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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과 안양이 맞붙는 그라운드는 항상 긴장감과 사소한 몸싸움이 이어졌다. |
삼성전자는 95년 축구단을 만들기로 하고 94미국월드컵의 명장 김호 감독을 초대 사령탑으로 영입해 창단 준비에 들어갔다. 96년 수원을 연고지로 K리그 9번째 구단이 탄생하던 순간 전해까지 서울을 공동연고지로 삼고 있었던 LG는 안양으로 '이사'를 왔다. LG를 비롯 일화 유공 등 3개팀은 서울을 공동 연고지로 삼고 있었지만 프로축구연맹의 지방축구와 연고지 활성화 프로젝트에 따라 수도를 떠나야만 했다. LG는 모기업의 기반이 있는 창원으로 옮기는 것을 검토했지만 안양시가 적극적으로 축구단 유치에 나섰고,수도권의 이점과 향후 서울 재입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국 안양에 둥지를 틀었다. 96년 시즌 수원과 안양은 '이웃 사촌'으로 K리그를 새롭게 시작했다.
그러나 96년부터 98년까지 3년 동안에는 지금 축구팬들이 생각하는 뜨거운 분위기의 '클래식 더비'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갓 창단한 수원이나 새로운 연고지에 적응해야 하는 안양이나 일단 각자 자립의 틀과 기반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안양을 이끌었던 조영증(96년),박병주(97~98년) 감독이 수원의 김호 감독과 별다른 경쟁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도 한 요인이었다.
그런 가운데 '클래식 더비'가 탄생할 외부적 분위기는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95년 겨울 사상 첫 프로축구단 서포터스인 그랑블루가 출범했고 이듬해 안양의 지지자 모임인 레드가 닻을 올렸다. 서포터스 사이의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는 초창기였다. 또한 98년 프랑스월드컵이 끝난뒤 이른바 '프로축구의 르네상스'가 만개했고 신세대 관중들이 경기장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운명의 99년,드디어 수원과 안양이 서로를 최고의 라이벌로 적대시할만한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다. 우선 안양 사령탑으로 조광래 감독이 부임했다. 조 감독은 김호 감독이 수원의 창단 사령탑으로 부임했을 때 수석코치로 그를 보좌했다. 김호가 '수원의 아버지'였다면 조광래는 '수원의 어머니'라고 평가할 만했다. 그런 조 감독이 안양을 맡게 되면서 두팀 사이에는 전운이 감돌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길고 긴 인연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는 안양이 자랑하던 최고 스타 서정원이 수원으로 말을 갈아타는 사건이 터졌다. 92년부터 97년까지 안양(LG)에서 뛰던 서정원은 프랑스리그 스트라스부르에서 '세오(Seo)' 열풍을 일으키다가 99년 K리그에 복귀하면서 친정대신 수원에 전격 입단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두 구단 프런트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감정의 골을 깊게 만들었다. 당시 절정의 기량을 뽐내던 서정원을 얻은 수원팬들은 열광했고,반면 안양팬들은 서정원의 유니폼 화형식을 하면서 분개했다. 99년은 이렇게 시작됐다.
김호(왼쪽)와 조광래는 숙명적인 관계였다. 92년 |
99년부터 2003년까지 벌어졌던 수원-안양의 '클래식 더비'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김호와 조광래의 '5년 전쟁'이었다. 김호와 조광래의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설명하지 않고서는 수원과 안양의 라이벌 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
통영 출신인 김호와 진주에서 태어난 조광래는 경남이 배출한 대표적인 축구인이였다. 10년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은 함께 국가대표 생활을 할 기회는 없었지만 축구철학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을 공유했다. 조 감독은 "젊은 시절부터 김 감독하고 이야기를 나누면 그냥 말이 통했다. 한국축구가 나아갈 방향이나 팀을 어떻게 만들어갈지에 대한 생각이 상당히 비슷했다"고 털어놨다. 김호가 92년 처음으로 도입된 국가대표팀 전임감독 1호로 선임됐을 때 조광래는 코치로 도왔다. 당시 기술위원회는 투표로 감독을 선임했는데 '김호+조광래 카드'가 성사되면서 김호는 투표전에서 이길 수 있었다. 이런 인연은 수원 창단때 까지 이어졌다. 김호가 수원의 초대 사령탑으로 창단 작업을 진행할 때 조광래가 코치로 합류했다. 조광래는 이미 92~94년에 대우 감독을 역임한 상태였다. 프로팀 감독을 했던 사람이 다른 팀의 코치로 간 경우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만큼 김호와 조광래는 단단한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축구계에서는 김호와 조광래가 '대권'을 주고받는 약속을 했다는 설이 떠돌았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했던가. 97시즌이 끝나고 조광래는 수원을 떠났다. 당연히 김호와의 불화설이 나돌았고,두 사람 사이가 '감정적으로 끝장났다'는 얘기가 축구계에 파다했다. 98년 말 조광래가 안양의 감독으로 K리그에 복귀했다. 조광래의 제1목표는 '타도 수원(김호)'이였다.
99년 안양은 수원과 4번 맞붙어 1승3패로 열세였다. 99년은 수원이 두번째 K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가장 강력한 스쿼드를 뽐내던 시기였다. 조 감독은 "내가 안양을 처음 맡았을 때 팀은 중하위권 수준이었다. 이 전력으로 수원에게 도저히 이기기 힘들었다. 그래서 수원을 창단하면서 만들었던 훈련프로그램을 똑같이 안양에 적용했다. 수원을 이기지 못하더라도 경기 내용은 대등하게 갖고 가겠다,좋은 경기를 하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수원을 만들던 방식으로 안양을 재구성하겠다'는 조광래의 전술을 적중했다. 이듬해 안양은 1년만에 수원을 상대로 4승1패의 놀라운 대반전을 일으켰고,내친김에 K리그 우승컵까지 거머쥐었다.
조광래 감독이 안양 시절 선수들에게 전술을 설명하고 있다. |
조광래 감독은 "수원 시절부터 어린 선수를 키워야 한국축구가 한단계 업그레이드된다는 생각은 확고했다. 안양으로 옮긴뒤 수원에서 구상했던 유망주 육성 프로젝트를 그대로 실현했다"고 말했다. 안양과 수원에서 경쟁적으로 키워낸 수많은 유망주들은 오랜 기간 국가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의 주축이 됐다. 김호 감독은 "수원과 안양이 펼친 선의의 경쟁이 한국축구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김호의 수원'과 '조광래의 안양'은 99년부터 2003년까지 5년동안 K리그에서 21번을 맞붙어 10승1무10패를 기록했다. 말그대로 용호상박의 혈투였다. 2003년 시즌이 끝난뒤 김호는 수원을 떠났고,안양은 다시 서울로 연고를 옮겨 FC서울로 재탄생했다. 그렇게 K리그에 가장 치열했던 라이벌전으로 기억되는 수원과 안양의 '5년 전쟁'은 막을 내렸다.
그랑블루의 창단멤버이지 지금은 수원에서 프런트로 일하고 있는 이은호씨의 기억은 각별하다. "그랑블루는 국내 최초의 서포터스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어요. 양질에서 최고라는 믿음이 있었지요. 그러나 늦게 만들어진 안양 서포터스 '레드'에 자극받은 측면도 큽니다. 당시 '레드'에는 예술가 취향의 멤버들이 많았어요. 미대 출신들이 큰 통천에 직접 수작업으로 멋진 그림을 그렸고,밴드 출신들이 락음악풍의 응원가를 만들기도 했지요. 레드의 그런 예술적 취향은 그랑블루에도 신선한 자극이 됐고,두 서포터스가 서로 경쟁하며 발전하는 계기가 됐어요".
당시 수원과 안양을 직접 잇는 버스노선이 없어서 양팀 팬들이 차량을 이용해 이동했는데 1번 국도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양팀 서포터스 사이에는 수원-안양전이 '1번 국도 더비'로 통했다. 이씨는 "아마도 두 팀의 경기가 끝난뒤 조용하게 지나간 적이 한번도 없었을 거예요. 서포터스끼리 크고 작은 뒤탈이 꼭 있었죠. 그래도 두 팀 서포터스는 원래 '붉은 악마'안에서 사이가 좋았던 그룹"이라고 회상했다. 안양이 서울로 연고를 옮긴뒤 두 팀간의 라이벌 의식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지만 '김호의 수원'과 '조광래의 안양'이 붙었을 때의 클래시컬한 맛은 분명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첫댓글 한웅수......
삭제된 댓글 입니다.
큰 의미 안두셔도 되는데요?
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원색 빨간유니폼...
이명박...
부활하자ㅜ
기사 중간에 서울 재입성을 위해 안양에 자리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참 의미심장하네요
"프로축구연맹의 지방축구와 연고지 활성화 프로젝트에 따라 수도를 떠나야만 했다. LG는 모기업의 기반이 있는 창원으로 옮기는 것을 검토했지만 안양시가 적극적으로 축구단 유치에 나섰고,수도권의 이점과 향후 서울 재입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국 안양에 둥지를 틀었다." 그러면 lg는 서울 재입성이 목표였음??
레드존 간지나네
부천팬 입장에서도 흥미로웠던 수원vs안양전. 우리와도 상당히 라이벌 의식 강했고 자주 충돌하곤 했는데..ㅎㅎ 그립군요.
안양과 부천도 부활해서 꼭 만날꺼야
진정한 더비!!!!!!!!!!!!!!!!!! 진정한 라이벌인 수원 과 안양 정말 경기 내외적으로 재미있었는데!!
정확히 지지대의 뜻이 뭔가요??ㅋ
안양과 수원을 잇는 그 고개에......1번 국도가 있습니다. 그 고개 이름이 지지대..... 로 알고 있음
정조대왕이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던 수원에 방문할 때마다 한양으로 돌아갈 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한발짝 가고 뒤돌아보고 또 한발짝 가고 뒤돌아보고 해서 행차가 엄청 느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고개 이름이 지지대고개라고 이름이 붙여졌고 수원이 효의 도시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역시 K리그 최고 더비는 수원vs안양
서정원 수원간거 생각할수록 열받네. 94월드컵때 서정원 선수 보고 안양팬 한거였는데ㅠㅠ
안양팬들은 얼마나 수원하고 경기하고싶을까요?? 꼭 이루어지길~
연.고.이.전. 지지대 더비를 한번밖에 경험하지 못했지만 어느 경기보다도 치열했다고 기억되는...할 말은 많지만 알싸라 말 못 하는 설움.. 안양아 내가 미국있어서 치토스 자주 먹는데 가끔 너 생각난다 언넝 올라와라ㅋㅋㅋㅋㅋ
첫직관이자 마지막지지대더비 였던 안양에서의 경기를 잊을수없다
안양과의 경기를 한번도 보지 못해서 너무 후회스럽네요ㅠㅠ
하 그립다ㅜㅜ
이런글좋아요 간만에신선하네
이런팀을 잃어버리다니 ㅠ
정말 재밌엇는데...
그때 안양팬들은 다 어디가셨나요 ㅠㅠ진짜 안양 수원전은 타팀팬들도 흥미롭게 지켜봤었던...
중계로 봐도 정말 뜨거웠었어요... ㅎㅏ .. 평관은 지금의 서울이 많지만 그때의 일당백의 열기란 ㅋㅋㅋ
당시 서울에 팀이없어서 부천과 안양을 응원하다 결국 서울에 합류했지요 ㅋ
안양에 팀 생기는 거 기다리다 지쳐(?) 수원과 서울로.... 각각 팬고이전 하신분들이 많은 걸로..........알고 있습니다!!!!
뭔 소리지 마치 안양팬들이 전부 다 서울로 합류했단 듯이 말하는 건...
제용삼이 생각나네. 이상하게 수원팬이지만 제용삼이 좋았는데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