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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1) 원문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天地之間, 其猶橐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多言數窮, 不如守中.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 천지지간, 기유탁약호. 허이불굴, 동이유출. 다언삭궁, 불여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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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仁) : 어질다. 어진 이.
추(芻) : 베어 묶은 풀. 꼴(마소에게 먹일 풀). 꼴을 먹이다. 풀. 짚.
구(狗) : 개. 범 새끼. 역(易)의 간(艮).
추구(芻狗) : 예전에 중국에서 제사 지낼 때 쓰던, 짚으로 만든 개. 제사 후에 는 버림. 쓸데없이 되어 버린 물건(物件)의 비유(比喩)
유(猶) : 오히려. 차라리. 마치 ~와 같다. 마찬가지다.
탁(橐) : 전대, 풀무, 사물의 소리
약(籥) : 피리, 구멍이 셋 또는 여섯, 자물쇠, 열쇠, 잠그다, 채우다.
굴(屈) : 굽히다, 굽다, 물러나다, 베다, 자르다. 다하다. 없어지다.
유(愈) : 더욱, 점점 더, 낫다, 뛰어나다, 병이 낫다.
삭(數) : 자주, 세다, 셈, 계산하다. 빨리. 빠르다. 빨리하다.
궁(窮) : 다하다. 끝나다. 그치다. 막히다. (이치에) 닿지 아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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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번역
천지는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와 같이 여긴다. 성인도 어질지 않아서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와 같이 여긴다.
하늘과 땅 사이는 마치 풀무와 피리의 가운데가 비어 있는 것과 같다. 가운데가 비어 있어 다할 일이 없고, 움직이면 점점 더 바람과 소리가 나온다.
말도 너무 많으면 (풀무와 피리의 빈공간이 찌꺼기에 의해 막히는 것처럼) 자주 막히게 되니, 가운데 빔을 지키는 것만 같지 못하다.
(3) 해설
이번 장은 세 단락으로 나누어 해석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중간 단락만 죽간(초간)본에 있어서 처음 단락과 끝 단락은 나중에 합쳐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중간 단락은 “하늘과 땅 사이는 마치 풀무와 피리의 가운데가 비어 있는 것과 같다. 가운데가 비어 있어 다할 일이 없고, 움직이면 점점 더 바람과 소리가 나온다”(天地之間 其猶橐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이다. 처음 단락(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에 나오는 인(仁)이라는 단어는 공자(孔子)가 많이 사용한 용어이며 도덕경에서는 비판적인 관점에서 주로 사용된다. 그래서 이번 장은 도덕경 해설가들 사이에 문맥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장을 완성시킨 사람이 나름대로 문맥을 잡아서 집필했다고 생각한다.
노자에게 있어서 천지(天地)는 유(有)의 시작이고, 이 하늘(天)과 땅(地)에서 만물이 나온다. 하늘과 땅이 만물을 만들거나 없앨 때 사사로운 정이나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고 노자는 말한다.(天地不仁) 천지는 여건이 갖추어지면 만물을 생성시켰다가 필요 없으면 소멸시킨다. 봄이 되어 새싹을 돋게 하지만, 가을이 되면 낙엽이 되어 떨어지게 한다. 산에 숲이 깊어지면 나무 사이의 간격이 좁아져서 바람으로 마찰이 일어나 산불이 일어나고 나무들은 재가 된다. 그리고 그 재를 거름으로 해서 또다시 새싹이 돋아난다. 산에 식물들이 어느 정도 자라서 동물들이 살 수 있는 여건이 되면 동물들이 자라고 번식한다. 그리고 그 동물들을 먹이로 하는 큰 동물들이 생성되고 이들로 먹이사슬이 형성되고, 먹이사슬의 정점(頂点)에 마침내 지성(知性)을 갖춘 인간까지 탄생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들이 노자가 말한 천지만물을 합쳐서 자연이라 부른다면, 자연은 스스로의 이치에 따라 움직여갈 뿐이다. 이 이치에 따라 흙과 돌, 물과 불, 식물과 동물 등을 생성 소멸시킨다. 그리고 태풍과 해일, 가뭄과 홍수, 지진과 화산 등 자연재해도 일어난다. 이것들이 일어날 때 인정사정(人情事情)이 없다.
그런데 지성을 가진 인간들은 자연의 이치를 연구하여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고, 그 발전된 기술로 인간에게 가장 유리한 쪽으로 자연의 방향을 바꾸고 있다. 이것이 문화이며, 이 문화를 소유한 인간집단을 문명사회라 한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문명사회는 자연과 멀어져 있다. 왜 그런가? 자연은 만물을 공평하게 대하지만 인간은 편협하고 치우치게 정과 친절을 베풀기 때문이다. 노자도 정을 나누고 친절하게 대하는 인(仁)이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 세상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은 안다. 그래서 8장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데는 인(仁)이 좋다(與善仁)”는 말을 한다. 그렇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집단 사람들 사이의 인(仁)이고 그 집단을 벗어나면 인(仁)의 실현이 잘 안 되는 한계가 있다. 집단 간의 투쟁을 막기 위해서는 인(仁)의 마음은 자신이 포함된 집단을 넘어서 만물에 미쳐야 한다. 인(仁)의 마음이 만물에 미치게 되면 만물을 공평하게 대할 수밖에 없으니 어느 특정한 사물이나 존재자에게 정과 친절함인 인(仁)을 베풀 수 없다. 그래서 천지(天地)는 불인(不仁)이다. 노자가 생각하는 성인(聖人)은 바로 모든 만물에게 공평하게 인(仁)을 베풀 수 있는 자이다. 따라서 사사로이 특정한 개별자나 집단에게 인(仁)을 베풀지 않는다. 따라서 성인(聖人)도 불인(不仁)이다.
노자는 천지와 성인을 함께 불인(不仁)이라고 하면서 만물과 백성을 각각 냉정하게 추구(芻狗)처럼 여긴다고 말한다. 그 이유를 풀무와 피리의 빈 공간을 들어서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들에게 빈 공간이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 만약에 빈 공간이 무엇인가로 채워지면 더 이상 바람을 일으킬 수 없게 된다. 마치 우리들 창자에 콜레스테롤이 채워지면 동맥경화 등의 병이 와서 오래 살지 못하니 빈 공간을 유지해야 하듯이, 비어 있는 공간을 그대로 두는 것이 좋음과 같다. 수도관이나 하수관이 막히는 것도 찌꺼기 때문이다. 찌꺼기가 한번 채이기 시작하면 계속 채여서 빈 공간이 줄여들다가 결국 막히게 된다. 그러면 뚫어서 사용해야 한다. 철로 된 파이프 경우에 녹이 쓸게 되면 쉽게 제거하기 어렵다. 유가에서 말하는 인위적(人爲的)인 인의예지(仁義禮智) 등을 노자는 관의 빈 공간을 채우는 찌꺼기와 같다고 본다. 빈 공간을 지속적으로 비워두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인위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인위적인 인의예지 등은 말을 통해 나타나고 행해진다. 왜냐하면 어떤 행위를 인(仁)이라고 규정하면 그렇지 않는 행위는 불인(不仁)이 된다. 그리고 어떤 행위를 의(義)라고 규정하면 그렇지 않는 행위는 불의(不義)가 된다. 예(禮)와 지(智)도 마찬가지다. 유가는 인간들로 하여금 정과 친절이 넘치는 따뜻한 세상에서 살도록 하기 위해서 교육에 열정을 쏟는다. 교육을 통해 어질게(仁), 의롭게(義), 예의 바르게(禮), 지혜롭게(智) 살아야 한다는 등으로 말했다. 이러한 내용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먼저 인의예지 등이 무엇인지를 규정해서 인의예지와 인의예지가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다보면 말이 많아진다. 이러한 말들이 빈 공간을 채우는 찌꺼기들이라고 노자는 보고 있으며, 그래서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게 된다(多言數窮)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행위를 쓸 데 없는 것으로 보며, 이것보다 가운데를 빈 공간으로 비워 놓아 지키는 만 못하다(不如守中)고 말한다.
노자는 인위적인 어짐(仁)이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으로 보았을 때 오히려 좋지 않다고 본다. 자연은 천둥, 번개, 폭풍, 가뭄, 홍수, 태풍 등을 일으키면서 여지없이 파괴시키기도 하는 등 냉정해 보인다. 그렇게 냉정해 보이지만 자연은 자연치유력을 발휘하여 가장 좋은 상태를 유지한다. 우리의 몸도 자연이다. 감기가 걸리고, 여러 가지 고통과 병 등에 노출된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자연치유력과 관련된다. 즉 가장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힘과 관련된다. 감기나 병이 있다는 것은 쉬어라는 자연의 명령이다. 에너지를 채우지 말고 비우라는 자연의 명령이다. 노자는 권력, 금력, 명예, 명성, 학벌 등으로 자신의 생명의 그릇을 가득 채우려고 하지 말고 상당량을 비워두라고 말한다. 비워야만 풀무로 바람을 계속 일으킬 수 있고, 피리를 계속 불 수 있듯이 자신의 삶을 계속 즐길며 수명을 다할 수 있다.
(4) 문제제기
노자가 67장에서 말한 보물 중 첫째가 자애(慈愛)이다. 이것은 인(仁)과 유사한데 어찌 5장에서 성인은 인하지 않다(聖人不仁)고 했는가?
2. 성인이 백성을 추구(芻狗)처럼 사용하다가 버리는 것은 토사구팽(兔死狗烹) 과 같이 의리 없는 행위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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