이 살림이 넉넉하지 못해서 낯선 제주도에서의 우리는 항상 용돈이 궁색했다. 이삼 천 원의 돈은 큰돈이었고 단돈 몇 백 원으로 시내 나들이를 하던 때였다. 둘이서 시내 구경을 나간 적이 있었다. 목욕도 해야 하고 점심으로 중국집 자장면이라도 한 그릇 사먹어야 했지만 돈이 없었다. 책방 앞을 지날 때는 토굴에서 심심풀이 파적삼아 읽을 책이라도 한 권 사고 싶었지만 그것은 무척이나 사치스러운 생각이었다.
그 날은 또 제주도의 그 흔한 바람이 몹시 부는 초겨울이었다.
어느 옷가게 앞을 지날 때였다. 진열장 안에는 곱게 짠 털 스웨터가 걸려 있었다. 우리는 동시에 둘 다 걸음을 멈추고 팔짱을 낀 채로 그 털 스웨터를 바라보았다. 그 때 원진 스님이 “더 추워지기 전에 우리도 저 털 스웨터 하나씩은 사 입어야 올 겨울을 날 수 있을 텐데,,,“ 라고 혼잣말처럼 했다. 그러나 그 해 겨울이 다 가도록 우리는 그 털 스웨터를 사 입지 못했다. 누비 두루마기에 팔꿈치가 다 떨어진 내의 하나로 겨울을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 떨어진 팔꿈치를 통해 맵싸한 겨울 바람은 왜 그리 파고드는지,,, 그렇게 선객의 겨울은 가난하기만 했다. 그래도 원진 스님이나 나는 숫기가 없는 사람이어서 어느 부자 절에 가서 용돈을 얻어 쓴다든지 하는 일은 생각도 못했다. 그러니 겨울이 다 가도록 돈 한 푼 생길 곳이라고는 없었다.
지금도 나는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를 잘 못하고, 잘 아는 사이에도 도움을 청할 줄 모른다. 아무리 힘들고 형편이 어려워도 내색하지 않고 혼자 속앓이를 하고 마는 건 그 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그 해 겨울을 춥게 지내고 나는 육지가 그립고 도반들이 보고 싶어서 원진 스님을 혼자 제주도에 남겨 둔 채 육지로 나왔다. 육지로 나와서는 제주도를 잊어버리고 한 일년 반인가 여려 곳을 떠돌면서 살았다. 그러다가 다시 제주도가 그리워지고 원진 스님이 그리워서 제주도로 돌아갔다. 제주도는 묘한 매력이 있어서 한 번 발을 들여놓은 사람에게는 늘 그리워지는 곳이다. 일년 전이나 일년 후나 제주도는 그대로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다시 돌아온 나를 기다리는 건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고 있는 원진 스님의 모습이었다. 아직도 나는 그 때 원진 스님이 왜 감옥에 들어갔는지를 확실하게 모른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원진 스님은 그저 가난하고 외로우나 누구보다도 진실한 수행자였을 뿐이다. 나와 같이 차비 몇 백 원만 있으면 버스를 타고 섬 안 구석구석을 구경 다녔고, 겨울 눈 밭에서 한란을 캐겠다고 한라산을 뒤지고 다니다가 춘란 하나를 캐들고 와서는 어린애처럼 좋아하던 그런 사람이었다. 여름에는 어디 사람 없는 바닷가에 가서 수영을 하기도 했고, 시내 구경을 나가면 모처럼의 외식으로 자장면을 사 먹고는 잘 먹었다고 좋아하는 그런 사람 있었다. 당시만 해도 티비가 귀한 때였다. 우리는 티비가 보고 싶어서 함덕 정토사에서 조천 고란사까지 겨울 밤 바다 바람을 맞으며 걸어간 일도 있다. 입은 옷이 허술한데다가 바다 바람이 무척 사나웠었다.
언젠가 원진 스님은 내게 나이 사십이 되면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책을 읽을 것이라고 했다. 그 동안은 선객으로 좌선수행만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본래 대학에서 외국어를 전공한 탓으로 영어나 일본어를 잘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 불교 책이 별로 국내에 번역된 것이 없을 떼라 좋은 책을 번역하겠다고 벼르기도 했다. 그런 착하기만 한 사람, 그것도 수행을 하는 스님이 왜 감옥엘 가게 되었는지를 정말 나는 몰랐다. 아무도 내게 말해 주는 사람도 없었고 나도 그 일만은 어쩐지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했다.
당시 제주도에서 같이 지냈던 스님을 얼마 전에도 만난 일이 있다. 그 스님이 주지를 하고 있던 절에서였다. 우리는 서로 그 동안의 안부와 근황만 물었고, 원진 스님에 대한 추억은 일체 말하지 않았다. 나는 원진 스님의 죄명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한 달에 한번 정해진 면회를 꼭꼭 갔다. 여전히 가난한 형편이었지만 영치금도 넣어 주었고 겨울이 돌아오면 내의도 넣어주었다. 주변머리 없는 나는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는 면회 때 영치금을 넣기 위해서 철저한 절약을 해야 했고,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아쉬운 말로 근처 주지 스님들에게 차비 명목으로 돈을 얻어야 했다. 면회를 할 때는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웃을 뿐 안부나 묻고 다른 이야기는 하지를 않았다. 사실 할 말도 없었다. 본래 눈물이 많은 나는 면회실에서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비쩍 말라 더욱 왜소해진 얼굴만 보면 눈물이 나와서 다른 이야기는 할 수도 없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내가 육지에 가 있는 동안 원진 스님은 제주도에서 참신한 수행자로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그렇게 존경까지 받던 스님이 갑자기 왜 감옥엘 가게 되었으며, 감옥에 간 뒤로 아무도 면회 한번을 안 갔는가 였다. 오히려 내가 원진 스님 면회를 다니는 줄 알고는 이상한 눈으로 경계까지 하는 것이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묘함이 있다. 일 년 여의 옥살이 뒷바라지를 하던 나에게 육지에 긴요한 볼 일이 생겼다.
원진 스님의 출소 날짜가 한 달을 남겨놓고 있을 때였다. 원진 스님은 출소하면 새롭게 발심하여 나와 같이 토굴에 들어가 공부하기로 약속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육지에 나와서 볼 일을 보고 다시 제주도로 가려던 중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렸다. 다시 재발급을 받고 하는데 한 달이 지났다. 제주도에 들어가니 이미 원진 스님은 출소를 했고 육지로 나가고 없었다.
나는 원진 스님이 감옥에 가기 전에 살던 토굴에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한번은 편지가 왔다. 그리고 토굴에 전화가 없어서 함덕에 있는 정토사에서 시외통화를 한번 했다. 두 번 다 육지 어느 암자에서 잠시 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곧 토굴로 돌아갈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전보 한 통을 받았는데 ‘원진 스님 사망’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그렇게 죽었다. 감옥에서 나온 지 한 달도 안 되어서다. 들리는 말로는 마지막 숨을 거둘 떼 “나는 독사에 물렸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모두들 산길을 가다가 독사에 물려서 죽게 된 모양이라고 했다. 그럴 수 도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수행자가 다니는 길이 산길이기야 하지만 정말 그가 산길을 가다가 독사에게 물렸을까. 아닐 것이다. 독사에 물렸다는 것은 다른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찌 뱀만이 독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젊은 수행자의 주위에는 독을 가진 것이 너무 많은 지도 모른다.
출처 ; 효림 스님 / 그 산에 스님이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