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 간의 경쟁이 뜨겁다. 역사 속에서도 한 인물이 지명도를 높이고 대권을 잡아가는 과정은 작은 사건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원래 함흥 출신의 변방 무장이었지만, 그의 이름이 중앙에까지 알려지는 사건이 있었다. 1380년(고려 우왕 6) 왜적을 격파한 황산대첩(荒山大捷)이 그것이다. 황산대첩의 승리를 계기로 존재감을 널리 알린 이성계는 1388년의 위화도 회군으로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였고, 1391년 과전법(科田法)의 단행으로 고려 말 신료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확보한 후에 조선 건국이라는 대권을 완성할 수 있었다. 황산대첩과 그 승전을 기념해 세운 황산대첩비의 영광과 수난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1.황산대첩, 이성계를 주류로 진입시키다. 고려 말 이성계(李成桂:1335-1408)는 1380년 지리산 동북쪽인 운봉의 황산(荒山) 앞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전쟁 영웅의 자리에 올라섰다. 함흥 출신 변방의 장수가 중앙의 주류로 진입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고려 말에는 특히 왜구가 변방을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는 일이 잦았다. 이때 일본은 1336년부터 시작된 남북조(南北朝)의 분열 시기였다. 막부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남해안 지역에 해적이 크게 일어났던 것이다. 남북조가 합일되는 1392년까지 60여 년 동안 왜구는 빈번하게 침범하였는데, 우왕 때는 무려 380여 차례나 침입해 왔다. 왜구가 계속해서 공격해 들어오자, 조정에서는 여러 장수를 보내어 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1380년 지리산 동북쪽인 운봉의 황산으로 쳐들어온 왜적은 특히 악명이 높았는데, 그해 8월에 지금의 금강 어귀인 진포(鎭浦)에 5백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왜구가 침입했다. 그들은 타고 온 배를 묶어두고 상륙해 충청ㆍ전라ㆍ경상 3도 연안을 약탈ㆍ방화ㆍ살육하였다. 9월에는 남원 운봉현(雲峰縣)을 방화하고, 인월역(引月驛)에 주둔하면서 장차 북상하겠다고 소리쳤다. 이때 삼도순찰사(三道巡察使)에 임명된 이성계는 변안열(邊安烈)과 함께 남원으로 가서 왜적과의 맞대결을 준비하였다. 이성계가 이른 아침에 적과 싸우려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적은 험한 곳에 의지하고 있으니,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려 싸우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태조는 “나라를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니 적을 만나지 못할까 두려워해야하는 것인데, 이제 적을 보고서도 치지 아니한다면 되겠느냐.”라고 하고, 동으로 운봉을 넘어 적과 수십 리를 두고 대치하게 되었다. 황산 서북쪽에 이르러 정산(鼎山)의 봉우리에 오르는데, 길 오른편에 험한 길이 있었다. 이성계가 험지에 들어서자 적이 날카로운 창을 가지고 튀어 나왔다. 태조가 화살 50여 발을 쏘아 적의 얼굴에 적중시키니, 활을 당기기만 하면 죽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태조실록』 총서에는 “태조가 하늘의 해를 가리켜 맹세하고 좌우에게 이르기를, ‘겁이 나는 자는 물러가라. 나는 적에게 죽을 터이다.’라고 하니, 장사들이 감동되어 용기백배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太祖誓指天日, 麾左右曰: ‘怯者退, 我且死賊!’ 將士感厲, 勇氣百倍.]”고 하여 이성계의 영웅적인 활약상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고려군을 가장 공포에 떨게 한 인물은 소년 장수 아기발도(阿其拔都)였다. 이성계는 측근의 장군 두란(豆蘭)과 연합하여 아기발도를 제거하고 승리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태조실록』총서의 기록을 보자.
적장 가운데 나이가 겨우 15, 6세쯤 돼 보이는 인물이 있었는데, 골격과 용모가 단정하고 고우며 사납고 용맹스러움이 비할 데가 없었다. 흰 말을 타고 창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돌진하니, 그가 가는 곳마다 휩쓸어 감히 당할 자가 없었다. 우리 군사들은 그를 아기발도라 일컬으면서 다투어 그를 피하였다. 태조는 그의 용감하고 날랜 것을 아껴서 두란에게 명하여 산 채로 사로잡게 하니, 두란이 말하기를, “만약 산 채로 사로잡으려고 하면 반드시 사람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아기발도는 갑옷과 투구를 목과 얼굴을 감싼 것을 입었으므로,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투구의 정자(頂子)를 쏘아 투구를 벗길 것이니 그대가 즉시 쏘아라.”고 하고는, 드디어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투구를 쏘아 정자(頂子)를 바로 맞히니, 투구의 끈이 끊어져서 기울어지는지라, 그 사람이 급히 투구를 바루어 쓰므로, 태조가 즉시 투구를 쏘아 또 정자를 맞히니, 투구가 마침내 떨어졌다. 두란이 곧 쏘아서 죽이니, 이에 적군이 기세가 꺾여졌다. 태조가 앞장서서 힘을 내어 치니, 적의 무리가 쓰러지고 날랜 군사는 거의 다 죽었다. 적군이 통곡하니 그 소리가 만 마리의 소 울음과 같았다. 적군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므로, 관군(官軍)이 이긴 기세를 타 달려 산으로 올라가서, 기뻐서 고함을 지르고 북을 치며 함성을 질러, 소리가 천지(天地)를 진동시켜 사면에서 이를 무너뜨리고 마침내 크게 쳐부수었다. 냇물이 모두 붉어 6, 7일 동안이나 빛깔이 변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가 없어서 모두 그릇에 담아 맑기를 기다려 한참 후에야 물을 마시게 되었다. 말 1천 6백여 필을 노획하였고 병기(兵器)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 처음에 적군이 우리 군사보다 10배나 많았으나 오직 70여 명만이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 [有一賊將年纔十五六, 骨貌端麗, 驍勇無比。乘白馬, 舞槊馳突, 所向披靡, 莫敢當。我軍稱阿其拔都, 爭避之。 太祖惜其勇銳, 命豆蘭生擒之。 豆蘭曰: “若欲生擒, 必傷人” 阿其拔都著甲胄, 護項面甲, 無隙可射。 太祖曰: “我射兜鍪頂子令脫, 汝便射之。” 遂躍馬射之, 正中頂子, 兜鍪纓絶而側, 其人急整之。 太祖卽射之, 又中頂子, 兜鍪遂落, 豆蘭便射殺之。於是賊挫氣。 太祖挺身奮擊, 賊衆披靡, 銳鋒盡斃。 賊痛哭, 聲如萬牛, 棄馬登山。 官軍乘勝馳上山, 歡呼皷譟, 震天地, 四面崩之, 遂大破之。 川流盡赤, 六七日色不變, 人不得飮 皆盛器候澄, 久乃得飮。 獲馬一千六百餘匹, 兵仗無算。 初賊十倍於我, 唯七十餘人, 奔智異山。]
위의 기록에서는 처절했던 당시의 전투상황을 읽어볼 수가 있다. 이성계가 아기발도의 투구를 쏘아 맞혀 투구를 떨어뜨리자, 동시에 두란이 재빨리 그를 사살하였다. 두란은 원래 여진족 출신으로 ‘쿠룬투란티무르’라 불렸으나, 고려에 귀화한 후 이씨 성을 하사받고 이지란(李之蘭:1331-1402)이라 이름 하였다. 이지란을 통해서 역사 속 귀화인의 활약 사례를 볼 수가 있다. 황산대첩의 승리는 아군보다 10배나 많은 왜적을 격퇴했다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 큰 승리였다. 왜적은 겨우 70여 명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이라고 하는데, 이성계의 황산대첩은 최영의 홍산대첩(鴻山大捷)과 함께 왜구 토벌의 일대 전기를 마련한 중요한 전투였다. 이제 이성계는 중앙 정계에도 그 이름을 부각시키면서 새로운 지도자의 길로 한 걸음 더 전진할 수 있게 되었다.
2. 우여곡절이 많았던 황산대첩비 황산에서의 뜻 깊은 전승을 기리기 위해 이성계는 다음해인 1381년 이곳을 찾아와 암벽에다가 전투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새겨두었다. 그리고 황산대첩이 있은 지 약 200여 년이 지난 1577년(선조 10)에는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朴啓賢:1524-1580)의 건의로 지금의 운봉읍 화수리(花水里)에 황산대첩비가 세워졌다. 황산의 지명이 바뀌어 그때의 승전이 잊혀져가니, 비석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왕명으로 세우게 된 것이다. 이후 황산대첩비는 조선인들의 자긍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19세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1762-1836)도 황산을 지나다가 황산대첩비를 보고 그 감회를 기록하였다.
위의 황산대첩비 한 첩(帖)은, 곧 우리 강헌대왕(康獻大王)이 잠저(潛邸) 시절에 왜구를 정벌하러 나가 남원의 황산 골짜기에서 왜장 아기발도를 죽이고, 드디어 큰 승첩을 거두었으므로 비(碑)를 세워 그 공적을 기록한 글이다. 옛날 내가 황산을 지나다가 이 비문(碑文)을 읽어 보고 또 아기발도와 치열하게 싸웠다는 곳을 보았는데, 대체로 깊고 큰 골짜기로서 숲이 우거진 험악한 지역이었다. 왜인은 본디 보전(步戰)에 익숙하였고 우리는 보전에 약하였는데, 더구나 그런 산골짜기에서는 말을 달릴 수가 없는데도 승첩을 거두었으니, 그 승첩을 거둔 것은 신통한 무용(武勇)에서 온 것이지 단순한 인력으로 된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왜인들이 계곡에 피를 많이 흘려서 계곡의 돌빛이 지금까지도 빨갛게 물들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이는 본래부터 붉은 돌이지 피로 물들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찍이, “남도(南道)의 관방(關防)은 운봉이 으뜸이고 추풍령이 다음이다. 운봉을 잃으면 적이 호남을 차지할 것이고, 추풍령을 잃으면 적이 호서(湖西)를 차지할 것이며, 호남과 호서를 다 잃으면 경기가 쭈그러들 것이니, 이는 반드시 굳게 지켜야 할 관문인 것이다.”고 논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아기발도가 운봉을 넘어오지 않았더라면 성조(聖祖:이성계)께서 어찌 그와 같은 노고를 하였겠는가. 조령(鳥嶺)은 천연적인 요새지이니, 그대로 두는 것이 더욱 견고할 터인데, 무엇 때문에 성(城)을 만들었단 말인가?」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제14권 「발황산대첩비(跋荒山大捷碑)」) [右荒山大捷碑一帖。卽我康獻大王在龍潛時。出征倭寇。至南原荒山之谷。殲阿只拔都。遂獲大捷。建碑紀功之文也。昔臣過荒山讀此碑。觀與所謂阿只拔都酣戰處。蓋深豁鉅谷叢林幽險之地也。倭人利於步。而山谿不可馳馬。其勝取神武。非人力也。世稱倭人血流谿谷。石色至今染赤。視之蓋本赤石。非故血染而然也。臣嘗論南路關防。以雲峯爲首。而秋風嶺次之。雲峰失則賊得湖南。秋風失則賊得湖西。兩湖失則畿甸蹙。此必爭之門也。向使阿只拔都。不踰雲峯。聖祖豈若是勞苦哉。若鳥嶺天險也。廢之益鞏。何以城爲。]
▶ 「동아일보」 1976년 10월 28일 기사
정약용은 당시 죽은 왜구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는 ‘피바위’가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이것은 과장된 얘기임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남원이 남도의 전략적 요충지임을 강조하고, 조령을 방어처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세태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였다. 일제강점 시기 일제의 대표적인 패전을 기록한 황산대첩비의 운명은 순탄하지 않았다. 일제는 민족혼을 말살시키기 위해 400여 년 동안 보존되어 온 이 암벽과 비석을 폭파시켰다. 1945년 1월 16일의 일이었는데,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의 인터뷰가 1976년 10월 28일 「동아일보」에 실려 있다. 기사에 따르면 밤에 술 취한 남원경찰서 고등계형사들이 몰려와 비석을 폭파하고, 암벽의 글씨도 정으로 쪼아 뭉개버린 뒤 총질까지 해 글자를 식별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1957년에는 파손된 부위를 짜 맞추어 옛 모습을 되찾고자 하였으나, 이미 심하게 파손되어 어찌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에 검은 대리석으로 원형과 똑같은 비를 다시 만들어 대첩비각(大捷碑閣) 안에 보존하였고, 폭파된 비석 파편은 파비각(破碑閣)을 세워 그 안에 한데 모아 놓았다. 황산대첩비에서 50미터 쯤 올라가면 바위 한 면을 기둥으로 삼은 어휘각(御諱閣)이 있다. 원래 어휘각에는 황산대첩 후에 이곳을 찾은 이성계가 승전을 기념하여 자신의 이름과 전투에 참가한 장수의 이름을 새겨 놓은 글자가 있었지만, 일제는 이 글자도 모두 뭉개 버렸다. 고려 말 여진족, 왜구, 홍건적 등 외적의 침입이라는 위기의 시기에 변방인 함흥의 장수에서 출발하여 민족의 영웅으로 부상한 이성계. 황산대첩은 그의 이름 석 자를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었고, ‘황산대첩비’는 일본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표시하는 기념비였다. 승리의 상징이었지만 일제에 의해 비석이 파괴되고 비문까지 훼손된 황산대첩비를 통해 역사의 기억들을 정리해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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