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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누가복음 18:31-43
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35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38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눅 18:31-43 / [수난에 대한 세번째 예고;마20:17-19,막10:32-34]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우리가 거기에 도착하면 나를 두고 말한 옛 예언자들의 예언이 사실로 이루어질 것이다. 32) 나는 이방인들의 손에 넘어가 조롱과 수치를 당할 것이다. 그들은 내게 침을 뱉고 33) 채찍질하며 마침내 죽일 것이다. 그러나 사흘 만에 나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34)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 말씀이 수수께끼처럼 들렸던 것이다. 35) [여리고의 맹인 ; 마 20:29-34, 막 10:46-52] 예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 맹인 한 사람이 길가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다. 36) 군중이 몰려가느라 소란해지자 그는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37)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고 알려 주자 38) 그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39) 앞서가던 사람들이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나무랐으나 그는 더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소리 질렀다. 40)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고 `그 맹인을 이리로 데려오라'고 말씀하셨다. 41) 맹인을 데려오자 예수께서 물으셨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는 예수께 대답하였다. `주님, 보기를 원합니다.' 42)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눈을 뜨고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43) 그러자 그 사람은 곧 보게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수를 따라갔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본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고난과 부활을 세 번째 예고하시는 말씀과 여리고 근처에서 맹인의 믿음을 통해 치유하시는 사건입니다. 두 사건 모두 예수님의 길은 십자가를 향하고 있고 그 길을 따르는 이들 역시 믿음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고난과 부활의 예고(31-3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래전부터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 곧 자신에게 성취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하며 삼 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그 의미를 하나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 말씀이 감취어서 예수님께서 이르신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고난당하는 메시야는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사상과 모순되는 것이어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고, 메시야의 죽음이 어떻게 구약을 성취하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십자가 없는 메시야를 기대하던 제자들의 한계와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영적 눈뜸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맹인의 외침과 예수님의 응답(35-43)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예수님께 나아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사람들은 그를 꾸짖지만, 그는 더욱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예수님은 머물러 서서 제자들에게 명하여 그를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묻습니다. 맹인은 단순하고 분명하게 보기를 원한다고 답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구원을 선포하신 후에 그를 고쳐 주십니다. 그러자 곧 눈을 뜨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도 이 맹인처럼 체념과 포기의 어두움 속에 있지 말고, 예수님께 나아가 큰 소리로 부르짖는 담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나의 현재 상황에 낙담하고 실망하지 않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적용: 예수님은 당신에게 묻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당신은 예수님께 어떤 소원을 가지고 나아가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자기 생각과 기준에 따라 말씀을 취사선택하곤 합니다. 어려운 말씀이나 부담되는 말씀은 외면하고 듣기 좋은 말씀만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이나 상황을 초월한 하나님의 뜻이 담긴 메시지입니다.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변화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는 위로받기도 하고 도전받기도 하며 때로는 깊은 회개의 자리로 인도되기도 합니다. 성령님께 도움을 구하며 마음을 활짝 열고 말씀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됩니다. 이 만남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출처]–국민일보
< 설 교 >
호크마 주석
=====18:31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 갈릴리를 출발하여 베뢰아를 통과하는 긴 여행은 이제 거의 목적지에 도달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당할 임박한 고난이 언급되어 있는 9:31부터 줄곧 이 예루살렘은 주께서 올라가시기로 계획하신 목적지요 또한 그의 인류 구원의 사역이 완성될 곳으로 거듭 암시되어 있다(9:51 ;1 3:22 ; 17:11 ; 18:31). 순례자들이 큰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 성전으로 나아갈 때에, 예배하기 위해 양이나 비둘기 등과 같은 제물을 가지고 가 듯이, 예수는 자신을 '세상 죄'를 대속할 제물로 바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사 53:10 ; 요 1:29). 선지자들로...응하리라 - 이 표현은 마태가 즐겨 사용하는 말이며, 누가복음에는 오직 이 곳에만 나온다. '선지자들로'로 번역된 '디아 톤 프로페톤'(* )은 선지자들이 예언선포의 주체자들이 아니라 대리자, 대언자임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고 예수의 고난과 관련된 '성경의 성취사상'은 평행 구절인 마 20:18과 막 10:33에는 언급이 생략되어 있다. 예수의 고난과 관련된 구약의 예언을 몇가지 예로 들어보면, 시 9:19 ; 22:15 ; 사 53:9 ; 슥 12:10 등이다.
=====18:32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 이 예언에서 누가는 맨 먼저 이방인들을 예수의 형(刑) 집행인으로 언급한다. 23장 내용을 보면 예수 무죄 방면을 위한 빌라도의 갖가지 노력들이 타복음서에 비해 밀도있게 기록되었음이 사실이다. 이렇듯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유대인들에게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방인의 책임도 분명히 지적되어야 함을 밝힌다.
희롱, 능욕, 침 뱉음 - 이는 예수의 고난을 매우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예언한 것이다(23:11,36 ; 마 27:30). 예수의 자의식 속에는 영광스러운 부활과 더불어 십자가 수난이 항상 자리잡고 있었지만 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시기를 보류하셨다. 이제 공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와 옴에 따라 이렇듯 구체적인 부분까지 언급하시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의 수난을 대속의 개념과 연결시켜 실로 적절하게 예언한 바 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18:33
죽일 것이니...살아나리라 - 본 구절은 32절과 함께 기독교 신앙의 골격을 이룬다. 예수의 고난과 부활은 성경상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박해받는 교회에 평안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들의 삶의 상처를 치유하신다는 확신을 갖게하기 때문이다. 특히 '죽일 것이니'라고 하는 말 가운데서 우리는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예수께서 그 죽음을 정복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수난과 더불어 부활이 함께 예고된 사실 또한 중요한 의미를 전해준다. 부활이 없는 갈보리는 패배에 불과하며 반면 갈보리없는 부활은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완전하지 못한 부분적인 사랑만을 들려줄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진수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18:34
하나도...알지 못하였더라 - 예수께서 그의 수난과 죽음을 거듭 이야기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데 대해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메시야에 관련된 그들의 잘못된 선입견 때문에 자신들이 메시야로 여기던 예수께서 그토록 비참한 수난을 당하리라고 결코 생각할 수 없었다. (2)그리스도의 수난은 일시적이나마 당시 제자들에게 숨겨졌던 사항이며 현재에 이르러 썩어질 구습을 좇는 모든 자들에게도 여전히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비밀이다.
=====18:35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 여리고(Jericho)는 요단강 서쪽 약 8km, 예루살렘 북동쪽 약 24km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 성읍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된 성읍으로서 여호수아의 지휘아래 이스라엘 백성이 칼 한번 쓰지 않고 함락시킨 성읍이다(수 6장). 그런데 예수 당시에 이 성읍은 신.구 여리고로 나뉘어져 구(舊)여리고에서 남쪽으로 약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헤롯 대왕에 의해 신(新)여리고가 건설되었다. 헤롯대왕의 정책에 따라 신여리고가 나날이 발전함으로 구여리고는 계속 퇴락해가 예수 당시에 구여리고는 거의 황폐화되었다. 신여리고의 발전은 당시 팔레스틴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할 만큼 소문이 나 있었다. 어쨌든 여리고는 갈리리와의 연결로였으며 예루살렘의 관문 역할을 했다. 따라서 예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은 곧 그의 죽음이 점점 임박해 오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이 구절에 대해 평행 구절인 마 20:29은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막 10:46은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반되는 기록이 아니라 정확히 일치하는 기록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신.구 여리고 중 어느 한쪽에 먼저 들르셨다가 나오셔서 다른 한쪽으로 가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태와 마가는 두 여리고 중 한 여리고에서 떠나시는 것을 기록했고, 누가는 예수께서 두 여리고 중 한 여리고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기록하였다.
한 소경 - 마가에 의하면 이 사람은 '바디매오'이다. 그가 예수께 대해 보인 태도(다윗의 자손으로 부른 것)에 의하면 그는 분명히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들은적이 있었으며 이미 그 마음에 예수의 메시야적인 능력에 대해 신뢰를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구걸하다가 - 당시 거지들은 종종 도시근처의 도로변을 따라서 구걸을 했다. 왜냐하면 도시의 도로변은 거지들이 사람들을 가장 많이 접촉할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아야 하는 의무를 소홀히하였다(레 25:35-38). 따라서 거지들이 그들의 비참한 삶의 테두리 속에서 벗어나고픈 소망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쉽게 짐작이 간다. 이 소경 거지는 메시야에게서 그 소망을 이루게 되었다. 그는 부끄러움 없이 예수의 관심을 끄는 소리를 질러댔고 예수는 소경 거지에게 그의 믿음이 그를 보게 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가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예수께 믿음으로 부르짖는다면, 그는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18:36
무리의 지남을 듣고 - 예수께서는 수난당하실 장소인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며 이 소경이 구걸을 하던 장소를 지나고 계셨다. 이미 예수의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그분이 지나는 것을 보고 여기 저기에서 몰려들었다. 그때 거지 소경은 사람이 몰려 웅성대는 것을 보고 궁금히 여기며 그 장소로 다가갔다. 그는 일단 사람이 많이 몰려 있으므로 구걸하기에 좋은 여건이 조성되어 많은 구걸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8:37
예수께서 지나신다 - 이 말은 구원의 기회가 마냥 인생을 기다리고 잇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를 만날 수 있을 때에 열의를 다해 그분 앞에 나아가야 된다는 긴박한 뜻을 먼저 암시하는 표현이다. 만일 소경 거지가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며 묵묵히 동냥이나 하며 앉아 잇었다면 그는 그토록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18:38
다윗의 자손 예수 - 마태는 이 칭호를 메시야의 의미로 즐겨 사용하곤 했다(마 9:27 ; 12:23 ; 15:22 ; 21:9). 이 칭호는 본서에서는 이곳에만 등장하는 데 기독교 이전의 문헌 가운데서는 솔로몬의 시편 17:21(위경)에서만 메시야의 칭호로 사용되고 있다. 바디매오는 예수를 기적을 행하는 자 뿐만 아니라 메시야로서 이해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고 믿었다(사 11:1). 그런데 예수께서 이 칭호에 대해 아무 말씀이 없는 것을 보면 그가 이제는 자신이 메시야임을 군중들에게 드러내며 밝힐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불쌍히 여기소서 - 이 말은 시 4:1; 6:2 ; 25:16 ; 31:9 ; 51:1 ; 86:16등에서 멸시와 고통을 당한자, 소외된 자들이 하나님께 고하는 외침의 한 형식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이는 13절에서의 세리의 기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18:39
더욱 심히 소리 질러 - '소리지르다'의 뜻인 헬라어 '크라조'(* )는 본래 까마귀의 우는 소리에서 만들어진 의성어에서 유래한 말로,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동물들의 외침 소리와 같이 '악쓰는 소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모처럼 예수를 만날 기회를 갖게 된 그 소경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게 하는 구절이다.
=====18:40
예수께서...데려오라 - 아이러니칼(ironical)하게도 예수께서는 며칠 후에 빌라도를 통해서 본 구절에서 하신 말씀과 같은 말을 듣는다(요 18:31). 압제자 빌라도 앞에 죄 없으신 예수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서신 장면은 본장면과 잘 대비된다. 본문에서 예수는 다윗의 자손으로서 왕의 모습을 갖고 우리들에게 열렬한 지지와 영접을 받으며 왕도(王都) 예루살렘에 입성한다(19:36-40). 아울러 왕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행차하시는 가운데서 불쌍한 소경 거지를 보신 예수는 진실로 위엄있는 왕의 권위로 거지에게 거룩한 능력의 보화를 내리셨다. 반면 빌라도 앞에서 예수는 철저한 종의 형상으로, 또는 제단에 드려질 희생 양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따라서 공생애의 마지막, 이제 죽음의 장소를 향해 가시는 도중에서 다윗의 자손이며 왕이신 예수께서 거지 소경을 만난 사건은 실로 큰 의미가 있다.
=====18:41
네게 무엇을...원하느냐 - 그 소경이 원하는 바란 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예수의 질문은 그 사실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경의 믿음을 유도하기 위해서 또는 고백의 시간을 주기 위해서 이 질문을 하신것이다. 예수께서는 병자든 죄인이든 항상 이러한 식의 질문을 하신 연후에 그 질문의 대답대로 이루어 주시곤했다. 이는 병자, 죄인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예수의 깊은 배려이기도 했으며 또한 그들이 자신들의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거지 소경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해결책은 얼마간의 적선 행위가 아니라 눈을 치유받는 일이었으며 나아가서는 영혼의 눈을 뜨는 일이었던 것이다.
=====18:42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 '네가 온전하게 되엇다'고 하는 의미인(Robertson) 이 말씀은 그 소경이 육체적인 축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축복 곧 메시야를 만나 죄의 구속에서 해방되었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예수께서는 이러한 구원의 역사가 바로 소경 자신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예수의 기적 행위를 있게 하는 보조 역할로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7:50 ; 8:48 ; 17:19 ; 마 9:22 ; 막 5:34)하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
=====18:43
예수를 좇으니 - 고침을 받은 그 소경이 단순히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자들의 뒤를 좇은 것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고 봄이 무난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주를 따르기로 했으며,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이 된 것 같다.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 평행 본문 중에서 오직 누가만이 소경이었던 본인과 그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이 다 함께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기록하고 잇는데 치유 기적 다음에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하는 이러한 송영은 누가의 독특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5:26 ; 17:18 ; 행 2:47 ; 3:9). 하나님께는 찬양을 돌리고 그리스도 예수에게는 큰 신뢰를 나타내 보이게 된 그들의 태도는 예루살렘 성전 안의 종교 당국자들, 교권주의자들의 태도와 완전히 대조적인 것이다.
최고의 은혜는 복음의 비밀을 깨닫는 것입니다
눅 18장 31~34절 / 안창천목사
우리가 읽어서 알 수 있듯이 예수께서 선지자들이 기록한 대로 자신이 고난을 당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31-33). 이처럼 예수께서 장차 자신이 고난을 당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을 수난예고라고 합니다. 수난예고는 누가복음에 세 번 등장하는데, 첫 번째는 누가복음 9장 22절에, 두 번째는 누가복음 9장 44절에, 그리고 세 번째는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18장 31-33절에 등장합니다. 세 번의 수난예고의 내용이 다소 다르지만 공통적인 것은 예수께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세 번째 수난예고를 언제 말씀하셨습니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입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동안 예루살렘에 7차례나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수난예고를 말씀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마지막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왜 하필이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에 수난예고를 말씀하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누가복음 13장 33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본문에서 ‘오늘은’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현재를 가리키고, ‘내일’은 예수께서 곧 고난당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도착하시기까지의 기간을 말하고, ‘모레’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를 가리킵니다. 또한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는 말씀은 과거 예루살렘이 여러 선지자들을 죽였기 때문에 자신 선지자로서 또한 예루살렘에서 죽으시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물론 예루살렘은 단지 지리적인 예루살렘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도 예루살렘 밖인 ‘마케루’에서 순교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은 죽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난을 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32-33절입니다.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그런데 이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첫째로,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로마군인들에 의해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왕이라고 불리고 놀려댐을 당했습니다.
둘째로, 능욕을 당하고 침뱉음을 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께서 뺨을 맞으시고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셋째로,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채찍질 하시고 죽일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군인들에게 채찍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넷째로,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이 되어 있습니다. 수백 년 전부터 수천 년 전에 예언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방인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시고, 능욕과 침 뱉음을 당하시고 채찍질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신 것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성경에 예언되어 있지만 아직 성취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성경의 모든 예언이 성취되었듯이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알고만 있지 말고 이를 준비해야 할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1-3).
그렇습니다. 주의 날은 밤에 도둑이 오듯이, 갑자기 옵니다. 그런데 그날이 도적같이 올지라도 준비하는 자에게는 도적같이 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의 재림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재림을 준비하느냐 하지 않으냐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런 사실을 노아홍수심판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시대에 물로 심판을 하실 때, 이를 준비하지 않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만 관심을 쏟았던 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지만 이를 준비한 노아와 그의 가정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짓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노아가 방주를 짓는데 몇 년이 걸렸는지 아십니까?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 볼 때 약 100여년 정도 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노아가 500세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은 후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땅의 부패함을 보시고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창 6:9-13), 노아의 나이 600세에 홍수가 났다고 말씀하고 있고 있기 때문입니다(창 7:6). 그런데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는 홍수가 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배를 지은 곳은 바닷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과 조롱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런 상황에서도 심판을 준비하며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의 재림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그날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이렇게 수난을 당하시기 전에 이를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즉 자신을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자신의 죄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죄 때문임을 온 천하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은 예수께서 곧 하나님이시라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4대 성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죽은 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4대 성인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곧 하나님이심을 증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믿지 못하신 분들이 있다면 오늘 그것을 믿고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께서 수난예고를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34절입니다.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무슨 말입니까? 한마디로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 것은 이번 만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종종 있었습니다. 왜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간이나 좇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을까요? 특별히 예수께서 수난예고를 말씀하신 것을 깨닫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생각을 갖고 예수님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즉 서로의 관심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메시야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갈릴리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각종 능력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야 말로 그런 꿈을 이뤄주실 수 있는 능력자라고 믿고 따라 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신다고 하자 그들은 이제야말로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통치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이루게 되고 그 나라의 통치자는 예수님이 될 것이고, 자신들은 그 나라에서 중요 보직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는 예루살렘에 가면 이방인에게 넘겨져서 능욕과 침 뱉음과 모욕을 당하고 채찍질을 맞아 죽을 것이다.” 자신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꿈꾸었는데 예수께서는 정반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자기들이 듣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하지 듣고 싶어하지 않은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수없이 설교를 듣지만 삶이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생각을 버리지 않은 채로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말씀을 듣지 않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수단화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318회나 나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예수님의 재림에 관심이 없을까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데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날마다 죽이고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다시 34절을 읽습니다.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누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하나도 깨닫지 못한 것은 그 말씀이 감취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누가는 그들이 말씀을 깨닫지 못한 것을 그 말씀이 감취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감취었다’는 단어를 보면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바울이 자주 사용하던 말입니다. 예를 들어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골 1:26),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3). 그런데 누가와 바울이 어떤 관계였습니까? 누가는 바울의 주치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전도여행시 함께 했습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 다니면서 그로부터 이런 말을 자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추어졌다는 것은 그것을 감춘 자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것을 감추셨기 때문에 그들이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감추신 것은 하나님께서 드러내시지 않는 한 인간의 편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지만 이것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지 않으면 이를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한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깨닫게 하셔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절)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니의 비밀인 복음을 깨닫는 것이 최고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깨닫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이 복음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 자들에게 이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어떻게 증거할까요?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가까운 가족은 삶으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는 말로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 가신 길, 그 길 따라 기적을 만나자!
눅 18장 35~43절 / 송수천목사(행복한교회)
미국 시카고의 한 빈민가에서 목사와 이발사가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며 지저분하고 악취가 풍기고 아주 좋지 않은 환경이었습니다.
이발사는 그런 모습을 보며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 정말로 목사님이 증거 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이런 것을 보시고 내버려 놓습니까?' 그 목사님이 질문에 깊이 묵상하면서 그 이발사와 걸어가는데, 마침 청년 한사람이 다가왔습니다. 머리는 산발을 하고 수염을 볼품없이 늘어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되묻기를 '여보세요. 왜 당신같이 훌륭한 이발사가 있는데 저 사람은 머리를 저렇게 늘어뜨리고 수염을 저렇게 길게 기르고 추잡하게 다닙니까?' 그 이발사가 허허 웃으면서 '내게 안 오니까 그렇지요. 이 친구가 내 이발소에 왔다면 내가 미남으로 만들어 놓지요'
'그래요?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가난한지 압니까? 하나님께 안 오기 때문에 가난한 겁니다. 하나님께 와서 하나님을 잘 섬기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했으면 모든 것이 더해지는 축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주님만 만나면 해결됩니다. /믿/
▶국내 전화 상담의 선두 주자인 '사랑의 전화'가 그 동안의 상담 내용을 정리해서 공개했습니다. 대체로 하루에 500여 통의 전화가 오고, 진지하게 상담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100건 정도가 된답니다.
재미있는 것은 상담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이 전 연령층에 고루 고루 분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초등학생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유치원생까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 문제는 누구에게나 있고, 그 문제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를 힘겹게 한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의 무거운 짐을 누가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인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오직 세상우주만물의 주인이 되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주님께로 나와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마11:28-29절에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라'고 하십니다. /할/
오늘 본문도 주님이 여리고 성에 한 소경을 치료해 주심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기적 같은 이야기입니다. /할/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행하신 기적을 보면서 우리 모두 그 기적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①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주신 예수님의 교훈들이 무엇입니까?
유월절을 몇 주일 앞두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십니다. 이번 유월절 기간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실 때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 깨끗하게 치료해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올 것인지 물어보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시면서, 인자의 때는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항상 기도하며 포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통해 기도의 정확성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하여 겸손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고, 이혼에 대한 교훈과 어린아이들을 막지 말라고 하시며 축복해 주셨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선하신 선생님, 재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물을 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청년이 어릴 때부터 계명을 잘 지켰다고 대답하자,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네가 완전해 지고자 한다면 가서 네 재산을 팔아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쫓으라'고 말씀할 때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때 그 유명한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자, 제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라고 하자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세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그리고 오늘 본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할/
②본문의 배경을 이렇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소경이며 구걸로 삶을 유지하는 거지가 주님을 만나 두 눈을 번쩍 뜨고 고침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여리고의 관문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앞을 지나는 것을 깨닫고 가까운 사람에게 무슨 일인가 물었습니다. 그 사람의 대답은 '나사렛 예수님이 지금 여리고를 지나가고 계십니다. 그는 병든 자를 고치고 소경을 눈뜨게 하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런 분이시지요.'
이 말을 들은 소경 거지는 큰 소리로 주님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그의 소리 지르는 것을 듣고 저마다 거지에게 면박을 주었습니다. '잠잠해, 이 사람아. 자넨 소경이면서 무슨 목소리가 이렇게 커. 돈이나 구걸하고 그것으로 살아가면 됐지 왜 이래'
그러나 소경은 더욱 더 큰소리로 소리 높여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그 소경의 음성을 듣고 제자들을 시켜 '저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소경 거지가 주님 앞으로 불려 나오자 사람들은 조용해지고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호기심으로 지켜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소경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슨 일을 해주기 원하느냐?' 그러자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자, 주님은 바디매오의 간절한 소원을 듣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시자, 즉시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할/
③장애자는 설음이 참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장애인이란 '상해, 질병, 유전적 결함으로 말미암은 만성적인 신체적 혹은 정신적 불능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되고 있습니다. 정신 지체 (지능지수 69 이하), 시각장애, 청각 장애, 지체장애, 정서장애(행동 장애, 부적응 행동, 미숙아), 언어 장애, 특정 학습 장애, 복합 장애, 자폐증 등 모두 신체적 정신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장애인이라고 합니다.
신체 장애가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의식의 장애가 옵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사람을 기피합니다. 죄의식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 죄 때문이라고 자책하기도 하고, 부정 탄다고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국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버림을 받게 되고, 장애로 말미암아 자칫 경제적 고통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소경처럼 거지가 되어 사람들의 동정에 의하여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더욱 소외되어 살아갑니다. 도와야 할 가족에게는 큰 부담으로 느끼게 됩니다. 장기 치료를 위해 정작 물질이 필요하지만 신체적, 정신적 장애에다 경제적 빈곤으로 말미암아 2중 3중의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사람들의 편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고 합니다. 사회적으로 냉대를 받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가정으로부터도 소외된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환영받고 사랑 받아야 할 가족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단란한 가정의 파괴자의 취급을 받고 살기가 십상입니다.
오늘 본문의 거지 소경도 이런 어려움에 살고 있었던 그런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 긍적적인 마인드가 그 사람을 기적의 주인공으로 만들었습니다. /할/
▶찬송가를 보면 '화니제인 크로스비'라는 이름을 자주 발견됩니다. 그녀는 약 9천 편의 찬송 시를 작곡했고, 이 중에 약 35편이 우리 찬송가에 실려 있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매우 불행하게 보냈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의 동정을 받아가면서 연명을 했습니다. 생후 1개월 반만에 크로스비는 감기에 걸리고, 눈병이 났는데, 식모가 뜨거운 겨자 수포를 크로스비의 눈에 댄 것이 화가 되어 크로스비는 이후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크로스비는 일생동안 세상의 광명을 본 기억조차 없습니다. 그런데도 크로스비는 그의 실명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중의 하나라고 말했답니다. 그는 결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실명했기에 세상 것을 보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았더니 그녀의 영의 눈이 더욱 밝아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은 보지 못했지만 참된 빛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던 것입니다. /할/
④본문의 소경의 신앙을 알아보고 우리도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소경은 어쩌면 저와 여러분 자신일지도 모릅니다. 보기는 보아도 내일 일을 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데 보는 사람보다도 볼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 너를 보낸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두 눈을 뜨고 있지만 정말 내일을 볼 줄 모르는 인생, 미래를 볼 줄 모르고, 죽음 후에 그 인생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하고, 죽음 후에 세계를 보지 못하는 인생이 많습니다. 심지어 교회는 왔다 갔다 하면서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얼마나 답답합니까?
오늘 본문에 이 소경은 자기의 어두움을 끌어않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선생님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절규합니다. 볼 수 없는 인생이 보는 인생으로 살아가기를 소원했습니다. 눈을 떠서 세상을 봅니다. 새로운 눈을 떠서 새로운 인생을 경험합니다. 이 소경은 새로운 삶을 살기를 소원했습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이런 치유의 경험, 이런 기적의 경험, 교회에 나올 때마다 영적인 눈이 열리고, 육적인 눈도 열리며, 새로운 세상을 보는 놀라운 경험, 이런 경험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일어나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이것이 물이 포도주 되는 기적입니다. /아멘!/
⑴그는 자신의 실존(모습)을 잘 깨달았습니다.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 소경은 여리고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해서 맨 먼저 통과해야할 성입니다.
예루살렘 동남쪽 30Km 지점에 위치한 도시인데 '달의 성읍'이라고도 하고, '종려의 성읍'이라고도 불리 우는 아주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특히 이 도시에는 향나무, 뽕나무, 장미 나무 등 아름다운 나무들이 많이 있답니다. 그래서 여리고를 '장미의 도시'라고도 합니다.
여리고가 이처럼 아름다운 도시였지만, 그러나 소경은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바디메오의 형편을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가진 것도, 소유한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세상에서 완전히 실패자의 모습입니다.
그의 장래도 불투명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꿈도 없었고 소망도 없었고 절대절망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 어떠한 희망의 빛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경이 복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이 사람은 자기의 처지(실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할/
이 소경은 자기가 소경인 것도, 거지인 것도 다 알았습니다. 자기는 얻어먹어야 사는 존재, 자기는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치유를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존재를 고치려고 예수께 나간 것입니다. 이것이 이 소경에게 축복을 받는 길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새로운 인생 길을 걷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그릇, 자신의 현실적인 사정과 환경과 형편, 자신의 모습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소크라데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대는 자기의 처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참 많이 있습니다. 자신이 불쌍하면서도 불쌍한 줄을 모르고 삽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합니까? 자기가 불쌍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께 나오지 못합니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죄인인 줄을 알지만, 자신이 죄인인 줄은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바뀌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먼저 자신이 연약하고, 무능하고, 죄가 많은 존재임을 깨달아야합니다. 자신을 깨닫는다는 것은 먼저 자신이 죄악 된 존재임을 발견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죄인이요 보좔 것 없는 존재임을 고백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의 부정함을 고백했습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사6:5)고 고백했습니다. /할/
⑵예수님을 메시야로, 구세주로 확실히 믿었습니다.
37절에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들어야' 합니다. 무엇을 들어야 합니까? 예수 소식, 복된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도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주 듣는 사람이 믿음이 자랍니다. 자주 듣는 사람이 깨닫습니다. 자주 듣는 사람이 생각이 넓어집니다. 자주 듣는 사람이 교회의 일도 합니다.
주께서 무엇을 요구하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시키는지 자주 들어야 하고 자주 살펴봐야 합니다. 교회는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 이 소경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듣고 그는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외쳤습니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았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는 소낙비와 같아서 빨리 서둘지 않으면 지나가 버리고 만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회가 오면 붙잡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후6:2절에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할/ 지금 이 시간이 귀합니다. 신앙은 현재 지금입니다. /아멘!/
㈂예수를 메시야로, 구세주로 확실히 믿었습니다.
이 소경이 막상 예수께 도움을 청할 때는 '나사렛 예수여' 그렇게 외친 것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 예수여' 그렇게 외쳤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이 소경이 예수님에 대해서 소개받기는 '나사렛 예수'라 소개를 받았습니다. '나사렛 예수'란 이 표현은 그 당시 예수를 표현할 때 가장 많이 쓰고있는 말로 이 표현은 예수님을 경멸할 때 부르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나사렛은 빈민촌입니다. 술 먹고 주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경멸의 대상이었고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 부르는 것도 예수님을 비하하는 그런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경은 나사렛 예수라고 소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불렀을 때는 나사렛 예수라 부르지 않고 '다윗의 자손이여' 이렇게 불렀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메시야는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오신다고 예언해 놓았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고, 나를 돕고, 나를 구원하고, 나를 치유하시는 분은 다윗을 통해서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 메시야가 오면 하나님 나라가 열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소경은 자신이 부르는 분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곧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타날 것이라는 메시아 칭호의 한 표현입니다. '당신이 메시아입니다. 당신이 이 세상을 구원할 자이고, 나를 구원할 자입니다.' 그는 거기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할/
마11장에도 보면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사람을 예수께로 보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인 줄 믿었지만 감옥에 있다가 보니까 다시 한번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를 보내어 묻습니다. '당신이 정말 오실 메시야입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요한에게 이렇게 말하라.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5).
이것이 바로 메시야의 증거입니다. 메시야가 오면 '소경이 눈을 뜬다. 메시야가 오면 벙어리가 말한다. 메시야가 오시면 귀머거리가 듣는다'. 그 소경이 이것을 믿은 것입니다.
소경은 예수를 천대받는 나사렛 사람으로 본 것이 아니라 내 눈을 고쳐주시는 메시야로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부른 것입니다. /할/
'그 분이 메시야라면 내 눈도 열어주실 수가 있다. 내 인생을 새롭게 하실 수 있다. 예수가 메시야라면 그분은 당연히 나를 고치시고 내 인생을 바꾸어 주실 수가 있다. 내가 그분께 나아가자. 그분께 엎드리자. 그분께 구하자'.
이 소경은 예수님이 내 인생을 바꾸고, 나를 치료하시고, 예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메시야로 믿었습니다.
여기서부터 그의 인생이 바꿔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신앙은 '네가 예수를 무엇으로 믿느냐?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오늘 우리들의 인생이 바뀌기를 원합니까? 새로운 세계를 보기를 원합니까? 미래를, 내일을 보시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예수를 메시야로, 나의 생명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믿으십시오. 그러면 '물이 포도주'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도 바뀌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여전히 옛 습관, 옛 사고, 옛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소경이 가지고 있는 이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나의 생명의 구세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만이 내 인생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 분만이 나를 구원할 수가 있고, 그 분만이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수가 있습니다. /할/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⑤이 소경은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신앙의 인내심이 있었습니다.
이 소경을 보세오! 이 소경이 단 한번의 요청으로 응답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38-39절에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소경이 소리를 질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한번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39절에 보면 장해 요인이 생깁니다.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장애요인이 발생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경을 방해했습니다. 잠잠히 하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소경은 이 무리들의 압력 앞에서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경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했습니까? '저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그렇습니다. 더욱 심히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바클레이는 '무엇으로도 예수님은 만나고자하는 이 소경의 고함소리를 막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소리 지른 것은 소리였고, 두 번째 소리 지른 것은 그 원어로 보면 비명에 가까운 소리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소경은 방해하는 세력이 있었지만 그 세력을 이기기 위해서 더욱 소리를 질러,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몸부림을 친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가는 장애물을 극복한 것입니다.
저는 소경의 이 두 번의 외침을 통해 이런 반성을 해봅니다. 우리는 신앙은 너무 안이한 것이 아닌가? 너무 쉽게 너무 간단하게 교회 몇 번 나오는 것으로 끝내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기도 몇 번하고 응답이 없으면 아 하나님은 별것이 아니구나! 교회 몇 번 나오고 별것이 없는 것 같으면 아 교회도 별것이 아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기도할 때 단 한번 기도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역시 나 같은 사람이 기도해보았자 무슨 응답이 있어, 난 역시 안 되는구나!' 하고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찾고 구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역사를 방해하는 방해의 말들이 난무했습니다. '잠잠하라, 시끄럽다.' 만약 이 소경이 주변 사람들의 비난을 듣고 '그렇다. 나는 팔자가 소경이요 거지니 내가 무슨 큰 소리를 지르겠는가?' 그냥 주저앉았다면 그는 평생 거지로, 소경으로 보내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이 소경은 낙심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부르짖음이 예수께 들리게 되었습니다.
공은 때릴수록 더 높이 튀어 오릅니다. 용수철은 힘있게 눌릴 수록 더 힘있게 솟아오릅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으려는데 방해들이 있습니까? 은혜를 무너뜨리려는 사단의 공격들이 있습니까? 무서운 핍박이 있습니까?
한 걸음 더 힘을 내 전진하시기를 바랍니다. 한 번 실패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들으실 때까지 계속 부르짖어 보십시오. 포기하지 않고 전진하는 용기를 가지십시오. /아멘!/
구약의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 가면서 갑절의 영감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두 번씩이나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엘리야를 따라가므로 엘리사는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할 때 결국 갑절의 영감을 받았습니다.
은혜의 생활에는 언제나 방해물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뛰어 넘지 못하면 신령한 은혜의 자리는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 만나기를 원했지만 약점이 있었고 방해물들이 있었습니다.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예수를 볼 수 없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키가 작아' 내가 가지고 있는 약점들 때문에 예수를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많아' 환경 때문에 예수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삭개오에겐 어떤 약점도, 환경 적인 제약도 은혜의 방해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예수님의 발길이 멈추어 섰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할/
여러분,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가 이 소경처럼 여러분 모두의 영혼의 눈이 열려지고 엘리사처럼 갑절의 영감을 받고,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모시는 기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⑥그의 분명한 고백이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소경 거지가 소리지르는 모습을 보고 지나가시던 예수께서 그를 불러 세우고 물으셨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예수님이 그 소경의 소원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주님은 그의 고백을 직접 듣기 위해서 물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소원을 다 아십니다. 우리의 생활고도 아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고백을 직접 듣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소경의 대답은 분명하고 간단하고 확실했습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렇습니다. 그가 소원은 '보는 것'입니다. 그는 보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는 거지였기 때문에 '보는 것' 이외에 필요한 것이 많았습니다. 먹을 것이 필요했습니다. 입을 것과 마실 것, 심지어 거주할 수 있는 집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그러한 것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경은 그 같은 것들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보는 것'을 원했습니다. 광명을 구했습니다. 밝은 빛을 사모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가장 시급하고,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분명하고 확신에 차 있습니까? 이 분명함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여기에 군소리가 필요 없습니다. '보기를 원합니다.' 소경에게는 이 말 한마디면 됩니다. /아멘!/
▶요5장에 보면 베데스다 연못에 38년 된 병자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예'하면 끝납니다. 38년 된 병자의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낫는 것입니다. 여러 다른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예' 한 마디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이 병자가 대답합니다. '이 물이 움직일 때, 나를 연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나이다.' 이것은 원망이고 불평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약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언제나 말이 많고 말이 앞선다는 것입니다. 말이 많다는 것은 건설적인 것이 아닙니다. 말이 많다보면 불평도 나오고 불만도 나오고 핑계도 나오게 마련입니다.
이 소경에게 예수께서 물으십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예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끝입니다. 기도에는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아멘!/
우리 신앙의 칼라도 선명해야 합니다. '예수가 누구시냐?'고 물으면 '예수는 나의 구주십니다.'라고 분명히 고백해야 합니다. 나를 떠나서는 예수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까?' 물으면 대부분 대답하기를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대답합니다.
'우리'라는 말은 참 애매한 말입니다. '우리'가 아니고 '나'때문이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누구를 위해 죽으셨습니까? '바로 나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신앙고백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신앙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나 없는 예수, 나 없는 부활, 나 없는 천국,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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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기적의 역사는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할 때 일어났습니다(40).
여러분, 오늘도 예수님의 발길을 붙들면 온갖 핸디캡은 사라집니다. 그러면 무엇이 예수님의 발길을 머물러 서게 할 수 있습니까? 헤롯의 권력도 이 일만은 할 수가 없었고, 빌라도나 대제사장의 폭력도 이 일만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주님의 발길을 멈추어 서시게 했습니까?
⑴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모든 것을 긍정의 마인드를 가진 사람 곁에 우리 주님의 발길이 멈추십니다.
꽃이 피어 향기를 발하면 나비와 벌이 찾아듭니다. 우리는 나비나 벌이 꽃을 찾아 헤매다가 그 꽃을 찾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실은 꽃이 나비를 필요해서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비를 부릅니다. 초청합니다. 아름다운 향기를 풍깁니다. 그러면 그 향기를 바람이 실어 나비에게, 벌에게 보내줍니다. 그러면 나비와 벌이 그 꽃의 초청을 받아 날아갑니다. 그래서 꽃가루를 채취하면서 꽃에게는 수수작용이 이루어지게 해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편에서 먼저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우리 주님이 오십니다. /믿/
그렇습니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주님은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곳으로 내려가십니다. 가난한 심령이 있는 곳에 주님은 계십니다. 이 소경은 참으로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빵을 살 돈도 벌 수 없어서 길거리에 앉아 구걸을 해야만 했습니다. 거기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외모에 도무지 관심이 없으십니다. 재단사는 여러분의 옷차림에 관심을 갖고, 구두 방 주인은 여러분의 신발에 관심을 가질지 모르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절망과 낙심에 처할 때, '나사렛 예수여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찾을 때 이미 그곳에 와 계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고통 당하는 성도들을 보살펴 주시고 절망 속에서 주님을 향하여 부르짖을 때 주님은 그곳에 발길을 멈추어 주십니다. /아멘!/
오늘 이 소경은 불행을 극복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성공 자들은 난관에 부딪혔을 때에 낙망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부딪었던 사람입니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애들러'는 '이 땅의 모든 성공 자들은 자신의 인생에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는 능력의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스파르타의 한 장군의 아들이 칼이 짧다고 불평했을 때에 아버지는 충고했습니다. '한 걸음 더 앞으로 전진해 보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할/
우리의 한계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뛰어넘는 용기가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문제를 직면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한 걸음 더 전진하십시오! /믿/아멘!/
▶미국 UCLA 대학의 심리학 교수로 40년 간 재직하다 은퇴한 '골드' 박사가 제자들을 관찰한 결과를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성공한 사람들은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한 마디로 적극적인 자세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적극적인 삶의 구체적인 특징을 다섯 가지로 정리해서 소개했습니다.
㈀걸음걸이가 빠르답니다. 걸음걸이가 빠르다는 것은 성취 욕의 표현이고 부지런함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늘 앞자리에 있답니다. 수업시간에 늘 앞자리에 앉고, 어떤 일이 생기면 늘 앞장을 선답니다. 어떤 부흥사는 예배드릴 때 '앞자리가 금자리'라고 했습니다.
㈂시선을 집중시킨답니다. 강의시간에 강의에 집중하고, 사람을 만날 때 상대방의 눈에 시선을 집중시킨답니다.
㈃늘 웃는답니다. 웃음은 따뜻한 인간관계를 맺게 해주고, 스트레스를 극복하게 해 준답니다.
㈄긍정적인 표현을 한답니다. 긍정적인 사람은 어떤 일에도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성공의 길을 찾아 나선답니다. /할/
여러분! 우리 앞에 놓인 인생의 어떤 문제라도 점령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문제를 피하려고 하지도 마십시오! 그리고 왜 내게만 이런 문제가 있느냐고 불평하지 말고, 나는 할 수 없다고 주저앉지 마시기 바랍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국 속담에 'Self Help'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우리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말입니다. /할/
⑵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 곁에 우리 주님의 발길은 멈추십니다.
본문 첫 절부터 예수님은 기도의 정확성을 말씀하셨습니다. 강청하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네 오늘 이 소경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쳤습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할/
사58:9절에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그리고 사55:6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할/
⑶'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긍휼을 구할 때 예수의 발길은 멈추었습니다.
우리는 공적을 내세워 주님께 무엇을 구하려고 할 때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은총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무관심하시고 지나가 버리십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키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기도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긍휼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아멘!/
⑷예수의 이름이 불려지는 곳에 주님의 발길은 멈추십니다.
이 소경이 간구할 때 예수의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기적을 가져다 줍니다. 온 천지에 예수의 이름보다 더 능력이 많은 이름은 없습니다.
마18:20절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요14:14절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16:23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아멘!/
⑧오늘 본문은 공관복음에 다 기록된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은 '눅 18:35-43절에, 막 10:46-52절에, 마 20:29-34절'에 다 기록된 내용입니다. 이 세 본문을 비교해 보면 또 다른 심오한 진리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⑴마가복음에서는 이 소경의 이름이 '바디매오'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⑵특별히 마태는 소경이 하나가 아니라 두 소경이 있었다고 말해줍니다.
마20:29-30절에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소경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한 사람의 소경이 있었는데 마태복음에는 두 사람의 소경이 등장합니다. 즉, 누가복음에서는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된 바디매오는 담대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었으나 마태가 언급한 제2의 맹인은 대단히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여기 제2의 소경 즉, 바디매오 뒤를 따라만 갔던 그도 눈을 뜬 은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비록 바디매오처럼 부르짖지는 못했어도 예수님을 찾아 나섰던 제2의 소경도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할/
여러분 가운데서도 소심하여 하나님의 교회에서 적극적인 신앙의 자세가 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께로 나오기만 하면 주의 은총을 덧입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언제나 앞질러 달려가며 부르짖고 외치며 전진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소극적이고 조용하게 뒤를 따라오며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보좌에서 이 모든 사람들을 능히 구원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 메시지에 상당히 여러분이 위로를 얻고 힘을 얻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⑶본문들을 비교해 볼 때 한편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즉, 누가복음의 본문과 마태복음의 본문은 계속된 다른 두 사건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3명의 소경이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먼저 바디매오가 예수께 부르짖어 고침을 받고 이 소식을 들은 다른 두 소경이 여리고 성 출구까지 뛰어나와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한 것처럼 똑같은 방법을 쫓아 같은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은혜 받았다는 간증과 소식을 들을 때 나도 그곳에 몸을 담고 달려가는 것. 참 귀한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신 예수님은 두 사람도 구원할 수 있고, 두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께서 세 사람, 삼천 명, 삼만 명도 능히 살리시고 그들을 구원하실 수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똑같이 눈을 떴지만 바디매오 한 사람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바디매오 한 사람만이 눈을 뜬 후 주님의 제자가 되었고, 열 두 제자를 따라 복음을 전하며 따라 나선 것 같습니다. 그가 은혜를 제대로 받은 사람입니다. /할/
⑨본문의 소경이 받은 축복은 무엇인가?
⑴그의 소원이 이뤄졌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43절에 '저가 곧 보게'되었습니다. 그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할/ 그는 예수의 능력을 체험했을 뿐 아니라 삼라만상을 그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⑵그는 믿음으로 영혼까지 구원받았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⑶그러나 더 큰 기적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를 좇으니라.
소경에게 없는 것, 있는 것, 필요한 것
눅 18장 35~43절 / 김학우목사
현재 스페인 통계청에 의하면, 시각 장애 협의회(Once)에 가입된 시각장애인은 약 6만 여명으로, 이중, 57% 정도는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에 소개된 소경을 통해 “소경에게 있는 것, 없는 것, 필요한 것”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소경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앞을 볼 수 없는 사람, 즉 소경은 단순히 앞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많은 제약이 따릅니다. 건강한 사람과 같이 일할 수 없기에 직장이나 경제활동도 정상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본문의 소경은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거지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소경은 자신의 핸디캡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제자들조차 “소경으로 난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입니까?”말할 정도로,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소경은 소경으로 태어난 것 때문에 좌절도 하고, 인생의 허무를 느끼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한나는 아들이 없다는 것 때문에 무척 괴로웠습니다. 자녀가 없는 것 때문에 먹지 못하고 통곡하였습니다. 자녀가 없는 것 때문에 술취한 여자로 오해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아들이 없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완벽할 수 없으며,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나에게 무엇이 부족하고 모자라는 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나에게 부족하고 없는 것을 알 때 채우고자 하는 열망과 갈급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경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낙심하기 보다는 그것을 채우고자 열망했습니다. 소경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구걸하는 것을 멈추고 외쳤습니다. (38절)“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이 그를 꾸짖었지만,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나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건강입니까? 직장과 사업 터, 자녀입니까? 믿음입니까? 나에게 부족하고 없는 것을 알 때에 채울 수 있습니다. 나에게 없는 것을 알고 있어야 기도할 수 있고, 부르짖을 수 있고,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방탕한 아들이 돌아오도록 30년 부르짖으므로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나에게 없는 것이 무엇이며 나에게 없는 것을 위해 얼마나 힘쓰고 부르짖고 있습니까? 나에게 없는 것 때문에 낙심하기 보다는 채울 수 있도록 기도하고 힘쓸 수 있길 소망합니다.
소경은 자신에게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소경은 비록 앞을 볼 수 없었지만, 두 손과 두 발, 무엇보다 말할 수 있는 입과 들을 수 있 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경은 들을 수 있는 귀로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고, 입으로 예수님을 크게 부름으로,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소경은 자신이 가진 것을 극대화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에 소극적이지만, 없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보내라 하라” 하셨을 때 모세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입니다.”했습니다. 그러자“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물었습니다. 지팡이입니다. “그것을 던져라. 던지니 뱀이 된지라” 그 지팡이는 홍해를 육지같이 갈랐습니다.
사람은 내게 없는 것을 먼저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있는 것을 먼저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없는 것보다 내가 가진 것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비록 내가 생각하기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가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까지라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질문하시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핸드폰”입니다. “통장에 쥐꼬리만 한 돈으로 있지만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두 손과 두 발, 몸밖에 없습니다.” “몸과 발, 손을 열심히 움직여 보아라!” “여기에도 저기에도 가보아라!”
어부들이 바다에 빈 배와 그물로 나갔지만 돌아올 때는 고기를 가득 채워 돌아옵니다. 철없는 어린 코흘리개가 20년 30년 자라, 어머니 아버지가 되고, 회사에 부장이 되고, 교회 집사, 권사가 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유대격언 “다른 사람에게 없는 것, 내가 가진 것으로 일하라.”고 하는 말은 참으로 명언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가진 자들이 아니었으며, 한두 가지로 쓰임 받았습니다. 나에게 있는 것을 알고, 그것을 극대화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어린아이의 손에 있는 물고기 2마리, 보리떡 5개로 5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여러분! 내가 가진 것이 적다고 해도 하나님께 맡겨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있는 것을 통해서 일하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길 소망합니다.
소경은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서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고쳐 주었습니다. 앉은뱅이는 40년 동안 걷지 못했지만, 단 한 번도 걸어야하겠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앉은뱅이는 구걸하는 것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즉,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에 비해, 소경은 옷도 필요하고, 집도 필요하고, 직장도, 돈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소경은 다른 것들을 원하지 않았으며, 오직 한 가지만을 원했습니다. 주님이 (41절)“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었을 때 소경은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우리의 삶에 두 양식이 있습니다. 필요한 것을 소유하려는 삶이 있고,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삶이 있습니다. 사람이 원하는 것을 소유하려고 할 때는 끝이 없습니다. (고전7:31)“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욕심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이 가장 힘들 때 쓴 시로, “내가 부족함이 없다.”한 것은 다윗은 모든 것을 소유한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며, 그렇다고 전쟁에 승리했기 때문도 아니며, 왕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3년 공생애에 동안 병자를 고치시며, 배고픈 자를 먹이셨지만, 모든 사람을 충족시켜 주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으로 채워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고, 그리스도로 만족하도록 위함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부족하고, 모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없는 것에 매달리기보다 나에게 있을 것을 개발하고 극대화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소경이 보게 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돌림같이, 저와 여러분 또한 꼭 필요한 것을 응답받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이야기
눅 18:35-43 / 박봉수목사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한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가시고 계셨습니다. 이 때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한 맹인이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말렸지만 더욱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소리를 들으시고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데리고 오라하셔서 뭘 도와주면 좋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사람이 보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보게 되었고, 즉시 예수님을 따랐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새삼 깨닫게 해줍니다. 그리고 그분의 능력을 덧입으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영적 비결을 깨닫게 해줍니다.
맹인의 믿음
이 이야기의 중심인물은 한 맹인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사람이 보인 행동에 몇 가지 특별한 점이 보입니다.
우선 이 사람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구약에 나오는 메시아를 지칭하는 대표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삼하 7장이나 사 11장을 보면 메시아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오며 영원한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예언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기 때문에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러왔습니다.
이 맹인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그동안 이스라엘백성이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믿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공개적으로 고백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이 맹인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믿을 수 있었을까요? 이 사람은 여리고의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해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에 앉아서 오고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들 중에 단연 예수님에 대한 뉴스가 가장 핫했습니다. 여러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해주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원래 소문이 그렇듯이 과장된 이야기를 해주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직접 예수님을 만나서 체험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 사람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구약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예언과 자기가 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종합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결론을 도출했을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바로 구약이 예언해 온 메시아이실 것이다.’
지맹선(智盲禪)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맹인의 지혜로운 통찰력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보통사람들과 다릅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를 선택할 때 보통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외모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이야기를 나누며 사람의 내면 즉 인품이나 진실성을 봅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눈으로 사람을 본다는 말입니다.
지맹선이라는 말은 이렇게 시각에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사물의 본질과 상황의 핵심을 더 깊이 있게 파악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표면적인 것을 넘어서 내면의 진실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맹인은 지맹선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보지 못하던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기다려온 메시아라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이 육체의 눈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심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깨달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이 사람이 주님께 간절히 자기의 소원을 말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38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사람이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자, 소리를 질렀다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가고 계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랐고, 또 길가에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길가에 앉아서 시끄러운 사람들의 행렬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행렬이 예수님의 행렬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누가 예수님인지, 또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그 인파와 행렬을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으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조용히 하라고 이 사람을 가로막았습니다. 아마도 인파를 뚫고 예수님의 길을 여는 제자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더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사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자기 곁을 지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자기의 소원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로막습니다.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더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기의 소원을 예수님께 말씀드려야겠다는 생각에 더 크게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도가 무엇인지 새삼 생각해 보게 됩니다. 기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종교의 종교행위의 중심에 기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가 없는 일반 사람들도 나름대로 기도를 합니다.
예를 들어 등산을 할 때 돌탑에 돌을 얹으며 등산을 무사히 잘 마치게 해달라고 빕니다. 어떤 행사를 시작할 때 ‘고사’를 지내며 행사가 잘 이루어지도록 해달라고 빕니다. 새해가 되면 일출을 보며 건강과 안녕을 빕니다. 저마다 나름대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할 때 이렇게 소원을 비는 마음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기도의 핵심은 이런 마음이 아닙니다. 바로 그 기도가 하나님께 전해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받으시고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한다고 해도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신다면 그 기도는 헛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기도했다는 위안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간절한 마음으로 빌었다고 다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를 드릴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기도를 드릴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나에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응답
이제 예수님께서 이 맹인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어떻게 응답하셨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이 사람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40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맹인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가던 길을 멈추셨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 이야기의 현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예수님과 일행이 여리고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가장 주목 받는 분이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고, 길가에 마주치는 사람들도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마치 요즘 유명인들이 시장이나 광장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모여들어 싸인을 받으려 한다거나 같이 사진을 찍으려고 시끌벅적한 상황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무리에 들지 못하고 길가에 앉아 조용히 구걸하는 한 맹인이 있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그곳에 있는 것에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갑자기 이 사람이 소리를 지릅니다. 모여든 사람들에게 이 사람의 외침은 그저 소음일 뿐입니다. 무시하거나 짜증을 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리고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 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신 것입니다.
누가는 이 사람 이야기이후에 바로 삭개오 이야기를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이 맹인은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오실 때 만나셨고, 삭개오는 여리고를 통과해서 나가실 때 만나셨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삭개오도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세리장이어서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다가 키가 작아서 군중들 저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기도 쉽지 않고 만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만나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무 위로 올라가 먼발치에서 주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삭개오에 관심을 기울이셨다는 것입니다. 다가가셔서 그이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삭개오를 특별히 대하신 것입니다.
누가는 이 두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의 관심이 어떤 사람에 가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요즘 셀럽이라는 말이 자주 회자되고 있습니다. 영어 셀러브리티(Celebrity)라는 말의 줄임말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유명인’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이름이나 이미지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서 인지도가 높은 사람을 말하고, 이런 유명세로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고, 또 그 유명세를 통해서 경제적 이익을 얻는 사람을 말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임영웅이나 백종원 같은 사람을 들 수 있습니다.
또 인플루언서라는 말도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의 발전으로 생겨난 말입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과 같은 플랫폼에서 활동하며 많은 팔로워들을 가지고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대중음악, 요리, 여행, 패션, 게임 등 다양한 분에서 활동하는 인플루언서들이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이런 셀럽들과 인플루언서들입니다.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보입니다. 그들에게 열광하고, 그들을 보며 울고 웃고 따릅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실까요? 주님께서도 이 셀럽이나 인플루언서에게 관심을 보이고 계실까요?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목하시는 사람들은 따로 있습니다.
그가 누구일까요? 바로 본문의 맹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삭개오와 같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간절히 도움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주님께 주목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특별하게 여기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누구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주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맹인처럼 주님께 부르짖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주목하십니다. 그리고 다가가셔서 그들을 도우십니다.
여러분이 이 맹인처럼 주님께서 주목하시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본문 4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뜨고 싶다는 소원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눈을 떴고 바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를 불쌍히 여겨서 눈을 뜨게 해준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그렇게 간절히 원하니 눈을 뜨게 해준다”라고 말씀하시 않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 사람이 눈을 뜨게 된 원인이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람이 믿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주님을 일하시게 합니다. 믿음이 놀라운 역사를 일으킵니다.
중국 선교차 섬서성을 다녀왔습니다. 처음 이곳에 간 것이 1998년이니까 26년 전입니다. 이때는 중국이 아직 G2로 부상하기 한참 전입니다. 개혁개방 이후 아직 기독교가 제대로 자리 잡기 전입니다.
신학교가 마치 난민 수용소처럼 좁고 허접했습니다. 당시 교장이시던 왕화이런 목사님께서 박해를 받고 18년이나 옥살이를 하시던 분이셨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며 학교를 이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신학교는 당시와 비교할 수 없게 달라졌습니다. 특히 이 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 마치 서울의 강남과 같이 서안에서 핫한 곳입니다. 지금 이런 곳에 신학교를 허락도 하지 않겠지만 허락한다고 해도 땅값이며 건축비를 감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답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게 된 이유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아무에게나 이런 역사를 일으켜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잘 압니다. 당시 왕목사님과 교회 지도자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런 역사를 일으켜주셨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런 신학교를 세워주셨고, 이 신학교를 통해 섬서성의 교회들을 일으키시고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십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이 맹인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그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그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눈을 뜨게 해주실 것이라는 그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그 믿음을 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믿는 그 믿음을 보십니다. 우리의 앞날을 책임지시고 인도하실 것을 믿는 그 믿음을 보십니다. 더욱 굳건한 믿음으로 주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응답받는 기도의 원리
눅 18장 35-43절 / 이한규목사
< 응답받는 기도의 원리 >
본문에는 한 맹인이 예수님의 은혜로 눈을 뜨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을 통해 배우는 교훈으로서 응답받는 기도를 드리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1. 주님을 높이며 기도하라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35-36절). 여리고는 요단강 서쪽으로 약 8km와 예루살렘 북동쪽으로 약 24km에 위치한 성읍으로서 북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서는 관문 역할을 했던 지역이었다. 본문의 맹인은 마가복음에 의하면 바디매오다.
맹인의 물음에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하자 맹인이 외쳤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때 맹인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한 호칭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담기에는 매우 부족한 호칭이지만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으로 온다고 믿었기에 그의 지식 범위 내에서는 예수님을 최고로 높인 호칭이었다. 그처럼 하나님을 최고로 높일 때 하나님도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
하나님이 높이는 삶이란 하나님을 높인다는 말을 자주 하거나 외적으로 화려하게 찬양과 경배를 하는 삶만이 아니라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용서하기 힘든 사람을 용서하는 삶이다. 감사와 용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온전히 인정해야 생기기 때문이다. 죽도록 충성하면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으면 곧 상황은 반전되어 기도 응답의 역사가 시작되고 놀라운 반전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2. 자기를 낮추며 기도하라
바디매오는 눈을 뜨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 있었지만 그 소원을 직접적으로 대담하게 아뢰면서 “저의 눈을 뜨게 하소서.”라고 하지 않고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자기를 지극히 낮추며 기도했다. 겸손하게 기도하면 문제 해결도 얻고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을 얻는다. 그것은 내게서 예수님을 닮은 겸손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최고의 영성은 신비한 능력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는 것이다. 예수님을 어설프게 만나거나 한두 번 만나면 마음이 높아지지만 예수님과 꾸준히 만나면 겸손해진다.
교회에서도 늘 겸손한 모습을 가지고 비판하기보다 이해하며 타인 감수성이 넘치는 자세로 교회생활을 하라. 또한 교회 등록도 신중하게 하고 등록한 후에는 교회가 나의 행복의 원천이자 마음의 고향이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따라 맺어진 운명적인 가정이란 마음으로 교회생활을 하라. 어떤 사람은 생각 없이 교회에 등록한 후 얼마 후에 떠나면서 여러 이유를 댄다. “교회가 사랑이 없다, 사람을 무시한다, 다른 교회에 있는 어떤 것이 없다.”
그렇게 따지면 그것만 부족하겠는가? 다른 부족한 것도 많다. 그런 식의 이유를 대고 떠나면 기분만 상하고 신앙성숙도 힘들다. 어느 교회든지 문제는 있음을 알고 그 문제를 나의 성숙을 위한 재료로 활용하라. 늘 나보다는 공동체를 생각하고 하나보다는 둘을 생각하는 겸손한 믿음이 있을 때 기도 응답도 속히 이뤄지고 성숙한 믿음도 나타난다.
한 사람이 노모의 외로움을 달래주려고 개를 키웠다. 그는 개를 사랑했지만 오냐 오냐 하지는 않았다. 주인이 지나치게 예뻐하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들의 예쁨을 받으려고 손님에게도 겸손하게 와서 애교를 부리니까 손님들도 다 예뻐했다. 또한 개가 겸손하니까 잔병치레도 없고 병원비도 안 들고 건강하게 살다가 제 명을 다하고 죽었다. 겸손해야 사람의 사랑도 받는다.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 겸손해야 하나님의 사랑도 받고 건강해지고 기도 응답도 빨라진다.
3.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라
맹인이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쳐 목 놓아 부르짖자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지만 그래도 그는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다(39절). 사람들이 꾸짖어도 그는 외침을 포기하지 않았다. 욕심이 담긴 잘못된 기도는 빨리 포기하되 욕심을 버린 바른 기도는 쉽게 포기하지 말라. 기도했는데 더 상황이 나빠져도 계속 감사하며 기도하라. 주위 사람이나 환경 때문에 하나님께 향하는 시선을 포기하지 않으면 조만간 하나님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다.
간절한 맹인의 외침을 듣고 예수님은 머물러 서서 그를 데려오라고 명하셨다. 같은 평행 본문인 마가복음 10장 50절을 보면 예수님이 자신을 부르신다는 소식을 듣고 바디매오가 겉옷을 내버리고 예수님께 뛰어왔다. 겉옷을 내어 버렸다는 말에는 자기의 소중한 것을 포기했다는 암시다. 거지에게 겉옷은 밤에는 이불 역할도 했기에 소중한 것이었지만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을 포기했다.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포기하면 하나님은 늘 그 포기한 것 이상을 되돌려 주신다.
또한 맹인이 겉옷을 내어 버렸다는 것은 자존심을 포기했다는 뜻도 있다. 자존심을 너무 내세우면 대개 후퇴한다. 육체의 병을 고치려고 의사에게 가서 의사 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우고 몸을 보이지 않으면 치료할 수 없다. 필요하다면 부끄러운 부분도 다 내보여야 하듯이 하나님 앞에서 나를 내려놓아야 온전한 치유가 이뤄진다. 자기 고집, 자기 욕심, 자기 허울은 기꺼이 포기하되 찬란한 꿈과 비전과 사명은 포기하지 말고 기도의 열정도 포기하지 말라.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하면 복된 응답의 역사가 있다.
4.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
예수님이 간절한 바디매오의 외침을 듣고 머물러서 그를 데려오라고 명하신 후 그가 가까이 오자 물으셨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가 즉시 말했다. “주여! 보기를 원합니다.” 그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단순히 보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때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외침을 단순히 큰소리로만 여기지 않고 믿음의 외침으로 여기셨다. 기도할 때 믿음으로 기도하라. 나쁜 환경 탓을 하지 말고 환경을 극복하는 믿음을 가지라. 하나님은 무엇보다 나의 믿음을 보신다.
요새 한국 교회가 많이 어렵지만 너무 실망하지 말라. 이런 때일수록 내가 평화의 사자 역할을 잘 하겠다고 다짐하라. 기독교선교연맹(C&MA)은 선교하는 교단으로서 보수적인 믿음을 지향하면서도 각종 차별과 장벽을 허무는 것을 중시한다. 얼마 전 교단 내에 목회자 사이에 카톡으로 약간 정치적인 공방이 있어서 잠깐 긴장감도 흘렀지만 대부분의 목사가 서로 자제하면서 그 문제가 은혜롭게 풀렸다. 진리의 본질 문제가 아닌 비본질적인 문제로 극심하게 갈라질 때 선교하는 교인들은 예수님처럼 평화의 사자 역할을 잘 해야 한다.
목회자는 선거 때마다 기쁨과 걱정이 교차한다. 우측 진영이 승리하면 “우측 성도님의 맺힌 한이 풀려 좋으시겠다.”라고 생각하며 같이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좌측 성도님이 실망하겠네.”라고 걱정이 된다. 반대로 좌측 진영이 승리하면 “좌측 성도님이 엔돌핀이 솟겠네.”라고 생각하면 기쁘지만 “우측 성도님이 실망해서 소화가 안 되면 어떡하지.”라고 걱정이 된다. 맑을 때는 짚신 장사 아들 때문에 기쁘다가 우산 장사 아들 때문에 걱정하고 비올 때는 우산 장사 아들 때문에 기쁘다가 짚신 장사 아들 때문에 걱정하는 부모 심정이다.
좋을 때는 남을 위해 기쁨을 절제하고 슬플 때는 남을 위해 슬픔을 절제하라. 성도가 삶의 명암과 환경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이면 목사도 기뻐하고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다. 환경에 따라 쉽게 흔들리지 말라. 작은 실망의 순간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면 하나님은 큰 실망의 순간을 덜 겪게 하신 하신다. 그것이 믿음의 열매다. 기도 응답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의 기도에 응답이 없어도 “여기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겠지.”라고 하면서 계속 믿음으로 기도하면 조만간 선한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5. 주님을 따르며 기도하라
예수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말씀하자 곧 맹인이 보게 되었고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후 즉시 예수님을 따랐다. 그 모습을 보고 백성이 다 하나님을 찬양했다(43절). 그때 백성들은 예수님의 기적적인 역사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맹인이 즉시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이다. 기도 응답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도 응답 후에 신실하게 헌신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다만 하나님을 믿고 따를 때는 순간적이고 즉흥적인 감정을 너무 앞세우지 말라.
성도의 영적인 건강을 진단하려면 두 가지 진단이 필요하다. 하나는 온도계 진단이다. 영적 온도를 잘 맞추라. 영적인 온도가 낮아져 믿음이 냉랭해지면 위험하다. 사람이 죽으면 체온이 낮아진다. 반대로 영적인 온도가 너무 높아져도 안 된다. 사람이 병들면 체온이 높아진다. 체온이 아주 높아지면 헛소리까지 한다. 열정적인 믿음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너무 열정만 심해지면 위험해질 수 있다. 이단에 빠진 사람을 보면 대개 잘못된 열정적인 기도가 수반된 것 알 수 있다.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겸비하라.
또 하나는 청진기 진단이다. 영적인 청진기로 마음속에 인간적인 욕심이 도사리고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살피라. 영성을 과시하려는 욕심이나 성공과 물질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거나 기도하지 말라. 예수님을 믿으면 일시적으로는 복보다 고난을 받을 때가 많다. 예수님의 제자 중 세상적인 복을 받은 사람은 없고 대부분 순교했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까 그 순교가 진짜 복이었다. 세상적인 복을 지향하기보다는 최종적인 복을 추구하면서 예수님의 길을 온전히 따름으로 이 땅에서 성도답게 살고 기도 응답도 넘치게 받는 복된 심령이 되라.
영적 거지가 되지 말자
눅 18장 35~43절 / 박한응목사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오늘도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어제 그제가 우리나라가 국가 적으로 지키는 현충일이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순국하기도 하고 또는 장애를 입고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분들을 추모하는 날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분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나라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분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어떻게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요즘 길을 다니다 보면 군데군데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풍경을 보면서 그 옛날 못 먹고 헐벗었던 보리 고개를 생각해 봅니다. 참으로 지지리도 가난하여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던 때가 바로 4~50년 전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386 좌익 세력들이 독재자라고 몰아붙이는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 사업을 통하여 “5000년 묵은 바위의 이끼를 벗기자” 라는 슬로건으로 “우리도 한 번 잘살아 보자”는 운동을 벌렸습니다.
그 결과 온 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어 지지리도 못살던 가난의 대물림을 끊어 버리고 선진국의 대열을 향해 고공행진을 하게 되었습니다. 몇 해 전 캄보디아를 선교 방문하였을 때 현지 가이드가 하는 말이 현재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고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세계적으로 고 박정희 대통령은 1세기에 한명 나올까 말까 한 인물로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 안에서만이 그 분을 독재자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김대중 前 대통령은 퇴임 후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기념관을 건립하였습니다. 故 노무현 대통령은 고향 봉화마을에다가 수십억을 드려 사저를 짓고 천년만년 살아보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백억의 국고를 드려서 호화묘지를 조성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 박정희 대통령만은 기념관 건립을 하지 못하도록 지나간 10년 동안 온갖 방해를 해서 이루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는 머리에 백발이 날리는 7080세대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며 이루어 놓은 경제 성장의 금자탑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오늘날 386세대라고 하는 사람들은 환상적인 이념만을 앞세워서 이와 같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우고 이 나라를 지킨 60대 70대 80대를 보수 수구세력이라고 단죄하면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2030 세력들이 누리고 있는 풍요로움 뒤에는 지난날 5060, 7080세대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베트남 전쟁을 통하여 많은 장병들이 월남의 정글 속에서 피 흘려 싸웠기에 우리나라의 군장비의 현대화가 이루어 졌고 경제 성장의 초석이 되었음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현충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몸 바친 그분들의 영령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느새 이제는 완연한 여름이 되어서 한낮에는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날씨로 변해 버렸습니다. 어제 그제가 절기로 보리 환갑이라고 하는 망종(芒種)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지역에서는 보리농사가 없지만 호남지역으로 가면 보리 추수가 지금 한창입니다.
이와 같은 여름철을 맞이하여 건강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하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신앙과 믿음이 떨어지거나 식지 않도록 각별히 힘쓰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생활에 있어서 에너지와 같습니다. 에너지가 떨어지면 모든 것이 다 정지되고 맙니다. 마치 자동차의 기름이 떨어진 것과 같습니다. 기름이 떨어지면 자동차의 모든 기능이 정지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믿음이 식어지거나 떨어지면 우리의 생활의 모든 기능이 마비되고 맙니다.
그래서 생활의 기쁨이 없습니다. 생활의 기쁨이 없으니까 매사에 의욕도 없고, 교회도 나오기 싫어지고, 억지로 교회 나와 앉아있어도 한 시간 내 졸다가 갑니다. 그러니까 무슨 은혜가 되고, 무슨 성령 충만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이래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는 『새 힘 받아 승리의 삶을 살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노력하고 힘쓰는 자를 도와주십니다.
다 같이 복음성가를 한절 부르겠습니다.
주님 손잡고 일어서세요.(136)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 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 찌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 세요 힘을 내 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힘을 내 세요 힘을 내 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잖아요
그럼 오늘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다 같이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영적 거지가 되지 말자』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 말씀으로 성경에 기록된 바디매오의 실상과 오늘의 우리들을 대조하면서 우리가 마치 거지같은 인생을 살고 있지나 않은지를 돌이켜 보고 저녁 시간에는 거지의 상징인 겉옷을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예수께로 나온 바디매오가 눈을 뜨게 된 것을 말씀드리면서 우리도 영적 거지의 겉옷을 벗어버리는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에 일어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건이며 기적의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발걸음을 재촉하여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요단강 건너 뵈뢰아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요단강을 건너면 여리고성을 지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리고성을 지나가실 때에 길가에서 구걸하는 바디매오라고 하는 거지 소경을 만났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나라에는 소경들이 참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리고성의 바디매오는 성문 곁에 앉아서 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만 들리면 구걸을 합니다. 그 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눈을 굴리며 구걸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지나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서 오늘이 무슨 날인데 사람이 이렇게 많이 지나갑니까? 하고 물으니까 나사렛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꿈속에서라도 만나기를 소원하였던 예수님이 지나 가신다니 꿈이냐? 생시냐? 하면서 예수님을 목청을 돋우어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못 들으신 척 그대로 지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는데 바디매오는 더욱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은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하시고 그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우리들은 이 바디매오의 기적의 사건을 통하여 바디매오가 눈을 뜬 것도 중요하지만 바디매오를 통하여 우리들 자신을 돌아다보며 우리가 오늘 고쳐야 할 고질적인 믿음의 병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함께 은혜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1. 먼저 바디매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詳考해 보겠습니다.
(1) 바디매오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소경은 눈을 볼 수 없는 장애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습니다. 약 7만 명의 맹인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책망하셨습니다.
(겔12: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막8: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예> 비행기를 조종하는 조종사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구름이 끼고 안개만 끼면 눈 뜬 장님이 되어 기계에만 의존하고 비행을 한다고 합니다. 미국을 출발하여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가 인천 공항 상공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천공항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계기판만을 드려다 보아야 합니다. 이때 관제탑에서 연락이 옵니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1마일 떨어져 있으니 고도를 낮추시오 이제는 0.5마일 남았으니 75피드로 착륙을 시도하시오’ 그러나 조종사의 눈에는 아무것도 안보입니다. 가까스로 활주로에 무사히 착륙을 하였습니다. 마치 장님이 외나무다리 건너가는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2) 바디매오는 항상 멸시와 천대를 받고 살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선천적인 질병이나 장애는 부모의 죄요 후천적인 것은 자신의 죄라고 믿는 습성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갈 때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신 것을 보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멸시와 천대를 받았겠습니까?
(3) 바디매오는 구걸하여 먹고사는 거지였습니다.
구걸이란 다른 사람에게 돈이나 곡식 또는 물건 등을 얻기 위해 간청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알다시피 구걸하는 사람들은 남에게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으로서 본연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2. 거지의 속성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거지들은 항상 더러운 옷을 입습니다.
평생 좋은 옷을 입지 못합니다. 있어도 입을 수가 없습니다. 좋은 옷을 입은 사람에게 누가 적선을 하고 도와주겠습니까?
(2) 거지들은 항상 구걸을 해서 먹고삽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항상 자기가 노력하고 그 노력에서 얻어진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고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거지들은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기껏 한다는 것이 남에게 더러운 손을 벌리는 것 밖에 없습니다. 서울에 가면 서울역 부근과 지하철 정류장이라든가 지하도에 노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는데 모두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는 것과 빈둥빈둥 놀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항상 술에 취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큰 맘 먹고 천 원짜리 두어 장 쥐어주어 보세요 그러면 당장 그 돈 가지고 매점에 가서 소주 한 병 삽니다.
그러므로 거지들에게는 씨를 심고 가꾸고 거두는 노력이 없습니다. 마치 기생충처럼 남에게 의존이나 해서 살려고 합니다.
3. 그러면 누가 어떤 사람이 영적 거지인가
위에서 거지의 속성에 대하여 이미 말씀을 다 드렸기 때문에 벌써 짐작을 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일반 사회에 거지들이 있다면 신앙생활에도 거지가 있는데 이들이 바로 영적 거지입니다. 더 고상한 말로 표현한다면 『거룩한 거지』입니다. 그러면 누가 어떤 사람이 영적 거지이고 거룩한 거지인가를 잘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 즉 설교를 들으면 그 말씀을 나에게 적용(Application)을 하여야 합니다. 선포되는 설교 말씀이 모두 나와는 상관이 없고 다른 사람에게만 연관이 된다고 생각을 한다면 이것은 극도의 이기주의입니다.
(1) 하나님과 멀어지면 거지가 됩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돈이면 다 되는 줄 알고 돈 가지고 떠났다가 가졌던 돈 다 잃어버리고 정말 거지가 되어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뜻합니까? 아버지를 떠나 아버지와 멀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과 멀어진 것을 말합니다. 교회와 멀어진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가진 돈 다 빼앗기고 잃어버리고 그리고 몸은 병들어 만신창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탕자와 같이 아버지께로 돌아만 오면 문제는 해결이 되는데 사람들은 마음이 강퍅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올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실 때에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라고 하였습니다.
(2) 신앙생활에 게으른 사람이 영적 거지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거지들은 누가 일찍 일어나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아무 때나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고 잠자고 싶으면 잠을 잡니다. 그리고 배고프면 나가서 구걸을 합니다. 생활의 규칙이 없습니다. 사람은 규칙의 동물이며 사회성을 가진 집단적 동물이기 때문에 규칙이 있어야 하고 그 규칙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 게으른 사람 보면 규칙이 없습니다. 주일날도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무슨 일이 있어서 다른데 가고 싶으면 가버립니다. 저녁예배도 이런 저런 핑계로 안 나옵니다. 새벽기도는 아예 다른 나라사람들이나 하는 것인 양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이 생각해 버립니다. 신앙생활에 규범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영적 거지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가 아니고 모두가 다 내 뜻대로 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고 말씀하였고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책망하실 때에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3:19) 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라"(롬12:11) 고 하였고 솔로몬은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고 하였고 그 외에도 게으른 자에 대한 책망의 말씀이 수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잠6:9)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잠22:13)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잠26:13)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잠26:14)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3) 타의에 의해서 겨우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항상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피동적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마치 손수레처럼 누가 끌어다 놓으면 그 자리에 그냥 있고 또 누가 끌어오기 전에는 그 자리에 그냥 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자기 생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름 사람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가자고 해야 겨우 손수레처럼 끌려 나오고 심지어는 아무리 끌어도 움직이지도 않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믿음가지고 무슨 신앙생활 한다고 하겠습니까? 이런 생활에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매사에 짜증만 나고 불평과 원망만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러면 사탄이 얼씨구나 하고 틈을 탑니다. 그러면 환난이 닥쳐옵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지금은 자다가 깰 때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할 때라”고 하였습니다.(벧전4:17) 사도 바울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4) 신앙의 구걸이나 하는 사람이 영적 거지입니다.
자기가 노력하지 않고 구걸하여 얻어먹는 것은 항상 부족하고 배가 고픕니다. 그러나 자기가 노력하여 얻은 결과는 항상 풍요롭고 넉넉하고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자기가 노력하고 힘쓰고 애써서 은혜 받고 기쁨이 충만한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남에게 얻어먹는 신세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서울역 앞의 수많은 노숙자들이 왜 그 생활을 청산하지 못합니까? 요즘 중소기업에는 일군이 없어서 기계를 모두 세워놓고 공장은 문을 닫고 불법으로 체류하는 외국인 노동자들로 인해서 겨우 돌아가고 있는데 어디 가서 일하면 왜 못삽니까? 그 생활에 중독이 되어서 그 생활을 떠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지 근성이 박히면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말세가 가까워 오니까 사람들의 마음은 강퍅할 대로 강퍅하여져서 아무리 권면하여도 듣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계22:10-12)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거지가 아닙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관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다시는 거지의 누더기 옷을 입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사함 받고 이제는 세마포 예복을 입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임을 명심하고 자녀답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자기 가슴에 가만히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영적 거지가 아닌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깊이 생각 할 것은 우리가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교인이 아닙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집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야 참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영적 거지가 아닙니까? 여러분의 신앙이 거지 신앙이 아닙니까? ①하나님과 멀어지고 ②신앙생활에 게으른 사람 ③매사에 능동적으로 행하지 못하고 타의에 의해서 겨우 움직이는 사람 ④신앙의 구걸이나 하는 사람은 아무리 자신은 아니라고 변명을 해도 어쩔 수 없이 영적 거지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계3:19-20)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는 열심을 내야 합니다. 주님이 지금 나의 심령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주님을 영접하여야 합니다.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성도가 되어서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걸음을 멈추시고
홍인식목사(현대교회) / 눅 18:35∼43(평행구절: 마 20:29∼34, 막 10:46∼52)
쉴 새 없이 달려오다
우리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인물들은 대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이룩하여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더욱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라나서 혼자 힘으로 노력하여 나름대로 성공을 한 사람을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하면서 더욱 존경하고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우리의 자녀나 후배들에게 이들처럼 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라고 가르칩니다. 땀을 흘리고 한 눈 팔지 말고 목표를 향하여 쉬지 말고 나아갈 것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고 배우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성공 사례는 쉴 새 없이 노력한 것의 결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릴없이 쉬는 모습이 발견되면 우리는 그것을 비생산적인 것이라고 간주하기도 합니다. 목표를 향하여 멈춤 없이 달려가는 모습이 오늘 우리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멈춤 없이 달려가는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들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난 벌써 하고 있는데
나이 지긋한 하버드 출신의 성공한 은행가가 멕시코 작은 해안가에서 모처럼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출항 두 시간 만에 고기를 조금 잡다 부두로 들어온 젊은 어부에게 은행가가 물었습니다. “아니, 왜 이렇게 일찍 들어오세요? 좀 더 고기를 더 많이 잡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남는 시간엔 뭘 하세요?” 어부는 웃으며 “전 이걸로 충분합니다. 몇 마리는 우리가 먹고 나머지는 팔아서 필요한 것을 사면 돼요. 낮잠을 자다가 오후에는 아이들과 놀고 아내 일을 거들곤 해요. 저녁식사 후에는 마을로 산책 나가 와인도 마시고 친구들과 기타를 치며 놀죠.”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은행가는 한심한 듯 비웃으며 일장 설교를 늘어놓습니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해 더 많은 고기를 더 잡고, 더 큰 배를 사고, 사람을 고용해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배를 한 척 더 사고… 공장을 세우고, 고기를 수출하고, 30년쯤 후에는 거대한 기업체 사장이 되어 주식을 상장하면 수백 억 달러를 벌 수 있습니다.” 어부는 그 말에 “그런데 그 다음엔 뭘 하죠?”라고 물었습니다. 은행가가 말합니다. “인생을 즐기는 거죠. 멕시코 해안가 조그만 마을로 이사 와 늦잠도 자고 고기 잡는 재미도 즐길 수 있습니다. 오후에는 아이들과 놀고 아내의 일도 거들며, 저녁에는 식구들과 식사를 한 뒤 마을로 산책 나가 와인을 마시는 거죠. 그리고 친구들과 기타를 치며 놀 수도 있고요.” 어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합니다. “그런 거라면 난 벌써하고 있는데..”
오늘 멈춤이 없이 숨 가쁘게 앞만 보고 달려가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생각해 보게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지난 세월 급류에 휩쓸려 가듯 앞만 보며 숨 가쁘게 달려왔습니다. 이렇듯 숨 가쁘게 달려가는 우리의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본문을 통하여 우리의 삶에 담아내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마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길 가는 예수님과 제자들
오늘의 사건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일행은 길을 가는 중에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누가복음 18장 31절에 의하면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길 가는 중에 여리고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길가에 있던 시각장애자 한 사람이(마가복음에 의하면 바디매오.) 예수를 향하여 소리쳐 외칩니다. 자신의 눈을 고쳐 달라고 합니다. 갈 길 바쁜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를 나무라며 조용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고 걸음을 멈추시고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가서 그의 눈을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눈을 뜨게 된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시각 장애자 바디매오가 그의 장애를 극복하고 눈을 뜨게 된 동기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살펴봅시다. 무엇이 이런 기적을 발생하게 만들었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특별히 시각장애자 바디매오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는가를 중점적으로 성찰해 봅시다. 바로 그 마음이 우리를 살리는 마음이고 따라서 우리의 삶에 담아내어야 하는 마음입니다.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오늘의 본문은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여행길에 나선 예수님의 일행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행길에 불쑥 나타난 불청객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큰 소리로 도와달라고 외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제자들의 마음을 바빠졌습니다. 갈 길이 먼 데, 이렇게 훼방꾼들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언제 예루살렘 도착할 것인가라는 걱정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왕의 입성으로 오해 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에 도착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자신들도 지금까지의 고생을 벗어나서 이제 한 몫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빨리 예루살렘에 도착해야만 했습니다. 걸음을 재촉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쁜 여행 일정에 나타난 바디매오의 존재가 그들에게는 한 없이 귀찮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바디매오를 조용히 시키려고 합니다.
이렇게 바디매오를 바라보는 제자들과 군중들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을 달랐습니다. 복음서는 바디매오의 외침 앞에서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복음서는 바디매오를 향하여 “조용하라!”고 나무라는 제자오 군중들의 모습과 “걸음을 멈추시는” 예수의 모습을 날카롭게 대조하고 있습니다. 마치 오늘 이 말씀을 읽고 있는 우리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어떤 사람들인가라고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디매오의 외침을 들으면서 우리는 어떤 자리에 서 있는 것일까요?
대체로 제자들의 입장이 우리들이 가진 입장일 것입니다. 시끄럽게 떠드는 바디매오가 귀찮은 존재로 보입니다. 갈 길이 바쁜 우리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훼방꾼으로만 보입니다. 우리 모두는 빨리 예루살렘에 도착해야 하는 데 바디매오 같은 사람을 돌아보려고 가던 걸음을 멈추게 되면 우리의 목표는 달성하기 어렵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중에 멈춘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불경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성공하고 싶어 하고 그리고 성공하기 위하여 곁길로 가지 않으며 가던 길을 멈추지 말 것을 강요당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그러한 환경 속에서 살아왔고 또 그래서 나름대로 성공을 이룩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놀라운 경제발전은 이러한 길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앞으로 달려간 노력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교회 성장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도 한 눈을 팔지 않고 그리고 가던 길을 멈춤 없이 목표만 향해서 나아감으로서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문제점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첫째는 멈추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 목표를 이룩하면 또 다른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끝없는 욕망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애초의 하나마저도 잃는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 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늙음이 아니라 녹스는 삶이다. 인간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법정)라는 말의 의미를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 많이 가지고 성취하려는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멈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성공을 오직 자신의 노력으로만 돌리게 됨으로서 자신에 대한 자만에 빠지기 일수 입니다. 자신이 이룬 것에 대하여 스스로 함몰되어 있음으로 인하여 이웃들을 외면하게 되고 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던 길을 멈추어본 경험이 없는 사회는 이웃을 돌아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목표만을 향하여 쉬지 않고 달려오기만 한 한국사회가 맞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2천 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루살렘 성이라는 목표를 향하여 멈춤과 쉼 없이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바디매오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바디매오의 외침이 귀에 들릴 리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멈춤 없이 걸음을 재촉하는 우리들의 모습가지고서는 바디매오가 눈을 뜨는 기적을 이뤄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기록은 갈 길 바쁜 사람들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예수님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걸음을 멈추기
성경은 예수님과 바디매오의 만남의 광경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앞에 서서 가던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크게 외쳤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오니,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주님, 내가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39∼40)
주님은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가시던 걸음을 멈추니까 예수님의 귀에 바디매오의 외침이 들려옵니다. 멈춤 없이 바디매오와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의 애타는 외침과 호소에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는 그 예수님의 마음이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만드는 기적을 발생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발걸음을 재촉하는 무리들의 모습과 발걸음을 멈추시는 예수님의 차이는 이토록 대단한 것입니다. 복음서는 이 같은 예수님의 걸음 멈춤이 많은 사람들을 살렸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환영하는 걸음을 재촉하는 소란함 속에서도 나무 위에 올라가서 맘 졸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삭개오를 만나기 위하여 걸음을 멈추십니다. 예수님의 걸음 멈춤이 삭개오를 구원합니다.(누가 19: 1∼10)
제사장 야이로의 딸의 병을 고쳐주시기 위하여 길을 가던 예수님은 그의 앞에 나타난 혈루병을 앓고 있던 한 가련한 여인의 호소에 가시던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그녀를 치료해 주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러가.”(눅 8:48) 그 뿐만이 아닙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동안이나 누워 지내던 사람,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사람 앞에서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합니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요 5: 8)
예수님은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누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인가 그래서 결국 영생에 이르게 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좋은 이웃이 되어서 결국 영생에 이르게 된 것은 어떤 연유에서 입니까? 가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갔기 때문입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잠시 가던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발걸음을 멈출 수 있는가 혹은 그렇지 못한가가 그들에게는 영생의 갈림길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하여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부지런히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옮겼습니다. 그런데 멈추지 않은 그들은 결국 영생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 반면에 걸음을 멈추고 강도당한 사람을 돌보아 주었던 사마리아 사람은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죽고자 하는 사람은 살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순간입니다.
걸음을 멈추는 예수
결국 예수님의 발걸음 멈추심이 많은 사람을 살게 하셨고 우리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2천 년 전에 그러하셨듯이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보시고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속사정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도와 달라는 그리고 살려달라는 우리의 음성”을 들으시고 계십니다. 만일 예수님이 우리를 보시고 발걸음을 멈추시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구원의 가능성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심에 의해서 새로운 생명을 부여 받을 수 있고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이처럼 목표를 위하여 멈춤 없이 발걸음을 재촉하는 마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서는 언제라도 발걸음을 멈출 수 있는 마음을 가지신 분입니다. 오늘 바디매오가 눈을 뜨게 된 이적은 오직 발걸음을 멈추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인하여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런 예수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도 생명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발걸음을 멈추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의 삶에 담아냅시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우리들의 삶을 잠시 접어두고 발걸음을 멈추고 나의 형제자매들의 삶을 돌아봅시다. 우리의 가정에서 성공이라는 목표만을 바라보면서 발걸음을 멈추지 말 것을 강요하지만 말고 가끔은 발걸음을 멈추시고 우리의 배우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우리의 자녀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경제발전만을 위하여 발걸음을 멈추지 말라는 재촉하는 소리를 잠시 뒤에 두고 가끔은 발걸음을 멈추고 우리의 자연들이 우리에게 호소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산과 강이 바다가 우리를 향하여 외치는 호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아야 합니다. 발걸음을 멈추시고 바디매오의 소리에 귀를 기이셨던 예수님의 마음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의 동물들이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를 살게 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사람과 창조세계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함께 슬퍼하는 애통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의 삶에 담기 위해서 그리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발걸음을 멈추시는 예수님의 멈춤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우리 모두를 살게 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오니,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주님, 내가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40∼42)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 삶에 담아내는 현대교회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무엇이 맹인 되게 하는가?
눅 18장 35~43절 / 유영설목사
성경본문을 통해서, 오늘날 무엇이 우리를 맹인 되게 하며, 누가 진정한 맹인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물을 보지 못하고,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그를 사람들은 맹인거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그분에게 구하면 자신의 병이 깨끗이 나을 것이라는 안목이 있었습니다. 구걸하던 맹인은 육체의 장애가 있었으나 그의 마음에는 평화와 기쁨 그리고 눈을 뜰 수 있다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그를 꾸짖는 자들은 마음의 장애를 가지고 있었으며, 은총을 베푸시는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맹인의 입장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육체와 마음의 맹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1. 절망(어두움)
현대인들에게는 이름 붙이기 어려운 질병이 많습니다. 불안과 긴장을 느끼게 하는 노이로제 그리고 의학적으로 진단이 불가능한 고독과 절망입니다. 철학자 키엘케고르는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절망’은 어떤 노력에 대해서 작은 결과도 얻어내지 못했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맹인을 보십시오. 절망할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자신의 상황과 조건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거나 돕지 않습니다. 냉정한 현실 앞에서 한 인간이 무엇을 바라보고 용기를 낼 수 있을까요? 구걸하던 맹인 거지는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귀로 들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의 눈은 절망적일지 몰라도 그의 귀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하나를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남아있는 하나로 부족한 것을 회복하려는 의지와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으로 절망을 극복했습니다.
2. 열등감
맹인 거지는 신체적인 조건에서 열등감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열등감은 치유가 필요합니다. 열등감 때문에 수치심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부끄러움 때문에 소극적이 됩니다. 어떤 일에 자신감보다는 실패하는 감정들이 지배합니다. 인간관계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수치심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정탐할 때, 아낙자손을 보고 자신들을 스스로 메뚜기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낙자손들이 보기에도 그럴 것이라고 했습니다(민 13:33). 맹인 거지를 보십시오. 그는 남들처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구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앞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열등감과 수치심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문제가 있어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구걸하던 맹인 거지가 문제가 있어 그걸 해결하려고 주님을 불렀습니다. 자기 문제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때, 문제는 더 커집니다.
3. 주변 환경
맹인 거지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 이유는 맹인 거지라는 신분 때문이었습니다. 맹인 거지의 외침은 자기 존재의 표현인데, 사람들은 그런 기회 자체를 주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환경의 제약을 많이 받습니다. 사회적 통념이나 관습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하여 칭찬과 격려 그리고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무관심과 외면으로 의지가 꺾일 때도 많이 있습니다. 사실 주변 환경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위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가 내 행동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환경을 초월해야 합니다.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았던 맹인 거지에게 예수님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맹인 거지의 유일한 소원이요, 희망입니다. 환경을 극복하는 자에게 소원을 물으시는 주님을 보십시오. 환경 때문에 낙심, 원망,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쁜 환경을 주님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계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고침 받은 맹인 거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신 분을 기억하며, 보답하는 삶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었습니다. 한 인간의 치유와 회복은 그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희열 그리고 가능성을 갖게 했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일어난 사건입니까? 이는 절망하지 않고, 열등감에 빠지지 않고, 환경에 붙잡히지 않는 한 인간의 태도가 이와 같은 귀한 열매를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 있는 맹인 되게 하는 요소들을 오늘 아침에 모두 내려놓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치유와 소망이 있는 여러분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현상유지는 위험합니다
눅 18장 35~43절 / 김광일목사
아쉽게도 어제 저녁 월드컵 3,4위전에서 우리나라는 4위를 했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긴장하지 못했던 집중력 부족과 수비의 허점으로 3골이나 내주면서 터키에 져 결국 4위를 하고 말았던 아쉬운 밤이었습니다. 현상유지를 하려는 안일한 자세는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여주는 한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시각장애 등반가인 에릭 바히헨마이어는 8천 8백 50미터의 에베레스트산 등정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에릭은 선천성 망막염으로 13살 때에 시력을 완전히 상실한 후, 아버지와 함께 하이킹을 시작하였고, 16세에 산악인으로서의 길을 걸어 킬리만자로산을 정복하였습니다. 산을 오르는 내내 지팡이를 의지해서 동료 셀파의 배낭에 달린 종소리를 들으며 방향을 잡아갔습니다. 정상인도 90% 이상이 등정에 실패한 에베레스트 등정은 그야 말로 고난이었습니다. 결국 등정 중 부상을 당하였고 짐을 셀파에게 지우고 그를 끌고 올라가려 했지만 "나는 정상까지 물건처럼 운반 당하고 싶지 않고 사람들이 마치 나를 공을 차듯이 정상까지 올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하며 거부했습니다. 끝내 그는 정상을 정복했고,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최초의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당신이 단지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홀로 설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깊은 시름에 빠지지 말라, 당신은 다른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비록 앞을 보지는 못했지만 오히려 눈을 뜬 우리보다도 더 놀라운 것을 보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현상유지를 벗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현상유지는 기독교의 정신이 아닙니다. 현실안주는 성경적 인생이 아닙니다. 성경은 현상유지를 강하게 거부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변화와 도전을 추구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현상유지를 거부하고 인생을 새롭게 도전해 가는 한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소경거지입니다. 여리고 큰 광장 길가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는데 길가가 웅성거립니다. 무슨 일이냐고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이 때 소경거지가 갑자기, "나사렛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칩니다.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습니다. 소경거지는 더욱 소리를 지르며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합니다. 이때 예수께서 그의 간청소리를 들으시고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41절에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때 소경거지가 외치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곧 보게 되었습니다. 이 소경거지는 곧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사건은 현상유지를 거부하고 새로운 인생을 출발한 기적입니다. 소경 거지는 예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현실 안주를 단호히 거부하고 인생의 역사를 바꾸어나갔습니다. 오늘은 이 소경거지의 모습을 보면서 보다 나은 인생과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찾을 때 성령께서 함께 하는 시간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현상유지를 강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현실상황은 어떻습니까? 현재의 상황이 좋습니까? 현실로 만족하십니까? 아니면 더 나아질 것을 기대합니까? 더 나은 인생을 꿈꾸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현상유지를 강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축구도 현상유지를 해서는 안됩니다. 앞으로가 문제입니다. 안일한 태도의 현상유지를 강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그래야 선진축구의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의 소경은 거지인생입니다. 거지의 삶은 무슨 삶입니까? 구걸하는 인생입니다. 빌어먹는 인생입니다. 35절에 보면, 거지가 여리고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앉아있다는 말은 현상유지입니다. 현실안주입니다. 적당히 살지 하는 것은 현실안주입니다. 그러나 소경거지는 인생의 현상유지를 거부했습니다. 이대로만 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빌어먹는 인생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 빌어먹는 인생을 종결시키기 위해서는 눈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예수님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거지인생의 현실유지가 싫습니다. 더 나은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하며 외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재에 앉아있으면 현상유지입니다. 인생의 현상유지는 손해입니다. 삶의 위치에서 일어나 외치며 현상유지를 거부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외치며 현상유지를 강하게 거부하시기 바랍니다.
송명희 시인을 아십니까? 의사가 태아의 뇌를 집계로 잘못 건드려 소뇌가 손상되어 평생 뇌성마비로 지내야 하는 그녀는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노래합니다. 7살 때까지 꼼짝못하며 누워지내야 하며, 집이 너무도 가난하여 분유 살 돈도 없습니다. 17살 때에 가서야 비로소 자기 손으로 숟가락을 처음 들 수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죽더라도 하나님을 만나고 죽자 하고 결사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기도응답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나를 믿으라! 네가 믿지 아니하면 죽으리라, 내가 너를 버리지 않으리라" 그 사건 이후로 그녀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그녀에게 하나님은 시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녀의 시는 극동방송에 소개되고 "나"라는 시에 최덕신은 곡을 붙여 노래를 하였습니다. "나"라는 찬양은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소망과 감격을 주었습니다. 송명희 시인은 현상유지를 거부했습니다. 현실안주를 거부했습니다. 누어있어야 하는 인생이 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병상인생이 뛰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의미 없는 인생이 이웃에 도전을 주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현상유지를 벗어나야 합니다
현상유지를 거부하는 데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더 나은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현상유지를 거부하기 위해 하나님이 나를 책임지신다는 확신과 용기와 담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미국의 역사적인 농구 선주중에 행크 루이세티가 있습니다. 루이세티는 농구선수로 활약할 때 절묘한 슛 동작은 관중으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그런데 루이세티가 등장할 무렵, 거의 모든 농구코치가 두 손으로 하는 슛 동작만을 고집하고 선수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루이세티는 그럴 때 한 손으로 하는 점프 슛을 고안해 시도했습니다. 다른 코치들이 그것을 비능률적이라고 반대했지만 루이세티의 코치만은 한 손 슛 사용을 허락하고 개발하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농구의 새로운 장이 열렸고 지금은 많은 선수들이 한 손 슛으로 승부를 가늠하고 있습니다.
현상유지를 거부할 때는 비난과 조소가 뒤따를 수 있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현실안주를 거부하며 인생을 도전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기다리고 있음을 믿고 나가야 합니다. 소경거지가 현실유지를 거부하고 인생을 도전할 때 보는 인생으로 변화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현실안주를 거부하고 앞으로 나갈 때 하나님은 놀라운 인생을 펼쳐 주실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더 나은 인생의 삶을 위해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더 나은 인생의 삶을 추구하기 위해 주님께 외치기 바랍니다. 많은 성도들이 주님을 믿는 것으로만 안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원만 받고 구원만 유지하고 있지,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소경거지는 구원의 믿음에만 안주하지 않고 능력을 체험하는 믿음으로 도전했습니다. 단지 교회에 나와서 예수 믿고 세례만 받고 믿음생활의 현상유지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현상유지를 단호히 거부하고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믿음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변화를 통해 현상유지를 벗어나야 합니다
유명한 안소니 멜로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청년 시절에는 세계를 변화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중년이 되어서는 내 이웃을 변화시켜 주소서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칠십이 된 오늘 난 오직 '하나님이여, 나를 변화시켜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고 했습니다. 변화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해야 합니다. 인생은 미완성이기 때문에 중단 없는 변화를 시도해야 합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치시고 은혜를 베푸셨는데, 하루는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시고자 몸소 방문하셨습니다. 어떤 곳에 갔더니 말도 못하며 축 늘어진 주정뱅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주정뱅이가 되었나?"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원래 절름발이에다 거지였소, 그 때에는 손만 내밀면 얻어먹을 수도 있어서 편했지요, 아 그런데 예수를 만나 두 발을 고침받고 나니 아무도 안 도와줍디다. 스스로 벌어먹고 살다보니 힘들어서 술을 먹게 되어 주정뱅이가 됐지요." 또 한 곳에 가니까 아주 추한 창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시 본 것 같아서 "너는 어떻게하다 비참해졌느냐?"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본래 창녀였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게 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그리고 새 사람이 되었지요. 하지만 막상 새 사람이 되어 깨끗이 살아보니까 너무도 따분하고, 재미도 없고, 행복도 없고, 영 진저리가 나서 도대체 살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 다시 창녀가 되어 지내다보니 이 꼴이 되었지요" 또 예수님께서 다른 곳에 가보니 불량배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었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이렇게 되었나?"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본래 장님이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제 눈을 뜨게 해주셨지요. 그 때는 너무도 감사했지요. 하지만 막상 눈을 뜨고 보니 세상이 어떻게나 더러운지 몰라요. 못된 놈들도 많고, 부조리한 것도 많고, 내 신경을 건드려 화나게 하는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래 어쩌다 보니 그만 깡패가 됐습니다." 계속해서 변화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현실안주 속에서 퇴보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는 그 날 까지 현실안주를 거부하고 계속해서 변화를 시도해야 합니다. 물살을 역류하려면 물살보다 더 빠른 속도로 역류해야 합니다. 내려오는 속도보다 빨라야 올라갈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내려갑니다. 인생의 현상유지는 낙오자입니다. 믿음의 현상유지는 타락입니다.
거지 인생이 인류의 소망되는 나사렛 예수라는 그 말을 듣는 순간에 보는 인생이 된 것처럼, 여러분의 인생도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함께 놀라운 인생이 되어지시기 바랍니다. 현상유지를 박차고 일어나 더 나은 인생을 창조하려 할 때 가로막는 장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무너지지 마십시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현상유지를 박차고 더 나은 인생을 살기를 원하는 자들을 도우시며 기회를 주십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십시오. 주님이 오실 때까지 현상유지를 거부하고 계속해서 변화의 인생을 만들어 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눅 18장 35~43절 / 허남길목사
◈서 론◈
히11:6 말씀에 보면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렇게 하셨다. 하나님은 성도의 바른 믿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줄 믿는다. 마귀는 불신앙을 통해서 자꾸만 역사한다. 불신앙하는 사람에게 마귀가 자꾸 역사한다. 여러분 아름다운 꽃에는 벌이 날아드는데 오물이 많은 곳에는 파리가 날아든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자꾸 역사하신다. 그런데 마음속에 불신앙을 가지고 불신앙으로 보고 불신앙으로 생각하고 그러면 마귀가 자꾸 역사한다. 이 마귀가 역사하는 통로가 불신앙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은 소경 즉 마가복음에는 바디매오라는 사람인데, 이 소경이 하나님 앞에 바른 믿음을 가졌더니 예수님께서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소경이 눈을 뜨고 일평생 구원을 받고 성경에 기록되어서 지금도 우리에게 전해지는 축복된 삶이 된 줄 믿는다. 이 소경의 믿음을 우리가 생각해보면서 은혜를 받겠습니다.
1. 무리 - 나사렛 예수
** 35절
여리고에 가까이 올때에 한 소경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거늘 아마 유월절이란 명절이 가까웠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많이 오니깐 무리들이 많이 있다. 여리고란 지역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외곽도로중에 반드시 통과해야할 지역이라고 한다. 무리가 많이 가니깐 당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듣고 예수님의 기적과 표적과 예수님의 것이 천지에 퍼져있다.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로 장정만 오천명, 여자와 아이들을 다 포함해서 약 이만명으로 본다. 그 이만명이 퍼져가면서 말을 다 퍼트렸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표적과 역사와 교훈들이 한 구석에 있었던일로 생각하면 안된다. 전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전역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사건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 무리가 가면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얘기하고 이슈가 예수님이였다. 며칠전 우리나라에 있었던 이슈가 탄핵의 기각 유무였다. 사람들이 모이면 어떻게 될것이냐 한 것이다. 국회의원 선거할때도 모이면 어느당이 될것이냐 얘기를 많이 하였다. 그런데 그건 잠깐 지나가는 일이지만 예수님께서 표적과 기적을 일으키시고 병을 낫게 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이런 일들은 하루 이틀이나 시기적으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3년동안 하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예수님께서 제사장들 예수님을 죽이려한다 등 만가지 이야기를 하니깐 사람들의 모든 관심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중에 소경이 있다. 구약에 의하면 육체적으로 불구는 죄인으로 취급받았다. 그리고 온전한 직업도 없고 소경도 먹어야되니깐 직업은 온전치 않고 구걸이 전부였다. 소경이 육신적으로도 인정 못 받고 직업도 그렇고 사람들에게 내놓을 것 없는 천한 사람이다.
** 36-8절
그런데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일이냐 하고 물은데 저희가 나사로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예수님께서 아마 그 무리 가운데 지나시는데 예수님의 소문을 파다하게 들었으니 예수님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보통 사람하고 뭔가 조금 다른 소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소경이 물었다. 누가 지나가느냐, 왜 이런일이 일어나느냐, 하니깐 사람들의 말에 나사렛 예수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 무리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표적을 많이 봤을것이고 들었음에도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본다. 우리가 꼭 두 눈을 뜨고있다고 복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그것보다 큰 복은 영적 눈이 뜨여야 된다. 우리가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고 복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그것보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이 열려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하여 지혜가 있는 자가 복있는 자인줄 믿는다. 이 소경은 보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은 두 눈으로 봤는데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았는데도 나사렛 예수..당시에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나 율법사들이 예수님의 교훈과 역사를 많이 보았음에도 예수님을 하나님 보내신 그리스도로 구주로 믿지 않는다. 그런데 천하고 약한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고 치료받은 사람들이 성경에 많이 나타난다. 사람들이 이렇게 했다. 예수님은 똑같은 분이신데 그 예수님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서 믿음대로 하나님의 역사도 달라진다. 같은 시대에 많은 사람들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고 그 예수를 통해서 구원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경은 예수님을 어떻게 불렀냐면..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불렀다. 이 소경은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사렛에 있던 목수 예수가 다윗의 후손인 것을 알았단 말이다.
2. 소경 - 다윗의 후손 예수
다윗의 후손은 메시야의 칭호이다. 메시야가 오면 다윗의 후손으로 온다 하였다. 마9:27등 여러군데 나온다. 삼하 7:12-13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죽지만 너희 후손이 일어나서 하나님 나라를 견고히 세우리라. 사 11:1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다. 다윗의 아버지에서 한 싹이 나며 그 결실할것이 메시야로 사람을 구원할 구주가 나실 것을 예언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의 후손은 육신적으로 생각하면 많이 있지만 다윗의 후손이라 하면 메시야는 한분이다. 이 소경이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직접 보지 아니하였지만 소문을 들었다. 나사렛 예수란 사람이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귀머거리가 듣고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귀신이 떠나가고 죽은자가 살아나고 소문을 다 들었다. 그런데 눈 뜬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보고해도 예수님께서 메시야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을 확실히 안 믿는다. 나사렛 예수라고 말하는데 이 소경은 직접 보지 않고 듣는것만으로도 알았다. 나사렛 예수는 메시야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해도 확실히 믿는 복된자 되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무리 소경이지만은 이스라엘 안에 있기 때문에 어릴때부터 성경을 배웠다. 메시야를 기다리는데 메시야가 오면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뜬다는 것을 배웠다. 벙어리가 말하고 귀머거리가 듣는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니 이 소경은 예수님이 메시야 그리스도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이것을 알았다는 것은 소경 자신의 눈도 메시야를 만나면 확실히 뜬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시는것보면 저분은 확실히 메시야다. 그래서 다윗의 후손 예수여 하였다. 이 메시야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분이다. 그래야 인간을 구원할 구주인 줄 믿는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땅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는데 죄는 없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이시라는 증거. 예수님이 이땅에 계실때에 하나님 하신 일을 모두 하셨다. 죽은자를 살리시고 예수님을 말씀하면 만물이 순종하였다. 증거는 지금도 우리속에 계시는 하나님이다. 죄 없다는 증거는 죽은지 3일만에 살아나신 것이다. 하나님 만나는 길이 되시오, 저주를 해결하시고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시고 지금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모든자에게 성령으로 함께 하신 이름인줄 믿는다. 초대교회 제자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성령을 선물로 주시리니 그 약속은 그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속에 계셔 해당한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속에 계신 것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이땅에 오신 그리스도요. 저와 여러분과 인류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죄 없으시기 때문에 살아나셨다.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우리와 계셔서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시는 분인줄 믿는다.
3.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소경이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 예수여..그 다음에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였다. 이말의 뜻은 내가 지금까지 살았지만 내 힘으로는 내 근본문제가 해결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깨닫는사람에게 우리는 주님을 향하여 더욱 부르짖고 기도하는 줄 믿는다. 신앙이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우리가 죄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고, 죽음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고, 사단, 영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고 내 마음의 평안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우리가 지극히 적은 우리 자신의 생명문제도 해결할 수가 없고 건강도 해결할 수가 없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건강해지기 위해 먹고 운동하는 등 여러 가지를 한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할 수 있는대로 몸에 맞는 좋은 음식 많이 드시길 바란다. 몸이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몸에 맞는 음식 먹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무조건 고기 안 먹고 어떤 사람들은 무조건 고기 먹고 그러는데 그러지 말고 섞어서 잘 드시길 바란다. 제가 황수관씨라는 분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 그 분이 재밌는 얘기를 했다. 우리는 잡식이니깐 그냥 고루 먹어라 하였다. 나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기름 나쁘다고 무조건 고기를 안 먹는다고 한다. 그러다 영양실조 걸리고.. 어떤 사람은 또 몸보신 한다고 무조건 고기만 먹고 다니고, 지나치게 먹는 것이 전부 안 좋다고 한다. 고루 먹으세요. 또 아무리 고루 먹어도 하나님이 건강 안 주시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제일 건강하다. 건강도 그리스도안에 있는줄 믿는다. 아무리 고루고루 먹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전부 다 병이 된다. 그리고 그 분 얘기하시길 너무 많이 먹는 것이 병의 근원이 된다고 적게 먹어라 하였다. 저는 참 절제가 어렵다. 가는 곳마다 먹을 것을 줘서 신방가면 주는데 안먹을려니깐 눈치 보이고 그래서 먹다보면 이렇게 뚱뚱해지고..암이라는 한문을 쓰는데 보니깐 입이 세 개였다. 입이 세 개 정도로 먹으면 암이 걸린다였다. 한 입 가지고 먹어야 하는데 입을 하나를 주셨는데 무조건 먹는게 제일 안 좋다 하였다. 그래서 제가 요즘 좀 적게 먹어야 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은혜를 받아야 한다. 주안에서 기쁘고 감사하고.. 여러분 눈 보니깐 많이 먹으면 암 걸린다는 말에 굉장히 은혜를 많이 받고 있는 것 같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주시는 것 적당히 먹고 남는 것 놔눠먹고 사는 것이 복이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내가 내 힘으로는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다. 그래서 이 소경이 알았다. 소경 안된 사람은 자기 힘으로 뭘 하면 될 줄 알고 잘 안 믿지만 소경은 정말 자기의 부족을 안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주님을 믿는 중요한 동기가 되는 줄 믿는다. 그럼 우리가 두눈을 멀쩡히 뜨고 있으면 소경보다 낫는게 있습니까? 별로 없다. 오히려 죄악된 것만 많이 보고 욕심만 많이 생기며 좋은거 보면 자꾸 탐심만 생기고 소경은 안보이니깐 그런 마음은 안 생긴다. 먹기만 하면 감사하고 말씀들을 때 은혜 받고 어떤 면에서는 이 소경이 더 복을 받을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여러분 눈 뜨고 있는 것 좋은데 이 눈뜬 것이 좋은 것만 보고 하나님 꽃을 보고 역사를 보고 해야하는데 그러나 탐심을 더 본다. 이 세상에서도 남녀 문제가 많은데 소경은 이뿐지, 코가 나왔는지, 입이 큰지 모른다. 이런것들이 문제가 안된다. 결혼해 놓으면 자기 마누라가 제일 좋은줄 알고 사는데 이 눈을 떠놨더니 뭐가 어떻고.. 병원에서 올렸다 내렸다 찍었다 이런다. 이것이 보통문제가 아니다. 꼭 눈이 보인다고 복은 아니다. 어쩌면 안보이는 것이 복일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든다. 안 보이는게 복이라는 말은 어쩌면 안보이는게 바른 믿음을 가진다. 그런데 우리가 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하면 보이는것도 복이다. 안 그러면 누가 데려다 줘야 하는데 혼자가서 복음 전하고..이런 사람이 적어서 그렇치 사실 어떤 면에서는 불신자들은 안보이는게 더 복이라고 생각된다. 쓸데 없는 것을 자꾸 본다. 이 소경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수 없는 것을 알았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4. 39절 잠잠-구걸, 소경
그런데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를 질러..사람들이 잠잠하라 하였다. 그런데 소경은 더욱 소리 질러 하였다. 왜 잠잠하라 하였냐면 구걸하는 사람이고 또 소경이고 인정 받지 못한 사람, 외모로 보았다. 대부분 사람들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려 한다. 무식하다. 배운 것이 없다. 돈없다. 못생겼다. 거지다. 구걸하는 소경.. 나사렛 예수님이 유명한데 우리도 지금 가서 말씀 듣기도 어려운데 소경에게 잠잠하라. 시끄럽다. 너는 은혜받을 자격도 없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하나님 앞에 은혜받을 자격도 없이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소경은 더욱 소리 질러.. 왜 더욱 소리 질렀냐면 기회가 이번 밖에 없기 때문이다. 언제 또 예수님을 만날지 몰라서 이다. 눈 뜬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쫓아가서 따라다니지만 지금 소경은 그럴 입장도 아니다. 기회가 이번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나아가고 은혜받을 때 기회가 이번밖에 없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면 은혜 풍성히 받는다. 이번 주 못받으면 다음주 받지.이러면 안되는 것이다. 이번 응답 안받으면 다음에 받지. 이런 사람은 응답받는 사람이 한명도 없다. 일주일 후에 우리가 만날지 안만날지 모른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 다음주에도 똑같이 준다는 보장도 없다.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때요 우리가 시간시간 은혜받을 때 내가 이번 기회밖에 없구나 라고 은혜를 간절히 받아야될 것이다. 그런데 다음에 받으면 되지.. 졸립다 잠이나 자자.. 이런 사람은 안된다. 소경이 막 소리지르는 것이다. 지금 기회가 이번밖에 없는데 일평생 또 다른 기회가 있을수 없잖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받을 기회가 목사도 설교할 때 하나님앞에 마지막인줄 알고 설교해야한다. 하나님 앞에 말씀 전할 때가 이때밖에 없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성도들에게 바르게 마지막이라면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씀을 전할까 이런 마음으로 말씀 전한다. 소경 바디매오가 이렇게 더욱 소리지른 이유는 예수님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분이란 것을 믿었던 것이다.
①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생각할때는 우리의 문제가 다른 것으로 해결될 것 같다. 그러나 그렇치 않다. 영적인 문제나 육신적인 문제도 예수님만 사실은 우리 문제의 해결자이다. 사람들이 육신적으로 뭔가 해결되어가고 잘 될 것 같은데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그것이 전부 저주가 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아무것도 없어도 형통하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물질도 하나님 떠나서 되는 것이 아니다. 한 집사님이 계시는데 남편이 예수를 믿지 않았다. 어묵 관계되는 일에 종사한다 하였다. 아들이 이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학교에서 떡볶이 하는데 아빠가 올 때 어묵 좀 가지고 오라고.. 아빠가 술을 한잔하고 학교에 갔다. 불신자니깐 애한테 어묵을 주면서 하나님 좋냐, 아빠가 좋냐 하였다. 하나님 좋다고 하면 어묵을 안 준다고.. 그러면서 부인 보고 애들 하나님 좋다하여 다 배려났다고 하였다. 불신자들이 능히 할수 있는 얘기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제가 어릴 때 아저씨댁에 과수원을 했는데 고모님이 전도사님이였다. 그런데 사과를 주시는데 기도하고 먹는데 어찌나 화를 내시는지 사과를 준 자기한테는 감사하다 안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수준이 똑같은거 같다. 예나 지금이나 수준이 똑같은 것 같다. 하나님이 하지 않으면 할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 건강도 하나님 주셔야 하는것이고 지혜도 주셔야 하는 것이고 정말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만 해결할수 있는 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자이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형상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왜 자꾸 불신앙에 흔들리냐면 하나님이 안해도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자꾸 가진다. 우리는 하나님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소경은 자기가 할 수가 없고 예수님만 할 수 있다는.. 이 사실만 알기 때문에 갈급해지는 것이다.
② 응답
예수님 안되면 안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 마음으로 주앞에 나와서 은혜받는 사람은 다 응답받는다. 이것이 응답의 중요한 열쇠이다. 예수님께 나아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해결해주신다. 이 믿음 때문에 간절하다. 예수님만 할 수 있음을 믿고 나오면 주님이 하심을 믿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와서 예수님이 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을 안 믿고 나온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그가 반드시 계신것과 그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이 시간,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응답을 주시고 복을 누리게 하시고 이걸 아는 사람은 나와서 진심으로 그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찬양 할 수 밖에 없다. 그럼 그 사람은 은혜 받는줄 믿는다. 그냥 나와 있다 하면 자기 믿음대로 은혜를 못 받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나올때는 주님 앞에 올 때 그냥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 하나님은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 분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 앞에 나오는 사람은 다 구원받는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자 구원을 받으리라. 우리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물리치는 분이 아니심을 믿는다.
5.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는냐..
예수님은 무엇해주기를 원하는냐 하였다. 소경은 내가 보기를 원하노라 하였다. 소경의 직업은 걸인이다. 걸인이라면 예수님이 그렇게 물으면 돈을 달라 해야할 것인데 이 소경은 그런 수준을 넘었다. 내가 눈이 밝으면 나도 일할수 있는데.. 근본적인 것을 구했다.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의 백성 신앙인이 하나님께 근본적인 것을 구해야 한다. 근본적인 것을 구하지 않고 다른 것을 자꾸 구하니깐 하나님이 잘 주시지 않는 것이다. 중요한건 내가 뭘 구했느냐 내가 정말 예수안에서 죄 용서함 받기 위해서 구하면 용서받는다. 내가 정말 은혜받기 위해서 하나님 알기 위해서 간구하는 사람은 하나님 아는 지혜를 주신다. 성령 충만 하길 원하면 하나님 은혜를 주신다. 내가 기도 응답받길 원해서 주님 말씀을 들으면 응답주신다. 근본적인 것을 구해야 한다. 내가 지혜와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 알아가길 원한다 하면 하나님은 아는 지혜를 준다. 네가 은을 찾듯이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하셨다. 간절함으로 주님을 알기를 원하지 않고 자꾸 다른 것을 구한다. 어떤 사모님은 자녀가 병이 들었다. 오래되었는데 2주만에 한번씩 피를 수혈해 투석해야한다. 무서운 병이다. 안 그러면 죽는다고 하였다. 병원에서는 불치병이였다. 사모님이 그렇게 간증하였다. 자기가 간절히 아들 병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응답이 안되었다. 1-2년도 아니고 일평생 소원이 뭐였냐.. 그 아들 때문에 아무것도 떠날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기도했는데 은혜를 받으면서 자꾸자꾸 기도가 달라지더라고 했다. 하나님 우리 아들 병낫게 해주세요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이 병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기쁨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 뜻을 이루기 원합니다 라는 기도를 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이 이 병을 낫게 해주셨다. 그래서 아들이 말하길 절대로 혈색이 안 돌아오는데 혈색이 돌아오고 입술도 하얀데 빨갛게 돌아오고 그래서 의사가 자꾸 좋아진다는데 아들이 의사한테 가서 할 일은 하나밖에 없다고 하였다. 내가 이렇게 예수의 힘으로 나았으니깐 의사 선생님도 예수 믿어라 이 얘기 하나 남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사모님이 내가 병낫기를 구했더니 응답을 안 주시더니 정말 하나님의 뜻을 구하니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더라 하였다. 근본적인 것을 구해야 한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였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 잘 아는 믿음을 구해야 할것인데 정말 중요한 그리스도의 비밀은 구하지 아니하고 자꾸 세상 것 구하니깐 믿음이 없는데 세상것 주면 세상으로 더 가버리지, 믿음 더 떨어지지, 하나님은 믿음이 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러니깐 못주겠다는 것이다. 믿음이 떨어지는 사람은 믿음 떨어져도 달라한다. 하나님은 믿음 떨어지면 안되겠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계속 싸우는 것이다. 너희는 믿음을 먼저 구해라 하니 우리는 돈을 먼저 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중요한 근본적인 것을 먼저 구해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먼저 구해라. 성경은 항상 먼저 구해라 그랬다.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 이 소경은 구하는 것이 근본적인 것을 구했다.
6. 보게 되어
그랬더니 보게 된지라.. 보게 된지라 라는 말씀은 응답이 되었단 말이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보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바른 믿음과 기도하는 사람은 지금도 은혜받고 지금도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그래서 성도중에 예수이름으로 병 나은 사람도 많이 있다. 죽을병에 걸린 사람도 나은 사람이 있고, 불치병에 걸려 나은 사람도 있고, 그렇치 않은 병 나은 사람도 있고, 영적으로 병이 있던 사람도 예수 이름으로 나은 사람도 있고 마음의 평안이 없고 늘 불안하고 초조한 사람도 예수 믿고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고 예수 이름으로 이다. 지금도 이루어지는 일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이 떠나가서 온전케 된 사람도 있고, 예수 이름으로 잠 못자던 사람이 잠자는 사람도 있고, 이것이 다 예수이름으로 치유된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삶 속에 하나님 때를 따라서 형통함을 주시고 감사가 있게 하시고 삶 속에 어떤 사람은 남편도 돌아오고 아내도 돌아오고 자식도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고.. 왜냐하면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고 주님을 바라봤더니 복이 된지라 이 말은 그때 주님이 우리안에 계신 예수님 똑같은 분이시다. 똑같은 능력으로 똑같이 믿음대로 역사하시는 주님인줄 믿는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7. 영광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여러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응답을 주시고 복을 주시거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우리에게 돌리지 마시고 정말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복이다 하나님 이름을 높이고 주를 찬양하시길 바란다. 많은 무리들이 찬양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찬양받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믿음의 결과이다. 믿음의 결과는 하나님께 영광이고 찬양이다. 불신앙의 결과는 원망과 불편과 고통이다. 여러분 삶에 바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여러분 삶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눅 18장 35~43절 / 고병호목사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표현이 오늘 함께 봉독한 본문에도 나옵니다. 주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을 만나게 됩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의 이름은 바디매오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며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거지였습니다. 그가 주님 앞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주님이 그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2000년 전 바디매오에게 질문하셨던 주님은, 오늘도 살아계셔서 갖가지 인생의 문제 때문에 수고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힘들게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 찾아오셔서 동일한 마음, 동일한 사랑으로 같은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이 땅에서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기 원하시는 주님이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시기 위해,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수고의 무거운 짐을 대신 져 주시고 하늘의 쉼과 기쁨을 주시기 위해 이처럼 묻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 순간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음성을 건성으로 듣지 마시고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고 바디매오가 믿음을 가지고 아뢰었던 것처럼, 믿음을 가지고 여러분의 소원과 바람을 주님께 말씀드리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1분간의 시간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에게 찾아오셔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물으시는 주님께, 여러분의 소원을 아뢰시기 바랍니다. 눈을 감고 조용히 1분간 묵상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 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2-3) 주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처럼 여러분들의 소원과 부르짖음을 주님께서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까지 보여주실 줄 믿습니다.
이 짧은 시간에 제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던 내용을 여러분들과 잠시 나누고 싶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듣는 여러분들의 마음을 혹 불편하게 하지는 않을까 조심스럽습니다. 그렇지만, 양해하고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시간 저는 제 둘째 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원래는 중학교 1학년이어야 하는데, 지금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또래에 비해 키가 너무 작기 때문입니다. 6학년에 다니고 있지만, 키는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아이가 생후 9개월이 되었을 때 레미콘 차에 치이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처음엔 죽은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그 후유증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성장이 매우 더딥니다. 정신이나 머리는 아주 건강하고 뛰어난데, 키가 잘 자라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1,2학년 때부터 “땅콩”이라고 놀림을 받았습니다. 이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입니다.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오더니 씩씩거리면서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나 태권도 도장에 보내줘.” 왜 그러는지 물었습니다. 아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권도를 해서 나보고 땅콩이라고 놀리는 아이들 혼내주게.” 참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아직 어렸고, 때가 되면 크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에 요즘처럼 심각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제 둘째가 나이에 비해 심지가 견고하고 속이 깊어서인지 저희 부부를 힘들게 하지 않고 지금까지는 잘 참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외모에 관심이 많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큰 아픔과 진통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키 때문에 얼굴에 기쁨이 없고, 기가 죽어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편하게 지내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면 부모로서 그렇게 마음이 아프고 상할 수가 없습니다.
몇 주 전에 저희 가족이 동네 가까이에 있는 놀이동산에 놀러갔습니다. 둘째 아들이 원했습니다. 제 둘째 아들이 입장하자마자 가장 먼저 뛰어간 곳이 범프카를 타는 곳이었습니다. 그 동안 여러 번 와서 타려고 했지만, 키가 너무 작아서 번번이 타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오래전부터 이제는 키가 컸기 때문에 충분히 범프카를 탈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던 둘 째 아들의 얼굴이 키를 재는 곳에 서는 순간 굳어졌습니다. 당황해 하며, 실망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저희 부부를 보고는 이내 씩- 웃으며 다른 곳으로 뛰어갔습니다. 하루 종일 마음이 아프고 쓰렸습니다.
며칠 전에는 둘째와 셋째를 데리고 놀이터엘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초등학교 3, 4학년 동생들이 자기보다 머리 하나 더 큰 것을 보고는 이내 얼굴이 땅으로 향하고, 풀이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밖으로는 모른 척 했지만,속가슴이 그렇게 미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속으로 울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둘째가 전지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세상 모든 친구들이 땅콩이라고 놀리고 무시하고 멸시해도, 그것 때문에 결코 무시하지도, 놀리지도 않으시는 하나님, 모든 친구들이 왕따시켜도 결코 떠나지 않으시고 언제나 사랑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고, 그 믿음으로 이 어렵고 힘든 환경을 극복해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 이 같은 아픔과 고통을 통해 자신보다 힘이 없고 연약한 이웃들과 그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사랑의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눈을 갖게 하옵시고, 불쌍한 이웃의 마음을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훈련의 기회가 되게 하옵소서.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능한 사람인지를 철저히 깨달아 항상 겸손하고,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닫고 고백할 수 있는 강한 믿음을 이 어린 시기에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늘도 동일한 기도를 했습니다. 아마 한 동안 이 같은 기도내용을 가지고 제 둘째 아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키가 작아서 어린아이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있지만, 그리고 그것을 보는 부모로서 가슴이 찢어질 만큼 마음이 아프지만, 그냥 단순히 성장시켜 달라고, 빨리 자라게 해달라고, 그래서 이 아이가 더 이상 그 같은 문제 때문에 힘들지 않도록, 상처받지 않도록 기도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단지 그 같은 환경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자신보다 더 약한 이웃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훈련을 하고, 자신의 무능함을 보고 깨달아 더욱 겸손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믿음이 성장하고 믿음의 터가 더욱 굳어지는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미래를 보았을 때, 그것이 제 둘째 아이에게는 더 큰 복이 된다고 믿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처럼, 당장에 필요한 것보다 보다 근원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제 아이를 위해 기도하게 된 배경에는 오늘 본문의 내용이 크나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주님이 바디매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그러자 소경이요 거지인 바디매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가 소원한 것은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보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원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그는 거지였기 때문에, “보는 것”이외에 필요한 것이 많았습니다. 먹을 것이 필요했습니다. 입을 것과 마실 것, 심지어 거주할 수 있는 집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그러한 것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그 같은 것들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보는 것”을 원했습니다. 광명을 구했습니다. 밝은 빛을 사모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가장 시급하고,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이 더 중했다면, 아마 그는 그러한 것들을 우선적으로 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것들 대신에 “보는 것”을 구했습니다. 바디매오에겐 “보는 것”이 어떤 것보다 근원적인 문제였던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질문과 그에 대한 바디매오의 대답을 묵상하면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시급하고 절박한 것은 무엇인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소원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거칠고 험하고 좁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절실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제대로 된 믿음의 생활을 꿈꾸며 노력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절박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보는 것”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가장 절실한 것은 마땅히 보아야 할 대상을 놓치지 않고, 지나치지 않고 주목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바디매오의 소원이 우리의 간절한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안으로 우리가 보아야 할 대상을 제대로 볼 그때에야, 우리 모든 삶의 터전이 천국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온전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우리가 보아야 할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전지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우리 삶의 자리는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바뀌며, 험하고 거친 세상에 살고,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우리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이 됩니다.
사도행전 6-7장에 보면 스데반의 순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유대의 율법을 범했다는 이유로 붙잡혀와 공회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고소를 당하여 끌려와서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 있는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이 났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아시는 것처럼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은 도저히 천사의 얼굴이 될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는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조롱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돌로 내리치기 위해 유대 율법에 따라 자기 머리통만한 크나큰 돌을 하나씩 들고 성난 군중들이 둘러써 있습니다. 당장에라도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습니다. 절망의 자리입니다.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 고통의 자리입니다. 한숨과 눈물의 자리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도저히 기뻐할 수 없고,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없는 죽음이 자리입니다. 사색이 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성경은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에 스데반은 그 같은 자리에서도 조금도 절망의 빛, 죽음의 빛, 사색을 띄지 않고 천사의 얼굴이 될 수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하늘 영광 보좌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주님, 온갖 멸시와 조롱을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신 사랑의 주님, 그러나 결국에는 사망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도 부활하신 소망의 주님을 그가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그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그는 성난 군중의 얼굴을 보는 대신에 거룩하신 주님의 얼굴을 보고 있었습니다. 절망 대신에 소망을 보았습니다. 곧 그에게 던져질 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귀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었으며, 그의 얼굴은 거룩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엄청난 고난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폭도들의 저주의 함성도 스데반을 두렵게 하거나 떨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던지는 엄청난 분노의 돌들도 스데반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조차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최근에 아주 재미있고 도전적으로 읽었던 책이 있습니다. 제목이 “펄떡이는 물고기처럼”이라고 하는 책이다. 그 책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일은 내가 선택할 수 없지만 태도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마찬가지입니다. 환경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환경을 대하는 태도는 우리 자신이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환경, 눈물나는 환경, 절망적인 환경, 속상하고 가슴이 미어지는 환경은 내가 선택할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지만, 그 환경을 대하는 태도는 얼마든지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절망을 선택할 수도 있고, 희망을 선택할 수도 있다. 두려움을 선택할 수도 있고, 용기를 선택할 수 도 있습니다.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고, 생명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결과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환경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스데반은 소망을 선택했습니다. 생명을 선택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의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했습니다. 그 분을 보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그 같은 고통과 죽음의 자리에서도 그는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을 바라보게 되면, 주님을 선택하면 살아나게 될 줄 믿습니다. 슬픔이 바뀌어 찬양이 되고, 눈물이 변하여 감사가 되고, 한숨이 변하여 찬양과 기도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런 면에서 주님이 마13:16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보는 것은 복입니다.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13:16) 그렇습니다. 보는 것이 복입니다. 우리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 축복 중의 축복인 줄 믿습니다.(히12:2)
우리가 주목하여 보아야 할 두 번째 대상은 연약하고 불쌍한 우리의 이웃입니다. 그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입니다. 도움의 손길과, 따뜻한 위로와 격려, 사랑의 언어를 기대하고 있는 이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시는 우리의 이웃들이 겪고 있는 고난을 주목하여 바라보는데서 우리의 사랑은 출발하며, 거룩한 능력이 펼쳐지게 됩니다.
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고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베드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베드로는 앉은뱅이에게 무엇이 있어야 할지를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을 준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베드로가 그처럼 앉은뱅이에게 궁극적인 도움을 베풀 수 있었던 중요한 단서가 사도행전 3: 4절에 나옵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베드로는 그를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앉은뱅이 앞을 무심코 지나쳤던 수많은 사람들과 달리 사랑을 가지고 보았습니다. 주의 깊게 보았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보았습니다.
그 같이 주목하여 보았기에 베드로는 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었고, 진정 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같이 힘 있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며, 앉은뱅이의 손을 힘차게 잡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IMF보다도 더 힘든 시대라고 말들 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주변에는 갖가지 인생의 문제 때문에 눈물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눈물과 한숨,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고통을 우리의 고통으로, 그들의 슬픔을 우리의 슬픔으로 느낄 수 있는 심장이 필요합니다.
이 설교를 준비할 때, 제 둘째 아들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아주 신이 나서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아빠, 나 친구 생일잔치에 초대받아 가지고 지금 이곳에서 파티하고 있어” 기쁨에 겨워서 신나게 자랑하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기뻤는지 모릅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아들을 초정하여 제 아들의 눈에서 흐르던 눈물을 닦아 준 그 아이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둘째 아이 생일이 되면, 그 아이 불러서 근사하게 대접해야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 그러실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눈물을 보고, 다가가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 줄 때, 주님은 너무나 기뻐서 그 같은 삶을 사는 우리의 삶을 살피시고 더욱 큰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가 보아야 할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굳이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을 들먹이지 않아도,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정확히 보고 아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고 넘어지는 중요한 이유가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목하여 보지 않을 때, 바른 신앙생활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을 깊게 만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정확히 볼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능함을 볼 수 있는 자만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무지함을 고백하는 자만이 전지하신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크나큰 죄인인지를 알 수 있는 사람만이 구원자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깊고 큰 은혜와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그 첫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을 때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게 되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자신의 죄악을 보게 됩니다.
최근에 Passion of Christ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그 영화를 보고 애인을 살해한 사람이 자수를 했다고 합니다. 애인을 살해하고 숨어 지냈는데, 그 영화에 나오는 주님의 고난을 보고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고 견딜 수가 없어서 자신의 죄를 자복했다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 자가 자신의 흠과 티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과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기독교적 용어가 “믿음”, 혹은 “믿음생활”이라고 하는 단어들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믿음생활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습니까?
만약 제게 그 같은 질문이 주어진다면, 간단히 “보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보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 있든지 환경을 보지 않고 전지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우리의 이웃과 그들이 흘리고 있는 눈물을 주목하여 바라보는 것이 믿음의 생활입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자신을 살피는 것이 믿음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지 않거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과 그들의 아픔을 보지 않거나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살피지 않고 함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을 보고, 이웃을 보고, 자기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지 않고, 이웃의 아픔을 주목하여 보지 않고, 자기 손에 묻어 있는 피와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않는 사람은 살수가 없습니다.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웃의 아픔과 눈물을 주목하여 보지 않으며,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와 손에 묻어있는 피를 보지 않고 신앙생활 한다 말하고 있습니다.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며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을 만난 후 그에게 일어난 변화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니라.”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상태”가 사울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이 같은 모습을 사울의 중간과정, 혹은 제3의 실존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기 전에 사울은 눈을 뜨고 보기는 했으나,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았습니다. 엉뚱한 것, 잘못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박해자가 되었고, 복음의 훼방꾼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아나니아를 만나 그의 안수를 받고 눈에서 비늘과 같은 것이 벗어지고 다시 보게 된 후, 그는 보아야 할 대상을 제대로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생명과 진리, 복음을 보았습니다. 진리를 몰라 방황하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자신을 정확히 살피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요, 사도가 되어 힘 있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항상 기뻐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힘 있게 외쳤습니다.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핍박자도 아니요, 그렇다고 복음 전도자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차지도 덥지도 않은 그저 “어정쩡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조심스럽지만, 바로 이 어정쩡한 상태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저를 포함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눈은 떴는데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눈은 떴는데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말씀은 듣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읽는데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금식하며 철야하며 기도하는 데, 우리의 이웃을 주목하여 보지 못합니다. 찬양을 부르는데, 하나님의 임재를 보지 못합니다. 예배에는 꼬박 꼬박 참여하는 데,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수많은 종교적 행위가 있고, 그곳에 빠짐없이 참여하지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하신 예언의 말씀이 곧 우리를 향한 말씀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움이라.”(사6:9-10) 주님도 마13:13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처럼,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진단할 때, 오늘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고, 가장 절박한 문제는 “보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내일부터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의 길을 걸어가시게 됩니다.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그처럼 멸시와 조롱을 받으시고,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의 소원을 들어 주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해 고난 받으신 주님을 생각하며, 이제는 우리가 이렇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십니까?”
아마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리라 생각합니다.
“ 내가 보고 싶다. 어떤 형편에 있던지 너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전지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너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었고, 사망을 이기고 부활한 주만을 바라보고 승리하며 사는 것을 보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내 백성들의 눈물과 아픔을 주목하여 보고 그들의 아픔과 한을 내 심장을 가지고 쓰다듬어 주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리고 너희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고 죄 많은 인생인지 정확히 살피고 깨달아, 끊임없이 너희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것을 보고 싶다.”
이 같은 주님의 소원을 들어주실 수 있는 고난주간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