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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드 위에서 한바탕 경연이 벌어진다. 가지고 있는 필살기들을 아낌없이 풀며 서로의 기량을 겨룬다. 에이스들의 자존심 대결이 딱 그런 경우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의 판도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 기존의 강자들이 주춤하는 사이, 새로운 멤버가 청중들의 시선을 확 사로잡는 모양새다. 그 중심에 박현준이 있다. 등장할 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그지만, 이제 “내가 LG의 에이스다!”라고 당당히 외칠 정도로 기세등등하다. 그만한 자격도 충분하다. 그는 신데렐라도, 다크호스도 아니다. 긴장하라. 프로야구판을 강타할 핵잠수함의 어뢰가 영점 조준을 마쳤다.
올해 LG 에이스로 자리잡은 박현준. 시즌 8승으로 다승 선두를 달리고 있다. (사진=스포츠온)
“현준아, 야구장 가자.”
“응, 오늘도 맛있는 것 사줄 거지?”
한 소년은 야구장이 마냥 좋았다. 야구가 재밌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야구장에 가면 먹을 것이 많았다. 야구장에 갈 때마다 소년의 아버지는 컵라면이나 간식거리를 아낌없이 사주곤 했다. 당연히 먹는 데 정신이 팔려 야구는 뒷전이 되기 일쑤였다.
그런데 운명이 참 얄궂다. ‘먹을 것에 더 관심이 많았던’ 그때 그 소년은 이제 타자들에게 가장 무서운 투수 중 하나로 발돋움했다. 올 시즌 거침없는 투구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박현준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개장수라는 별명은 정말 싫다. 그 이야기는 쓰지 말아 달라”고 울상을 짓다가도, 또 다른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며 멋쩍은 듯 미소 짓는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자신이 생각해도 지금의 모습은 꿈만 같아서일까. 어쩌면 박현준의 인생은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 야구 경기와 같을지 모른다.
팔을 내리다
먹을 것밖에 모르던 소년의 눈에 야구가 들어온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박현준은 조금 망설이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야구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싱겁게(?) 정리한다. 그렇지만 운명이었을까. 한 번 빠져들자 이 소년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야구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졸라 초등학교 야구부에 들어갔고, 강아지를 배트와 맞바꾸려고 했다는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다 그때 만들어졌다.
이런 박현준에게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꿈이 생긴 것은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박현준은 그 전까지 우완 정통파였다. 지역 최고의 명문인 전주고 내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기대주였다. 그러나 팔의 각도가 조금 낮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가진 조건에 비해 구위가 제대로 살지 않았다. 변화가 필요했다. 박현준의 야구인생을 바꿔놓은 사이드암 전향은 그렇게 이뤄졌다.
“사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옆으로 던진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 당시 감독님과 코치님이 조금 고지식한 편이시라 옆으로 던지면 ‘건방지다’고 하셨다. 그런데 어느 날 감독님께서 직접 ‘내려서 던져봐라’ 하시는 게 아닌가.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올라가면서부터 옆으로 던지게 됐다.”
처음에는 재미있었다. 새로운 자극이기도 했다. 하지만 쉬울 리 없었다. 10년 가까이 유지했던 폼을 한순간에 바꾸는 것은 모험이기도 했다. 박현준은 “재미는 있었는데 어려웠다. 연습 때는 공이 잘 들어갔는데, 경기에만 들어가면 마음대로 안 됐다.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1년 내내 그랬다”고 되돌아본다.
본격적으로 자세가 잡힌 것은 3학년 때부터였다. 박현준은 “3학년 올라가면서야 어느 정도 제대로 던질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회상한다. 2004년 봉황대기 1회전에서는 간발의 차로 노히트노런을 놓치기도 했다. 야구 관계자들의 눈길을 끌 만한 호투였다. 하지만 박현준은 프로가 아닌 대학에 진학했다. 전국대회에서의 성적과 기량 등에서 부족한 점도 있었지만, 사연도 있었다.
박현준은 “대학진학은 일찌감치 정해졌다. 3학년도 아닌 2학년 때 경희대 진학이 결정됐다. 당시 이국성 경희대 감독님이 많이 원하셨다. 사실 프로에 진출하는 것을 기대했는데 잘 안 됐다. 많이 힘들었다”며 고개를 숙인다. 프로에 비해 대학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었다.
2007년 원광대와의 추계리그 경기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을 때도 짤막한 기사 하나만 실렸을 뿐이다. 자연스레 그의 이름도 잊히기 시작했다.
박현준이 상대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뒤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트레이드, 그 후
“야, 너 왜 빨리 안 오냐?”
“아, 직접 가는 거예요?”
어안이 벙벙했다. 트레이드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남의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그런데 포털 사이트에서 확인해 보니까 진짜였다”고 당시를 떠올리는 박현준이다. 새로운 팀과 새로운 유니폼.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러나 엄연히 자신에게 닥친 현실이었다.
박현준은 지난해 7월 LG로 트레이드됐다. LG는 최동수 안치용 권용관 이재영을 내주고 SK로부터 박현준과 김선규 그리고 윤상균을 받았다. 시즌 중임을 감안하면 대형 트레이드였다. 박현준은 “처음에는 LG쪽에서 데리러 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왜 안 오냐고 전화가 오더라”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꽤나 큰 충격이었다. 섭섭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가장 뛰어난 투수 중 하나로 평가받았던 박현준은 2009년 신인드래프트에서 SK에 2차 1순위로 지명됐다. 그토록 그리던 프로 입성이었고, 또한 자존심을 세울 만한 지명순위기도 했다. 당시 SK 관계자들은 사이드암으로서 140km 후반대의 빠른 직구를 뿌리는 박현준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이는 SK 김성근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김 감독은 “박현준을 두고 3~4년 내에 대표팀에서도 일익을 담당할 아이”라며 잠재력에 큰 기대를 걸었다. 꾸준히 기회도 줬다. 신진급 선수들을 잘 중용하지 않는 김 감독의 스타일상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았다. 그의 무대는 1군이 아닌 주로 2군이었다.
실전에만 올라가면 몸이 굳었다. 제구는 들쭉날쭉했고, 타자들이 까다롭게 승부하면 곧잘 무너지곤 했다. 잠깐 1군에 올라왔다 다시 2군으로 내려가는 일이 반복됐다. 한편으로는 SK의 팀 상황도 급박했다. 당시 SK는 부상자들이 많아 전력 곳곳에 구멍이 난 상태였다. 어음을 주는 한이 있더라도 현찰을 당겨야 했다. 그 와중에서 박현준은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LG에서 트레이드 카드로 박현준을 강력하게 원했고, SK는 웬만한 출혈을 감수하더라도 우승이 필요했다.
박현준은 “사실 공은 지금보다 SK에 있을 때가 더 빨랐다. 그런데 부담감이 컸다. 또 SK는 아무래도 고참 선배들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감독님 눈치도 많이 봤던 것 같다”며 아쉬워한다. 하지만 전화위복이 됐다. 그는 “LG에 오니까 마음이 편했다.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다른 것 생각하지 않고 야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던 지난겨울이 그랬다.
“정말 독하게 했다. 전지훈련에서만 4000개 정도를 던졌다. 일정상 쉬는 날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일정이었다. 쉬는 날에도 나가서 해야 했다. SK도 훈련이 많은 팀인데, 나는 운동을 몰고 다니나 싶었다(웃음). 그런데 신인 때, 그리고 2년차 때와 달라진 것도 있었다. 마음가짐이었다. 어떤 목표를 딱 정한 것은 아닌데, 올 시즌에는 1군에서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그렇게 겨울을 보낸 박현준은 팀 전체의 기대주가 되어 있었다. 우선 빠른 볼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 제구력 보완에 매달리면서 강약조절에 신경을 썼다. 또한 SK 시절 매년 있어왔던 투구폼 손질도 하지 않았다. 가장 던지기 편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불필요한 동작만 없앴다. 공이 잘 들어가니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절묘한 시기에 기회는 찾아왔다.
LG에 와서 야구 인생을 다시 쓰고 있는 박현준. LG 에이스를 넘어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로 성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제 시작이다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냥 내 능력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리고 첫 등판이었던 지난 4월 3일 두산과의 경기에서 감이 왔다. ‘아, 이제 되겠구나’라고.”
사실 박현준은 개막 전까지만 해도 확실한 선발은 아니었다. 오히려 벤치는 롱릴리프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시즌을 앞두고 에이스 봉중근이 부상을 당했다. 4월 한 달 동안 봉중근의 몫을 대신할 선수가 필요했다. 그 ‘땜질’의 역할이 박현준이었다.
하지만 박현준은 준비된 투수였다. 박현준은 올 시즌 첫 등판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그 이후에도 호투를 거듭하고 있다. 낮게 제구되는 직구에 포크볼과 슬라이더를 적절히 섞어 타자들을 돌려세운다. 여기에 “칠 테면 쳐봐라”라는 특유의 기백까지 더해져 쉽게 공략하기 어려운 투수가 됐다. 지금까지의 활약만 놓고 보면 리그의 어떤 투수도 부럽지 않은 성적이다. 올 시즌 최대의 이변이라 할 만하다.
박현준은 “예전에는 볼 카운트가 몰리면 스스로 흔들렸다. 머릿속에 고민이 많아서 그랬다. 그런데 요즘은 그냥 가운데 집어넣으면 된다는 자신감이 부쩍 늘었다”고 비결을 설명한다. 몸 상태도 좋다. 요즘 같아서는 매일 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는 “아직 피곤하지는 않다. 공을 던지는 것 때문에 아픈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고 당당히 말한다.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성적이 좋으니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곳도 많다. 덕아웃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취재진의 집중 타깃(?)이 되는 것은 물론 인터뷰 요청도 쇄도한다. 인터뷰가 이뤄진 날도 이미 방송 촬영 하나를 마친 뒤였다. 박현준은 “인기를 얻으면 좋을 것 같았는데 막상 되고 보니 창피하다.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라고 부끄러워한다. 마운드에서는 강인하지만, 밖으로 나오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20대 청년의 모습이다.
그러나 꿈은 크다. 임창용이 우상이라는 그에게 “임창용을 뛰어넘을 자신은 있는가?”라고 묻자 “어떻게 더 잘 던지겠는가”라는 꼬리 내린 답변이 돌아온다. 그래도 계속 물으니 자그마한 목소리로 포부를 말한다. 잘해서 인정받은 뒤 일본에서 한 번 던져보고 싶단다. 그 순간, 작은 목소리를 만회하고도 남을 예리한 눈빛이 엿보인다. 마운드 위에서 타자들을 상대할 때의 그 눈빛이다. 꿈을 향한 핵잠수함의 기동이 이제 막 시작됐다.
PROFILE
▲생년월일: 1986년 9월 22일
▲체격조건: 185cm 90kg
▲출신교: 금평초-전주동중-전주고-경희대
▲프로입단: 2009년 SK 2차 1순위(계약금 1억2000만 원)
응원 횟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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