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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누가복음 19:1-10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 19:1-10 / [예수와 삭개오] 예수께서 여리고 시내를 지나가실 때였다. 2) 로마 세관에서 일하는 세관장으로서 큰 부자이며 매우 영향력이 있는 삭개오라는 유대 사람이 3) 예수를 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키가 너무 작은데다 사람이 많아서 볼 수가 없었다. 4)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지나가려는 길을 앞질러 달려가 길가에 있는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다. 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자 삭개오를 보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 `삭개오야! 빨리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무르겠다.' 6)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쁜 마음으로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셨다. 7) 그러나 군중은 `그분이 소문난 죄인의 집 손님이 되시다니' 하고 투덜거렸다. 8) 삭개오는 주님 앞에 일어서서 말하였다. `선생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제가 세금을 누구에게 더 부과한 것이 발견되면 제 돈으로 네 배를 갚겠습니다.' 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이 집이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잃어버렸던 아브라함의 자손중의 하나이다. 나, 인자는 이와 같은 이들을 찾아서 구원하러 왔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여리고의 한 맹인을 고치신 후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던 길에 삭개오를 만나십니다. 이 만남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구원의 사건이었습니다.
돌감람나무에 올라간 삭개오(1-4) 세리장이며 부자이며 키가 작은 삭개오는 돌감람나무 위에 올라가 예수님을 지켜보았습니다. 그의 부모는 순결, 정의라는 뜻으로 삭개오라는 이름을 고상하게 지어주었으며 그 이름처럼 살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이름과 다르게 공공의 적으로 여기던 세리의 직업을 가졌습니다.
삭개오를 부르신 예수님(5) 예수님은 돌감람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보시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속히 내려오라면서 오늘 그의 집에 머무시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 가운데에 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보셨을 뿐 아니라 그의 이름까지 알고 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늘 밤 그의 집에 머무시겠다는 것은 죄인의 자리까지 내려가 함께해주시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삭개오의 회개(6-8) 삭개오는 자기를 너무나 잘 알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제안에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기뻐서 재빠르게 내려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안내했습니다. 과거 자기 자신만을 위해 물질을 사랑하고 물질을 모으기 위해 가난한 백성들을 쥐어짜던 그가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고 빼앗은 것은 네 배로 갚겠다고 고백하며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의 가치관이 변했습니다.
구원받은 삭개오(9-10) 예수님은 삭개오와 그의 가족 모두에게 오늘 구원이 임했다는 선포하며 삭개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자기의 죄를 회개한 순간에 정죄와 심판이 사라지고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삭개오가 잃어버린 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적용: 삭개오처럼 간절히 예수님을 만나려는 열망이 당신에게도 있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처럼 잃어버린 자를 찾으려는 사랑과 관심이 있습니까?
느헤미야 8장에서는 매우 특별한 장면이 나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했을 때 백성들은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들은 ‘아멘, 아멘’이라고 응답하며 손을 들고 경배했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기쁨을 경험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에스라가 특별한 설교를 하거나 해석을 한 것이 아니라 단지 말씀을 낭독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말씀 그 자체에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듣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출처]–국민일보
< 설 교 >
호크마 주석
=====19:1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 이 구절은 새로이 시작되는 삭개오 이야기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앞에서 소개된 소경 치유 기사와 직접 연결시키고 있다. 즉 여리고에 '이르러'생긴 사건(18:35)에 곧이어 여리고 안에서 새로운 사건이 전개됨을 보여준다. 누가는 '지나가다'(* , 디에르코마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예루살렘을 향한, 다시 말해서 고난을 향한 예수의 굳은 의지를 보다 확연히 드러내고자 한 듯하다. 한편 삭개오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사건을 다루는 본기사의 시간적 배경은 수난주간 전 목요일 쯤으로 짐작된다.
=====19:2
삭개오(* , 재카이오스) - 이 이름은 전통적 유대인의 이름으로서 본래의 뜻은 '청결한 사람' 또는 '의로운 사람'이다. 누가의 소개에 따르면 삭개오는 세리장(稅吏長)의 직책을 맡은 사람이었다. 세리장이란 곧 세관장을 의미하는데 여기고는 베레아 지방으로 부터 요단강을 건너가는 통상인들의 길목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세관이 있었을 것이고 그 세관에서는 주로 길르앗 지방으로부터 유입되는 향유 등 여러 상품에 대해 통관세를 징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 지방은 발삼나무의 산지였기 때문에 특산물에 대한 세금까지도 징수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삭개오는 이 세관의 우두머리로서 세금 징수를 지휘했던 인물로 보인다. 당시 세리장은 로마의 막강한 공권력을 이용하여 의도에 다라 자율적으로 세금을 부과하여 징수할 수 있었고, 자기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누가는 삭개오를 소개할 때에 '부자'라는 말을 첨가시킨다. 이는 당시 세리에게도 '허가낸 도둑'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는데 하물며 세리장이 받고 있는 원성은 더 높았을 것이고 또 그가 누리는 '부'의 원천이 부당한 착취에 있음을 암시한다. 삭개오에 대한 이와 같은 배경은 그의 직책이 관료라는 점과, 부자라는 점과 함께 18:18-30의 이야기 즉 부자의 구원에 대한 질문과 연결되고 있다(Danker). 그리고 당시 세리들이 유대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았던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삭개오의 구원에 관한 이 이야기는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의 은혜를 확연히 드러낸다.
=====19:3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 삭개오가 예수를 보려고 한 이유는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아마 호기심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으로 보인다. 삭개오도 이미 예수께 관한 소문을 못들었을리 없고 특히 여리고 성 가까이에서 일어났던 소경 치유 기적과 그를 따르는 군중(18:35-43)에 대해서 듣고 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분인지 확인하고, 또 만나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첫째, 사람이 많아서 앞을 가려 예수가 보이지 않았고 둘째는 설상 가상으로 키가 작아서였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일행이 걸어갈 때 그 주위에 많은 군중들이 둘러싸고 함께 걸어가고 있음을 상상할 수 있다. 아마도 삭개오의 호기심은 더욱 고조되어 예수를 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 여기서 나타난 장면 묘사에서 상징적인 두 가지 의미를 읽을 수 있는데 하나는 예수를 만나는데 있어서 장애가 되는 외적 요인 즉 다른 사람에 의해서 방해되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미 예수를 만나려고 모여든 무리가 예수를 가리고 있기 때문에 삭개오는 예수를 볼래야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에서도 먼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왜곡된 특권 의식이나 이기심 때문에 새롭게 교회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도리어 문을 막고 있는 위치에 있음으로써 예수를 가로막아 다른 사람의 구원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암시로도 이해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예수를 만날 수 없는 내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카가 작은 점이다. 키가 작다는 말은 볼 수 있는 위치에 못미친다는 말인데 예수를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의 영적 결핍에 있다는 말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기적 교만, 세상적 욕심, 진리에 대한 경멸심 등이 다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예수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이 두가지의 장애를 극복하는 일을 선결 과제(先決課題)로 삼아야 할 것이다.
=====19:4
앞으로 달려가 - '앞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엠프로스텐'(* )은 본래 장소를 나타내는 부사였다. 여기서는 전치사적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어디를 향해 앞으로 달려갔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문맥상 뽕나무를 향한 것이었고 예수의 일행이 걸어가는 방향으로 앞질러가 기다리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앞절에서 언급된 삭개오의 한계 즉 예수를 만날 수 없게 하는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을 극복하려는 삭개오의 의지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에게 관계된 외.내적 한계를 극복하고 앞으로 향해 달려가는 용기가 참다운 신앙을 형성하게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뽕나무 - 이는 단순한 뽕나무(* , 모론)가 아니라 무화과를 의미하는 '쉬케'(* )와 합성된 '쉬코모레아'(* )라는 뽕나무이다. 따라서 17:6에서 언급되는 뽕나무(* , 쉬카미노스)와는 다른 나무이다. 이 뽕나무는 '애굽 무화과' 또는 '무화과 뽕나무'라고도 불리워지며, 열매는 무화과이고 잎은 뽕잎인 나무로서 요단강 지역에서 많이 자란다. 이 나무는 그 가지가 넓게 퍼지고 아래로 늘어져 있어 비교적 쉽게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삭개오는 이 뽕나무 위로 올라가게 됨으로써 예수를 만나기 위해 자기의 한계성(限界性)을 극복해 내는 놀라운 지혜를 발휘하고 있다.
=====19:5
우러러 보시고 - 헬라어 '아나블레포'(* )는 '위'(up)라는 전치사 '아나'(* )와 '보다'의 동사 '블레포'(* )가 합성된 복합어로서 '쳐다 본다'(look up)는 뜻이다. 예수는 뽕나무에 앉아있는 삭개오를 쳐다보셨다.
삭개오야 - 뽕나무 위에 올라 앉아있는 삭개오에게 예수는 직접 이름을 부르셨다. 예수가 신적 전지성에 의해 삭개오의 이름을 아셨을 수도 있고 혹은 삭개오의 이름이 이미 여리고 땅에 널리 알려졌으므로 무리들 중에서 삭개오의 이름이 언급되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본문에서 누가의 관심은 에수의 초자연적 능력보다는 예수가 삭개오를 지목하여 인격적으로 부른 사실 자체에 집중되어 있다 하겠다. 내려오라...유하여야 하겠다 - 예수의 인격적 초대는 단순한 부름에 그치지 않고 삭개오의 집에 함께 머무르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이같은 이야기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예수와의 만남은 예수의 주권적인 초대(sovereign invitation)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삭개오가 예수를 보기 위해 자신이 갖고 있는 여러가지의 한계점을 극복하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은 사실 호기심이었고 진정한 의미에서 만남은 예수가 인격적으로 삭개오를 부르고 그의 집에서 머물겠다고 제안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특히 '...해야 하겠다'는 표현은 신적 필연성(必然性)을 강조함과 아울러 예수의 주권적 의지를 뚜렷이 드러내준다(4:43).
=====19:6
급히 내려와...영접하거늘 - 예수의 인격적 초청에 대한 삭개오의 응답은 전격적인 것이었다. 즉 '급히 내려와'라는 단어와 '즐거워하며'라는 단어, 그리고 '영접하거늘'이라는 단어는 예수의 제안을 더할나위 없는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표현이다. 이는 매우 감동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의 인격적 부르심과 삭개오의 전격적인 영접은 구원의 눈부신 접촉점이 되고 있다. 이같이 누구에게든 향하고 있는 예수의 초청을(요 6:35;7:37)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고 영접하는 사람에게 구원의 문은 활짝 열리게 된다. 삭개오가 이같이 기쁜 마음으로 승낙한 것은 이미 예수에 대한 소문을 잘 알고 있었고 그 명성에 대한 권위를 인정함을 뜻한다. 또 삭개오는 평소에 자신의 세리장이라는 직책과 정당하지 못한 세금 징수 때문에 주민들로부터 원성을 샀을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소외된 아픈 심정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또 자신의 정당하지 못한 행위에 대한 자책감으로 고민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수의 부름은 삭개오에게 있어서 어둠 속에 비추어지는 빛이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을 그 명성 높으신 예수가 초청했다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었고 또 자신을 초청했다는 사실은 7절에 언급된 바처럼 모든 사람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배척하는 지옥같은 상황으로부터 구원해주는 생생한 용서의 선언으로 이해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5절에서 언급한 '오늘'은 구원의 즉각성(卽刻性)을 뜻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 단어는 '급히 내려와'라는 말과 맛물려 구원이 주저할 수 없는 결단성을 요청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또 9절에서 다시 '오늘'이라는 말이 언급되어 구원의 즉각성을 재삼 강조한다.
=====19: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당시 세리는 죄인 취급을 당하였으므로 예수의 행위는 당연히 문제시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죄인의 집에 머물며 함께 식사한다는 사실은 죄인의 죄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5:29,30). 한편 이들의 수군거리는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의 두가지 악한 본성을 엿볼 수 있다. 첫째는 자신의 눈에 박힌 들보를 보지 못하고 타인의 눈에 묻은 티를 흉보는 비판 심리이다(마 7:3). 특히 당시 유대인들은 왜곡된 선민의식에 근거한 교만과 자기의를 과시하는 형식주의로 인해 타인을 비판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둘째는 타인의 잘됨을 시기하는 심리이다. 본문의 '뭇 사람'은 죄인에 불과한 세리장이 예수의 관심과 호의를 받게 되자 시기심이 발동하였던 것같다.
=====19:8
서서 주께 여짜오되 - 앞절의 내용으로 보아 삭개오가 말하고 있는 장소는 삭개오의 집 안이었을 것이다. 아마 식탁이나 탁자 주위에 앉았다가 일어서서 말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일어서서 말하는 행위는 말하는 사람의 진지함과 말하는 내용의 진실성을 나타내는 엄숙성의 표시라고 볼 수 있다.
주여 보시옵소서 - 이미 삭개오는 예수께 대한 호칭을 신앙적인 의미의 '주'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또 삭개오는 '보시옵소서'(* , 이두)라는 말로서 자신의 의지의 단호함과 실천 가능성에 있어서 자신 만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같은 말은 6절에서 언급된 바 있는 그의 기쁨과 결부되어 나오는 즐거운 선언임을 느낄 수 있다. 즉 강요에 의한 타율적 선언이 아니라 기쁨에 의한 자율적(自律的) 결단인 것이다. 내 소유의 절반을...주겠사오며 - 삭개오는 당시 랍비들에 의해 제시된 구제비 곧 소유 혹은 수입의 20%보다 훨씬 많은 파격적 액수를 제시한다. 이러한 헌신적인 태도는, 영생을 사모하여 예수께로 나아왔으면서도 '네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서 근심하여 집으로 돌아갔던 부자 청년의 모습과 너무도 대조적이다(18:18-23). 만일 뉘 것을...사 배나 갚겠나이다 - 여기서 '만일'로 시작되는 가정문은 삭개오가 부당하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갈취한 사실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가정문을 이끌고 있는 '에이'(* )라는 단어를 '...하는 무엇이든지'라는 의미의 관계 접속사(everythint that...)로 해석하여 '토색한 것은 무엇이나'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또 '에이'는 '멘'(* )이라는 단어와 같이 사용되어 '확실히' 또는 '틀림 없이'라는 뜻으로 서약문에 사용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삭개오의 진술은 자신이 부당하게 취한 모든 것은 본래의 주인에게 확실하게 그리고 무엇이나 돌려준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여기서 삭개오는 부당하게 빼앗긴 사람에게 본래의 것의 4배를 돌려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는데 율법에 의하면 부정으로 취한 것을 돌려 줄때에는 1/5을 덧붙여 상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레 6:5;민 5:7). 또 남의 것을 도적질한 것은 4배로 갚아야 한다는 규정도 있다(출 22:1;삼하 12:6). 따라서 삭개오의 이같은 선언은 당시 율법이 정하는 도적질에 상당하는 배상을 하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삭개오 자신이 그같은 정도의 죄를 범하였음을 고백하는 셈이다. 이같은 삭개오의 파격적(破格的)인 행위는 자기 중심적 삶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새로이 방향을 바꾸는 전격적인 회개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회개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회개는 죄에 대한 참회나 죄에 대한 단순한 고백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전격적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실천적 행동을 동반해야 한다
=====19:9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 삭개오의 선언에 대한 예수의 응답 역시 즉각적인 것이었다. 즉 구원이 오늘 이 집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죄인에게 구원을 선언한 것은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실로 파격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같은 선언은 삭개오의 헌신적 자아 부인의 선언에 따른 직접적 결과임에 분명하다. 구원은 장차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자아 부인의 실천적 결단을 통해 경험되는 현재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 이 말은 공동체로부터 소외되고 배타적인 대접을 받아온 삭개오를 공동체로 복귀시켜 당당하게 한 형제로 살아가야 할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특히 삭개오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삭개오야말로 참된 믿음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당시 종교적 복권은 곧 정치.사회적 복권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는 전인적 인간 구원을 의미한다.
=====19:10
인자의 온 것은...구원하려 함이니라 - 삭개오에 대한 구원 선언 후 그 선언에 대한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즉 이미 앞절의 주석에서 밝힌 바 있듯이 잃어버린 자에 대한 구원이란 소외되고 비뚤어진 인간을 다시 공동체로 복귀시켜 당당하고 품위있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 말은 온갖 죄악과 허물로 말미암아 혼돈과 파멸에로 향하는 인간들을 구해내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로 인도하시는 것을 뜻한다. 이같은 선언은 사실 에수의 전체적 삶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병에 걸려 정상적인 인간 삶이 불가능한 귀신들린 자(마 17:18), 문둥병자(17:14), 벙어리,귀머거리(막 9:25), 소경(막 8:23) 등과 같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공동체로 복귀시키며 삭개오와 같은 죄인들을 용서하고 공동체로 복귀시키는 모든 행위는 땅위의 평화(平和)를 위한 사랑의 치유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참으로 사람다와질 수 있도록 하는 예수의 구원 행위는 오늘의 기독교가 우선적으로 따라야 할 과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미의 선언이 이미 5:31,32에서 언급되었는데 결국 삭개오는 이와 같은 선언의 실천적 모델(model)이 된 셈이다.
키가 작아도
눅 19장 10절 / 김근중목사
이번 주는 주님앞에 기뻐하며 작은 믿음이라도 주님이 크게 쓰시는것을 감사 합시다
아프카니스탄에 인질로 있던 성도들이 다풀려나서 오늘 새벽에 귀국하여 성도와 식구들이 함께 예배드리게 됨을 아니기뻐할수 없군요.아프카니스칸에 뿌려진 그들의 피와 땀이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울부짖음같이 하나님께 들려서 응답으로 이슬람지역이 우리나라도 선교사들의 피로 선교120년에 30% 기독교인것같이 될것을 확신합니다.작은믿음이 이렇게 쓰임 받음을 믿어야 합니다.
제가 충청도 조촌 교회로 부임해갈 때 조촌교회 장로님들이 처음 저를 만났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마지막에 “목사님은 뵈었는데 사모님을 못 뵈어서 궁금해서 그러는데 사모님은 건강하십니까?”하고 물으십니다. 그래서 저보다도 더 건강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분이 “키가 크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키 하면 우리 부부는 할말이 없잖아요? 그래서 “키도 크고 몸매도 무지 건강합니다”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제가 아내에게 “여보 당신 키가 크냐고 장로님들이 묻습디다” 하면서 함께 웃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키가 작아서 한이 맺힌 사람이 있습니다. 삭개오라는 세리장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세금을 걷어서 로마에 갖다 바치는 사람으로서 원래가 인기가 없는 직업인데다가 시대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더욱 미움을 받고 거기다가 풍채라도 좋으면 좀 위로가 되련마는 키가 작고 풍채가 없어서 항상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자신의 직업으로 인하여 사회와 이웃에게 소외당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세리 장으로 돈은 있고 높은 지위로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권세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직업으로 인해 이웃과 나라라는 공동체를 잃어버린 외롭고 쓸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예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그의 귀를 기울이게 한 요소는 그분은 누구나 사랑하고 세리나 창녀와 같은 사람은 사회에서 짐승처럼 여기는 직위의 사람들을 가까이 하며 그들을 돌보아 주고 위로해 주며 함께 친구로 살아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예수에게 대하여 좋은 감정을 가지고 한번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는데 어느 날 예수가 여리고로 지나 가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서 아니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속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길에 서 있어서 자신의 키로는 도저히 예수님의 어느 부분도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작은 키가 또 말썽이었습니다. 속이 상하여 그냥 돌아가고 싶었지만 예수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한 그로서는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길가에 서 있는 뽕나무로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확실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무 아래 오셔서 삭개오를 보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였습니다. 처음으로 자기 가정에 모신 귀한 손님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너무 기뻐서 자신의 재산을 절반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그리고 토색한 것을 4배나 갚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하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아도 다른 키가 컸으므로 예수님께 인정받고 사랑 받고 구원의 확실한 말씀까지 들었습니다.
우리도 여러 가지 키가 작아서 힘들고 낙심하고 좌절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이는 신앙의 키가 작은 분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물질의 키가 작은 분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건강의 키가 작은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학문의 키가 작은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사랑의 키가 작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를 보면 키가 작아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작은 키를 가지고도 삭개오처럼 승리하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말씀을 잘 들으시고 삭개오 처럼 작은 키로도 승리하시는 창녕감리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열심의 키를 키웁시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려고 갔지만 도저히 자신의 키로는 예수님의 머리카락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만나고 싶은 열심이 특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체면도 인격도 권위도 모두 버리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길가의 뽕나무위로 올라갔습니다. 아이들은 높은데 올라가는 것을 좋아하지만 어른이 되면 아무리 올라가고 싶어도 올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오직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열심 때문에 서슴없이 뽕나무 위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남들보다 더한 이 열심이 그의 작은 키를 크게 해 주었고 축복을 받는 지름길이 되었습니다.
남보다 가난하고 남보다 못 배우고 지위나 권세가 없어도 열심의 키를 키우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일상 생활에서 사는 것이 누구보다 열심이고 기도와 감사에 열심이고 사랑과 봉사에 열심이면 그런 것들을 다 하나님이 채워주시고 삭개오처럼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열심은 자존심을 꺾는 만큼 크게 자라게 되어져 있습니다. 이 말씀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삭개오가 자신의 지위나 나이나 체면이 중하여서 뽕나무에 올라가지 아니하였다면 그는 자신의 작은 키를 키울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자존심이나 체면 때문에 열심의 키를 키우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직분이 높은데, 내가 이 나이에 이런 것 할 수 있겠나? 하고 충성할 일들을 행하는데 머뭇거리거나 남들이 경망스럽다고 하거나 흉 볼까봐 정말 말씀이 내게 감동이 오는데도 아멘 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는 없습니까? 이 자존심과 체면을 삭개오처럼 용기 있게 버리시고 열심의 키를 키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옥합을 깨트린 여인을 보십시오! 자신의 행동을 보고 옆에 있는 제자들이 책망을 합니다. 이걸 팔아서 가난한 이웃에게 주면 300명은 도울 수 있는데 왜 허비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열심이 주변의 반대나 비웃음을 넉넉히 극복합니다. 그녀는 전력이 부끄러운 여인이었으나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기록되고 예수님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엘리사를 보십시오 ! 그는 농사꾼입니다. 감히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만한 그 어떤 것도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열심의 키가 컸습니다. 엘리야의 뒤를 따라가며 아무리 엘리야가 말려도 하나님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면서 벧엘로, 길갈로, 여리고로,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까지 따라갔습니다. 그 열심이 결국 그의 모든 부족한 키를 크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엘리야보다 더 어려운 시기에 더 어려운 이적과 기사를 이루며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동안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자리 때문에 열심을 잃어버리고 삭개오처럼 작은 키를 원망하며 살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말씀을 들으시고 열심의 키를 키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힘으로 어쩔 수 없어 고민하고 힘든 물질의 작은 키, 건강의 작은 키, 능력의 작은 키를 어느 날 우리 주님께서 크게 해주실 것이고 그 작은 것들을 오히려 축복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열심의 키를 키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기쁨의 키를 키우시기 바랍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았지만 그는 기쁨의 키를 크게 키워 자신에게 임재한 하나님의 축복을 극대화하였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얼굴만이라도 보려고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가 잘 보이게 나무 아래 오셔서 서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마음까지 알고 계셨습니다. 삭개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눅19:5)삭개오는 너무도 기뻤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비방해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급히 내려와서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하여 자신의 기쁨의 키를 크게 하였습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눅19:6-7)
삭개오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작은 기쁨을 소유할 때마다 그것을 더 크게 기뻐하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삶을 힘들게 하는 어려운 삶의 작은 키를 크게 만들어 축복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즈음 한동안 날씨가 나무 더워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릅니다. 그래서 저는 더위를 이기기 위하여 운동을 가끔 하는데 한시간정도 공원에 가서 빠르게 걷습니다. 그러면 땀이 속옷을 다 적시고 흘러서 양말까지 젖습니다. 그리고 샤워를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새삼 깨닫고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이 물을 우리들에게 주시지 않았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땀을 무엇으로 씻으며 더위를 무엇으로 이길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너무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샤워를 하면서 저절로 찬송이 나오고 더운 게 싹 가시고 삶이 아름답고 감사해서 다시 힘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기쁨의 키를 키우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도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하며 불평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도 행복하고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데 기쁨의 키를 키우지 않고 살아가니 자신에게 오는 작은 어려운 일들을 남들보다 몇 배나 더 크게 맞고 더 힘들어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여 한숨짓고 원망하게 합니까? 물질이 모자라서, 몸이 건강치 못해서, 자식들이 속썩여서, 사람들이 나를 괴롭혀서, 힘들고 어렵고 원망과 불평이 나오게됩니까? 삭개오처럼 작은 일에도 기쁨의 키를 키우셔서 넉넉히 이기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텔레비전에서 본 이야기인데 어떤 청년이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식 날 머리를 자르러 이발소에 갔습니다. 항상 가는 이발소라서 주인 아저씨와도 낯이 익고 잘 아는 사이여서 이발하는 의자에 앉으면서 자신이 오늘 장가간다고 한마디 했답니다. “아저씨 나 오늘 가요!” 그리고 피곤해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다 깎았다고 깨워서 거울을 보니 큰 일 났습니다. 이발사 아저씨가 “나 오늘 가요” 라는 말을 군대간다는 줄로 잘못 알아듣고 머리를 박박 깎아버린 것입니다.
새 신랑이 까까머리가 되었으니 큰일입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가발 가게에 가서 가발을 사 쓰고 결혼식을 했답니다. 요즘 같은 각박한 시대에 저는 그 청년이 이발사에게 손해배상 청구라도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벙글벙글 웃으면서 “결혼식 잘했고 아름답고 착한 신부 맞았으니 됐지요!” 하면서 좋아하는 것을 보고 그 젊은이의 행동에 감동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도 우리가 저렇게 기쁨의 키를 키우고 살면 기뻐하시고 더 큰 축복으로 채워주시겠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날씨가 짜증나게 덥고 삶이 힘들고 나의 어떤 키가 작아서 속상하더라도 기쁨의 키를 키우시기 바랍니다. 구원받은 것 감사하고, 하나님의 자녀된 것 감사하고, 복된 직분 받은 것 기뻐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삭개오처럼 키가 작은 것이 오히려 축복으로 바꾸어지는 놀라운 은혜를 이 여름에 모두 이루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결단의 키를 크게 해야 하겠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이 자기 민족의 돈을 빼앗아 로마에게 준다는 사실이 괴로웠지만 직업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자위하며 살았고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아도 자신이 가진 물질에 자위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찾아오셔서 자신의 모든 잘못과 약점을 덮어 주시고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는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예수님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고 영원히 사랑 받고 싶었습니다. 이 기회를 잃어 버릴 수가 없어서 그는 용기 있게 결단했습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해도 민족의 반역자라고 해도 돈만 있으면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고, 돈 만이 자신을 위로해 주고 자신을 도와줄 존재로 여겨 하늘같이 귀하게 여기던 돈을 모두 내어 놓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래서 절반은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토색한것은 사배로 갚기로 결심하고 예수님께 용기 있게 고백했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19:8)
이 위대한 결단이 키 작고 보잘것없는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구원이 이루어진 복된 가정의 가장으로 결단의 키가 큰 삭개오로 만들었습니다.
성령은 때때로 우리 마음에 오셔서 말씀을 들을 때, 어떤 사건을 만날 때 깨닫게 하시고 선하고 아름다운 결단을 하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 그때마다 망설이거나 뒤로 미루지 마시고 삭개오처럼 결단의 키를 크게 키우는 성도들이 되시기 축원합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야 자신의 죄악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을 멸하고 구원하시는 일은 오직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데 자신이 심판하고 자신이 도피하려 했습니다.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로 결단하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 2:2)그리고 그는 그 결단으로 니느웨를 구원하고 선지자의 이름을 아름답게 합니다.
어떤 작은 키로 힘들게 살아가십니까? 낙심하고 좌절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삭개오를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열심의 키를 키우고 기쁨의 키를 키우고 결단의 키를 키워서 여러분의 작은 키를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말씀을 들으시고 그렇게 삭개오처럼 행하셔서 하나님의 칭찬 받는 복된 성도들과 완전한 구원을 이루어 가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는 과연 변화될 수 있을까
눅 19장 / 이동원목사
제가 20대 초였습니다. 조금씩 철이 들고, 인생이 진지해지기 시작하면서, 제 마음을 무척이나 괴롭혔던 그런 질문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정말 변할 수가 있나? 내가 과연 변할 수가 있을까? 그런 질문이었습니다. 내 안에서 내가 좋아할 수 없는 내 약점을 발견할 때 마다 이 질문은 늘 절 다시 괴롭힙니다. 나는 과연 변할 수가 있을까? 한 해가 다 지나가고 연말이 되면 새해를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결심을 하죠. 내가 좀 새로운 삶을 살아야지. 그러나 저는 제 인생이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새해의 한 주간이 흘러가게 되면 마치 이 속담을 입증하듯, 작심삼일이라는 속담을 입증하듯 새해의 결심이 다시 물거품처럼 꺼져버리고, 옛날의 내 모습으로 다시 내 삶이 돌아올 때 마다 이 질문은 다시 저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변할 수가 있나? 나는 정말 변할 수가 있을까? 바로 그 무렵 저는 제 친구들의 초청을 받아서 선교사님을 모시고 성경 공부하는 어떤 모임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때 모인 20,30명 남짓한 사람들은 성경을 가운데 열고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열띤 토론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들 앞에 펼쳐진 성경 말씀이 누가복음 19장이었습니다. 교회에 나온 사람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이야기, 그러나 교회 처음 나온 저는 사돈의 팔촌까지 뒤져도 예수 믿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났던 저에게는 매우 생소했던 이야기. 삭개오라는 사람의 이야기. 삭개오라는 인물이 예수님 만나고 변화되었다는 이야기. 그런데 거기 모인 내 또래의 사람들은 삭개오의 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삭개오의 얘기를 하면서 쭉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간증을 하고 있었습니다. 삭개오처럼 나도 변했다고. 삭개오처럼 나도 인생이 변화되었다. 그 중에는 제가 잘 아는 저의 친구 두, 세사람도 섞여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가 진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저들의 얘기가 사실 그대로 정말 저들이 변해버린, 변화의 이야기라면, 나도 변할지 몰라. 어쩌면 나도 변할 수가 있을 거야.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변화의 희망을 걸었던 밤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그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 우선 우리는 이 사람의 정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가 누구였는가? 그리고 둘째로 그를 변화시켰던 기회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를 변화시켰던 그가 만날 수 있었던 기회. 그리고 세번째로 그를 변화시킨 결단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는 누구였습니까? 삭개오라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성경은 이 사람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누가복음 19장 1절에 이하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이 먼저 삭개오였다고 말합니다. 삭개오. 삭개오라는 이름이 먼저 알고 보니까 청결하다는 뜻이예요. Clean 청결하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날 이 사람의 집에 들어갔더니,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 죄인의 집에 예수가 들어갔다. 청결하다는 이름의 뜻과 달리, 그는 동네에서 소문난 죄인이었습니다.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인생을 살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할까요. 꼭 제 얘기 같군요. 저도 아주 이름은 괜찮습니다. 제 이름으로 말하면 저희 어머니가 제 아버님이 무여독남 외아들이신데, 장남으로 태어났으니까 귀한 집 자식이었죠.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막대한 요금을 지불하고 서울 시내에 이름을 제일 잘 짓는 사람 집에 가서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제 이름을 지어 가지고 오셨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어렸을 때 시원찮은 행동을 할 때마다, 이놈아 네 이름은 비싼 이름이야.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아니? 이동원. 동녘 동자, 으뜸 원자. 동쪽에서 제일 잘난 사람이야. 근데 저는 이름하고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기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회적 기대. 우리가 다 좋은 이름을 가지고 자라나고 있잖아요. 우리 부모가 나를 낳아 주시고, 네게 좋은 이름을 붙여 주시면서, 좋은 인생을 살라고 주신 이름은 우리 모두의 사회적 기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회적 기대를 미치지 못하고 인생을 살고 있다는 열등감을 저마다 다 갖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 이 사람은 세리장이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세금을 거두고 다니는 사람들의 권력은 대단하죠. 장사하시는 분들 세금처리 되거나, 세금 국세청에서 조사 나오시면, 얼마나 힘드십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세리장이었습니다. 권력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권력. 권력은 사람들이 탐하는 것인지요. 권력. 니체라는 철학자는 인간이 생존하는 가장 중요한 의지가 권력에 대한 의지다. Will to Power 권력에 대한 의지. 권력은 정치인들만이 탐하는 것이 아니더라구요. 집안에서 고부 싸움이 한창일 때, 거기에도 권력의 문제가 있습니다. 누가 곳간 열쇠를 쥐는야. 이것도 권력에 대한 싸움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항상 권력에 대한 사모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리장이니까! 그런데 권력이 이 사람을 행복하게 못했던 모양입니다. 권력으로 행복을 살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권력으로 인생의 의미를 살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어느 날 자기의 동네를 지나가는 어떤 낯선 사람을 몹시도 만나고 싶어합니다. 또 이 사람은 부자였습니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랬습니다. 부자라. 부자 얼마나 좋은 이름입니까? 부자. 부자되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십니까? 증권투자도 하고, 오르락, 내리락 증권에 얼마나 신경을 쓰십니까?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우상이 있다면 만물일 것입니다. 돈 입니다.
어떤 청년들이 모여서 지도자와 대화를 하면서, 서로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청, 지도자가 질문을 던지기를 너희들은 인생을 사는데 뭐가 제일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아마 남자들만 모였던 모양이예요. 한 청년이 대답하기를 뭐니 뭐니해도 머니죠. 돈이죠. 옆에 사람한테 물어봐죠. 옆에 사람 , 저는 인생을 살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여자. 저에는 여자가 필요합니다. 세 번째 사람은 저는 돈과 여자가 둘 다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지도자가 대답하기를 그러면 돈, 여자를 가져 가라. 돈도 필요하고 여자도 필요하다면 돈, 여자를 가져가라. 돈이라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것입니까? 이 사람은 부자였어요. 돈을 가지고 있었어요. 근데 돈으로 행복을 살 수가 없어요. 돈으로 인생의 의미를 살 수가 없고, 돈으로 인생의 목적을 살 수가 없고, 돈으로 죽음 건너편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우리 나라에서 최고 부자를 20분동안 만나 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일본에 암 수술을 받으러 가기 직전이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을 떠나 가셨습니다. 한국인의 부자의 대명사. 제가 그분을 만나면 이 질문을 오랫동안 묻고 싶었습니다. 제 가슴에 묻어둔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회장님 평안하세요? 근데 저는 이분의 뜻밖의 의외의 대답을 오랜 시간이 지나간 지금도 잊어버리지 못할 거예요. 아니 제가 살아 있는 한 잊어버리지 못할 겁니다. 평안이라니,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초조하고 불안하오. 한국의 제일가는 부자의 대답이었어요. 제가 이 분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어느 날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저는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있어요. 예수님, 하나님, 제가 이분에게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 받는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삭개오는 권력도 부요함도 있었고, 또, 이런 사회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결할 수 없었던 인생의 문제를 끌어안고 어느 날, 자기의 동네를 지나가는 어떤 분을 몹시도 만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기회가 왔습니다. 그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기회. 기회를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절에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신다” 예수가 지나 가신다. 예수가 지나 가신다. 저 갈리리에서 요단강 저 동편의 데가볼리에서 예수를 만난 사람마다, 인생이 변했다고 사람들이 소리치며 그를 따라다니는 저 예수. 예수가 우리 동네에 와서 우리 곁에 지나가신다. 열 두해를 혈루증을 앓면서,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서 재산을 탕진했지마는 그러나 고쳐지지 않는 병 때문에 인생에 대한 절망 속에 살던 한 여인이 지나가는 나사렛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더니, 자기 병이 순식간에 치료되었다고 소문난 치료자 예수, Healer Jesus! 예수가 지나가신다. 예수가 지나가신다. 기회였습니다. 기회.
제가 지난 주일 저녁에 유승준을 만났습니다. 유승준. 온누리 교회에 갔다가 유승준이하고 한 15분 같이 차 마시면서 대화를 했습니다. 저는 정말 예수님이 좋아요 그러더라구요. 너 그 마음 변하면 안돼. 인기가 너에게 그런 진정한 삶을 줄 수가 없어. 같이 기도해 줬어요. 돈으로 인기로 살 수가 없었던 인생의 의미, 그런데 그런 인생의 의미에 굶주리고 있었던 삭개오에게 놀라운 기회, 천재일우의 기회. 놓칠 수 없는 기회. 기회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그래서 빅토르 위고는 기회는 인생의 가장 위대한 자산이다. 그랬습니다. 기회.
누군가가 기회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옛날 희랍에,그리스에 시락쿠스라는 거리에 이상한 동상 하나가 있었다고 그래요. 그 동상은, 그 동상은 날개가 있는데, 날개가 어깨 죽지에 와서 달린 것이 아니라, 발에 가서 달려있어요. 그리고 앞머리는 아주 무성하고, 뒷머리는 대머리고 사람이 머리 벗어지는 것도 여러가지죠. 어떤 사람은 뱅뱅 돌아가면서 머리가 벗어지는 분이 있습니다. 주변머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운데만 쏙 빠지시는 분이 있습니다. 속알머리가 없는 분이죠. 어떤 사람은 아무데나 빠집니다. 버르장 머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 분은 앞에 앞에 머리가 이렇게 많아. 뒤에 머리가 없고, 이 동상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누가 그대를 만들었는가?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기회. Appotunity 기회. 기회. 그대는 왜 날개를 발에 달고 있는가? 더 빨리 빨리, 빨리 날으고 싶어서. 걷고 싶어서. 그대의 앞머리는 왜 이렇게 무성한가? 내가 올 때 쉽게 사람들이 붙잡을 수 있도록. 그대의 뒷머리는 왜 대머리인가? 다시는 붙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기회는 그런 것입니다. 기회. 놀라운 기회. 예수가 지나가신다. 구원자 예수. 치료자 예수. 그를 만난 사람들마다 이상하게 인생이 바뀌었다고.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지금 죽어도 천국갈 수가 있다고. 인생의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가 없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그 놀라운 예수. 예수가 지나가신다. 놀라운 기회죠.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 왜 지나가고 있었을까요? 우리가 이 얘기를 읽으면 성경의 이야기로는 참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어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삭개오라는 사람이 자기 권력과 자기 명예와 자기의 부를 가지고도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예수를 만나고 싶었다고. 그래서 예수를 기다리는 얘기라고.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한참동안 읽다보면 결론이 바뀝니다. 왜냐면요, 삭개오가 이렇게 아마도 이 사람은 키가 작았어요. 키가 작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들끓고 있었고, 그 군중 Crowd 속에서 키 작은 삭개오가 쉽게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어요. 그렇지만 만나야만 했었습니다. 만나지 않으면 안되겠다. 이런 것을 구도의 갈증이라고 합니다. 구도의 열망. 이런 마음을 가지고,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만나고자,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세리장이 세무서장이 뽕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체면의 옷을 벗어 던지고 올라간 것입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를 만나야 겠다.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를 반드시 만나야 겠다. 내가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나는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 나는 무엇이라도 할 수가 있겠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죠.
근데 얘기를 읽다보면 성경 이야기는 이렇게 변합니다. 아마 삭개오가 나무 위에서 예수님이 내 앞에 지나가봐라, 소리칠거야. 예수님. 그냥 이렇게 부르면 실례일거야. 앞에다 뭐라고 붙여야지. 인류의 위대한 스승 예수여. 그 말은 좀 형식적인가, 나사렛 예수여, 나사렛 예수는 예수님이 별로 좋아하지 않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천하게 부르는 용어야. 어떻게 부를까. 다윗의 자손 예수여. 이렇게 부를까. 아니면 위대한 휴머니티안 예수여. 한번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앞에 딱 뽕나무 앞에 오더니, 삭개오가 부르기 전에 삭개오를 올려다 보더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삭개오야. 어. 이때 삭개오가 받았을 충격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저분이 내 이름을 알아. 나를 만나지도 않고 나를 이름을 부르는 저 예수. 예수는 누굴까? 아마 우리 자매님 같으면 어머 하고 놀랐겠죠. 어떻게 알아 저분이 내 이름을. 저는 성경을 읽다가 늘 저를 감동시키는 부분이 예수님이 사람들을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마리아야.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자가 있습니다. 귀신들린 여자, 욕심 많았던 여자. 그래서 이름도 막 달라 마리아. 막 달라 마리야. 그래도 그 욕심이 해결되지 않고 있었던 여자. 그런데 예수님이 이 여인을 만나주시고, 성녀로 바꿨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 부활의 소식을 모른 체 동산에 묻혀있는 줄 알고, 예수님이 묻히신 동산에 올랐던 이 여인. 새벽이었는데, 동산 관리하는 사람인줄 알았어요. 어디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마리아야, 마리아야, 깜짝 놀라 보았어요. 그렇게도 그리워했던 죽은줄 알았던 예수의 음성.. 마리아야, 삭개오야, 나사로야, 사람들을 이름으로 부르는 예수, 그는 우리를 60억이라는 거대한 하나의 인류 덩어리로 취급하지않고, 우리 개인개인을 알고 이해하고 찾아오십니다. 나의 좌절을 이해하시고, 나의 고독을 이해하시고, 나의 방황을 이해하시고, 나의 삶의 그런 슬픔을 이해하시고, 내 인생의 벽 같은 인생의 삶의 벽 앞에서 나갈 길이 없는 출구가 없는 벽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내 모습, 내 답답한 내 모습을 아시는 그 예수. 찾아와서 그는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와. 빨리 내려 오너라. 속히 내려 오너라. 속히 내려와.
자, 여기쯤 읽으면 우리가 이 이야기는 삭개오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얘기가 아니예요. 예수님이 삭개오를 만나고 싶어하는 얘기.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은 아마 이런 생각도 했을지 몰라요. 나도 예수라는 분을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 알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 아십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을 알고 싶어 하시는 것 보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더 알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시는 것보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더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래서 성경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그 분의 미션을 그분의 사명을 설명하는 놀라운 대목마다 이런 말씀이 반복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설명하는 이 대목마다 인자가 온 것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삭개오를 찾아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동네까지 찾아 오신 것입니다. 삭개오를 찾으시던 주님은 오늘 이 밤에 당신을 찾습니다. 여러분을 찾습니다. 친구들에게 초대받아 오셨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초대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찾고 계십니다. 그것 아십니까?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잃어버려다구요. 그렇습니다.
대답해 보실까요. 여러분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인생의 목적은 어디입니까? 살다가 살다가 죽으면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모르신다고요. 그래서 인생은 방황이 아닙니까. 인자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잃어 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60억의 인구 가운데 인류의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나란 개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나를 아시는 분. 나를 이름으로 아시고, 나의 좌절과 내 눈물과 내 고독과 내 갈등을 이해하시며 내가 살아온 인생의 History와 나의 Carrier를 아시고 내 모든 삶의 발자취를 기억하시고, 아시는 그분. 당신을 포기할 수 없어 하시는 그 분. 당신을 만나고 싶어서 오늘밤 당신 곁에 조용히 그분은 지금도 다가오십니다. 이 기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삭개오 곁에 지나가고 있었어요.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자. 우리는 마지막으로 삭개오를 변화시킨 결단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삭개오가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변화되었습니다. 자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삭개오야 이리 내려 오너라. 삭개오야 이리 내려오라고. 근데 성경에 보시면 삭개오가 어떻게 응답을 했습니까? 6절에 보시면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요. 삭개오야 속히 내려와. 삭개오는 이렇게 응답했다구요. 급히 내려와. 다시 한번요.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너라. 자, 삭개오는 어떻게 응답했다구요. 급히 내려와. 예수님도 급하고, 삭개오도 급하십니다. 꼭 한국 사람 같습니다. 우리가 다 급한 사람들 아닙니까? 바쁜 사람들. 그런데 여러분 신앙의 결단도 그렇게 급하게 하실수록 좋아요. 신앙의 결단도 급할수록 좋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급한데 신앙만은 자꾸 급하지 않게 미뤄 두시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사람이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런지 알 수가 없다고. 사람이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런지 알 수가 없다고. 그래서 오늘이 은혜 받을 만한 때고,바로 지금이 구원 받아아 할 시간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급할수록 좋아요.
어떤 빵집 운영하는 사람이 하도 가게가 안되니까, 꾀를 짜내서 이렇게 빵집 앞에 광고를 붙여 놓았습니다. 내일 오시면 거저 드리겠습니다. IQ 낮은 멍청한 사람이 그 이튿날 와서 저 빵 거저 먹으러 왔습니다. 그러니까 빵집 주인이 다시 읽어 보십시오. 내일 오시면 거저 드립니다. 아니 어저께도 내일이었습니다만, 우리집 표어는 그 날, 그 날 유효합니다. 내일이라는 시간은 다시 우리들에게 찾아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바로 지금이 구원 받을 만한 시간이예요. 급히 내려와서.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말합니다. 자기 집에 영접한 거예요. 그러나 삭개오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만 영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집으로 모셔드리면서, 이미 삭개오라는 사람은 자기 전 존재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자기의 마음속으로, 자기의 영혼 속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받아 들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집에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그러니까,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어떤 목사님이 교인 한 분이 교회에 나왔다, 안 나왔다. 그러시는 분이 있어요. 신앙이 참 신앙이 없으니까, 가끔 나왔다, 안 나왔다. 그래서 한번은 찾아 갔었요. 전화 걸어도 안되고, 밤에 가면 있겠지, 밤중에 아파트로 습격을 했습니다. 그래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아무개 목삽니다라고 문을 두드리니까, 목사님 음성을 듣자 마자, 갑자기 조용해 지더래요.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는 거예요.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그러니 어떻게 해요. 할 수 없이 아무개 목사 다녀갑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다 성경구절을 하나 써놓았어요. 요한 계시록 3장 20절. 나중에 목사님 가시고 난 다음에 그 분이 문 열고 보니까 쪽지 하나가 있단 말이죠. 아무개 목사 다녀갑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이게 뭘까. 성경을 찾아보았어요.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너에게로 들어가리라. 좀 미안했겠죠. 그래서 그 다음 주일날 교회에 갔어요. 그래도 차마 목사님 뵙기는 어색하고 그래서 목사님 사무실에다 이 교인이 쪽지 하나를 남겨놓고 갔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도 오늘 교회 다녀갑니다. 그 아래에다 창세기 3장 10절 그랬대요. 목사님도 희한하거든요. 교회는 가끔 나오는데 어떻게 창세기 3장 10절을 다 알까. 그래서 뭔가 목사님도 찾아 보았더니, 창세기 3장 10절에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문을 두드리시면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면서 내 마음속에 찾아오시겠다고, 내 마음의 문을 노크하시는 예수님. 우리 박광현 형제가 Nock. Nock. Nock.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을 찬양했어요.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너에게로 들어가겠다.
삭개오는 마음의 문을 열고 자기 가정의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오시자 마자, 이 집에 오시자 마자, 삭개오가 예수님을 모셔다 놓고 이런 고백을 합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누구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업 잘한 사업가가 자기 재산의 한 4분의 1 정도를 환원하는 것은 훌륭한 사업가의 윤리로 평가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4분의 1 정도가 아니라, 재산의 절반을 나눠주겠다고. 이게 사실이라면 변한 거죠. 이 사람은 굉장히 변한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것입니다. 이 사람을 앞에 놓고 예수님이 너 재산 절반 나눠. 앞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 뭐 이렇게 소위 도덕적인 설교를 한 것이 아니예요. 너 이제부터 착한 사람 돼야 돼. 이런 말씀하신 것이 아니예요. 이런 도덕적인 윤리를 설교하지 않았는데도, 이 사람이 자발적으로 인생을 바꾸겠다고, 선언합니다. 변한 것 아니예요. 무엇이 변화시켰을까요. 무엇이. 도덕이 변화시킨 것 아니예요. 도덕이.
여러분, 기독교는 도덕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단순한 도덕적 종교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기독교가 부도덕한 종교라는 말은 아닙니다. 기독교에는 도덕이 포함되어 있지만 기독교의 수준은 도덕의 수준이 아닙니다. 저도 교회에 처음 나갈 때, 기독교와 도덕이 비슷한 것으로 알았어요. 그냥 착한 사람으로 살면 되는 것 아니예요. 뭐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 아니예요. 모든 종교마다 선을 가르치는 것 아니예요. 그런데 성경을 공부해 보니까 아니더라구요. 제가 3년 동안 왔다 갔다 했는데, 교회를 그냥. 처음에 나가서 3년 동안은 그냥 왔다 갔다 그랬어요. 그런 어느 날 갈라디아서라는 성경을 공부하다가, 우리 교회 나가는 사람들의 말로 말하면 제가 깨졌습니다. 깨졌어요. 갈라디아서 2장 마지막절에서 우리가 이런 말씀을 공부하고 있었어요. 바울이라는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을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잘 이해가 안가더라구요. 이 말이 무슨 뜻인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는다. 만약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을 지켜서 가능하다면, 예수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다. 잘 이해가 안가시죠. 저도 잘 이해가 안갔으니까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도덕이라는 단어하고 성경에서 젤 비슷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이 율법이라는 말이예요. 율법. 왜냐하면, 율법은 많은 계명으로 이루어 진 것이 율법인데, 결국 율법은 두가지 이거든요. 두가지 예요. 아주 짤막하게 요약하면 두가지예요. 하라, 하지말라. 뭘 하라. 여호와를 공경하라. 하나님만 섬기라. 안식일을 지켜라. 뭐 하라,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 하지 말라. 하라. 하지말라 두가지. 근데 이 말씀의 뜻이 뭐냐하면 너희가 하나님이 하라는 것 하고, 하지 말라는 것 안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네 행동이 합격, 의롭다. 합격 받을 수가 있다면 예수는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없었다. 십자가에 갈 필요도 없었고, 돌아가실 필요도 없었다. 어, 이 말씀이 무슨 뜻이야. 도대체 이 말씀이 무슨 뜻이야. 라는 질문이 제 마음 속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그 말씀의 뜻을 더 생각하다가, 제 인생을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 누구나 도덕을 추구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하고, 하나님이 하라는 것 하고, 하지 말라는 것 안 하는 것이 좋은 일인 것은 아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지금까지 성경 조금 공부해 보니까,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 나는 다 했더라구요. 하지 말라는 것 이미 했어요. 성경에 보면 형제를 보고 미워하는 자는 이미 살인했다. 미움은 살인의 동기가 아니라 살인의 시작이래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 음욕은 간음의 동기가 아니라 간음의 시작이래요. 나는 간음한 사람이예요. 나는 살인한 사람이예요. 나는 율법을 지켜야 할 자가 아니라, 이미 율법을 깨트렸어요. 그러니까 죄인이죠. 율법을 깨트렸고, 죄인이고,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가 없어요. 나는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더라구요. 노력해도 발버둥쳐도 최선의 노력을 다해도, 나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는 사람. 그래서 내 행동으로는 내 최선을 다해도 나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될 수가 없는 자, 그러나 이걸 깨닫는 그 순간, 그 순간 저에게 또 하나 깨달아진게 있어요. 맞아 내가 나를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최선을 다해도 내가 나를 고칠 수가 없고 나를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거야. 예수는 나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떨구신거야. 그 예수 믿으면 내가 용서받고 새사람이 되는 거야. 갑자기 십자가의 사건이 제 마음속에서 깨달아 지더라구요. 아~~ 예수님이 그래서 오셨구나. 내가 나를 구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물속에서 나를 스스로 구할 수가 있다면 구원자가 필요가 없어요. 근데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보내시고, 그는 죄 때문에 내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시고, 붉은 피를 철철 떨구시면서 나를 믿기만 하라. 네가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되.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복음인 것입니다. Good News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자 마자 그래서 삭개오가 이 변화된 모습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을 하자마자 예수님이 뭐라고 그랬는지 아세요. 그 다음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고,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야. 그 말을 바꾸면 이런 얘깁니다. 오늘 네가 구원을 받았고, 오늘부터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나님의 딸이야. 네가 죄 용서받고 하나님이 아들과 딸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수가 있다. 삭개오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고, 삭개오가 한 결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가 있다면 오늘 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 이 자리를 떠나 갈 수가 있습니다. 기도 하십시다.
조용히 머리 숙여서 기도하는 이 시간에 제가 초청 받으신 분들에게 묻고 싶어요. 또 교회 그 동안 계속 나왔지마는, 기독교가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확실히 이해하실 수가 없었던 분들도 포함됩니다. 목사님 말씀 듣고 보니까, 저도 정말 예수님을 만나고 싶고, 정말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고 싶어요. 저도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고, 변화되고 싶어요. 이런 마음이 생기시면 한번 손 올렸다 내려 주세요. 제가 기도해 드릴께요. 손 번쩍이요. 네. 네. 네. 괜찮아요. 아주 부끄러운 손 아니거든요. 아주 거룩한 손, 아름다운 손. 결심의 손. 번쩍 다시 한번 올려주세요. 손 번쩍 괜찮아요. 괜찮아요. 번쩍 올리시고요, 자리에서 잠깐만 일어나 주세요. 제가 기도해 드릴께요. 자리에서 잠깐만 일어나서, 괜찮아요. 우리 많이 일어나, 다 일어나서요. 괜찮아요. 우리 많은 분들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결심한 분들은 다 일어나세요. 그리고, 자 다 일어나 주시고, 너무나 아름다운 순간, 너무나, 감격적인 순간, 오늘밤 우리들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이 잔치를 열었어요. 여러분이 저희와 똑같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어서 오늘 이 잔치를 열었거든요. 자, 일어서신 분들 저를 따라서 기도하세요. 먼저. 저를 따라서. 제 기도가 여러분의 마음속의 기도와 같다면 저를 따라서 기도하세요. 아직 결심하지 않은 분도 지금 결심하실 분도 같이 일어나세요. 괜찮아요. 지금 결심하실 분도 같이 일어나세요. 우리 일어나서 저와 같이 기도 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기도할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 같이 기도하고 싶으신 분 따라서 하세요.
하나님 아버지, 다른 우리 성도들도 같이 기도를 도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성도님도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하나님 앞에 와서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변화되고 싶습니다. 구원받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저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피 흘리신 예수님. 그 피로 저의 죄를 씻어 주시옵소서. 부활하신 예수님. 살아계신 예수님. 제 마음속에 오시옵소서. 나의 구주와 주님이 되어 주십시오. 저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네,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오늘밤 이웃 초청 생명의 잔치 첫날밤, 우리 많은 이웃들이 이렇게 주님앞에 나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나님 기쁘시죠. 이들을 받아 주시옵소서. 안아 주시옵소서. 그리고 저들의 모든 죄가 다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 졌다고, 말씀해 주시옵소서. 저들이 이제 용서받은 자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것을 확증시켜 주시옵소서. 이제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었고,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딸이다. 이렇게 확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마음속에 모든 의심은 다 사라지게 도와주시옵소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로 주님을 높여 드리며, 주님을 따라가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오, 주님 저들을 축복합니다. 저들을 받아 주시옵소서.
기회를 잡는 인생
눅 19장 1~10절 / 노경모목사(함께하는교회)
"기회는 과감한 자를 좋아한다.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엄청난 기회를 주지만, 과연 내가 그것을 할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무조건 먼저 'Yes'라고 말하세요. 그러고 나서 나중에 그걸 어떻게 하는지 배우세요!"
너무 마음에 와 닿은 말입니다. 우리가 머뭇거리다가 나에게 다가온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심지어는 기회가 나에게 찾아 왔지만, 혹시나 내가 가진 작은 것마저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서, 그 기회를 잡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들도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는 이렇게 말합니다. “단순히 내가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기회를 주실 때가 참 많습니다. 그 때에는 기회를 앞에 놓고 머뭇거리거나, 그 기회를 부정적 눈으로 바라봐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그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성경 에베소서 5장 16절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는 말씀이 에베소서 5장 16절에 나옵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기회라는 것은 순간적으로 붙들지 않으면 지나갑니다. 지나가고 나면 후회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잘 잡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의 아들 카이로스의 모습은 무척이나 독특합니다. 앞머리는 숱이 무성한 대신 뒷머리는 대머리이며, 어깨와 양발 뒤꿈치에는 날개가 달려있을 뿐만 아니라 양손에는 저울과 칼을 들고 있습니다. 신화의 등장인물의 모습은 대부분 은유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요, 카이로스의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그를 발견한 자가 그의 머리채를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네요. 그러나 그의 뒷머리는 대머리이기 때문에 머리카락을 붙잡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발에 날개가 달려있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고 합니다. 한번 지나가면 뒤에서 다시는 잡을 수 없는 이것을 그리스 사람들은 이것을 ‘기회’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카이로스를 기회의 신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지 잘 잡은 사람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하나님이 네 고향 네 아버지의 집 갈대아 우르를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을 때, 아브라함을 지체하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그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다윗도 마찬 가지 입니다. 소년 다윗이지만 전쟁에 나가 있는 형들을 면회하러 갔을 때, 블레셋의 골리앗을 봅니다. 그리고 골리앗을 무너뜨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습니다. 그외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은 사람들을 성경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삭개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별로 중요한 성경의 인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람이야 말로 기회를 잘 잡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의로운 자’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이름을 지어줄 때 너는 의로운 사람이 되라는 소원을 갖고 이름을 지어준 것 같은데 그는 지금은 그렇게 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입니다. 세리는 세금을 거두어 정부에 바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들 중에서 최고 책임자가 바로 삭개오입니다. 많은 세금을 거두어 일정액을 로마 황제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가 갖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세리를 아주 싫어하고 증오하고 경멸했습니다. 죄인이라고 생각했으며 강도와 소매치기 수준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광야에서 가장 잔인한 짐승은 곰과 사지이지만 도시에서 가장 잔인한 짐승은 세리와 기생충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또 삭개오는 부자였습니다. 세리장으로 많은 돈을 거두어 들였으니 당연히 대단한 부자입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키가 작았습니다. 어느 정도 작았는지 모르지만 아주 작았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자기 앞에 사람이 서면 그 앞을 볼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같은 유대인으로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동족들의 돈을 갈취하고 불의하게 재물을 불려나가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동족들의 비난, 손가락질, 동족들로 받는 모멸감 때문에 삭개오 자신도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심지어는 동족들 앞에서 나서는 것을 꺼리는 대인공포증, 공황장애, 우울증도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에다 사람들이 ‘너는 매국노, 죄인이다.’ 라고 낙인을 찍어 버렸고, 키도 아주 작았으니 정신적인, 신체적인 위축감이 아주 컸을 것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도 아주 부족했을 것입니다.
이름도 너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인데, 그 이름답게 살지 못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바라 볼 때,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도 대단했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겉으로는 잘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속으로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고 편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삭개오가 엄청나게 변화되고 새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랑하는 바래새인, 서기관과 장로들과 정통 유대인들을 제치고 아브라함의 자손의 반열에 드는 놀라운 축복을 주님으로 부터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었을 수 있었을까? 궁금합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삭개오가 이런 기회를 어떻게 잡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소문에 대한 기회를 잡았습니다.
소문이 들린다는 말은, 나에게 정보가 주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주는 정보, 예수님이 주는 정보, 주변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로 부터 소문과 정보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귀담아 듣고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잡아야 합니다. 삭개오는 이 소문에 대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삭개오는 예수님이 자기가 있는 여리고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던 터라 한 번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는 못할지라도 멀리서라도 얼굴이나 한 번 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삭개오의 마음 속에 강렬하게 일어났습니다.
우리에게 비전을 이루기 위한 소망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한 열망과 열정이 우리 속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이러한 소망과 열망과 열정이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일어날 때, 하나님은 그 비전을 그 사람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소원은 무엇을 말합니까? 소망, 열정, 열망을 말합니다. 이것을 먼저 두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삭개오는 기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움직였습니다.
기회가 왔을 때, 머뭇거려서는 안됩니다. 주저 주저 해서도 안됩니다.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빨리 그 기회를 잡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그는 예수님이 오는 쪽으로 재빨리 그의 몸을 움직였습니다.
그가 주님을 볼 수 있을까? 검토해보고 연구해보고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그는 무조건 지채하지 않고 움직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회가 주여졌을 때, 생각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맞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아,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나는 알아, 그래하는 것이 옳아, 이렇게 생각만 하고 움직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생각만 해서는 기회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12년 동안이 혈루증이란 병을 앓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혈루증'이란 '만성자궁출혈증'이라고 하는데 하혈이 엄추지 않고 계속 나오는 병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병입니까? 치료를 받기 위해서 많은 의사를 찾아 다녔고, 돈도 다 썼는데도 아무 효과를 보지 못했고 병은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 때 이 여인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 창백하고 연약한 여인은 무리들을 뚫고 예수님의 향하여 돌진했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친다는 소문을 듣고 그냥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움직였습니다. 돌진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기회를 잡을 수 었고, 그 고약한 병이 낫는 은총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기회를 잡기 위해서 방해와 장애물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길에 나갔지만 벌써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려고 길가에 나와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아서 도저히 예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삭개오가 집으로 돌아 갔습니끼? 기회를 잡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습니까? 아니요 삭개오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는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달려가서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라도 반드시 보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4절,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어른이 나무 위에 올라간다. 이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삭개오는 그 동네에서 다 알려진 사람입니다. 나무 위에 올라간다면, 주변의 사람들이 얼마나 웅성거리면 비난을 하겠습니다. 손가락질을 할 겁니다. 안 그래도 동족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데, 불난 데에 기름을 껴얹는 꼴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그러한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기회를 잡으려면 방해를 극복해야 합니다.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러한 것들 때문에 뒤로 물러서거나 기회를 잡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잡으려고 할 때, 마귀는 방해를 합니다.
마귀는 두려움을 줍니다. '혹시 내가 망하지는 않을까?' '있는 것까지 다 잃는 것은 아닌가?' '손해 보는 것은 아닌가?' 기회를 잡으려는 우리에게 이러 두려움들을 줍니다.
또 마귀는 의심을 줍니다. 마귀가 하와를 유혹할 때도 의심을 주었습니다. 의심을 줍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마귀는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이것들을 뛰어 넘어야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내 것으로 취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삭개오가 기회를 잡았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다가 삭개오에게 오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에 몰려 있었습니다.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려고 말입니다. 잘 믿는다고 자랑하는 유대인들, 종교지도자들..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한 번이라도 만져 보려고 손을 내미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님을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은 지나쳐 갑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발생합니다. 예수님이 삭개오가 올라가 있는 그 나무 밑으로 다가 오셨습니다.
5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그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삭개오가 있는 곳입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앞줄에 서서 예수님을 향하여 지지의 표시를 한 사람들이 아니라 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 그것도 죄인이라고 사람들이 비난하고 정죄하는 그 삭개오가 올라가 있는 나무 밑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바쁘십니다. 빨리 지나가셔야 합니다. 제자들도 빨리 가자고 재촉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다가 오셨습니다. 그렇게 보기를 원하셨던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먼저 다가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멀리서라도 보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는데 그 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쳐다 보십니다.
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에게 다가오신 주님은 삭개오를 쳐다보십니다. 5절,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삭개오의 마음은 터질 듯이 기뻤습니다. 아니 나같은 죄인을 쳐다보시다니.. 너무 황송했습니다.
주님은 회복이 필요하고 치유를 받아야 자에게 다가오셔서 사랑의 눈길을 쳐다보십니다. 인자와 자비의 눈길로 바라보십니다. ‘쳐다보신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사정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의 상처와 고통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너의 아픔과 너의 고민이 무엇인지 내가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는 눈길입니다. 이 눈길은 사랑의 눈길입니다. 자비와 긍휼의 눈길입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았는데 삭개오의 상처와 아픔이 치유되기를 시작합니다.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 삭개오를 부르십니다.
5절,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삭개오야’라고 부르신 것은 정말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사전에 삭개오의 이름을 누구로부터 들었거나, 아시는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삭개오를 만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삭개오를 쳐다 보면서 ‘삭개오야’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누가 나의 이름을 알아주고 나의 이름을 불러 준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고 감사하겠습니까? 오늘 주님은 우리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시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0장 3절,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문지기, 목자되시는 주님은 양인 우리들의 이름을 각각 부르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나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양이기 때문에 부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부르십니다. 이름을 부르실 때, 주님의 사랑이 이름과 함께 전달됩니다. ‘아브라함아’ 하고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사무엘을 부르신 하나님, ‘베드로야’ 하고 베드로를 부르신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마치 엄마가 사랑하는 자녀들을 부르듯이 말입니다. 주님이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 주신다는 것은 삭개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을 보려는 기회를 붙잡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축복이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초청하십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4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오늘 내 집에서 머무르며 쉬며 너와 함께 먹고 교제하며 자겠다는 것입니다.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삭개오 자기 집에 예수님이 오셔서 유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이, 그렇게도 유명하신 예수님이 죄인인 자기의 집에 유하시겠다니... 삭개오는 꿈만 같았습니다.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겠다는 말은, 삭개오 보고 나를 너의 집으로 초청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삭개오를 예수님께로 초청한 것입니다. 주님을 보겠다는 기회를 잡았더니 주님의 초청까지 받습니다. 할렐루야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새롭게 변화시킵니다.
8절,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의 이 고백은 자기가 완전히 치유되고 회복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놀라운 변화입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앞으로 이렇게 살아라고 강요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옆에서 충고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 자신이 스스로 이렇게 변화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가 되었다는 것은 삭개오가 상처와 아름이 멋지게 치유가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주님은 삭개오가 하나님의 자녀로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선포합니다. 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삭개오는 구원의 은총까지 받습니다. 주님을 보겠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았더니 주님을 보는 것을 이룬 것 뿐만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초청까지 받고 삭개오가 갖고 있는 모든 상처와 아픔까지 치유되고 회복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까지 받게 됩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으니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남을 보고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들을 믿고 하나님의 주시는 우리에게 올 때, 그것을 아브라함처럼, 다윗처럼, 삭개오처럼 그것을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소중한 기회들을 놓치지 말고, 방해와 장애물 두려워하지 말고 그 기회를 향하여 움직여서 그것을 믿음으로 취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삭개오에게 붙은 레이블
배 혁목사(안토니오교회) / 눅 19:1-10
식료품 가게에 가면 진열장에 수 많은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각 상품마다 레이블이 붙어 있습니다. 그 상품에 대한 정보입니다. 그 레이블을 보면, 어디에서 누가, 무엇을 가지고 그 물건을 만들었는지 알수 있고, 그것을 얼마에 살 수 있는지 그 가치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상품에 레이블이 붙여 있지 않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아마 가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물건을 찾고자 하는 소비자들로 인해 아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레이블이 없는 것도 문제가 되겠지만, 또한 잘못된 레이블도 문제가 됩니다. 한국 농촌에서 잡초를 죽이는 제초제를 실수로 먹고 죽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농부들이 쓰고 남은 농약을 물병이나 음료수병에 담아 놨다가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물이나 음료수인지 알고, 농약을 마셨다가 죽는 경우라고 합니다. 엉뚱한 레이블을 붙이고 있는 상품도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사람들처럼 엉뚱한 레이블을 붙이고서 살아가는 존재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의 레이블을 붙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레이블을 붙이고 있기도 합니다. 내 자신은 나를 이런 사람이라고 레이블을 붙이는데, 또 보는 사람들마다 각각 다른 레이블을 붙이기도 합니다.
1. 오늘 말씀을 보면, 엉뚱한 레이블을 붙이고 살아가던 한 사람, 삭개오를 보게 됩니다..
삭개오에게도 그를 나타내는 레이블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를 ‘세리이며 부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삭개오를 향해서 사람들은 죄인이라는 레이블을 또 하나 붙여 주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 아래에 있었고, 로마제국은 식민지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삭개오도 로마의 세리로서, 동족으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상납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 중에 세리들은 더 많은 금액을 거두어서 자신의 재산을 늘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삭개오가 부자라고 언급된 것도 아마 그러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삭개오와 같은 세리들은, 이스라엘을 배반한 로마의 앞잡이로 여겨지게 되고,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이라고 레이블을 붙여 놓고, 함께 어울리면 안되는 더럽고 악한 존재로 취급했습니다.
그리고, 삭개오도 사람들이 붙여 준 그 레이블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았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그는 재물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며 자신의 부를 쌓는 사람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삭개오가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부모님들이 그에게 붙여준 삭개오라는 이름의 뜻은 ‘상종못할 죄인’이 아닙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의, 정결한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롭고 정결한 사람으로 살라고 부모님께서 이름을 붙여 주셨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보다 불의를 행하며 부정한 사람으로, 그 레이블에 합당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삭개오의 레이블이 바뀌게 되는 사건이 생깁니다. 바로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자신의 마을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사모함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주변에 사람들이 워낙 많이 있었고, 또 삭개오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보고 싶어서 예수님이 지나가시기 될 길에 서 있는 돌무화과나무, 옛날에는 뽕나무로 번역된 그 나무에 올라갑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그 길로 오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나무를 지나쳐서 가시는 것이 아니라, 나무 아래에 멈추셔서 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올려다 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는 너무 기뻐서 나무에서 급히 내려 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보면서 수근거립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여전히 삭개오는 죄인이었고, 사람들은 그를 죄인으로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한 삭개오에게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서 결단의 말을 올립니다. “예수님, 이제 제소유의 절반은 가난한 자에게 주고, 누구를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 동안 죄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모아 두었던 그 재물들을 이제는 가난한 사람에게 거져 주고, 빼앗은 사람에게는 보상해서 갚아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모실 때에 자신의 집에만 모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자신의 마음 중심에 모셨습니다. 앞으로 사람들이 붙여 놓은 레이블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하신 대로 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믿고 살아갈 것을 결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진정으로 믿고, 영접하게 되면, 사람들이 변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게 되고, 삶에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선언하십니다.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고,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붙어 있는 ‘구원받지 못한 죄인’이라는 레이블을 떼 주시고,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레이블을 붙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사람과 같이 취급되었던 그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해 주시면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라고 레이블을 붙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시는 일은, 그들이 마땅히 붙이고 살아가야 할 레이블을 붙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각자 자신의 참된 모습을 깨닫게 해 주시고, 자기 자신이 붙인 레이블이 아니라, 사람들이 말하는 레이블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레이블을 붙여주시는 것입니다.
2. 사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 새로운 존재로 레이블을 받은 것과 같이, 저와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믿게 된 후에 모두 새로운 존재로 레이블을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2:10절,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선한 일을 하는 존재로 새롭게 지으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선한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셔서 우리로 행하게 하려고 했던 그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은 이 땅에서 선한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1:26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모습속에 그를 만드신 하나님의 모습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면서 선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Image)’라는 성분이 함유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안에 넣어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면서 살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의 악을 따라서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리게 되니까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악을 따라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리고,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결국 어떠한 레이블이 붙여지는지 아십니까?
“사망, 죽음”입니다. “사람들은 죄로 인해서 영원히 죽을 존재입니다.”라는 레이블이 붙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을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구세주로 믿을 때에, 우리의 존재가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에게 “구원받은 자”라는 레이블을 붙여 주셨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에게도 그러한 레이블을 붙여 주십니다. “이 사람은 내 대속의 피로 구원함을 받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누가 우리를 만들었는지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We are God’s workmanship, handiwork.” 레이블에 꼭 표기되어야 할, 누가 나를 만드셨는지를 비로소 심각하게 깨닫게 됩니다.
때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지으심을 받았음을 잊고서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Made by God”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레이블을 붙이고 나를 만들어가도록 그냥 내버려 둘 때가 있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만든 것처럼 내가 원하는데로 내 자신을 만들고자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우리는 다른 사람이나 내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의 작품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목적에 맞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의 아들 요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셉은 어릴 때부터 주위의 사람들에 의해 여러가지 다른 레이블을 붙이고 살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너무 사랑해서 색동옷을 지어주면서, “내 목숨과도 같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레이블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형들은 요셉이 그들을 해하는 어떠한 일도 하지 않았는데도, 동생 요셉을 시기하여서 “죽여 없애야 할 동생”으로 레이블을 붙이고 요셉을 괴롭혔습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 이집트의 보디발 장군의 집에 팔려 갔을 때에 그의 주인 보디발 장군은 보디발 장군은, 요셉의 능력과 신실함을 보고 집안의 모든 것을 맡길 만한 충성스러운 종이라는 레이블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주인은 요셉이 자신과 동침하지 않는다고 원한을 품고 충성스러운 종이 아니라, 여주인을 간음하려고 했던 악한 종으로 레이블을 붙여서 감옥에 넣어 버립니다. 감옥에 죄수로 있을 때에 요셉은 꿈을 해몽하는 용한 사람으로 레이블을 붙입니다. 그 이후에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해 주게 되고, 요셉은 애굽의 2인자라는 레이블을 붙이게 됩니다.
요셉은 그가 살아오면서 여러 사람에 의해서 수많은 레이블을 붙였다가 떼었다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결코, 그 사람들에 의해서 붙여진 그 레이블에 따라서 자기 자신을 정의하거나 그대로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그 레이블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만드심을 따라 살아 갔던 사람입니다.
3.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이제 세상 사람들이 붙여 놓은 레이블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붙여 주신 그 레이블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에 수고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위해서 지음받고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붙여주신 레이블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새롭게 지은 받은 존재가 된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구원하시고, 선한 일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로마서 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 모두에게는 예수님께서 새롭게 붙여 주신 나에 대한 레이블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요, 하나님의 선하신 일들을 감당하라고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붙여주신 레이블을 보기 위해서는, 내가 사람들에게 붙여 놓은 레이블을 떼어 놓아야 합니다.
나다니엘 호손 (Nathaniel Hawthorne)이라는 사람이 쓴 ‘주홍글씨 (The Scarlet Letter)’라는 책을 아실 겁니다. 그 책은 1640년대,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였을 때, 미국 보스턴에 이주해 온 청교도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청교도 마을에 헤스터 프린(Hester Prynne)이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그녀의 이웃들은 헤스터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임신은 그 마을에 커다란 소동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남편은 아직 유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간음한 것은 커다란 죄라며 임신한 헤스터를 감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온 이후에도 사람들은 그녀가 입는 모든 옷에 알파벳 A 를 주홍글씨로 수 놓아 다니도록 합니다. 주홍글씨 ‘A’는 Adultery 간음이라는 단어의 첫글자였습니다. 그 이후에 레스터는 그 주홍글씨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받지만, 그녀는 그 사람들이 붙인 레이블에 얽매이지 않고, 여전히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선하게 살아갑니다. 헤스터의 선한 모습을 마을 사람들이 보면서, 그녀에게 새겨진 주홍글씨가 마땅하지 않다고 여기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주홍글씨 A 를 떼어낼 것에 대해서는 주저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며 레이블을 쉽게 붙이는데, 그 레이블을 떼 주는데는 인색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에게 붙여졌던 주홍글씨를 아낌없이 떼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너는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그 레이블대로 선하게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바라볼 때에 주님께서 붙여 주신 그 레이블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그것을 확인시켜 주고, 격려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붙여 놓은, 정죄와 편견의 레이블을 떼어 내십시오. 미움과 차별의 레이블을 떼어 내십시오. 내가 붙인 레이블이 하나님이 주님께서 붙여 놓으신 레이블을 가리거나 앞서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서로에게 붙여주신 레이블로 서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한 사람이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누구보다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 일들을 위해서 다시 지음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붙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레이블을 확인시켜 주며, 그 레이블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며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삭개오와 같이 잘못된 레이블을 붙이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삭개오를 찾아 오셔서 어떠한 존재인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구원을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 곧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이들이 깨닫는 레이블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판단하며 여러가지 레이블을 붙일지 모르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셔서, 하나님의 선하신 일들을 위해서 불러 주신 줄로 믿습니다.
날마다 예수님께서 붙여 주신 레이블을 확인하고 고백하며 사십시오.
“나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던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이고 구원받은 사람이야.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셨어. 이제 나도 그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하며, 주의 뜻대로 살아 갈 거야”
세상 사람들이 붙이는 레이블로 만들어지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붙이신 그 레이블에 합당한, 주님의 뜻과 말씀을 이루는 선한 삶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또한 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주님께서 붙이신 레이블이 있음을 알리고, 격려하여서, 함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나가는 믿음의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리장 삭개오
김필곤목사 / 눅 19:1-10
두 주간 동안 파키스탄과 태국 선교지를 방문하고 왔습니다. 파키스탄에 만만만 생명운동을 통하여 월드라이프 학교를 세웠는데 도착하자마자 경찰서에 신고하고 오후에 학교를 방문하여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200여명의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모여 환영해 주고 찬양을 부르고 성경을 암송하고 연극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 곳 학교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고 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선물을 주었습니다. 저녁시간을 이용해서 학부모 가정을 방문하여 기도하고 선물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새로 지을 학교 부지에 가서 기초석을 놓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참 예수님 앞에 나오기가 힘듭니다. 파키스탄 인구는 2억명으로 전 세계 6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자 인도네시아에 이어 2번째로 무슬림이 많은 나라입니다. 파키스탄 인구의 97%가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든 공문서에 종교 기입을 의무화해 공무원이나 군인, 판사 등의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의무적으로 이슬람 신앙 선서를 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이런 직업을 갖기 위해 거짓으로 종교를 기입하면 반역이나 헌법 위반 혐의로 처벌을 받는다고 합니다. 몇몇 이슬람 근본주의·극단주의 단체가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납치, 폭행, 살해, 강제 개종 등을 하는 상황은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몇 년 전에 손이 잘린 청년을 선교사님이 우리 교회에 대리고 와서 의족을 만드는데 조금 도와 준 적이 있습니다. 미국 국무부 산하 기관인 종교자유위원회에서는 파키스탄은 지구촌 최악의 종교 탄압 국가 중의 하나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중동언론연구소(MEMRI)는 ‘파키스탄은 정규 교과서를 통해 이슬람식 가치관을 끊임없이 반복 교육 시키고 있으며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지하드를 권장하고 있으며 비무슬림인 학생들에 대한 테러 공격을 정당화 시키는 가치관을 주입 시키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태국은 소승불교의 나라입니다. 인구의 95%정도가 불교인이고 학교에서도 불교에 대하여 배우고 남자는 일생에 최소한 3개월 간 한번 승적을 보유하는 것이 사회적 관행으로 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사원과 가정, 사무실, 상점까지도 불상을 모셔놓을 정도로 불교가 국교화 되어 있고 국왕과 불상과 승려가 신성한 존재로서 경의와 숭앙을 받는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들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빈곤, 불공평, 차별적 환경을 감수해야 만합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이나 부자들이 예수님께 나오는 것은 쉽지 않은 나라들입니다. 우리는 작은 헌금이지만 어떻게 해서든 어릴 때부터 그들을 교육을 시켜 예수님을 영접하여 각분야의 기독교 지도자로 소수이지만 만들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파키스탄이나 태국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오기 쉽지 않은 것처럼 오늘 성경에 나오는 삭개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치열하게 산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리장이 되었습니다. 지금 말하면 세무서장이 된 것입니다. 적당한 권력을 얻었습니다. 그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치열한 생존 경쟁 사회에서 그는 남보다 열심히 노력을 해서 어느 정도 당시 사회에서 살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교가 주류인 사회입니다. 유대교에서 개종하면 이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1. 오늘날 예수님께 나오려면 무엇을 극복해야 하겠습니까?
많은 것이 있겠지만 삭개오를 통해 볼 때 세 가지를 극복해야 합니다. 시대는 변했어도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첫째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신분의 장애물을 극복해야 합니다.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에 대하여 세리장이요 부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삭게오는 세리장의 신분이었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조금만 신분이 높으면 사람은 교만해져 예수님께 나오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조금만 가진 것이 있으면 교만해지는데 그는 부자였지만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요즈음 갑질하는 사람들이 신문지상에 오르는데 돈 조금 있으면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도 몰라봅니다. 조금 가지면 얼마나 교만해집니까? 조금 권력있으면 얼마나 교만해집니까? 조금 배우면 얼마나 교만해 집니까? 우리나라만 해도 일 년에 2만 6천권 이상 책이 나온다고 합니다. 일평생 읽어도 세계에서 나오는 책 하루 분량도 못 읽고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조금 알면 세상 모든 것 알고 있는 것처럼 이성우월주의자가 되어 하나님이 없다고 교만을 떠는 것이 인간입니다. 조금 주어진 권력이, 미모가, 건강이, 지식이, 부가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방해 요소가 되면 안 됩니다.
둘째는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사람의 장애물을 극복해야 합니다.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무엇이 방해를 합니까?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우호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을 만나는데 방해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 믿으려면 핍박하는 사람, 예수 믿지만 위선적인 사람들이 방해 요소입니다. 특히 교주를 절대시하는 이단들이 예수 믿는데 방해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사람의 방해물을 극복하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갑니다. 세리장으로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을 다 내려놓지 못하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제일 구원받기 힘든 사람 중에 하나는 체면 차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사람이 방해 요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다니는 누구 때문에 예수님께 나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처럼 사람이 예수님 만나는데 방해되는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사탄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가장 탁월한 도구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최 우선시하게 하는 휴머니즘일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해야 진정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열등감의 장애물을 극복해야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는 키가 작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갑니다. 무엇하기 위해서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보고자 하되” 문법적으로 미완료형으로 계속해서 예수님을 보기 위해 애를 썼다는 말입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동분 서주하는 삭개오의 적극적인 모습을 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였습니다. 자신의 결함이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방해물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도 돈이 있어야해, 배워야 해, 교회에 다니는 여성들을 보니 다 예쁜데 좀 예뻐야 해. 똑똑해야 해.” 등을 말하면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 같은 놈은 예수를 만날 자격이 없어!" 라고 비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열등한 요소가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말츠라는 심리학자의 말을 빌리면 95%의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약점 때문에 열등감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누구나 약점이 있는 것입니다.
심리학자인 크래머 박사는 사람의 사고 방식을 "자산에 바탕을 둔 사고(Asset엣세트, 자산-based thinking, ABT)"와 "결핍에 바탕을 둔 사고"로 나누어 설명을 합니다. 그는 그의 책 [긍정으로 리드하라]에서 성공하는 리더들은 무엇을 보고, 말하고, 행동할 때 늘 자산에 바탕을 둔 사고를 한다는 것입니다. 실패하는 사람은 내가 실패하는 이유는 돈이 없어서, 기술이 없어서, 주변 사람의 도움이 없어서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공하는 리더들은 그와 반대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서 무엇이 효과가 있는지, 어떤 장점이 있는지, 어떤 잠재력이 있는지 들여다본다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등감을 극복해야 합니다. 학력 때문에 괴로워하던 링컨이 예수님을 만나니까 대통령이 됩니다. 소아마비의 약점을 가졌던 루즈벨트가 예수님을 만나니까 실력을 갖추어 대통령이 됩니다. 가난이라는 약점을 가진 록펠러가 예수님을 만나니까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 만나는데 나쁜 직업, 신체적인 조건, 가정적인 불행이 장애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약점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 나오는 자는 예수님이 부르시면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예수님을 보기위해 돌무화과 나무에 오를 삭개오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삭개오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삭개오를 보고 "삭개오야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삭개오를 찾아갔고 그의 이름을 정확히 불렀으며 그의 마음을 정확히 읽었습니다. 예수님이 초대 받지 않았는데도 먼저 손님으로 그 집을 방문하겠다고 한 유일한 경우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사실 삭개오가 먼저 예수님을 찾아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삭개오를 만나기 위해 여리고에 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삭게오를 찾아간 분명한 의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믿습니까?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러 오기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삭개오를 만나기 위해 여리고로 가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간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먼저 찾아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에게 돌을 던지고, 무시하고, 적대시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잃어버린" 자라는 헬라원어의 뜻은 "완전히 파괴하다", "죽다", "멸망하다", "손상시키다"입니다. 삭개오가 겉은 잘 포장되어 멀쩡한데 실제는 그런 인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겉은 멀쩡한 것같지만 내부에 들어가면 남모르는 아픔과 질병과 상처가 있습니다. 삭개오가 바로 양떼를 떠남으로 '잃어버린' 양과 같은 사람입니다. 삭게오는 그대로 놓아두면 인생의 종착역에서 지옥으로 떨어질 사람입니다. 그는 권력도 있고 돈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죄인으로 유대사회에서 왕따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뭇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수군거립니다. 삭게오라는 이름의 뜻은 '순전하다, 정의롭다'라는 뜻입니다. 그의 부모가 그를 낳고 순전하고 정의롭게 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의 뜻대로 그렇게 살지 못하고 민족의 배신자, 부정 축제자가 되어 자기 동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돈은 있고, 권력은 쥐었지만 백성들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유대 동족들은 세리들을 매국노와 같이 멸시하고 상종도 해 주지 않았습니다. 창기처럼 죄인 중에 죄인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뭇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리고로 가셔서 의도적으로 삭개오에게 다가가 삭개오를 보고 "삭개오야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주님은 죄인인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결코 우리가 먼저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 만큼 깨끗하거나 의롭지 못합니다. 요한복음15: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로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떨어졌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님이 우리를 먼저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시고 오늘도 진정한 행복에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시22:10)"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통가운데 처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출 3:7)"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우리의 사정, 우리의 형편, 우리의 아픔, 우리의 슬픔, 우리의 상처 모르고 외면할 것같지만 우리 주님의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아무도 위로해 주지 않을 것 같은 우리의 고통 다 보고 계십니다. 아무도 들어주실 것 같지 않던 우리의 부르짖음 다 듣고 계십니다. 아무도 알지 못할 것같은 우리의 사정 다 아십니다. 사람들은 조그마한 비난거리만 있으면 소문내고, 비판하고, 수군거리고, 정죄하고 따돌립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의 허물과 약점을 다 아시면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다 해도 우리 주님은 우리의 허물을 들어내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예수님은 죄의식 속에서 불행하게 사는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손가라가질 받는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범죄한 후 아담을 찾아간 분은 하나님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찾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먼저 아브람을 찾아가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게 하셨습니다.(창 12:1). 하나님이 먼저 성전에 있는 어린 사무엘을 찾아 가 "사무엘아, 사무엘아!" 이름을 불러 주신 것입니다(삼상 3:1-9). 바울도 베드로도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찾아 자기 땅에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백성을 떼를 지어 집단적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룹별로, 연령별로, 성별(性別)로, 지역별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개인적으로 불렀습니다(창 12:1). 하나님은 사무엘을 실로에 있는 성전에서 개인적으로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시며 세 번이나 연속해서 같은 내용으로 불렀습니다(삼상 3:1-9). 하나님은 이사야를, 예레미야를, 에스겔 각각 개인적으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나다나엘을 미리 아시고 불렀습니다(요 1:47-48). 베드로와 요한의 형제를 고기잡이하는 어장에서 불렀습니다(눅 5:10-11). 마태를 세관의 공직에서 불렀습니다(마 9:9). 사울을 박해의 도상에서 불렀습니다(행 9:1-9). 예수님은 삭게오에게 속히 내려오라는 부르심입니다.
지체하거나 머뭇거리거나 주저할 수가 없는 화급한 결과만을 요구하는 단호한 명령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행동의 기회를 촉구하는 명령입니다.
이 때 삭개오는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① 급히 내려 왔다고 하였습니다. ② 즐거워하면서 내려 왔다고 했습니다. ③ 그리고 예수 영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 말의 여자적(如字的) 의미는 물리적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말입니다. 좀 더 의미를 확대해석하면 주님의 부름을 받는 자는 내려 와야 합니다. 삭개오 스스로의 열심과 노력으로 만들어 놓은 그 자리에서는 주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높고 높은 영광 보좌를 내어놓으시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내려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겸손의 걸음을 걸어 지금 여리고까지 오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든, 사람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이른바 높은 자리, 성공의 자리, 명예와 권력의 자리, 부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사람들은 가문이라고 하는 큰 나무 위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들은 거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사람은 문벌(학문)이라고 하는 큰 나무 위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은 거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른바 경제라고 하는 큰 부의 자리에서 내려 와야 합니다. 우상이라고 하는 헛된 종교의 나무 위에나, 어떤 무서운 이데올로기의 나무 위에나, 아니면 정치라고 하는 나무 위에나, 교육이라고 하는 나무 위에나, 문화와 예술이라고 하는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다 그 나무를 과시하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예수 부름 받은 사람은 먼저 그 자리에서 내려 와야 합니다. 역사와 전통이라고 하는 나무 위에 있는 자가 있습니다. 결코 그 자리에서는 예수를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진정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은 거기서 내려 와야 합니다. 온갖 종류의 교만과 인본주의적인 사람의 자리에서 내려 와야 합니다. 인간의 노력, 인간의 공로, 인간의 업적, 인간의 열심, 인간의 명예에 걸터앉아서는 예수를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만신창이가 된 가정에서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오로지 삭개오에게 베푸신 주님 자신의 은혜요, 사랑이요,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눅 19:9). 이 말은 ① 그가 구원의 언약 안에 예정되었던 사람이란 뜻입니다. ② 또한 하늘나라를 상속받을 기업의 후손이란 뜻입니다. ③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예수를 믿어야 될 사람이란 뜻입니다. ④ 그 일 때문에 예수께서 세상 중 여리고에까지 오셨고 ⑤ 삭개오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눅 19:9). 삭개오 개인의 구원이요, 그로 말미암은 가족의 구원이었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00아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삭개오처럼 지체지 말고 속히 내려 와 즐거워하며 주님을 영접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3. 예수님께 나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어떻게 변했는지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합니다.
“주여 보십시옵소서”라고 예수님은 인생의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주님을 구세주와 주인으로 모시는 삶으로 변화가 된 것입니다. 최고의 우선순위를 예수님께 두는 삶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땅에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선교에 같이간 목사님께서 목회하면서 어려운 점을 이야기 했습니다. 성도님들이 다른 교회로 떠나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너무 아파하지 말라고 흐르는 물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은 고여 있으면 썩습니다. 흐르면서 일을 합니다. 돌과 부딪치면서 아름다운 개울물 소리도 만들고, 돌을 나르기도 하고 가는 곳마다 나무에게 물을 주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세상 가지고 있는 것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집착했던 집도, 돈도 다 떠나는 것입니다. 사랑했던 자식도, 아내도, 남편도 떠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 다 떠납니다. 없어지고 떠난다고 그것 너무 아쉬워하고 아파할 것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실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신앙사건이란 인간이 바로 우리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신 예수님과 만나는 체험입니다.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한 삶을 실제적으로 고백하는 체험입니다. 다 죄인이라고 욕하고 모두가 떠난다 할지라도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한 삶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예수님이 주라는 사실을 실제적으로 고백하면 삭개오처럼 예수님 만나 기뻐한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 한분만으로 진정 행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해 버립니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나는 만족해 나의 모든 것된신 주님 찬양해 나의 영원한 생명되신 예수님 목소리 높여 찬양 주님의 크신 사랑 찬양해 나의 힘과 삶 변화되었네 크신 주의 사랑 찬양해". 행복을 환경이나 조건에서 얻으려 하지 마십시오. 돈을 많이 모으면 높은 지위를 누리면 깊은 지식을 얻으면 육신의 향락을 통해서 행복을 찾으려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잠시는 행복한듯 느껴질지는 모르나 우리 환경이 변하면 그 행복도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복을 누리는 선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선물을 주신 분으로 진정한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초가 삼간도 만족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초가 삼간도 나는 만족하네 값진 재물도 내겐 없지만 내게 주어진 하늘나라에 가면 내게 황금과 은만 있네 내게는 하늘 저 위에 집 있네 햇빛 비치고 찬란한 그곳 그 날이 오면 다시 방황치 않고 순 황금길을 거닐겠네 나 가난해도 외롭지 않네 천국길 가니 실망없다네 나 은혜로서 면류관 쓰며 거문고 타는 천국가네 내게는 하늘 저 위에 집 있네 햇빛 비치고 찬란한 그곳 그날이 오면 다시 방황치 않고 순 황금길을 거닐겠네 그날이 오면 다시 방황치 않고 순 황금길을 거닐겠네 내게는 하늘 저 위에 집 있네 햇빛 비치고 찬란한 그곳 그날이 오면 다시 방황치 않고 순 황금길을 거닐겠네”
둘째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합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 것을 안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진정 회개합니다.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말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사람이 도적질한 것을 고백하면 그 원주인에게 불법적으로 취한 그액수에 1/5을 보상(민5:7)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는 4배로 갚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도적질한 것이 탄로 나고 여러 사람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할 때 취하는 행동입니다.(출22:1,4)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면서도 4배로 갚겠다는 삭개오의 행동은 율법에 개의치 않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불의를 철저히 뉘우치는 행동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삶이 아니라 철저히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삶을 말합니다. 의의 경쟁을 하면 인생은 행복해 질 것 같지만 불행해집니다. 신앙생활이란 죄인임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셋째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삭개오의 변화체험은 가치구조의 전환으로 나타납니다. 8절 보세요.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합니다. 재물을 끌어 모으는 일에만 관심을 갖던 그가 이제는 재물을 나누어 주는 일을 위해 스스로 결단한 변화입니다.
나 중심에서 타자 중심의 삶으로 방향이 전환됩니다. 인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의 일로 방향이 전환됩니다. 이 세상 지향적이 아니라 내세 지향적인 삶으로 방향이 전환됩니다. 이룸의 가치에서 됨의 가치로, 가짐의 가치에서 나눔의 가치로, 그리고 지배의 가치에서 섬김의 가치로 인생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는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을 만들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남을 생각합니다. 전에는 자기만 알던 사람이 이웃을 생각하고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체험한 신앙인은 가치관이 변합니다. 가장 현격한 변화가 이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억울한 사람, 소외된 사람, 불의한 제도로 압박받는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는 우리 인간의 필요(needs)를 절대적 필요와 상대적 필요, 두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절대적 필요란 주위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에 상관없이 느끼는 필요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몹시 배가 고팠을 때 우리가 찾게되는 음식에 대한 욕구는 생명유지를 위해 나온 것이지 남보다 나아짐으로써 기쁨을 느끼기 위한 욕구가 아닙니다. 대개 생계유지에 필수적인 것들이 절대적 필요에 해당합니다. 반면 상대적 필요란 충족 순간에 주위 사람보다 낫다는 기쁨, 또는 남과 다르다는 기쁨을 느끼고 싶어하는 욕구에서 나온 필요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충족되면 행복감이 더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 사람들은 지나치게 상대적 필요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 교인이 내 교회로 수평 이동해서 내 교회 부흥되었다고 너무 자랑하고 기뻐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디에서는 간 교인들이 다 떠났다고 슬퍼하며 가슴 아파 하며 울고 있는 목회자가 있습니다. 너무 나만 주식으로 돈을 벌었다고 기뻐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디엔가 주식으로 집을 날리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예수님의 시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최고의 부자로 이름을 날렸다는 록펠러를 보십시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가난의 한 때문에 미국 석유 90%를 차지하고도 만족하지 못하여 노동자를 심하게 착취하고 끝없이 욕심을 채우려고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심한 노이로제와 소화불량, 무력감과 악몽..등으로 의사는 죽음을 준비할 것을 선언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진정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 체험을 한 것입니다. 죽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일어나 기도하는 중에 더 파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석유 부자가 되었고 질병에서 치유 받아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라는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답니다. 예수님 만나 완전히 가치관이 바뀐 것입니다. 그는 백만평이 넘는 12개 대학을 건립하였습니다. 그가 세운 대학 중에 시카코 대학은 지금까지 노벨상 52명을 배출한 명문대학입니다. 그가 일평생 4928개의 교회를 지어 하나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어느 곳에도 자기 이름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 돈은 내 돈이 아니요. 하나님이 축복으로 주신 돈이기 때문에 대학 교회 어디에도 내가 돈을 내어 지은 대학이나 교회라고 쓰지 말라고 당부하였답니다. 그는 나중에는 십일조만 관리하는 직원 40명을 별도로 두었다고 합니다. 기자는 하도 이상하여 다시 물었다고 합니다. 다른 사업가들은 돈을 빌려서라도 투자해도 안 되는 데 선생님은 십분의 일을 헌금하고도 어떻게 잘 됩니까? 그 때 그는 말하기를 그들은 겨우 보는 것이 3-4년 밖에 보지 못하지만 자신은 30-40년을 내다보고 투자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체험한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는 3천 개의 도서관을 설립했고 8천대의 오르간을 기증했습니다. 가치관이 바뀐 것입니다. 그는 "상속은 자식들의 재능과 에너지를 망치게 하는 것이다. 저 세상으로 돈을 가지고 간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세계적인 인재를 기르는 하버드 대학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만나 가치관이 바뀐 하버드 목사가 1639년 자신의 책 400여권과 작은 유산을 기증함으로 출발하여 지금은 얼마나 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까?
고아의 아버지 죠지 뮐러(George Muller)는 16살 되던 해에 절도죄로 감옥에 들어갔었고,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술과 여자, 노름 등으로 방탕한 생활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두 차례 무서운 질병을 앓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뮐러가 20살 되던 해 성경 속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놀랍게도 그의 삶에는 대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예배와 기도와 헌신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삶에 대한 새로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전 재산 13만 5천 달러의 돈을 불쌍한 고아들을 돕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애슐리에서 고아원을 세워 2천명이 넘는 고아들을 기도로 양육하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 42개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기도 했던 그는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3백 만 명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라는 시편 68:5의 말씀을 통해서 66년 동안 고아들을 양육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는 정부의 도움을 받지 않은 채 2천 명이 넘는 고아들에게 하루 세 끼를 제공했습니다. 그는 생애를 통해서 5만 번 이상 기도의 응답을 받았으며, 그 일을 통해서 15만의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세리장 삭개오처럼 변해야 합니다. 주님을 기쁨으로 영접하고 예수님을 정직하게 주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합니다.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나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 이웃 중심으로 변해야 합니다. 언젠가 가야할 영원한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현세 중심에서 내세 중심으로 가치관이 변해야 합니다. 이룸의 가치에서 됨의 가치로, 가짐의 가치에서 나눔의 가치로, 그리고 지배의 가치에서 섬김의 가치로 인생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인생을 새롭게 살고자 한다면
눅 19:1-10 / 송기성목사
옥스퍼드대학 천문학 교수였던 크리스토퍼 렌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48세 때 그 명문 대학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건축학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89세까지 영국의 대성전 53개를 설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전업을 우려했지만 그는 그의 인생을 새롭게 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한 삶을 아주 성공적으로 이룬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이가 많아도 사람은 새 길을 탐구할 수 있으며, 언제나 새 출발은 가능하다.”
언제나 새 출발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나이가 많아도 새 길을 탐구하고 인생의 변화를 추구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 사람을 꼽는다면 삭개오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여리고의 세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자였습니다. 당시 큰 세관의 책임자이며 부자였던 것으로 볼 때 그의 나이가 결코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그는 그의 안정된 삶 속에서 별로 변화될 가망도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그의 인생을 새롭게 살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성공적으로 그의 인생을 새롭게 산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서 인생을 새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열정과 감격을 마음에 품고 변화된 삶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열정을 가지고 앞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세리장이요 부자인 삭개오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고자 했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나 경제적인 재력으로 볼 때 그는 상당히 성공적인 사람처럼 살았을 것입니다. 그를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심령은 공허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사모하는 열정을 언제부터 갖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가버나움 세관의 세리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비롯하여 많은 세리들이 주님으로부터 감화를 받았던 (눅5:27-32) 것으로 볼 때 삭개오도 예수님께 대한 친근감과 호기심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하여 길에 나선 삭개오에게는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키가 너무 작고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을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왠만한 사람 같으면 그 호기심을 접고 뒤돌아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집으로 돌아가기는커녕 예수님이 가시는 방향으로 앞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들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끝내 그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에워싸고 따르는 그 많은 사람들도 삭개오에게는 더 이상 그의 시야를 가로막는 장벽이 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키가 큰 사람들도 삭개오의 시선을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삭개오의 작은 키도 예수님을 보는 데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열정을 가지고 앞으로 달려가는 사람, 위로 올라가는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인생을 새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줄 믿습니다.
다윗, 그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습니다 (시51:4). 그는 남의 아내와 간음하였으며, 그녀의 남편을 피 흘려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주의 성령을 그에게서 거두어 가시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는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갈망하였습니다 (시51:11,12).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했던 그가 자식의 반란을 당하여 피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낙심과 불안으로 가득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포자기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았습니다. 그의 영혼은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자 하나님을 사모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종일 그에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Where is your God?)라고 조롱하였지만 그는 결코 뒤로 물러나지 않고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42:5,11:43:5).아멘!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27:4)
“여호와는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107:9)
삶이 어렵고 힘들 때 낙심하고 불안해 하기 쉽습니다. 그런 때일수록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모하는 열정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난관과 장벽을 넘어서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소망이 헛되지 않음을 체험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하며 인생을 새롭게 살게 될 줄 믿습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주님을 영접하는 감격을 가지고 참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들무화과나무가 있는 곳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삭개오를 쳐다 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사실 예수님이 그곳을 지나가실 줄 알았지 그곳에 오셔서 머물러 서실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이 자기의 이름을 알고 계시며 그의 이름을 불러 주시리라고는 상상도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자기 집에 머무르시겠다고 말씀하실 줄은 꿈도 꿔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선재적인 은총입니다.
삭개오는 주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뭇 사람이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라며 수근거렸습니다. 여기서 ‘뭇 사람’이란 ‘모든 사람’(all the people)을 뜻합니다. 그 모든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예수님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기적을 보고 설교를 듣고 주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죄인의 집에 들어간 죄인으로 비난하며 수근거렸습니다. 그러나 죄인 삭개오는 서서 주님께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한 네 갑절 배상은 도둑질한 것을 시인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감격을 가지고 참으로 달라진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됩니다. 그리고 그 인생을 새롭게 살아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사울, 그는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그는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는 참으로 달라졌습니다. 그는 무엇이든지 그에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면서 그 이유를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빌3:8-9상반) 고 고백하였습니다.
요한복음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3:20에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하셨습니다.
삶이 어렵고 힘들 때 낙담하고 절망하기 쉽습니다. 신뢰하고 자랑하던 것들이 무너지기 쉽습니다. 그런 때일수록 내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영접하는 감격을 가지고 참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그리하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받고 그 인생을 새롭게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초대교회의 교부 클레멘트는 삭개오가 바로 가룟 유다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뽑힌 제자 맛디아 (행1:26) 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나중에는 가이사랴의 감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인생을 새롭게 살고자 했던 죄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새 출발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새롭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그 인생을 새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사모하는 열정을 가지고 앞으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영접하는 감격을 가지고 참으로 달라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고 간증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구원의 시각으로 거듭나라
눅 19:1-10 / 박찬길목사
오늘은 전도축제주일입니다. 성경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는데, 천하보다 귀한 여러분을 기쁜 마음으로 환영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예배 가운데 여러분의 마음에 은혜와 사랑을 부어주셔서 여러분의 삶이 복되고 형통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템플대학교를 창시자인 러셀 코웰 박사가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미국에서 백만장자로 성공한 4,043명을 조사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발견했는데 그들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목적이 그들을 백만장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으려면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구원입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건져냈다는 뜻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듯이, 죄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인간은 죄에 빠져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의 생각대로 살아갑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인데도 그것을 모르고 육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빠져 살아가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불쌍히 여기시고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원하기도 생각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16-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예수를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죄에서 건져져서 영원히 죽지 않는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크신 은혜인지 모릅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람은 누구나 육신의 생명이 끝나면 영혼이 심판을 받잖아요. 히브리서 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4:10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지옥으로 가야 할 사람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천국에 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구원은 인간이 이 땅에서 누리는 최고의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구원의 개념을 좀 더 깊이 생각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육신이 죽은 이후에 영혼이 천국 가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될까요? 너무나 좁은 생각입니다. 구원은 궁극적으로 내 영혼이 천국에 가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은 현재성이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동시에 내 마음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묻지요.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17:20-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구원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림으로 내 안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천국 가는 티켓”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분 정도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었고, 세례를 받았고,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당연히 구원 받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잘 믿어서(?) 이 수준에서 머물러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입으로 시인했으니까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이번 여름에 한국 가기 위하여 비행기 티켓을 끊어 놓고 지내다가 한국에 갈 때에 사용하는 티켓과 같은 것일까요? 한번 구원받았으면 세상에서 죄지으면서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다가, 죽을 때에 다시 찾아서 천국 가는 티켓과 같이 보장된 것일까요? 구원은 티켓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구원받는 그 순간부터 천국 열차에 올라타고 천국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내 마음에서 천국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정기적으로 나의 삶이 구원 받은 생활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은 천국과 같습니까? 아니면 천국에 가는 티켓만 가지고 있는 삶이십니까? 오늘 전도축제주일에 저와 여러분은 각자의 구원을 점검하고 확인하셔서 구원의 시각으로 거듭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삭개오는 구원의 시각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삭개오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을까요? 우리는 성경에서 삭개오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삭개오는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입니다. 2절에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당시에는 로마가 이스라엘을 통치할 때이기 때문에 로마는 총독을 세워서 세금을 부과시켰습니다. 총독은 지역마다 세리장을 두고 세금을 거두었는데, 삭개오는 여리고 지역의 세금을 걷는 책임자였습니다.
삭개오가 부자라고 했는데,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아서 부자가 되었는지, 세리장을 하면서 세금을 강탈해서 부자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부자입니다. 삭개오는 권력이 있고, 돈이 많이 있는 사람입니다.
둘째로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던 사람입니다. 3절에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되” 삭개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말씀에 권위가 있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는 소문도 들었고, 각종 질병을 고친다는 소문도 들었고, 죄인들과 잘 어울려서 바리새인들의 미움을 받는다는 소문도 들었고, 가난한 사람들과 죄인들이 그를 따르고 있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삭개오는 궁금했습니다. 누구일까?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바리새인에게 비난을 받는데도 많은 사람이 몰려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분이 마침 우리 동네로 온다고 하니까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가보니 사람들이 많이 나와서 발 디딜 틈이 없는 것입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포기할 텐데 삭개오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4절에 보면 앞으로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은 사모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로 삭개오는 자존심을 버린 사람입니다. 4절에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나갔는데 많은 사람들 때문에 볼 수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삭개오는 키가 작습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마침 돌무화과나무가 있는 겁니다. ‘아! 저기에 올라가면 되겠구나.’ 생각이 들어서 즉시 올라갑니다.
여러분, 삭개오의 결단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간다는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나 나무 위에 올라가서 보는 것이지,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어른이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삭개오가 자존심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잠시 뒤에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삭개오를 쳐다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삭개오의 이름도 알고 계셨습니다. 삭개오는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예수님의 지나가는 모습만 보려고 했는데,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도 불러주시고 내 집에 가시겠다고 하니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6절에 보면 즐거워하며 영접했다고 기록합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데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집에 모신 이후에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가 두 가지 폭탄선언을 합니다. 하나는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누구의 것을 속여서 떼먹은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다.”는 것입니다. 이 선언은 두 가지 해석이 있어요. 하나는 “내가 많이 떼어 먹었기 때문에 4배로 갚겠다.”라는 해석이 있고 “나는 떼먹은 것 없이 정직하게 일했지만, 만일 내가 누구의 것을 떼먹은 것이 있으면 4배로 변상하겠다.”라는 해석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해석이 괜찮은 것 같아요? 문맥상으로 보면 후자의 해석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도둑질한 것을 세상에 환원하겠다. 4배로 내놓겠다는 것은 자랑거리가 못됩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삭개오가 만일 그렇게 말했다면 사람들이 비아냥거렸을 것이고, 삭개오의 마음을 다 아시는 예수님도 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 앞에서 정직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한 푼도 떼먹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세리장이기 때문에 당연히 떼먹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정직하게 일했습니다. 내가 만일 누구의 것을 떼먹은 것이 있으면 4배로 변상하겠습니다.” 이 말을 예수님이 들으시고 9절에서 “오늘 이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서 정직하게 양심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 삭개오가 언제 거듭났습니까?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신 이후였습니다. 성경에는 삭개오의 집에서 예수님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삭개오는 예수님을 모시고 교제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천국에 가는 티켓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중심에 모시고 날마다 순간마다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반복해 말씀드리지만 구원은 예수님을 내 마음에 보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구원은 예수님을 모시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주님과 대화하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공급받으면서 친밀하게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구원을 천국에 갈 때에 사용하는 티켓 정도로 생각하시면 신앙생활의 심각한 문제가 발생됩니다. 예수님을 의식하지도 않고 예수님과의 교제도 없습니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습니다. 기껏 해야 급한 일이 있을 때에 예수님을 찾을 정도입니다. 죄책감에 눌리거나 병들었을 때에 예수님의 보혈로 치료받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입니다. 사업이 어려우면 예수님을 의지해서 사업이 잘 되게 하는 정도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예수님을 완전 물건 취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삶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부르짖어도 대답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했다고 말은 하지만, 나는 구원받았다고 확신을 갖고 있지만 부부 관계가 변하지 않습니다. 직장생활이나 사람들과의 관계가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원수이던 사람이 여전히 원수입니다. 단지 교회에 와서 예배만 드리는 사람에 불과할 뿐입니다.
기도를 시키면 잘합니다. 봉사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가정이나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합니다. 예수 믿어도 여전히 돈이 좋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화끈하게 놀아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급한 일만 생기면 다시 찾아옵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나중에 어떤 문제가 생깁니까? 천국 가야 할 그 중요한 순간에 아무리 예수님을 찾아도 주님이 찾아지지가 않게 됩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가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통하여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과 교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주님의 마음이 내 마음에 들어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보혜사이지요. 보혜사는 돕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나는 죄인입니다. 나에게는 주님이 필요하다고 고백하면 성령께서 내 안에 임재하시는 거예요. 성령께서 내 마음에 들어와서 내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되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연애하고 사랑하면 그 여자가 내 마음에 들어옵니다. 그 남자가 내 마음에 들어옵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좋은 겁니다.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생각만 하면 만나고 싶은 겁니다. 사랑에 빠진 것이잖아요.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와서 내가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과 생각이 바꾸어지고, 삶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가정생활이 달라지고 직장생활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나의 삶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해지니까 구원의 시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와 미국에 있을 때의 보는 눈이 다릅니다. 결혼하기 전에 보는 시각과 결혼 후에 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아이가 생기기 이전과 임신한 이후의 시각이 다릅니다. 구원을 받기 이전과 구원을 받은 이후의 시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입으로만 시인하고, 구원을 천국에 가는 티켓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이 무겁습니다. 의무감에서 하게 됩니다. 교회에 또 가야 되나? 헌금을 해야 하나? 왜 이렇게 일이 많아.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힘이 듭니다.
그런데 구원을 티켓이 아니라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으로 교제하는 사람들은 의무감을 뛰어 넘습니다. 율법을 초월합니다. 삭개오처럼 자기 재산의 반을 나누어주겠다고 말하게 됩니다. 도둑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행여나 잘못된 것이 있으면 4배로 값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삭개오의 마음인가요?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하면 나에게 이러한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주님과 교제하면 붙어있기 때문에 영적인 생명을 계속해서 공급받아서 내 안에 주님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찬양대가 찬양했던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나의 삶에서 나도 모르게 저절로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미운 사람이 밉게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전에는 불편하던 사람이 불편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랑스러워집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이 몰라서 그렇지. 불쌍해 보입니다. 그 사람을 감싸는 마음이 듭니다. 세워주게 됩니다. 주님과 나와 친밀함을 통해서 나타나는 구원의 시각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이러한 시각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이 우리 육신의 생명이 다하는 날 부르시면 ‘할렐루야’ 하면서 궁극적인 천국에 들어가면서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신학교 2학년 때인 22살에 처음으로 부흥회 강사로 섰습니다. 영적인 실력으로 보나 학문적인 실력으로 보나 부흥회 강사로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겨우 신학대학 1학년을 다녔는데 설교학을 배우지도 않았고, 여러 성도들을 놓고 설교한 경험도 없고, 그렇다고 화술이 뛰어 난 것도 아니고 이렇다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오라는 겁니다.
그것도 삼일 동안 부흥회를 하는데 첫날에 하라는 겁니다. 둘째 날은 김성일 장로님으로 유명하신 분이고, 셋째 날은 그 분보다 더 유명하신 분입니다. 첫날 설교를 잘못하면 그 다음 날부터 오지 않거든요. 부흥회 강사로 가면 첫날 굉장히 신경이 쓰입니다. 그런데 첫날 하라는 겁니다. 얼마나 당황되든지 앞이 캄캄했습니다.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어떤 설교를 해야 하는지 도무지 영감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방법이 없지요. 날마다 기도하는데 어느 날은 무난한 설교를 하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일 무난한 설교가 사랑 설교입니다. 사랑 설교는 누구나 은혜를 받게 되어 있어요. ‘어둠을 깨우는 사랑’이라는 주제로 설교하기로 했습니다. 당시에는 컴퓨터 시대가 아니었기에 일일이 손으로 적어야만 했습니다. 이 책 저 책을 보면서 사랑에 대해서 자료를 수집했고 원고지에 적기 시작했습니다. 말이 설교지 편집하는 겁니다.
며칠을 고민하면서 원고를 마감했습니다. 그 이후로 원고를 들고 다니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성령을 의지했습니다. 강단에 서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왔는지 예배당을 가득 메웠습니다. 어디를 보고 설교해야 될지 몰랐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정신이 없었습니다. 성령을 의지하고 원고대로 하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담임목사님과 몇 분의 장로님이 자리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르고 했으니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1시간의 설교를 마쳤는데 얼마나 기쁘고 평안이 오는지 성령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성도들이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좋아하셨습니다. 의례히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고 고백하는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일할 때마다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27년 전에 공급하신 하나님이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들에게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으신 분입니다. 변함없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 주셨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에게 매순간순간마다 역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고, 주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중에 천국에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천국은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주님과 친밀한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지옥은 어떤 사람이 갈까요? 악한 사람이 갈까요? 아니요. 악한 사람 중에 천국에 간 사람이 많습니다. 지옥은 생명의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이 가는 곳이고,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진 사람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곳에 가고 싶으십니까? 천국에 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천국에 가기 위해서 이 시간 주님께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모시면 성령께서 이 시간부터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생각을 넣어주십니다. 지혜를 넣어주시고, 지식을 넣어주시고, 생각나게 해 주시고, 부족함을 채워주시고, 넘어졌을 때에 세워주시고, 쓰러졌을 때에 일으켜 세워주시고, 방향을 잃었을 때에 방향을 찾게 해 주십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인지 깨닫게 해 주십니다.
전도축제주일에 저희 교회를 찾아주신 여러분, 또 좋은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반드시 믿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형통해지고 예수를 안 믿으면 어려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도 질병에 걸릴 수도 있고 예수를 안 믿어도 질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목적은 이 땅에서 잘 되고 형통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목적은 구원의 시각을 소유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원받은 시각으로 거듭나서 이 땅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하기 위해서입니다. 나중에 주님께서 부르실 때에 영원한 천국에 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세주로 영접하십시오. 입으로 시인하십시오.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햇빛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와 복을 충만히 받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원의 시각으로 거듭나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서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신앙생활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예배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이 주님과 가까워져서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능력을 공급받아서 근사한 삶을 살아가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내가 네 집에 유하리라,전도
눅 19장 1~10절 / 김광일목사
월간 ‘좋은 생각’에 실린 어느 간호사가 쓴 “어머니의 손가락”이라는 글입니다. “몇 년 전 간호사로 일할 때였다. 아침에 출근해보니 아직 진료가 시작되기 전 이른 시간이었지만 모녀로 보이는 스물다섯 쯤 되어 보이는 젊은 아가씨와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주머니가 두 손을 꼭 마주잡고 병원 문 앞에 서 있었다. 업무시작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두 모녀는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작은 소리로 얘기를 주고받기도 했고 엄마는 연신 딸의 손을 쓰다듬고 있었다. 다소 긴장된 그러나 따뜻한 미소를 보내며 위로하고 있었다. 잠시 후 원장 선생님이 오시고 두 모녀를 진료실로 안내했다. 진료실로 들어온 아주머니는 원장님께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얘가 제 딸아이예요. 옛날에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외가에 놀러갔다가 농기구에 다쳐서 왼손 손가락이 모두 잘렸어요. 다행이 네 손가락은 접합 수술에 성공했지만 네 번째 손가락만은 그러질 못했어요. 다음 달에 우리 딸이 시집을 가게 됐어요. 사위 될 녀석이 괜찮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디 그런가요? 이 못난 어미 때문에 어린 마음에 상처를 많이 줬지만 그래도 결혼반지 끼울 손가락 주고 싶은 게 이 못난 어미바람이에요. 그래서 말인데 늙고 못 생긴 손이지만 제 손가락으로 접합수술이 가능할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막히는 듯 했다. 원장 선생님도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두 모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참 후 원장 선생님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그렇게 대답했다. ‘그럼요. 가능합니다. 예쁘게 수술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모녀도 울었고 나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딸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십자가를 지시러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위해 여리고를 지나시던 예수께서 그 어느 누구에게도 따뜻한 시선 한번 받지 못했던 한 사람을 주목하시고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바로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의 뜻은 ‘순결하다, 의롭다’입니다. 부모가 순결하고 의롭게 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세리가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가 유다를 통치하던 시대이기에 세무 공무원은 로마의 앞잡이, 매국노라고 욕을 먹었습니다. 세리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고 악독한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들과 식탁을 같이 하거나 그의 집에 들어가는 것 또한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삭개오는 물질적으로는 부요했으나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지위와 권력이 있었지만 기쁨이 없었습니다. 항상 자신의 직업과 행동에 대하여 죄의식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이러한 삭개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향하여 “내가 너의 집에 유하리라” 즉 ‘내가 너의 집에서 머물겠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 이상 삭개오의 불행은 계속되지 않았습니다. 고통은 계속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였습니까? 본문을 통해 우리는 삭개오의 모습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가 과연 어떻게 하였기에 예수를 모시는 은혜를 입었습니까?
첫째로 좋은 소식을 들어야
2010년 칠레의 산호세 광산이 붕괴되어 33명이 갱도에 갇혀 있다가 69일 만에 전원 무사히 구출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세계적 뉴스거리였습니다. 한 편의 휴먼 드라마였습니다. 2015년 터키 지진 때는 집이 붕괴된 지 8시간 만에 9세 소년이 구출되었습니다. 47시간 만에 생후 2주된 아기가 구출되었습니다. 108시간이 지난 다음에 13세 소년이 구출되었습니다. 이런 생명의 소식에 세계가 흥분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소식은 언제나 좋은 소식입니다. 생명을 얻은 소식은 누구에게나 흥분이 됩니다. 온 천하의 온갖 소식도 생명보다 못합니다. ‘죽은 줄 알았더니 살아 있었구나’라는 말보다 더 흥분되는 말은 없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습니다. 언제나 가장 좋은 소식은 생명과 관계되는 소식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여기 '보고자 하되'는 ‘보기를 열망하되, 간절히 사모하되’라는 뜻입니다. 삭개오는 예수 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예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실뿐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신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보기 위하여 길에 나갔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각자 기다리는 소식이 있습니다. 취업을 원하는 자는 취업했다는 소식이고, 수험생들에게는 합격의 소식이고, 주식 투자자는 주가상승의 소식이며, 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는 치유되었다는 소식입니다. 기독교는 복된 소식의 종교입니다. 죄의 종노릇하던 나를 살리기 위하여 예수께서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소식 즉 복음입니다. 이 소식을 믿음으로 받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죄에서 해방이 됩니다. 삭개오가 들은 소식은 바로 이 복음이었습니다. 자신을 구원하는 소식이 되었습니다. 구원의 좋은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이미 좋은 소식을 듣고 교회에 오셨습니다.
둘째로 좋은 만남을 가져야
‘미스터 탁’ 서종현 선교사는 힙합을 통해 CCM 음악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킨 청소년 사역자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있었고,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었지만 늘 문제아였습니다. 중학교 시절, 교사의 불합리한 체벌에 불만을 품고 삐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싸움 중 칼에 찔리는 일을 당하기도 했고 군대에서도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입대 첫날 문제를 일으킨 그는 ‘단체생활 부적응, 정신과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요한다’는 이유로 퇴소를 당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입원한 병실에서 그는 매일 생각했습니다. “산다는 게 무얼까? 죽음은? 천국은 어떨까? 지옥은?” 그러다가 어린 시절에 심어진 복음의 씨앗이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에게 상처가 있지만 일어나라. 너의 상처로 이 땅의 청소년들을 살릴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만남으로 소외된 청소년들에게 천국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쓸모없이 버려진 자신을 힙합 뮤지션으로, 선교사로 재활용해주신 예수의 사랑에 힘입어 방황하는 청소년, 특히 소년원 원생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나는 쓰레기였습니다. 그래서 재활용의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나를 낫게 했고 나를 먼저 변화시켰습니다. 분노의 마음을 치유하고 사랑으로 채울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을 만나는 것뿐입니다.”
본문 5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키가 작은 삭개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있는 예수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예수를 만나고자 하는 열망으로 무화과나무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을 부르시는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부르심에 기쁨으로 내려와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지만 예수는 삭개오의 집에 머무르시며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과거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의 집에 머무시며 죄와 절망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예수께 나아오는데 장애물이 있습니까? 그 장애물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핸디캡을 넘어야 합니다. 환경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를 만나야 영혼의 안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좋은 결단을 하여야
미국의 40대 대통령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의 어린 시절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구두를 사러 양화점에 갔습니다. 주인아저씨가 “앞이 둥근 것과 각진 것 중 어떤 구두가 마음에 드느냐?” 라고 묻자 레이건은 살펴보기만 할 뿐 결정을 못했습니다. 결국 구두를 맞추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습니다. 며칠 후 다시 양화점에 갔지만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주인아저씨가 “알았다. 내가 너의 맘을 알았으니 내가 지어주는 대로 구두를 신으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구두를 찾으러 갔는데 한 쪽 구두는 둥글고 다른 한 쪽은 네모지게 만들어 짝짝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레이건은 구두가 왜 짝짝이가 되었는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아저씨는 “결정할지 모르는 아이에게는 이 신발을 신겨야 한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레이건은 그 때 머릿속에 결정할지 모르는 사람의 신발은 짝짝이라는 교훈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 후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마다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 대통령에 당선되어 정치가로 성공했습니다. 결단을 내리는 것은 중요합니다. 좋은 결단은 속히 내려야 합니다. 담배를 끊겠다고 결단하지 못해 암에 걸리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술을 끊겠다고 결단하지 못해 알코올 중독에 빠지기도 하고, 도박을 끊겠다고 결단하지 못해서 재산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속히 결단하고, 결단한 대로 행동에 옮길 때 더욱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속히 내려오라는 예수의 말씀에 삭개오는 급히 내려왔습니다. 삭개오의 결단은 좋은 결단이었습니다. 신앙적 결단은 급할수록 좋습니다. 뒤로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증거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사람이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 수가 없도다.”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받아야 할 시간입니다.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집에만 모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전 존재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결단을 속히 내려야 합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결단을 통하여 삭개오처럼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회개한 삭개오를 향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삶의 방향이 바뀌어지는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서양연극 중에 생명이 불과 15분밖에 남지 않은 청년을 주인공으로 하는 ‘단지 15분(Just Fifteen Minutes)’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총명한 젊은 청년이 대학을 마치고 결혼을 앞두고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해 놓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슴에 통증을 느껴 병원에 찾아갔는데 시한부 인생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심지어 남은 시간도 단지 15분뿐이었습니다. 그는 망연자실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15분, 14분, 12분, 11분이 지나갑니다. 그때 병실에 한 통의 전보가 날아들었습니다. “억만장자였던 삼촌이 돌아가셨습니다. 재산을 상속할 사람은 당신뿐이니 속히 상속절차를 밟아주십시오.” 죽음을 앞둔 그에게 재산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몇 분 남았느냐고 묻는 시간에, 시계는 생명이 10분, 9분, 8분이 남았음을 가리킵니다. 그 때 또 하나의 전보가 도착했습니다. “당신의 박사학위 논문이 최우수 논문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축하전보 역시 아무 위안이 되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생명이 7분, 6분, 5분, 4분 남았음을 가리키는데 또 하나의 전보가 날아왔습니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연인으로부터 온 결혼 승낙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전보도 시계를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3분, 2분, 1분이 지나면서 결국 청년은 숨을 거두는 것으로 연극은 끝이 납니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즈음에는 시간이 불과 15분처럼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가치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삭개오는 예수를 만남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좋은 구원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를 만나는 좋은 만남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영접하는 좋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아직 예수를 영접하지 않으셨다면 지금 예수께로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예수를 모시고 기쁨으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룩한 불만족을 해소시키려면
눅 19장 1~10절 / 송기성목사
미국 시카고에 있는 윌로우크릭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거룩한 불만족’ (holy discontent)이란 말을 보편적인 용어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2005년 윌로우크릭 리더십 서밋 10주년 대회에서 거룩한 불만족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대부분의 참석자가 목회자인 이 대회에서 그는 거룩한 불만족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러분은 거룩한 불만족을 지니고 있습니까? 거룩한 불만족으로 인해 마음이 무너진 목사들이야말로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지닐 수 있습니다. 교회는, 목회자는, 크리스천들은, 세상을 보며 거룩한 불만족을 가져야 합니다.”
예, 오늘의 교회와 목회자들과 크리스천들은 세상을 보며 거룩한 불만족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에 앞서 자기 자신을 보며 거룩한 불만족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이 무너질 정도로 거룩한 불만족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불만족을 가질 뿐만 아니라 거룩한 불만족을 해소시켜야 합니다. 그리할 때 자기 자신을 변화시켜 주시고 세상도 변화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누가복음 19:1-10의 예수님과 삭개오에 대한 말씀을 통해 자기 자신이 겪고 있는 거룩한 불만족을 속 시원하게 해소시켜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예수님은 열망하는 호기심을 품고 전진하는 사람에게 인격적인 만남을 갖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거리를 지나가실 때였습니다. 그 도시에 삭개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였습니다. 삭개오 (삭카이오스)는 ‛청결한 사람’, 또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이름만큼 청결하지도, 의롭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리를 ‛허가낸 도둑’이라고 했습니다. 허가낸 도둑으로서 삭개오는 큰 권력과 많은 제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상적으로 그는 성공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정하고 불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명무실한 자기 자신에 대해 거룩한 불만족을 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룩한 불만족을 가진 삭개오, 그는 예수님이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하셨습니다. 그러자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사실 당시 삭개오에게는 일종의 열등감과 대인기피증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외감과 고립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예수님을 보고자 열망하는 호기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키가 작고 사람들이 많아 할 수 없었지만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앞으로 달려갔으며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아무도 열망하는 호기심을 품고 전진하는 그를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인격적인 만남을 갖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의 열등감과 고립감과 소외감 등 모든 불만족과 거룩한 불만족을 아주 만족하게 해소시켜 주셨습니다.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인 폴 스톨츠 (Paul Stoltz)박사가 1997년 <역경지수> (AQ:Adversity Quotient), ‛장애물을 기회로 역전시켜라’라는 책을 통해 ‛역경지수’ 이론을 제창하였습니다. 역경지수란 무엇인가? 그는 어떠한 고난과 위기와 역경 가운데서도 좀처럼 위축되지 않고 자신이나 공동체가 꿈꾸는 목표의 완성을 향하여 뜨거운 열정과 남다른 끈기를 가지고 도전해 나가는 지구력이라고 말한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일수록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집념과 어떤 위험도 긍정적으로 감수하고자 하는 낙관주의가 확립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는 역경에 대처하는 모습을 등반에 비유하여 퀴터(Quitter), 캠퍼(Camper), 클라이머(Climber)라는 세 가지로 유형화하였습니다. 첫째, 역경지수가 낮은 퀴터는 산에 오르다가 힘들거나 장애물을 만나면 등반을 포기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둘째, 캠퍼는 등반하다가 직면한 장애물이나 어려움 앞에서 뚜렷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현상유지 정도로 적당히 안주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기업을 예로 들 때, 조직 내 약 80%의 구성원들이 캠퍼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역경지수가 높은 클라이머는 역경이 오더라도 자신의 모든 능력과 지혜를 동원하여 기어코 이를 이겨내려고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클라이머는 캠퍼인 동료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우면서 함께 역경을 헤쳐나가려고 하는 의욕도 가지고 있습니다. 폴 스톨츠 박사는 높은 역경지수를 지닌 사람들의 특징을 세 가지로 보았습니다. ①그들은 역경이나 실패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비난을 돌리지 않는다. ②그들은 역경이나 실패가 자신 때문에 생겼다고 스스로 비난하거나 비하하지 않는다. ③그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들을 얼마든지 해결하고 해쳐나갈 수 있다고 낙관적으로 믿는다. 그래서 그는 지능지수(IQ)도 중요하고 감성지수(EQ)도 중요하지만 인생이란 어쨌든 수 없이 많은 역경들을 헤쳐나가느냐의 문제이므로 지성과 감성을 총동원하여 이 역경을 넘어가는 역경지수를 높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29:11-13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온 맘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만나 주십니다. 하나님께 와서 부르짖는 사람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평안을 주시고 미래와 희망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보고자 열망하는 호기심을 품고 전진하는 사람에게 인격적인 만남을 갖게 하십니다. 그리고 거룩한 불만족을 해소시켜 주십니다. 열망하는 호기심을 품고 전진하는 사람은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입니다.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은 어떤 난관이나 장애물에 직면해도 결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향해 열망하는 호기심을 품고 역경을 돌파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갖고 평안과 미래와 희망을 받으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은 회개하는 신앙심을 품고 행동하는 사람에게 즉각적인 구원을 받게 하십니다.
삭개오가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보고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라며 수근거렸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서서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갑겠나이다’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라며 자기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삭개오를 비판하고 시기하였으며, 예수님을 비난하고 불신하였습니다. 그러나 큰 기쁨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삭개오의 태도는 그들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거룩한 불만족을 가진 삭개오, 그는 예수님을 ‛주님’ (Lord)이라고 호칭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저가’(this man)라고 하며 무례하게 혹평한 사람들과는 아주 다른 신앙적인 고백을 한 것입니다. 돌무화과나무 위에 숨어 있던 삭개오는 이제 ‛주여, 보시옵소서’라며 주님께 자기를 보아주시기를 원하며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사오며, 그가 부당하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갈취한 것은 네 배로 갑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죄악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삭개오의 회개하는 신앙심에서 비롯된 삶의 변화를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삭개오의 고백에 대해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그 사람이야말로 참된 믿음의 소유자라고 인정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신앙심을 품고 행동하는 그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하심으로써 즉각적인 구원을 받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허가낸 도둑 삭개오의 죄책감과 수치심과 불안감 등 모든 불만족과 거룩한 불만족을 아주 만족하게 해소시켜 주셨습니다.
2011년 ‛서바이벌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에서 윤복희의 ‛여러분’을 열창하여 모든 이들의 가슴을 울리고 결국 눈물을 흘리게 한 뒤 기립박수를 받은 가수 임재범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990년대 후반 정신적인 고통이 절정에 달해 아주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우울증이 심했던 그는 그 당시를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불안이 엄습해 왔고 매일 죽음만 생각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심각한 생활고까지 겹쳐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고 합니다. 전기요금을 낼 돈이 없어 밤에는 모든 전원을 내렸고, 수도요금을 아끼려고 씻지도 않았으며, 급기야 길에 버려진 담배꽁초를 주워 피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폐인생활을 하던 중 우연치 않은 기회에 성경을 접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정신적 회복을 위해 성경을 그의 곁에 두고 일독을 권했습니다. 한때 불교 등 다른 종교에 심취했던 적이 있었지만 그는 아내가 시키는 대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푹 빠져 살게 되었고 결국 하나님의 평안을 경험하게 되었다면서 ‟우울증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종교적일 수 있다” 며 ‟하나님을 향한 믿음 하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2011년 12월 그는 KBS ‛승승장구’ 프로그램에서 6년 동안 심각한 우울증과 조울증을 앓았다면서 인생의 나락에 떨어졌을 때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들어 결국 다시 희망을 되찾게 되었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역대하 7:14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에게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않게 하시거나 메뚜기가 토산을 먹게 하거나 전염병으로 망하게 하십니다(대하7:13).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고, 자신을 낮추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들의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의땅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는 신앙심을 품고 행동하는 사람에게 즉각적인 구원을 받게 하십니다. 그리고 거룩한 불만족을 해소시켜 주십니다. 회개하는 신앙심을 품고 행동하는 사람은 변화지수가 높은 사람입니다. 변덕지수, 변질지수가 아니라 변화지수가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하는 신앙심을 품고 행동함으로써 변화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허가낸 도둑이 아니라 죄인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주님께로부터 즉각적인 구원을 받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받게 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중국의 노자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 이상의 불행은 없다”고 했습니다. 인생의 불만족이 최악의 불행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불만족은 불행의 원인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역설스럽게도 불만족이 없으면 회개와 변화도 없고, 도전과 성취도 없습니다. 따라서 불만족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별로 거룩한 불만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리와 죄인들은 거룩한 불만족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즉각적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거룩한 불만족을 가진 죄인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열정적인 호기심을 품고 전진함으로써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역경의 클라이머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신앙심을 품고 행동함으로써 즉각적으로 구원을 받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거룩한 불만족을 말끔하게 해소시켜 주시는 주님의 은총 안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운’ (빌4:11)행복한 성도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약점이 있는 사람들
눅 19장 1~10절 / 박영규목사
사랑하면 약점이 안 보입니다. 사랑하면 약점을 감춰줍니다. 미워하면 약점만 보입니다. 오늘은 약점을 극복한 사람들이 성공한 사례를 소개해 드려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1. 노아
노아는 술 취해 벌거벗고 잘 정도로 약점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자녀들을 인류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창6-8장)
2.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자신의 목숨을 위해 부인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 [아비멜렉]이나 이집트 왕 바로가 사라를 범하려 하자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막으셨습니다.
3. 모세
모세는 살인자요 수배자였습니다. 그런 모세를 광야 40년 연단 후 하나님께서 시내 산 가시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쓰셨습니다. 말주변이 없는 사람인 모세를 위해 하나님께서 형 아론을 세우셨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십계명을 받고 내려와 보니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절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돌 판을 던져 깨 버린 성격이 과격한 모세를 하나님께서 요단강 까지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쓰셨습니다.
4. 다윗 왕
17세의 나이 어린 다윗이 양떼를 목숨 걸고 지키는 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다윗을 17세에 사무엘을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베들레헴 집으로 보내셔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며칠 후 이스라엘을 침략한 블레셋의 골리앗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게 하셨습니다. 인구조사해서 하나님보다 군사력을 의지한 다윗을 회개의 제사를 통해 용서하셨습니다.
5. 삭개오
본문에 등장하는 여리고의 세리 장 삭개오가 키가 작아 예수님을 뵙기 위해 뽕나무에 올라갔다가 예수님을 만나 뵙고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하루 밤을 머무시는 축복과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눅19장) 삭개오는 죄인이며 키가 작은 약점이 있는 사람인데 예수님을 뵈려고 체면불구하고 뽕나무에 올라갔다가 뜻밖에도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게 되었으며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6. 바울을 쓰신 하나님
스데반 집사가 예루살렘에서 순교 할 때 돌 던지는 자들의 옷을 지킨 주동자요 핍박 자 사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부르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귀하게 쓰셨습니다. 바울은 몸의 가시인 안질과 간질이 있었다고 전승으로 전해내려 오고 있습니다.
7. 예수님
예수님은 족보상 나사렛 목수 요셉의 아들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인물이 나겠느냐 라고 사람들이 여길 정도로 나사렛 예수님을 사람들이 비하하였지만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에서 일어나 걷게 되고 고넬료의 집에서는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 이십니다.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8.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
링컨은 켄터키주(州) 호젠빌 출신입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노동을 하였기 때문에 학교교육은 거의 받지 않았지만, 독학하여 1837년 변호사가 되어 스프링필드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였으며, 1834~1841년 일리노이 주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847년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861년 3월 4일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재선에 성공하였고 미국을 남북통일 하였습니다. 출처-[네이버지식백과]에이브러햄링컨[Abraham Lincoln] (두산백과)
링컨은 얼굴이 말라 어떤 소녀의 편지를 받고 수염을 기르게 되어 이미지가 더 좋게 되었다고 합니다.
9. 나폴레옹
1812년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의 초상화는 오른손을 조끼 속에 넣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전쟁터를 다니며 오랫동안 말 위에서 급하게 식사하는 바람에 만성적인 위통과 변비로 고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통증을 가라앉히려고 조끼 단추를 풀고 배를 문지르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출처]네이버 나폴레옹의 위장병/작성자크리스탈] 나폴레옹은 위장병을 앓으면서도 프랑스를 위대한 국가로 만드는데 기여를 했습니다.
10. 베토벤- 독일출신 1770.12.17.~1827.03.26
베토벤은 독일의 클래식작곡가로, 바흐, 모차르트와 함께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작곡가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세계 음악사에서도 손꼽히는 존재이며, 악성(樂聖)으로 불립니다. 그만큼 현재까지도 큰 영향력과 명성을 가졌습니다.
게다가 음악가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청각장애를 딛고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기 때문에 불굴의 의지와 인간승리를 상징하는 인물로 유명하며, 그의 음악에서도 이러한 고뇌와 인생 역정의 분위기가 잘 드러납니다. 또한 당시 독일 민족의 열등감을 해소시킨 거인과 같은 존재이자 빈 청중들의 자랑이었습니다.
베토벤은 이 귓병 때문에 유서를 쓸 정도로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그럴 만도 한 게 음악가에게 청각장애라는 질병은 사실상 사형선고에 해당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무렵 친구들 기록을 보면 표정이 너무나도 어두워졌고 말수가 적어졌으며 사람 만나기를 꺼리며 엄청나게 괴로워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하일리겐슈타트로 가서 쓴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는 베토벤 사후에 발견되었으나 유서를 썼다고는 해도 자살을 기도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그러나 유서를 쓴 후 자신에게 주어진 음악적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고 새롭게 결의한 베토벤은 그 후로 걸작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1802년에는 2번 교향곡을, 이듬해에는 오라토리오 "감람산의 예수 그리스도"를 작곡했습니다. "감람산의 예수 그리스도"에서는 사망을 눈앞에 두고 고뇌하는 예수의 모습이 귀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고뇌하던 베토벤의 절절한 모습과 묘하게 중첩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출처]-네이버, 나무위키.
베토벤은 시력과 청각이 약한데도 이를 극복하며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11. 프랭클린 루즈벨트[1882.1.30 ~ 1945.4.12.]
미국의 32대 대통령으로 4선한 대통령이며 1921년 39세에 소아마비를 앓아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임에도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어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루즈벨트는 1932년 대통령 후보가 되어 뉴딜 정책을 발표하여 1929년 이후 미국의 경제 대공황을 극복하였습니다.
1941년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승전하였으며, 1943년11월27일 카이로선언(Cairo Declaration,1943.11.27)에서는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승인할 것을 결의하여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보장을 받았습니다.
얄타회담(Yalta Conference,1945.2.) 등의 연합국 회의에서 전후 처리문제 등에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였고, 전쟁종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얄타회담에서 전 후 한국을 일정기간 신탁통치 할 것에 합의하여 분단의 원인을 초래했습니다. 1944년 네 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국제연합구상을 구체화하는 데 노력하였으나, 1945년 4월 세계대전의 종결을 보지 못하고 뇌출혈로 사망하였습니다.
12. 조용기 목사님
조용기 목사님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부족한 면도 많지만 그래도 과보다 공이 더 많다고 생각을 합니다. 조목사님은 중학교 중퇴의 학력으로 독학을 해서 영어로 유창하게 설교를 하고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조목사님은 청년시절 폐병으로 각혈을 하며 사경을 헤매다가 성령을 받고 병을 고침 받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13. 스티븐 호킹 박사
(1942년출생-2018, 3월 14일) 호킹 박사는 1963년 손가락 외엔 전신을 거의 움직일 수 없는 [루게릭]병을 앓기 시작하였으며 1979년부터 케임브리지대학교의 루카시언 석좌교수를 지냈습니다. 1985년 폐렴으로 기관지 절개수술을 받은 뒤로는 가슴에 꽂은 파이프를 통해서 호흡을 하고 휠체어에 부착된 고성능 음성합성 장치를 이용하였는데, 병의 진행에 따라 처음에는 손가락을 사용하다가 나중에는 눈썹의 움직임이나 뺨의 움직임, 마지막에는 동공 추적을 통한 음성 변환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하였습니다.
병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우주 천체물리학의 권위자로 살아생전 빅뱅과 블랙홀의 연구와 이론으로 세계 우주 천체 물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루게릭병으로 1~2년밖에 더 살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으나 이후 55년을 더 살면서 역경 속에서도 연구 활동을 계속하였고, '갈릴레오 갈릴레이-아이작 뉴턴-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계보를 잇는 물리학자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네이버 지식백과] 스티븐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두산백과)
14. 3,6등급을 받은 목사님 아들
서울시 장애인 봉고차를 운전하는 B목사님께 전화가 왔는데 아들이 3,6등급을 받아 걱정이라며 한 숨을 쉬시더니 지방 중소도시에 있는 대학 2군데에 원서를 냈는데 학비와 하숙비가 걱정이고 노는 것을 좋아해 아버지를 떠나 객지에 살면 걱정이 된다고 저와 상담을 하고 기도를 마친 20여 분 후 고려대에서 합격 통지를 10분 전에 받았다고 합격통지서를 카톡으로 찍어 보내와 축하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상의도 안하고 고대에 원서를 내고 면접을 봤다는데 아버지를 도와 방학 때는 장애인을 방문해서 청소와 목욕봉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고대 시험관(면접관)교수님이 이를 높이 평가해서 점수는 낮아 곤란한데 인성이 좋다고 합격을 시켜줬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영성, 인성, 지성을 겸비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이웃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5. 헬렌 켈러
헬렌 켈러 (Helen Keller|Helen Adams Keller)사회사업가[ 1880년 6월 27일생-1968년 6월 1일] 수상경력 1964년 자유의 메달 1952년 레지옹도뇌르 훈장 관련정보 네이버[지식백과] -미국의 작가 겸 사회사업가 / 헬렌 켈러는 시력, 청력을 잃고 말도 할 수 없는 3중고를 겪으면서 비관도 했지만 설리번 선생님을 만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16.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이 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통령을 역임한 분들입니다.
17. 세계적인 축구선수 호날두[Cristiano Ronaldo]
호날두는 성이고 이름은 크리스티아노인데 그 의미는 스페인어로 기독교인이라는 뜻입니다. 호날두는 1985년 2월 5일, 2남 2녀 중 막내 아들로 포르투갈에서도 가장 가난한 작은 섬마을 '마데이라 푼샬 근교 산투안토니우'의 빈곤층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Cristiano Ronaldo dos Santos Aveiro.마데이라 제도는 어업이 중심인 대서양의 외딴섬으로 특히 호날두의 가족은 정부에서 가장 싼값에 빌려주는 아파트에 살았습니다.
당시 호날두는 두 명의 누나와 한 명의 형과 같은 방을 썼는데 겨울에는 매우 추웠고, 여름에는 천장에서 비가 새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형은 마약 중독자였습니다. 청소부였던 모친이 생계를 꾸렸습니다. 지금은 당당한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는 호날두지만, 어린 시절에는 제대로 먹지 못해 ‘말라깽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호날두가 축구를 시작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어느 날 빈민가 놀이터에서 혼자 흙장난을 치던 호날두는 멀리서 축구를 하는 동네 친구들을 발견했습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호날두는 축구를 함께 하지 못했지만 우연히 날아온 축구공을 찼을 때 희열을 느꼈고, 어머니를 졸라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호날두가 힘들어 할 때 호날두의 아버지는 호날두에게 오직 약한 사람만 포기를 하는 법이라며 호날두를 달랬고 지금까지도 호날두는 아버지의 이 말씀을 가슴속 깊이 새기며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호날두는 세계적인 축구선수가 되어 이적료 1145억 원을 받고 레알의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호날두는 올해 34세인데 24세의 체력을 갖고 있으며 근육 량 50% 매일 팔굽혀펴기 1,000번 윗몸일으키기 3,000번을 하여 체력을 유지하며 45세까지선수생활을 다짐하고 있답니다./자료출처-나무위키.
오늘 소개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역사적인 인물들은 약점이 있는 분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고 산 분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약점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인을 바꾼 삭개오
눅 19:1-10 / 배 혁목사
이번 중고등부 수련회는 크리스티나 전도사님께서 ‘가스펠, 복된 소식’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4일간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강사 전도사님께서는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질문하셨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는 다닌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 구원받은 자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회개와 함께 삶의 변화를 동반해야 하는데, 회개를 통한 삶의 변화없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에 이르렀다고 확실할 수 있겠냐며 도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최대의 관심이고,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진정한 죄에 대한 회개와, 이에 따른 삶의 변화없이 예수를 믿는다면 그 신앙은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예수님으로부터 확실하게 구원에 이르렀다고 인정받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삭개오 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삭개오가 구원함을 받았음을 확언해 주셨습니다.
삭개오가 구원받는 장면과 그 과정을 보면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우리에게 임하는 지를 살펴 보면서, 또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혜의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예수님의 구원은 사람의 공로가 아니라, 죄인을 찾아 오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가실 때에, 그곳에는 삭개오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리장이요, 부자였습니다. 이 말로 우리는 삭개오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죄인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앞잡이가 되어서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불의하게 세금을 걷어서 바치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그 일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부자가 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삭개오의 삶의 주인은 세상의 돈, 물질이었고, 그 물질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이 삭개오였습니다.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할 수록 더욱 부자가 되고자 했고, 그 물질들로 위로함을 받으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삭개오가 자신이 사는 곳에 예수님이 들어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하여 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의 행동을 보게 되면,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모습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분명 예수님을 보기 위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죄인취급하는 것이 싫었을 텐데, 그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군중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신체적인 악조건이 있었습니다. 키가 작다는 것입니다. 까치발을 해보고, 사람들 틈을 비집고 가보려했지만 되질 않았습니다. 삭개오는 사람들에게 막혀서 예수님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다가 보면 삭개오와 같은 상황을 접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를 원하는데 때로 사람들이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나도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곳이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역기능을 할 때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저지르는 악한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서 실망해서, 예수님께로 가려고는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교회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더욱 바라보며 가까이 나아가야 하는데, 때로는 사람들에게 신경쓰다가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지금도 예배를 드릴 때에 예수님만을 바라보면서 더욱 가까이 주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사람에게 신경 쓰다가 예수님을 제대로 예배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곳에 온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께 예배드리기 위함인 줄로 믿습니다. 그 목표가 정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라는 장애물을 넘어야 하고, 같이 믿음생활하는 사람들의 장애물을 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예배드리지 못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이 손해가 아니라, 내 손해인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삭개오는 그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그 열심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이 키가 작다는 것으로 예수님 뵙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키가 작다는 단점으로 인해서 이를 극복하려고 더욱 적극적으로 열심을 가지게 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겠다고 몰려다니면서, 정작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군중들을 벗어나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서 예수님이 지나가실 길 앞에 돌무화과 나무를 보고 그 나무를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은 키가 작지만 무화과나무에 올라가면 예수님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그 일을 했습니다.
여러분, 키가 작은 세리장이 평생 그 돌무화과나무를 올라갈 일이 있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무화과열매를 따기 위해서 올라갔을 수도 있지만, 세리장이 돈주고 사먹으면 됐지 굳이 그곳에 올라갈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마음이 급했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막 오고 계시는데, 빨리 나무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익숙하지는 않고, 고생좀 했을 것입니다.
삭개오가 나무를 오르는 이유는 단한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자기가 체면이 있는 세리장이든, 키가 작은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지 상관하지 않고 예수님을 보기 위한 그 일념을 가지고 무화과 나무를 올랐던 것입니다.
누군가를 보기 위해 나무를 올라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자신의 체면까지도 버리고서 누군가를 보기 위해서 그토록 갈망했던 적이 있으십니까? 없으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위해 나무를 오르는 삭개오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렇게 수고했는데 못 볼거면 보고 말지하고 뒤돌아서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가깡이 하기 위해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삭개오는 예수님이 그곳을 지나가시기 전에 감사하게도 나무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점점 가까와집니다. 군중속에서 오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가슴이 벅찼을 것입니다. 온갖 좋은 소문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죄인이라고 함부로 대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시고 선하게 대하시는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격했을 삭개오에게, 자신이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무 밑을 그냥 지나가시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고개를 들어 나무위에 앉아있는 자신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합니다.
삭개오는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알고 계셨고, 불러 주셨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오셔서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 주신다면 그것처럼 감격스러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삭개오라고 부르기보다는 그를 죄인이라고 불렀는데, 예수님은 그를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으시고, 삭개오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의 집에 유하겠다고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삭개오에게 있어서는 은혜의 순간이었습니다. 기쁨의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을 때에 이러한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감사하고 은혜가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부르시고 그 집에 유하겠다고 하신 이유가, 삭개오가 다른 사람들보다 의로웠고 잘났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 분을 모실만한 사람이 못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유하여야겠다고 하셨더니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삭개오의 집에 갔다가 아니라, 죄인의 집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삭개오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의 집에 예수님이 유하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삭개오의 집에 유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당신이 오신 것이 죄인을 부르고, 병든자를 부르러 오셨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만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셨습니다. 그가 세리장이고 사람들로부터 악평을 듣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행실이 어떠하신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세리장 삭개오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이 자리에 온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보다 우선해서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신 것은 우리가 다른 이들보다 의로워서가 아니라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불쌍해서 불러주신 것입니다. 죄인이기에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불쌍히 여기셔서 더 가까이 와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이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3.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부르셨을 때에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대하실 때에 단순히 얼굴보고 인사하고 지나치지 아니하십니다. 그의 집에 머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의미는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삶속에 들어가셔서 역사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그가 진정으로 구원받을 자리에 이른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자신에 삶에 주인으로 모시고, 자신의 과거의 삶에 대해 회개하고 돌이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예수님께서 요청하지도 않으신 일을 합니다. “예수님, 제가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겠다는 봉사차원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 자신의 삶을 지배했던 자신의 소유, 물질을 버리고, 이제 예수님을 자신의 집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모셔들인다는 믿음의 결단인 것입니다.
그동안 삭개오의 삶의 중심, 주인은 돈이었습니다. 그가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그 세리장의 일을 관두지 못했던 것도 돈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이제 그 삶의 중심을 이루었던 그 돈을 제거해 버립니다. 그 돈 때문에 죄를 지었고, 그 돈으로 인해서 삶의 만족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이 오시니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구원자임을 아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살지 못했던 삶이 죄인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중심에 있던 주인, 내 자신이나 물질들,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이제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시고, 주인으로 삶고서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요, 구원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말을 들이시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시면서 죄인 삭개오가 구원받았음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말씀 전에 있는 누가복음 18장 18절에 보면, 삭개오와 같이 예수님을 만난 또 다른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부자인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을 어떻게 해야 얻을지를 묻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그 관리는 쾌재를 부릅니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아마 그 관리는 자신은 문제없이 영생을 얻었을 것이라고 확신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한 가지를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네게 아직도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주라 그리하며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니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그 사람은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큰 부자인 관리의 삶의 주인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그 물질을 주인으로 해서 그 물질을 따라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어려서부터 했지만, 정작 그 삶의 주인은 하나님도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은 너의 삶의 주인이었던 그 물질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합니다. 그 때에 영생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삶의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이 주인이되어서 물질을 바라보고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어떤 이들은 명예를 위해, 권력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어떤 이들은 세상적인 사랑을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부자 관리는 그 말씀을 듣고도 주저합니다. 심히 근심하면서 있었습니다. 영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 관리는 그 물질을 포기하지 못해서 근심하며 그 기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 즉각 그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삭개오도 예수님을 만나고 망설이지 않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여 모셔들었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영어로 보면, “Look, Lord! Here and now” 그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영접하니, 바로 지금, 여기서 과거의 주인을 포기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반을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배로 갚겠다고 합니다. 그가 속여 빼앗은 일이 없어서 자신있게 그렇게 말한 것인지를 알수 없지만, 그는 더 이상 물질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네배로 갚아준다고 하면 그는 이제 파산이 될 수도 있을 텐데 그는 그렇게 즉각 결단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진정한 삶의 주인으로 모십니다. 과거 물질로 인해 위로받고, 힘을 얻고, 그것을 소망하면서 살았다면, 이제는 그러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제 예수님으로 위로받고, 힘을 얻고, 예수님을 소망하면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진정한 구원의 변화는 내 삶의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도 바로 여기에서 결단할 때에 그 구원의 기쁨이 날마다 누려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모든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사건을 믿으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가장 복된 소식, 복음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그 복음의 소식을 삭개오와 같이 누리지는 못합니다.
의롭게 보였던 부자 관리는 예수님을 만난 후 근심하였는데, 도리어 죄인된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구원의 기쁨을 누렸다는 것은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감격은 내가 의로워서 누려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인임을 깨달을 수록 더욱 경험되게 됩니다. 내가 꽤 그럴듯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충만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진정한 구원과 그 감격은, 과거 자신이 주인으로 삼았던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모시고,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되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죄인된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 나의 추한 모습을 너무 잘 아시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외면하거나 조롱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나의 더러운 집안에 유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 내가 지금 이곳에서 회개하며 주님앞에 나아갈 때에 이를 반겨하며, 구원이 이곳에 이르렀다고 해 주시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으로 인해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삭개오와 같이 주님을 만남을 사모하고 기뻐하며, 주님이 주인이 되시는 삶을 살아가심으로, 복음의 능력이 삶의 변화로 나타나고,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좋은 길잡이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삭개오가 축복받은 이유
눅 19장 1~10절 / 이한규목사
1. 예수님을 추구했기 때문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으로 가기 며칠 전에 삭개오가 살던 여리고에 잠시 들리셨다(1절). 삭개오는 부자 세리장이었지만 백성들로부터 사람취급도 받지 못했다. 동족의 혈세를 빨아 로마 정부에 바치는 앞잡이로 여겨졌으니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그는 가끔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중년에 자기 인생을 돌아보면서 가족도 모르는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인생에는 돈과 권력이 풀지 못하는 내면의 문제가 많다. 그 문제를 보는 눈이 열려 돈보다 귀한 것을 삭개오는 찾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명성을 듣고 모여들자 삭개오는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했지만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려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3-4절). 진리와 행복을 막는 2대 걸림돌은 “내가 키가 작다.”라는 내 탓 의식과 “나를 막는 사람이 많다.”라는 남 탓 의식이다. 그런 의식의 한계에 갇혀 살지 말라.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내달려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면 자기 한계를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향해 열정적으로 나아가고 하나님을 배경으로 자기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찾을 때 만나주신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예배에 힘써 참석하고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고난 중에도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 하나님 이외의 것을 노리고 계산적으로 하나님을 추구하지 말라. 순수한 동기를 가지라.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기보다 물주처럼 생각하고 믿지 말라.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지 ‘소원성취를 위한 수단’이 아니다. 물질과 성공과 기적을 얻으려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다.
한 남편이 아내를 매우 사랑했다. 특히 순수함을 사랑했다. 결혼 전에 선을 볼 때 자신이 사회적으로 유력한 집안 출신임을 알고 대부분 그런 배경을 생각했는데 그의 아내만은 자신을 순수하게 사랑해서 그 모습에 끌렸다. 순수한 사람은 순수한 사람을 좋아한다. 하나님은 더욱 그렇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얻으려면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라. 축복과 기적과 성공을 노리고 하나님을 찾으면 진짜 축복은 멀어진다. 하나님이 없는 성공은 성공이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실패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재료가 된다.
2. 체면을 버렸기 때문
삭개오는 부와 권력을 가졌기에 교만할 수 있었고 세리장으로서 나이도 꽤 들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보겠다고 체면을 버리고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면 그의 키 작은 콤플렉스는 더 드러나지만 그래도 올라갔다. 그처럼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면 체면을 버리는 자기 파괴의 아픈 시도가 필요하다. 진리를 찾는데 체면이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라. 진리와 구원은 체면이나 자존심보다 소중하다.
하나님 앞에는 내세울 것이나 숨길 것이 없다. 나를 버리고 내 모습 이대로 받아달라고 하라. 진리에 붙잡히려는 자기 파괴를 힘써 시도하라. 로켓이 우주로 나갈 때 가장 힘든 일은 대기권을 탈출하는 일이다. 그 짧은 순간을 위해 로켓이 가진 전 에너지의 4분의 3을 쓴다. 그러나 대기권을 빠져나가면 자유가 있다. 나를 끌어내리는 잘못된 습관 중력을 뚫고 나가기가 힘들어도 뚫고 나가면 자유와 다른 차원의 행복이 있다.
삭개오는 사회적인 습관 중력을 뚫으려고 체면을 다 버리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앉았다. 대기권과 같은 체면의 껍질을 힘써 깨뜨리라. 내가 죄인임을 모르면 하나님 앞에서도 체면을 생각하지만 내가 죄인임을 알면 체면을 버릴 수 있다. 체면을 잘 버리라. 사회적인 지위와 체면의 껍질에 갇힌 삶에서 해방될 때의 자유와 기쁨을 생각해 보라. 껍질의 화려함은 생명력이 짧지만 껍질을 깨고 내용으로 승부하면 생명력이 길다.
맹인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겉옷을 내버리고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왔다. 예수님이 “네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하자 그가 말했다. “선생님! 보기를 원합니다.” 결국 보게 되었다. 거룩한 척, 잘난 척, 아는 척, 안 괴로운 척, 부러움이 없는 척, 행복한 척 하는 겉옷들을 내버리라. 문제 해결의 길은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길 밖에 없다. 자존심과 체면을 내버릴 때 하나님이 내 삶에 찾아오신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적인 옷을 잘 벗으라. 지식의 겉옷도 잘 벗으라. 조금 배웠다고 아는 척 하면 믿음이 깊어질 수 없다. 제대로 많이 배운 사람은 겸손하다. 지위의 겉옷도 잘 벗으라. 한 사단장 집사는 주일에 제일 먼저 교회에 와서 주보를 들고 교회 앞에서 안내하니까 부하 장병들이 큰 감동을 받는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겸손해지라. 감정의 겉옷도 잘 벗으라. 예수님 때문에 참고 마음의 상처를 잘 극복해서 기뻐하면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이 넘치게 될 것이다.
3.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
예수님이 삭개오의 열정적인 추구를 보고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자 삭개오는 급히 돌무화과나무에서 내려와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했다(5-6절). 그는 계산이나 머뭇거림이 없이 즉시 예수님을 영접했다. 구원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주어진다. 예수님을 좋은 분으로 여기거나 멋지게 경배하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내 마음과 가정과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라. 그때 하나님이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해 주신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갈 때는 늘 베다니의 삼남매인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의 집에 머무셨다. 그들이 예수님을 힘써 영접했기 때문이다. 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는가? 자기 사상에 몰입되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겉으로만 따랐기 때문이다. 사람의 사상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내 생각과 사상과 자존심과 고집을 버리고 예수님을 온전히 영접하라. 그때 참된 회개가 나오고 날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있게 된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답게 살려는 것까지 포함한다. 당시 군중들은 예수님이 따돌림의 대상인 삭개오의 집에 들어간 것을 보고 수군거렸다. “어떻게 불결하게 저런 죄인과 어울리는가?”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선한 길로 인도하려는 목적 하에 펼쳐진 ‘사랑의 외면’과 같은 조치를 제외하고 누군가를 부당하게 따돌리는 삶은 결코 복된 삶이 아니다. 그 사실을 깨우쳐 주려고 예수님은 보란 듯이 삭개오의 집에서 유하겠다고 하셨다.
그때 삭개오는 예수님의 사랑과 의도를 깨닫고 감격하며 말했다. “주여 보소서, 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았다면 네 갑절이나 갚겠습니다(8절).” 그는 회개의 표시로 소유의 절반을 선교와 구제를 위해 내놓았고 부당하게 속여 빼앗은 것에 대해서는 4배의 보상도 약속했다. 회개는 죄의 고백과 함께 삶의 변화를 수반해야 한다. 믿음에는 하나님의 선행적인 은혜와 함께 나의 변화도 요구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지만 구원받은 후에는 더 나은 삶을 결단하고 실천하라.
구원받은 성도로서 더 나은 삶을 결단하라. 특히 부당한 돈 욕심을 잘 버리라. 많은 사람들이 돈을 거의 신처럼 숭배하며 돈을 따라 직업과 배우자와 진로를 선택한다. 또한 돈 때문에 미워하고 거짓말하고 싸우면서 사탄에게 미혹될 때도 많다. 믿음이란 마음의 중심에 ‘돈을 둘 것인가? 하나님을 모실 것인가?’의 싸움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셨다(마 6:24). 돈에서 해방될 때 참된 믿음이 가능하다.
< 구원받은 성도답게 살라 >
바른 헌금 생활은 바른 믿음의 표식도 된다. 청교도들은 주머니의 회개가 없으면 가짜 회개라고 했다. 삭개오는 회개 고백을 물질에 대한 욕심 극복의 고백으로 뒷받침했다. 그 고백에 담긴 진심을 알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9-10절).”
확신은 헌신으로 진전되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답게 헌신을 결단하고 선교와 구제에 힘써 동참하라. 돈을 버는 목적도 ‘나누려고 번다’는 목적을 뚜렷이 하라. 돈을 잘 쓰는 사람이 소유하는 것은 돈을 못 쓰는 사람이 소유하는 것을 방지하는 의미도 있기에 돈을 벌 때도 사명감을 가지고 벌러. 행복은 돈의 소유로 좌우되지 않는다.
2001년에 미국의 멧칼프 부부가 6540만 달러의 로또에 당첨되었다. 당첨 후 그들은 곧 이혼했다. 그 후 남편은 2003년에 음주운전과 법정다툼에 시달리다 45세에 죽고 아내는 2005년에 오하이오 강변의 대저택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돈을 의미 있게 벌거나 의미 있게 쓰지 않으면 의미 있는 행복한 인생은 펼쳐지지 않는다. 미국의 한 연구에 의하면 거액의 로또 당첨자들의 90% 이상이 5년 만에 당첨 전보다 더 가난해져 있었고 더 불행을 느꼈고 더 정신과 병원을 찾았다. 돈 자체가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다(마 6:21). 말과 생각으로만 선교하지 말고 실제로 선교에 동참하라. 거룩한 선교 비전에 넉넉히 동참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존재로 준비되라. 돈을 벌 때도 사명감을 가지고 벌라. 가난이 한이 되어 돈을 벌려고 하면 그 목적을 이루기도 전에 영혼이 망가지지만 사명감을 품고 돈을 벌려고 하면 성취 가능성도 커지고 성취가 늦어져도 낙심하지 않고 성취 후에도 영혼을 잘 지킬 수 있다.
인생에서 돈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도 많다. 돈이 건강을 주는 것 같지만 때로는 병을 준다. 현대인의 많은 병은 못 먹어서 생기는 병이 아니라 잘 먹어서 생기는 병이다. 돈이 친구를 주는 것 같지만 진짜 친구를 빼앗고 돈이 사랑을 주는 것 같지만 진짜 사랑을 빼앗기도 한다. 돈과 세상 명예에 너무 매이지 말고 삭개오처럼 구원받은 성도답게 헌신하며 살기로 결단함으로 축복과 행복과 건강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복된 심령이 되라.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눅 19장 1~10절 / 김광일목사
‘한국의 삭개오’라고 불리었던 전도자 백사겸(白士兼)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평안남도 평원 출신으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아홉 살 적에 눈병으로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몇 해 되지 않아 어머니마저 잃고 형제가 거지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형의 손에 이끌려 복술을 배운 그는 산통과 죽장에 의지하여 열다섯 살 때부터 대동강 줄기를 따라 다니며 돈을 벌었습니다. 눈치가 빠르고 상황 판단이 정확했던 그였는지라 명복으로 소문이 퍼졌습니다. ‘백장님’으로 불리며 떼돈을 벌었습니다. 장가갈 나이가 되어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자 ‘딸을 성한 사람에게 시집 보내면 일찍 죽는다’며 양갓집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부부가 정착한 곳이 고양읍이었습니다. 백사겸은 무당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낙오된 인생들, 즉 창기, 소첩, 정신병자 등 버림받은 민중들이 줄을 섰습니다. 1897년 정월을 전후하여 100일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마친 1월 12일, 매서 김제옥이 찾아와 전도지를 주며 말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도리를 적은 말씀인데 한번 읽어 보시오.” 백사겸은 그의 체면을 보아 받기는 받았지만 독한 벌레가 손에 닿는 듯이 선뜻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백사겸은 환상을 보았습니다. “나는 예수다. 내가 주는 산통은 의의 산통이니 받아 가지라.” 며칠을 그렇게 꿈을 꿨습니다. 백사겸은 아내에게 전도지를 읽어 달라고 했고 그 내용이 꿈속에서 들었던 예수의 말씀과 같은 것을 알고 “점치는 일을 단연코 그만두겠소”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김제옥과 함께 고양읍 교회로 갔습니다. 유명 복술가였던지라 바로 공중 기도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해서 그동안 자신의 삶이 술수와 기만이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있었음을 몰랐다고 말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벌었던 3천냥과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내주었습니다. 아내에게는 자신이 걸인 신세가 될 터이니 이혼해 달라고 말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길을 따르겠다는 아내는 그의 지팡이가 되어 주었습니다. 성도들은 소문으로 알고 있었기에 ‘회개한 백장님이 오셨다’라며 강단에 세워 부흥회를 하였습니다. 백사겸은 1900년을 전후해 백정 선교에 앞장섰던 사무엘 무어(Samuel Foreman Moore) 선교사 밑에서 전도를 하다가 남감리회 정식 전도사가 됩니다. 백사겸의 아들 백남석은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교수를 지냈으며 현제명의 가곡 ‘가을’의 작사가이기도 합니다. 백남석은 주일학교운동 선구자였으며 아내 남숙희는 ‘고린도전후 주석’을 번역하였습니다. 이는 백사겸의 눈을 씻긴 예수의 공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은 누가만이 기록하고 있는 독특한 사건으로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죄인임을 발견하여 회개하면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회복함은 물론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도 회복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만남이 쉽지 않습니다. 누가는 삭개오의 장애를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이러한 장애적 요소 때문에 도리어 주님의 눈에 띄게 되었다고 누가는 증거합니다.
본문 5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여기의 ‘쳐다보시고’는 원어로 ‘아나블렙사스’인데 외모가 아닌 태도를 보시는 주님의 시각을 표현하였습니다. 원래 삭개오가 예수를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는데 본문에 보니 예수께서 삭개오를 보시는 모습으로 주어가 바뀝니다. 누가는 삭개오에서 예수로 초점을 옮기면서 ‘보고자 하는 자를 보시며 찾는 자를 찾으시는 예수’이심을 강조하였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장애는 무엇입니까? 장애를 극복하여야 합니다. 오히려 신분이 낮기에 주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가난하기에 주님을 의뢰할 수 있습니다. 병들었기에 주님께 매달릴 수 있습니다. 죄를 지었기에 주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나고 장애의 요소가 없다면 어찌 주님을 만나려 하겠습니까? 장애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는 요소가 됩니다. 그러므로 장애의 요소가 있다 해도 우리를 보고 계시는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삭개오의 행동을 보시고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삭개오의 어떠한 모습을 보시고 선언을 하셨습니까?
첫째로 사모하는 모습을
빌 하이벨스(Bill Hybels)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16살 때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받았지만 구원받은 자로서 더 나은 삶을 향한 결단이 없었기에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20살때 사귀던 자매와 헤어지고 남미 여행을 하게 됩니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코파카바나 해변 식당에서 식사할 때 근처에 앉은 노부부의 대화가 들렸습니다. “아! 좋다! 여태껏 안 먹고 안 쓰고 고생하다가 지금 이렇게 휴가를 누리니 고생도 할 만하네!” 그런데 그 말이 빌에게 어리석게 들렸습니다. “그토록 안 먹고 안 쓴 결과가 고작 코파카바나 해변의 고급 식당에서 저녁 한 끼 먹는 것이란 말인가?” 그는 방으로 돌아와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제 인생에 더 나은 무엇인가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한 자각을 통해 변화된 삶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사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열정으로 미국 최대의 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더 나은 것을 사모하는 열정이 있습니까? 간절히 사모하는 모습이 하나님께 보여야 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여기의 ‘보고자 하되’는 원어로 ‘에제테이 이데인’인데 ‘집요하게 찾다’라는 뜻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를 보기 위해 계속적으로 사모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만남으로 수치스러운 상황에서 구원받고 싶은 열망이 있었습니다. 삭개오의 내면에 있는 열망과 사모함을 보신 예수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돈과 명예를 얻으려다가 부족함과 허전함을 느껴 영적인 주림으로 예수를 만나려는 생각이 곧 구원의 시작입니다. 주님께 대한 열망은 하나님의 은혜를 불러옵니다. 삭개오는 열망의 행동으로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 사모하는 열망을 주님께 보여드리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영접하는 모습을
로버트 멍어(Robert Boyd Munger)의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My Heart Christ's Home)”이라는 책에 나오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주님, 저의 마음이 주님의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께서 이곳에 정착하셔서 온전히 안주하시기 원합니다. 그리고 이 집의 모든 것을 당신의 것처럼 사용하시기 원합니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당신은 손님이었고, 제가 주인이었습니다. 이제 후로는 제가 하인이 되려 합니다. 당신이 저와 이 집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여기에 저의 존재와 소유의 모든 것이 있습니다. 이제 당신이 집을 운영해주십시오. 저는 단지 심부름꾼과 친구로서 당신 곁에 있겠습니다”라고 끝내고 있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여기의 ‘영접하거늘’은 원어로 ‘훼페텍사토’인데 ‘흔쾌히 받아들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본문을 보니 세 가지 동사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입니다. 마음을 열고 온전히 즉시 순종하는 태도가 영접하는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삭개오는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삭개오는 ‘네 집에 유하겠다’는 말씀을 듣고 곧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주님을 바라만 보아도 안 됩니다. 환호하는 것으로 끝나서도 안 됩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영접은 최고의 권위자로 모셔 들인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삶의 주권자로 모셔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묻고 그 뜻에 순종하는 모습이 보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이 쳐다보시고 기뻐하시며 돌봐 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회개하는 모습을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는 청년 시절에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도박이나 술과 같은 쾌락에 빠져 방황하였습니다. 그러나 방탕한 삶을 살면서도 도스토옙스키가 끝까지 고집했던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숙집을 언제나 교회 십자가가 바라보이는 곳에 얻었고, 항상 신약성경을 가지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삶의 수렁에 빠져 살아갈지라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고 하나님과 눈을 맞추려는 신앙고백적 행동이었습니다. 결국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을 바라보시는 하나님 사랑을 깨닫고 방탕한 삶을 청산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감동케 하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쳐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눈 맞추기를 거부하고 비록 범죄의 자리에 빠졌다해도 하나님의 시선은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시선을 외면해도 하나님은 잠잠히 바라보십니다. 이제 그 시선에 눈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본문 8절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여기의 ‘주겠사오며...갚겠나이다’는 원어로 ‘디도미...아포디도미’인데 미래적 현재 용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삭개오가 예수께 결심을 표명한 직후 바로 결심을 실행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결심한 내용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였습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전인적 행동입니다. 잘못을 입으로 시인하고 몸도 마음도 고치고 행동도 고치는 것입니다. 머리가 회개하면 나쁜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눈이 회개했으면 나쁜 것을 보지 말아야 합니다. 귀가 회개했으면 나쁜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야 합니다. 입이 회개했으면 나쁜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손이 회개했으면 더러운 것을 만지지 않아야 합니다. 발이 회개했으면 그 발로 더러운 땅을 밟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의 모습입니다.
삭개오는 자기가 앉았던 자리에 주님을 모시고 자기는 서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군림하던 자세를 버리고 종의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전에는 이웃을 착취의 대상으로 여겼지만 이제는 이웃을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불의한 세리장에서 의로운 제자로 변화되었습니다. 무엇이 삭개오를 변화되게 하였습니까? 바로 주님의 사랑으로 인한 회개였습니다. 이 사랑에 감격하여 변화된 것입니다. 예수의 은혜로 섬기게 되었고, 깨끗한 양심을 찾았고, 잃어버렸던 이웃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에이든 토저(Aiden W. Tozer)는 20세기 위대한 설교가입니다. 최고의 복음주의자이며, 경건 생활에 앞장 섰던 목사였습니다. 설교는 집중력이 있었고,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나온 말씀이기에 교인들은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마치 용광로의 문을 여는 것과 같은 강한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토저는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한번 만난 것으로 그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한번 만난 것으로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더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하고, 더 깊은 인격적인 관계 맺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은혜의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귀한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까? 선한 양심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이웃을 잃어버리셨습니까? 부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낙심하지 말고 주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행실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를 보시옵소서
눅 19장 1~10절 / 김광일목사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는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크리스마스 캐롤 (A Christmas Carol)은 서른네 살에 출간한 소설로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고 사회적인 악습에 반격하여 일어난 사건을 풍자한 내용입니다. 주인공 스크루지는 지독한 구두쇠였습니다. 거지들조차 그에게 구걸하지 않습니다. 사무실 직원 인 봅에게 월급주는 것조차 아까워합니다. 모금함을 들고 온 사람을 쫓아버리고 조카 프레드가 크리스마스에 초대하였지만 거절합니다. 크리스마스에 돈을 쓰기 싫어서 혼자 지냅니다. 쓸쓸하고 적막한 그 날밤, 스크루지의 침실에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7년 전에 죽었던 동료 말리의 유령이 나타났습니다. ‘인색한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나처럼 탐욕의 사슬에 묶여 비참한 유령으로 영원히 떠돌게 될 것’이라고 그에게 경고합니다. 뒤를 이어 나타난 세 유령과 함께 스크루지는 과거, 현재, 미래로 시간여행을 시작합니다. 과거의 유령은 스크루지를 어린 시절 가장무도회가 있었던 곳으로 안내하고 사랑하는 여인 벨을 버리고 돈에 집착하기 시작하는 스크루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현재의 유령을 만나 직원의 집을 찾아갑니다. 가난한 집에 어린 아들이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봅은 스크루지가 돈을 아끼다가 행여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유령은 미래로 데리고 가서 스크루지의 무덤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잘되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스크루지는 자신이 죽은 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모든 것이 꿈이었습니다. 스크루지는 크리스마스 아침이 된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잘못된 행실을 회개하고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했습니다. 직원의 집에 커다란 칠면조를 보냈습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써달라고 큰돈을 기부했습니다. 그리고 조카의 집에 가서 크리스마스를 보냈습니다. 스크루지는 참된 행복을 깨달았습니다. 길거리의 어린아이들, 거지들과 이야기하고 어루만져 주며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도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스크루지의 변화된 모습을 사람들은 의아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사람이 갑자기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고 변화되는 것을 보는 것만큼 큰 즐거움은 없습니다.
다같이 복음성가 ‘내가 주인 삼은’을 부릅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본문에 예수를 만나 변화된 사람이 나옵니다. 이름은 삭개오입니다. 삭개오의 뜻은 ‘의로운 자, 청결한 자’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이름과 반대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동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받으며 세금을 거두어들이는데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불행하게 살던 삭개오가 변하였습니다. 누가는 예수 안에서 죄인됨을 발견하고 회개하면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회복함은 물론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도 회복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본문 8절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여기의 ‘보시옵소서’는 거듭난 삭개오의 고백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고백하여야 합니다. “나를 보시옵소서,” 그렇다면 어떠한 모습을 주께 보여드려야 합니까?
첫째로 원하는 나의 열정을
닉 부이치치(Nick Vujicic)는 사지가 없이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며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난 후 변화되었습니다. 절망 가운데서 절대 긍정의 삶을 살고, 배우자를 만나 아들까지 낳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자신의 저서 ‘플라잉’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승리의 비결은 ‘넘겨 드리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틈틈이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모두 맡깁니다!’ 그렇게 맡기면, 하나님은 아픔을 선하게 바꾸셔서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나는 한계가 뚜렷하지만, 하나님은 무엇에도 제한받지 않으십니다. 한계를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내 계획과 꿈, 소망을 모조리 ‘맡긴’ 덕분입니다. 스스로 세운 계획을 남김없이 내려놓는 순간 하나님은 나를 위해 닦아놓은 멋진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 나아오는 것을 가로막는 요소가 있습니까? 그 장애마저 예수를 보기 원하는 열정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를 원하는 열정이 안식을 누리게 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여기의 ‘보고자 하되’는 원어로 ‘에제테이 이데인’인데 ‘계속해서 찾고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은 신체적 장애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라는 환경적 장애로 인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얼굴을 보려고 계속적으로 노력하는 열망을 보였습니다.
열정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보려고 하였으나 키가 작아 볼 수 없었습니다. 체면을 불구하고 돌무화과 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선한 열정이 돌무화과 나무로 올라가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하였습니다. 마음에 주님을 향한 열망이 있다면 하나님 뜻으로 순종하여야 합니다. 예배드리고 싶은 열망, 봉사하고 싶은 열망, 기도하고 싶은 열망이 있습니까? 열망에 따른 행동을 즉각적으로 예수께 보이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모시는 나의 마음을
미국의 전 대통령 오바마(Barack Obama)는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었던 혼혈아입니다. 그는 하와이의 푸나후오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1,700명 학생 중 흑인 혼혈아는 두 명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늘 친구들의 놀림감이었고 덕분에 함께 인종 문제와 혼혈문제의 고민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1997년 두 살이 많은 가쿠가와가 미국으로 가버리자 오바마는 방황하며 마약에 손을 댔습니다. 그리고 30년 후 오바마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가쿠가와는 전과 3범으로 로스엔젤레스에서 노숙자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변수가 있었길래 그런 차이가 생겼습니까?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가쿠가와는 하나님을 외면하였으나 오바마는 예수를 영접하고 모셨습니다. 오바마는 인생을 자포자기하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인도하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예수를 모심으로 삶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를 주로 모시고 영접하는 믿음이 삶의 문제를 극복하게 하였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여기의 ‘영접하거늘’은 원어로 ‘휘페덱사토’인데 ‘흔쾌하게 받아들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의 관심에 감격을 감추지 못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삭개오는 예수께서 죄인인 자기를 용서하고 천국 백성의 일원으로 받아주신 은혜에 대하여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예수를 모시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영접하고 모시게 됨을 기뻐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자신의 신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삭개오는 물질이나 권세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모신 일로 감격하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주인의 자리로 모시고 그 앞에서 섬겼습니다. 예수를 주권자로 모시는 마음을 보여야 합니다. 범사에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주님이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마음을 예수께 보여드리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변화된 나의 모습을
김동호 목사의 ‘복음을 위한다면 지갑을 찢으라’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오래전에 읽은 신문 기사는 내 삶과 목회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내용은 한 여성이 일년내내 손으로 뜬 스웨터 여러 벌을 들고 신문사에 찾아와 이 스웨터를 필요로 하는 고아원에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녀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쪽지 하나를 주고 갔는데 기사에 그 쪽지 내용이 실려있었습니다. ”안데르센의 백조 왕자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왕자들이 마녀의 저주를 받아 백조가 되자 그 마법을 풀기 위해 여동생 엘리사가 6년 동안 쐐기풀로 스웨터를 짰습니다. 그것을 백조들에게 던져주자 마법이 풀려 그들이 다시 왕자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몸과 마음이 추운 아이들의 마음을 녹여 줄 수만 있다면 저는 6년이 아니라 60년이라도 스웨터를 짜겠습니다.” 인생의 목표가 성공하고 돈버는 것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는 마음으로 넓어져야 합니다. 예수께 나를 개방한다면 더 큰 변화를 경험하면서 사람들이 귀하게 보이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본문 8절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여기의 ‘주겠사오며’와 ‘갚겠나이다’는 원어로 ‘디도미’와 ‘아포디도미’인데 ‘재산을 나누어 주다’라는 현재 진행형 동사입니다. 삭개오는 하인들을 통해 가난한 자들과 토색 당한 자들에게 자기 재산을 이미 나누어 주고 있었음을 가리킵니다. 결심을 표명한 직후 바로 행동으로 옮겼던 것입니다.
삭개오에게 관계의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행위를 도적질로 간주하고 재산을 포기하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회개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은혜에 감격하여 자발적으로 하는 행동입니다. 그 결과 삭개오는 구원의 복을 얻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만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또 다른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삭개오는 불의한 세리장에서 의로운 예수의 제자로 변화되었습니다.
남미 과테말라 산악 지대에 위치한 알모롱가(Almolonga)는 인구 2만여명의 작은 도시입니다. 30년 전만 해도 기독교 인구가 거의 없었습니다. 마시몽이라는 우상을 섬기며 늘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그러나 알모롱가는 지금 98%가 예수를 믿고 깨끗하고 은혜로운 도시로 변했습니다. 36곳의 술집 중에 33곳이 문을 닫았고 늘 만원이었던 교도소는 모두 폐쇄되어 주민 행사나 결혼식, 피로연장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도 거의 사라졌고, 모든 가정이 회복되었습니다. 이같은 변화의 중심에는 도시를 위해 목숨 걸고 기도하며 사역 중인 리스카호체 마리아노(Riscajche Mariano) 갈보리교회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를 섬기게 하기 위해 내가 너를 선택했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 믿고 1970년대 중반 영적 전쟁을 선언합니다. 일주일에 3~4일을 금식하며 우상이 떠나가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영적 전쟁은 매우 격렬했습니다. 어떤 이는 교인들에게 먹을 것을 팔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가 예배를 중단시키고 마술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협박과 생명의 위협에도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목숨을 건 영적 전투를 통해 도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귀신이 떠나가고 병든 자가 낫는 역사가 일어나고 예수 믿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범죄가 뚜렷한 하락세를 보였습니다. 복음의 위력이 지역의 농작물에도 나타났습니다. 야채들이 다른 도시에서 자라는 것보다 3배나 크고 맛도 좋아 잘 팔렸습니다. 알모롱가는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과테말라 사람들은 알모롱가를 ‘기적의 도시’라고 부릅니다.
신앙은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신 예수를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한 삶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예수를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면 삭개오처럼 변화될 수 있습니다. 행복을 환경이나 조건에서 찾지 마십시오. 물질이나 지위나 지식이나 쾌락이 사라지면 행복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 예수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부디 거듭난 삶이 되어 ‘나를 보시옵소서’라고 주께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만나려는 간절한 열망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는 마음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로 인해 변화된 모습을 보여 드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