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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래스님 출가수행 이야기
출가 전 선래스님이 고등고시를 패스해 '세상을 호령해 보겠다'며 운달산 김용사로 들어간 건 1957년.
시간 날 때마다 사찰업무를 봐 주던 청년은 종무일로 서울 총무원에 갔다 동산스님을 처음 만났다.
한 눈에 보아도 거목임을 직감했다.
동산스님 역시 사제 간의 인연을 꿰뚫었던 것일까?
동산스님은 청년에게 '천연(天然)'이라는 법명을 내렸다.
천연거사는 '군에 갔다 와 출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어느 날 묘적암에서 본 광경이 집에 돌아와서도 잊혀지지 않았다.
일타, 법전, 석주 세 스님이 가부좌 틀고 정진하던 그 모습.
과거응시 차 장안으로 가던 중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부처되는 것만 하겠는가?'라는 한 스님의 말에 마조스님을 찾아가 화두를 들었던 단하천연 선사처럼 천연거사도 자문했다.
'고시에 합격하는 것이 부처되는 것만 하겠는가!'
생각이 예까지 이르니 '군 제대 후 출가'라는 말도 사족이었다.
집안 허락도 구하지 않고 그 길로 범어사로 향했다.
해질 무렵 범어사 입구 팔송정에 도착해 겉옷을 모두 벗어 길가 나무에 걸어놓았다.
옷이 귀할 때니 누구든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라는 뜻도 있지만 그 보다는 '속세 옷은 이제 필요 없다'는, '저 일주문으로 들어선 후엔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의 발로였으리라.
그 때가 1958년 음력 3월이다.
사미계를 받았다.
동산스님은 '선래(善來)'라는 법명을 내렸다.
<본생경>에서 용왕의 항복을 받아 낸 후 용왕에게 삼귀의와 오계를 준 그 '선래'다.
하지만 선방으로 직행할 수는 없었다.
당시 교무를 맡고 있던 진상스님에게 자신의 바람을 고했으나 '초발심자경문도 배우지 않은 사미가 감히 선방에 가겠다는 것'이냐며 핀잔만 들었다.
그대로 물러설 선래스님이 아니다.
공양주 소임 당시 200인분의 밥을 짓다 보니 어떤 때는 설고, 어떤 때는 질었다.
그때마다 대중스님들이 "오늘은 왜 이리 설었냐"며 한 소리했다.
하루는 설익은 밥, 진밥, 고두밥 세 가지로 지어 내놓고 대중스님들에게 말했다.
"마음대로 골라 드세요!"
대중스님들은 파안대소 했다.
사미가 보여주는 기백은 이미 사중에서도 정평이 나 있던 터였다.
선래스님은 선방으로 가 소리쳤다.
"저에게 초발심자경문 일러주실 분 안 계십니까?"
묘적암 인연 덕이었을까? 석주 스님이 나섰다.
"내가 해 줄 테니 저녁예불 끝나고 법당에서 만나자."
결국 밤을 꼬박 새워 다 마쳤다.
선원에서도 '기가 찰 노릇'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날 저녁 당당히 선방에 들어섰다.
설봉, 기산, 응담, 일타, 도우, 지유, 지원, 석주 스님 등 20여명과 함께 한 첫 정진.
화두는 은사 동산스님이 내린 '마삼근(麻三斤)'이었다.
7일간의 용맹정진 중 아침공양을 위해 청풍당으로 가던 중 보제루 기둥을 안고 잠든 적도 있었다는 선래스님.
강원으로 간 도반 스님들도 한 마디씩 일렀는데 홍선스님과의 대화가 일품이다.
홍선스님이 웃으며 묻는다.
"선래스님, 어제 저녁에 도통하셨나?"
선래스님이 받아친다.
"다 되어 간다!"
이후 도리사, 불국사 등 제방선원에서 20안거를 성만했다.
선래스님이 손수 낸 차향이 눈 내리는 학소대(鶴巢臺)를 감싸 안았다.
1981년 20여년의 행각 후 발길이 닿은 곳이 법륜사였다.
12평 남짓의 법당도 기울어져 가던 시절 스님의 첫 불사는 사찰건축이 아닌 유치원 개원이었다.
1983년 개원한 법륜유치원은 부산불교 최초 유치원이라는 소사(小史)를 썼다.
그러고 보니 연등축제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최초의 부처님오신날 합동법회(1975년)도 선래스님이 기획하고 이끌었다.
"어느 날 한 신도님이 오셔서 푸념해요. '스님, 우리 아이가 교회 유치원부 다니더니 맨날 아멘해요.' 아하, 하면서도 아차 싶더군요. 천진불을 안 모셨구나. 어린이포교 놔두고 불교미래 운운하다니, 어불성설이었구나."
금정학원 이사장을 맡으며 교육불사에도 남다른 관심을 쏟았던 선래스님.
장르별 포교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 빠르게 간파했던 것이다.
매년 170여명을 수용하고 있는 '법륜유치원에 들어가려면 줄을 서야 한다'는 말은 결코 비약이 아니다.
비결이 뭘까?
법륜유치원에서는 영어교육을 하지 않는다.
대신 박물관이나 유물관을 간다.
아울러 법륜유치원은 '작가와의 만남'을 추진하며 아이는 물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작은 도서관도 운영하고 있다.
인근 지역의 문화시설로도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아이에게 특정종교를 주입시키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자연스럽게 불교와의 인연을 지어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일 뿐입니다. 입학식 날 학부모들에도 '부처님 만난 인연 소중히 생각하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말합니다."
법륜유치원 인연이 지속 돼 성인이 되어서도 '부처님 마음' 잃지 않기를 바라는 스님의 작은 바람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벌써 초기 유치원생이 학부모가 되어 아이를 입학 시키러 오고 있다.
선래스님의 생일은 관음재일이다.
세속 나이로 회갑을 맞은 그 날도 법상에 올랐다.
그리고는 단호히 일렀다.
"오늘부터 주지 안 합니다. 절은 상좌에게 맡깁니다."
그리고는 1998년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했다.
만덕터널이 지나는 금정산 아래 자리한 사회복지법인 해월 무량수노인요양원은 부산 전역에서 그 명성이 자자하다.
단순히 최고의 시설을 구비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어르신들을 부처님처럼' 모시려는 직원들의 '보살심'이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어느 날 문득 한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불은(佛恩)과 시은(施恩)에 40여년을 살아왔다. 무엇으로 보답할 것인가?
갈 곳 없는 노인들이 여생을 조금이라도 편히 보낼 수 있는 쉼터라도 만들어보자 마음먹었지요. 염불정진하다 가시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지요."
대중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궁금했다.
"두 가지만큼은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는 것, 부처님 법을 배웠으면 실천에 옮겨야 참 공부라는 사실만큼은 각인하고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이 전한 말씀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 실천에 옮기라는 뜻이다.
"번뇌에 끄달리다 보면 시비에 휩싸일 뿐입니다. 시비에 얽매이다 보면 옳고 그름은 없어지고 무조건 내가 옳다는 아만심만 일으킵니다. 다 시간낭비입니다. 내 아이, 내 이웃이 부처입니다.”
#법보신문 #해월선래스님
첫댓글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