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NDG4ADk5Q7o
브루크너의 6번 교향곡은 개정이나 보필을 즐겨 되풀이 해왔던 브루크너로서는 보기 드물게 일단 곡 전체를 끝낸 후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던 작품이다. '개정이나 보필을 즐겨'라고 말했으나 그러한 상황에 빠져들어 간 것은 주위의 간섭이 크게 영향을 주었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곡은 주위의 간섭 때문에 그다지 괴로움을 당하지 않은 작품이라 하겠다.
이 곡은 5번 교향곡 완성 후 헬메스베르거 현악 4중주단의 의뢰를 받아 작곡한 현악 5중주곡 바 장조와 4번 교향곡의 개정을 사이에 끼워서 1881년 9월에 완성되었다. 작곡 착수는 1879년 9월이었으니까 대강 2년 동안에 써낸 것이다.
이 곡은 1883년 2월에 초연 될 기회가 생겼는데, 초연하고 싶다고 신청해온 빈필의 지휘자 빌헬름 얀은 2 악장과 3 악장만을 연주하겠다고 했고,브루크너도 그것을 양해하여 그 형태로 그것도 꽤 개정되어서 연주되었다.
전곡의 초연은 브루크너의 사망 후 2년 반 정도 지난 1899년 2월 26일에 말러가 지휘하는 빈 필하모니에 의해 연주되었는데 이때도 꽤 커트된 형태로 연주되었다. 즉 브루크너는 이 6번 교향곡이 실제로 울리는 소리로는 일부분만 들었던 셈이며, 개정을 하기에는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어쨋든 브루크너의 낭만성을 물려받아 낭만파 교향곡의 마지막 거봉을 일군 말러가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초연했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곡의 출판은 먼저 1901년에 브루크너의 제자인 시릴 하나이스의 편집아래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브루크너의 수고(手稿)와는 세부적으로 꽤 달랐다. 수고를 바탕으로 한 하스판이 출판된 것은 1937년의 일이었고, 나아가서 1952년에는 노바크 판에 의한 원전판이 나왔다. 다만 하스판과 노바크판은 거의 같은 것이다.
제1악장(Majestoso) 이 곡의 첫 악장은 전체적으로 축체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어서 되도록 심오한 정서감 같은 것은 배제되어 있는 듯 하다. 하실 브루크너는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할 때 어떤 해방감이나 휴식하는 심정으로 필을 들었기 때문에 신작 교향곡의 첫악장부터 부담스러운 악장을 전개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제2악장(Adogio Sehr feieirlich) 소나타 형식으로 처리되어 있는 그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지극히 아름다운 악장이다. 정녕 이 곡은 브루크너의 모든 곡을 통틀어 가장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사람의 감정에 흐느끼듯 호소한다.
그러나 브루크너 자신이 이 악장에다가 '장중하게'라고 기입해놓고 있어서 아름답다는 것이 그저 천진스럽거나 방종스러운 아름다운만은 아닌 듯하다. 그것은 삶을 삶답게 영위하는 자의 행복감에서 얻어진 아름다움, 곧 무언가 생각게 해주는 아름다움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거대한 심연의 깊은 곳에서부터 잔잔하게 물결치는 듯이 우리에게 다가와 인간의 가장 상처받기 쉬운 곳을 정확하게 찌르며, 듣는 이로 하여금 완전한 침잠에 빠지도록 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브루크너가 추구하던 순수하고도 높은 차원의 승화된 슬픔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한낱 통속적인 인간의 앝은 슬픔이 아닌 것이다.
제3악장(Scherzo Nicht schnell-Trio. Langsam) 스케르쵸이지만, 브루크너 자신이 '너무 빠르지 않게' 연주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이 스케르쵸 악장은 브루크너가 쓴 모든 교향곡의 스케르쵸 악장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색채적인 것으로서 지극히 환상적인 스케르쵸이기도 하다.
제4악장(Finale. Bewebt, doch nocht zn schnell) 전체적으로 정열적인 악상의 전개가 눈부시다. 율동적으로 연주하되 너무 빠르지 않게 하라는 지시가 되어 있어서 적당히 빠르고 적당한 율동감을 갖춘 역동감을 요구하고 있다. 곳곳에 힘과 강렬함들이 번득이며 그야말로 '호탕한'피날레를 장식하고 있다.
그런데 이 6번교향곡은 브루크너의 모든 교향곡 중에서 가장 브루크너적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점이 많다. 즉 그의 교향곡을 특징 지우는 몇 가지 점, 이를테면 브루크너 휴지라고 부르는 'Generalpause'로 악상의 구분을 지우는 것이라든가, 아주 브루크너다운 무거운 표정 등이 그 교향곡에서는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실은 이 때문에 이 교향곡이 그의 성숙기 교향곡 중 가장 구성이 탄탄하며, 길이와 작곡법이 거의 고전주의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들은 결코 이 작품을 브루크너의 대표작으로 인정하지는 않고 있다. 요컨대, 이 곡은 위에서 말했듯이 작곡가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점에서 브루크너의 특징을 나타내지 않은 것은 아니며 독특한 브루크너 개시와 셋잇단 음표를 특징으로 하는 브루크너 리듬이 사용되고 있으며, 금관악기 활용방법이나 오케스트라 전체가 오르간 풍으로 장엄한 음향을 내는 점에서도 브루크너다운 매력을 나타내고 있다. 즉 이러한 특징들이 브루크너 성숙기 교향곡 스타일의 압축된 형태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길이와 같은 명확한 특징 뿐 아니라 화성과 동기의 대담함을 보더라도 그것은 확실하다. 브루크너 자신은 이 때문에 이 교향곡을 '가장 대담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크너적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는 앞서 말한 것 외에도 작품 전체가 평온한 명랑함과 청명함을 지녔다는 것, 1 악장 등에 브루크너에서는 드물게 보는 리듬을 강조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점, 3 악장의 스케르초가 매우 아름답고 독특한 분위기를 지녔다는 점 등을 들 수가 있다. 차라리 그런 점이 이 곡의 가장 커다란 매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전체적으로 이 교향곡은 브루크너의 다른 교향곡에 비하여 대중적인 인기도는 떨어지지만, 작곡가의 인생을 달관한 듯한 정밀함이 전편을 꿰뚫고 흘러 음악 자체에 깊이 침잠할 수 있는 안온함을 안겨주는 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 하스(Robert Haas, 1886.8.15. 프라하~1960.10.4.비인)
음악학자. 프라하 베를린, 비인에서 음악학을 공부했다. 1908년 프라하 대학교에서 귀도아들러(Guido Adler)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그의 조교를 지냈다. 그후 그는 처음에는 독일 뮌스터(Munstersden)등지에서 지휘자 및 오페라 성악코치로 일했으나 1914년 이후로는 비인에서 학술 활동에만 전념했다.(그는 1923년에 비인 대학교의 사강사가 되었으며 1929년에는 이 학교의 교수가 되었다.)비인에 소재한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브루크너가 자신의 자필 악보들을 맡기도록 유언을 남긴 오스트리아 궁정 도서관의 후신)의 음악 분과장을 오랫동안 역임했으며(1920년부터 1945년까지), 역시 알프레드 오렐(Alfred Orel)과 함께 브루크너 작품 전집 발간 프로젝트의 발기인 및 편집인을 맡아 오랫동안 작업하면서 가장 중요한 브루크너 연구가 중 한사람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그의 연구 영역은 브루크너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연구영역은 몬테베르디(Monteverdi)부터 후고 볼프(Hugo Wolf)에 이르기까지 매우 방대했다. 또한 그는 수편의 피아노곡과 실내악 작품, 그리고 성악곡을 발표하여 작곡가로서 인정받기도 했다.
로버트 하스, 오렐, 에른스트 쿠르트(Ernst Kurth)와 함께 음악 분석을 바탕으로 한 브루크너 전작품의 양식사적 정리와 해석의 토대를 놓았으며, 그들의 연구 성과는 오늘날까지도 브루크너 연구자들이 언제나 다시 돌아가야 할 출발점으로 여기고 있다. 그는 문헌학적-텍스트 비평가적인 편집 활동을 함에 있어 왕왕 자신의 판단만을 고집스럽게 밀고 나갔지만 또 그의 학문적 태도는 언제나 그만큼 주도면밀했으며, 그의 이러한 태도는 후학들에게 브루크너 작업 방식을 인식하기 위한 본질적인 체제와 지침을 마련해주었다. 많은 브루크너 연구가들이 브루크너의 신비주의적이고 비합리적인 면에서 점점 더 많이 매달리고 브루크너 작품을 그렇게 재구성해내려고 힘쓰던 시절에 하스는 이른바 '원전판'에 대한 천착과 출판 작업으로 선구적인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브루크너 원전판 편집작업을 하면서 그 작업의 의의와 자신위 학자로서의 명성에 결코 묻어둘 수 없는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다. 나찌 집권 시절에 나찌의 힘을 등에 업고 브루크너 원전판 출판 프로젝트를 진행시켰던 그로서는 나찌 문화 정책의 공식적인 '지침'에 따른 "나찌 국가 예술가"브루크너(像)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하스는 후속 출판된 작품을 지속적으로 감독했으며 나중에는 심지어 공동 연구자나 조수들의 도움없이 혼자서만 편집 작업을 진행시키기도 했다. 브루크너 작품의 판본을 결정함에 있어 특정 시기위 판본을 순수한 상태로 내놓은 것이 아니라 브루크너의 "마지막 의중"을 -자신이 이해한 대로 -재현한다는 구실로 남아있는 판본들을 취합하고 뒤섞어버렸던 그의 편집방침은 나찌 이후에 이 프로젝트를 넘겨 받은 후임자 '레이폴트 노박(Leopold Nowak)'에 의해 비판적으로 재검토된다. 노박은 하스와는 달리 각 작품의 판본들을 섞어 결정판을 만드는 것이 아리라 한 작품을 둘러싸고 존재하는 각 판본들을 독립된 형태로 모두 출판했다.
하스의 브루크너 상이 이렇게 왜곡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가 집필한 브루크너 평전(Potsdam 1934)은 오늘날에도 그 학문학적 신뢰성과 객관성을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레오폴트 노박(Leopold Nowak,1904.8.167.비인~1991.5.27.비인근교 레카빌켈)
음악학자. 어려서는 소년 합창단 생활을 했고 (1913~1919) 그 후에는 비인음악 아카데미에서 프란쯔 슈미트(Franz Schmidt) 에게 대위법을, 루이디테(Louis Dite)에게 피아노와 오르간을 배웠고 비인 대학교에서 귀도 아들러(Guido Adler)와 로버트 라흐(Rodert Lach)에게 음악학을 배웠다. 1927년에 음악학 박사 학위를, 1932년에는 교수자격을 취득했으며, 1933년부터 1973년까지 이 대학에서 사강사로서 음악사를 가르쳤다.
1946년부터 1969년까지는 로버트 하스(Rodert Hass)의 후임으로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의 음악 장서부 감독을 지냈다. 1951년에는 브루크너 원전판 출판 프로젝트의 편집자 권한을 넘겨 받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신 원전판 전집의 출판을 주도했으며- 그는 이미 그 이전에도 나찌 시대에 하스가 주도하던 구 원전판 편집 작업에 참여했었다.-정년 퇴임 이후 1991년에 타계할때까지도 이 작업을 계속 이끌었다.
그의 생애 마자막 십여 년간 그는 하이든과 모짜르트, 그리고 브루크너 연구에 집중했다. 그는 수 많은 브루크너 관련 전시회를 주관했고 브루크너 기념비 건립에도 힘썼으며, 무엇보다도 국제 브루크너 협회의 부회장으로서 많은 활동을 했다. (한편 그는 하이든 기념비 건립을 위해서도 많은 힘을 기울였는데 이 일로 하이든의 출생지 로라우(Robrau)시는 노박에게 명예 시민증을 수여하기도 했다.)
브루크너 작품의 원전판 전집에 그가 끼친 영향과 의의는 각별하다. 그가 필생의 목표로 삼은 것은 브루크너 교향곡의 버전들을 혼합하여 각 작품마다 하나의 에디션을 내 놓은 <하스와 오렐>의 구 원전판 전집에서 벗어나 브루크너 작품의 각 판본들을 있는 그대로 출판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작업을 생을 마칠때까지 거의 혼자서 진행시켰으며, 그때까지 그가 편집해서 내놓은 푸른표지의 브루크너 악보는 브루크너를 연주하는 지휘자들과 브루크너 연구자들에게 필수적인 텍스크가 되었다.
글출처: 하늘바람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