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뿔’ 얘기를 하다가 아내가 이런 말을 했다.
“백일섭이 김혜자에게 한 얘기,
뭐 당신이 늘 하던 얘기랑 비슷하지 않아?”
아내 김한자(김혜자분)가 남편 나일석(백일섭분)과 헤어진 후 혼자 나레이션으로 한 말인데,
(김한자는 지금 휴가 명목으로 집을 나와 따로 살고 있다)
“평생 나를 이쁘다 해주는 사람
미워 미워 이를 갈아도 그래도 자기는 내가 이쁘다는 사람.. ”
동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나도 보면서 ‘내 상태와 똑같네’ 했다.
2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아내와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한지 1년쯤 되었을까.
어느날 아내가 나를 종로 YMCA 뒤 높은 빌딩 꼭대기에 있는 어느 교회로 데리고 가더니
“이제 형을 자유롭게 해 주고 싶어” 한다.
이게 무슨 아닌 밤에 홍두깨같은 말인가 했더니
내가 사귀자 해놓고도 별로 달라진 것도 없고
손 한 번 제대로 잡아 주지도 않는 것이
자기에게 특별한 마음이 없는데도 그냥 형식적으로 만나면서
그만하자는 말을 못하고 있으니 자기가 헤어져 주겠다는 거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하하하 크게 웃었던 거 같다.
참 황당하면서도 엄청 반가운 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난 여자친구(아내)가 너무 소녀처럼 어리고 순진해 보여서
언제 진도를 나갈 수 있나 하며
수없이 망설이고 힘들게 참고 있던 터라
이건 마치 막혀있던 물꼬를 터주는 것과도 같았다.
그 대화가 있고 며칠 안 돼 첫 키스를 했지 싶다.
아내의 집 근처 사직공원 한쪽 깜깜한 구석에서
같이 입을 붙이고 시간을 얼마나 보냈는지 모를 정도로 길게 한 기억이 난다.
그 후로는 만나기만 하면 입을 맞추고 싶어서 안달이 나곤 했다.
가슴이 뜨겁던 시절이었다.
집에 바래다주러 갔다가 그대로 헤어지기가 싫어서
집 주변을 몇 번이나 같이 돌다가 아주 늦어져서 마지못해 집에 들어가게 했던 적이 많았다.
종일 같이 붙어 지냈는데도 헤어지자마자 금방 또 보고 싶었다.
그날 교회에서
“내가 사귀자 할 때 넌 왜 수락했니?” 물었더니
아내는 “그냥 운명처럼 느껴져서”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이 든든한 보장보험처럼 여겨져
그 후 아내가 “당신과 같이 못 살겠다”고 하면
언제나 “우린 운명이야”하고 둘러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아내는 그 말을 인정하지 않고
그때는 뭘 몰라 잘못 말한 것이라고 끝까지 항변한다.
지난 9월 3일이 우리 결혼 20주년이었다.
그런데 나는 하루 지나서 생각이 났다.
한 달 전부터 결혼 20주년이 다가오는 걸 알았고
무슨 중요한 시험일처럼 그날이 다가오는 게 무서웠다.
그 두려움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해서 그날을 잊고 지나가게 했는지 모른다.
이틀 뒤 아내에게 전화로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죄지은 것 많고 많이 미안하지만
그래도 너무 죄인처럼 굴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앞으로는 그냥 뻔뻔하게 비비겠으니 그렇게 알아라”
난 아내와 손잡고 길을 걸으며 얘기할 때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이 행복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옆에 아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지 얼마전에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지금 이 여자와 함께 살게 해 주신 하느님께 무엇으로 감사를 드릴 수 있을까.
이번 주말에 나의 사랑하는 드라마 ‘엄뿔’이 종영된다고 한다.
아 이제 무슨 드라마에 정을 붙이나
‘엄뿔’ 다시보기를 클릭하여
2008년 한국의 어머니, 김한자의 나레이션을 다시 들어본다.
“40년 한이불 덮고 산 사람
그 사람도 나도 세월만큼 늙어 할머니 할아버지...
어느 남편이 그이만큼 뜨뜻할까?
어느 남편이 그 사람만큼 깊고 은근할까?
평생 나를 이쁘다 해주는 사람.
미워 미워 이를 갈아도 그래도 자기는 내가 이쁘다는 사람.
나일석 김한자...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그래 벌써 염색 안하면 파뿌리가 반이 넘으면서
우리 두 사람 인생이 이렇게 바래져 가고 있다.”
첫댓글 하이고~ 얘기하는 뽄새가 이제 웬만큼 늙었네. 가깝고 가깝도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