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사도행전(15) 아펜젤러 선교사(6)
배재학당의 교육 내용
영국인 비숍 여사는 1897년 배재학당의 규모와 교과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배재학당에는 ”한문 고전(古典)과 셰필드(Sheffield)의 만국역사(萬國歷史)를 가르치는 한문-국문과가 있고, 소규모의 신학과(神學科)와, 독법(讀法), 문법, 작문, 철자법, 역사, 지리, 수학 및 화학과 자연철학을 가르치는 영문과가 있다.“
배재학당의 특별활동 시간에는 학생들의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민주시민, 또는 지도자의 필수 소양인 연설과 토론 등 구두 언론) 훈련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아펜젤러의 배재학당 설립 목적은 이 학교를 기능공이나 기술자를 배출하려 의도하지 않았고, 봉건적인 사회 질서에 순응하는 인간이 아닌, 개혁적인 교양인을 기르고자 하였다. 즉 ‘근대적인 시민’과 ‘지도자’로 학생들을 양성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런 뜻에서 아펜젤러는 학생들의 자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당대의 시사 포럼으로까지 확대되는 협성회 써클 활동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 박사는 한국에서 민주 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배재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다. 배재학당에서는 매주 토요일마다 서재필 박사와 윤치호 박사의 주도로 국회 제도에 관한 연설이 이루어졌다. 또한 학생들로 하여금 교내 변론회(辯論會)를 조직하고 다양한 주제들을 토론하도록 하였다. 그 토론회의 명칭을 협성회(協成會)라고 하였는데 처음에는 교내문제에서 시작해 점차 사회문제와 시국 관련 주제들도 다루었다.
이 협성회 토론은 그 자체가 토론과 연설에 대한 훈련이라는 교육적 기능과 함께 당시 조선 사회의 당면 과제들을 제기하고 논변하는 시사 포럼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포럼의 특징은 중구난방식 자유토론이 아니라 법정에서의 재판 과정이나 국회에서의 토론 과정과 같이 일정하게 정해진 규칙과 형식에 맞추어 진행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협성회에서는 독립협회의 예비 국회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중추원에 대의원으로 내보낼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배재학당의 학생들은 패를 나누어 백성들에게 가두 연설을 하는 등 민중운동 즉 국민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배재학당의 당훈
아펜젤러의 교육 정신인 자유 민주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배재의 정신 자산은 일제 강점기의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출신 배재인들의 당당하고 꿋꿋한 항일 독립의 운동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전시실에 게시되어 있는 학당 역사 소개의 문구에 의하면,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활동하는 교육을 받은 배재학당 학생들은 민족 독립 운동에도 앞장섰다. 당시 외국 기관은 치외법권(治外法權)이었으므로 일본인들의 순찰을 피할 수 있었다. 배재학당 기숙사는 독립지사들의 은신처가 되었고, 3.1운동 당시에는 거사를 계획하는 민족 독립운동의 산실이 되었다.“
배재학당에서는 처음부터 학생들에게 복음(福音)에 대하여 의무적으로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학교생활이나 가르치는 모든 학과에서 의식 혹은 무의식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뜻에서 학당훈(學堂訓)은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 當爲人役)’ 즉 크게 되려는 사람은 마땅히 남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정했다.
이 말은 성경에 나오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 26~28)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