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 2:11)
"너는 접시들과 잔들과 병들과 전제물을 붓는 희생 대접들을 만들되 정금으로 만들지며"(출 27:28-29)(원문 대조─역자 주). 접시들은 떡을 진열하기 위한 것이었다. 식사를 담을 때에는 음식을 옮겨 담는 접시에 담는다. 동일한 원칙으로 접시들은 떡을 진설하는 데 사용되었다.
잔들은 유향을 담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유향은 상 위에 진열된 진설병 위에 부어졌다. 잔들은 이 액체의 유향을 담는 데 사용되었다. 병들과 희생 대접들은 전제물을 붓는 데 사용되었다.
유향은 그리스도의 달콤한 부활을 나타내는 수지질의 흰고무이다. 유향의 히브리 어원은 백색을 의미한다. 더욱이 유향은 고무를 생산하는 다섯 종류의 나무들로부터 나오며 이들 나무들은 다섯개의 꽃잎을 가진 꽃과 다섯 면을 가진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삼일성이 있는 부활 안의 책임을 뜻한다. 또한 흥미로운 특징은 이들 나무의 꽃잎 안에 다섯 개의 암술과 다섯 개의 수술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유향을 생산하는 나무에서 우리는 거듭거듭 다섯이라는 숫자를 보게 된다. 우리는 나무의 종류에서 꽃의 다섯 꽃잎에서 꽃 속의 다섯 수술과 다섯 암술에서 다섯 면을 가진 열매에서 이 숫자를 본다. 이 모든 것은 유향의 의미와 관계 있다.
동방 박사들은 단지 그리스도를 발견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분께 경배했다(11절).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경배 받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며 그분을 경멸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에 의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들의 경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박사들은 아이에게 경배했으며 그 아이는 하나님이었다. 이사야 9장 6절은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 그의 이름은 …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칭하리라』고 말한다. 박사들에 의하여 발견된 아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불리웠다. 박사들은 그분께 경배했으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그분께 드렸다(11절).
우리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성경의 예표론에서 금은 신성한 본성을 상징한다. 이것은 아이 예수가 신성한 본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그분은 신성하셨다. 유향은 부활의 향기를 상징한다. 우리의 천연적인 종교적 이해에 따르면, 예수의 부활은 다만 그분의 죽음 후에 왔을 뿐이다. 그러나 그분은 죽기 전에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그분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1:15). 따라서 그분이 죽기 전에도 그분은 부활이셨다. 그리스도의 이 땅 위에서 사신 생애는 부활의 생애였다. 누가복음 2장 52절은 우리에게 심지어 그분이 그의 유년기에조차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럽게 발견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천연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부활의 생애였다. 누가복음 2장에 있는 기록은 그 아이가 비범한 아이였음을 계시한다. 그는 독특한 아이였는데 이는 그가 부활 안에 있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분의 전 인간의 생명과 생활에는 유향 곧 부활의 달콤함이 있었다. 사망은 그분을 잡거나 심지어 그분을 만질 수 없었다. 그분은 생명이었을 뿐만 아니라 부활이었다.
몰약은 죽음과 또한 죽음의 향기를 상징한다. 인간 가운데 있는 사망은 향기가 없지만 그러나 예수에게는 죽음의 향기가 있었다.
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을 때 나는 그들이 자신들이 드린 예물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고 믿지 않는다. 그들은 분명히 성령의 감동 아래 그들의 예물을 드린 것이다. 그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 을 드렸는데, 이는 아이 예수가 신성한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생애가 유향의 향기로 충만한 부활의 생애가 될 것이며, 그의 생애는 죽음의 향기가 충만한 생애가 될 것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열두 살 되셨을 때 그분은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가셨다(눅 2:42). 그분은 사람들이 자기 아버지의 집인 성전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볼 부담이 있었기 때문에 명절 후에 예루살렘에 머물렀다(눅 2:43). 마리아와 요셉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를 찾았으며 결국 성전 안에서 그를 발견했다(44-48절).
어떤 의미에 있어서 마리아는 그를 책망했다. 만일 내가 예수였더라면 나는 그녀를 책망했을 것이다. 나는 따지며 "당신은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십니까? 왜 나를 괴롭히려고 오셨습니까?"라고 말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누가의 기록을 읽어 본다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무언가를 말씀하셨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분은 "내가 내 아버지의 일에 관계하여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말씀하셨다(49절). 그분은 이렇게 말하신 후에 그들과 함께 나사렛으로 돌아가셨다. 그것은 참으로 그분에게 있어서 죽임당하는 것이었다. 그분의 의도가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죽임당함 가운데에서 우리는 몰약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그것은 유향의 향기가 아니라 몰약의 달콤한 향기였다.
만일 우리가 예수의 전기들인 사복음서를 읽는다면 우리는 예수의 생애에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매우 많았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분은 항상 부활의 생명을 사셨으며, 항상 십자가의 죽임 아래 계셨다. 그분은 십자가에 죽으시러 갈 때까지 삼십삼 년 반을 기다리시지 않았다. 그분의 전 생애를 통하여 그분은 계속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따라서 그분은 단지 부활의 향기뿐 아니라 또한 십자가의 달콤한 몰약을 갖고 계셨다.
박사들은 미가서 5장 2절에서 "유대의 수천의 고을들 가운데 작다"고 말하는 베들레헴에서 왕이신 예수를 발견했다. 그분은 그처럼 천한 환경 안에 있는 비천한 고을에서 태어나셨다. 그러나 별로부터 온 이상을 인하여 박사들은 그 장소에 주의하지 않고 왕이신 아이께 그들의 온전한 경의를 표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분께 세 가지 귀한 것들을 드렸다. 이 항목들은 각각 주 예수의 본성과 생애에 대한 보배로운 요소를 상징한다. 사복음서의 거의 매 페이지에서 우리는 주님의 인성의 귀함과 그분의 부활 생명의 향기와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의 달콤한 향기를 본다. 주님이 출생하신지 얼마되지 않은 초기에도 박사들은 적절한 것들을 드렸다. 그것은 주님의 본성과 생애에 정확히 일치되었다. 그들의 드림은 분명히 성령의 감동 아래 드려진 것이었다.
박사들이 드린 이 귀중한 보배들은 주님의 유대로부터 애굽으로의 여행과 애굽으로부터 나사렛으로의 여행을 위해 예비된 것일지도 모른다. 박사들의 경배와 드림은 참으로 무언가를 성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