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교의 특성화고 고3 취업 문제에 대해서는 제주교육청, 언론도 정부도 시민사회도 관심도 대책도 없다.학교와 학생, 학부모들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지금까지 매년 5~10% 극소수 취업율을 부풀리고 전망이 좋다고 여론을 확대 호도하며 예비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기만하여왔다.
그래서 제주고등학교 고3 학생들은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을 취득하기보다는 대학 진학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특성화고의 경우 취업률이 학교 지원금에 반영되고 이는 신입생 및 재학생들에게 그만큼 복지나 학습지원에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에 학부모들과 학교 측은 취업률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취업을 생각하고 들어왔지만 대학 진학에 대한 생각으로 진로가 바뀌게 되고 진학을 위한 여러 방법의 특성화고 전형, 학생부 전형 등 있지만 학교에서는 무조건 취업을 하라는 분위기여서 선생님들한테 도움을 요청하거나 정보를 얻기가 쉽지가 않다.
취업목적의 전문기능·기술 인재를 양성하는 제주고가 취업 실적이 없는 학교로 전락되고 있다.
현실과 동떨어진 미래 없는 교육만을 강요하고 있어, 더 이상 특성화고 체제 유지도 어려운 실정이다.
누구를 위한 교육인가?
특성화고는 사실상 비정규직 취업 사관학교에 불과하다고 지적들을 한다.
졸업자의 취업률에만 매달리는 학교와 이를 방치한 교육 당국이 자초한 일이라는 분석이다.
문제는 고졸 취업시장에 나온 특성화고와 일반계고교 졸업생들의 급여,복지등 차이가 없고 전공과목과 연계된 경쟁력이 확보된 제주지역사회의 양질이 취업은 사실상 어렵다고 보아야 한다.
졸업생들이 사회에 진출해 보니 임금격차, 업무분장 차별 등 직장 내 고졸과 대졸, 각 분야에 뿌리 깊은 차별이 존재하여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선취업 후진학 대학문을 노크하여 도전하는데, 학과 개설이 적거나 없는 이유로 타전공학과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을 격고있으며 대학입학은 특성화고에서 배우고
노력했던 것과는 또 다른 진로를 다시 시작해야하는 고충이 따른다.
이러한 편법 교육 혼란이 가중되는 마당에 해결 대안 없이, 제주고 교정 안에 또 다른 인문계 고교 신설을 발표했습니다.
얼마나 제주고를 무시하고 업신여겼으면 사전에 어떤 협의 없이 일방적 통보하겠는가?
제주도교육청이 제주고를 바라보는 편협한 시각을 입증하고 있으며, 이를 강력히 규탄한다.
동지역 과밀학급 해소도 중요하나 현재의 제주고 폐해도 심각한 수준으로 균형 잡힌 시각과 판단을 통해 학습권 침해, 교육환경 파괴, 중지요구에 제주교육청 스스로 편견, 편가르기 정책 중단 하고 제주고 문제에 적극나서 근본적인 대안과 대책을 수립 해야 한다.
현재의 제주고 내면을 보면 특성화고를 포기하고 대학 진학에 올인하고 있는 일반고와 다름없는데 또 다른 인문계 고등학교를 제주고 교정에 세운다면 제주고 학생들은 어떻게 하란 소리인가?
제주고 교정 안에서 대학을 진학하기 위한 일반고, 특성화고 2개교가 경쟁해야 한다는 것인데 시작부터 불공정하게 출발하게 될 것이며, 상대적으로 교육격차에 의한 박탈감과 위축감, 공교육 붕괴에 교육 불평등 심화의 결과물은 오롯이 청소년기 학생들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 예상되어 "교육기회 만큼은 평등한 출발선에서 시작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을 하고있는 것이다.
우리 헌법 제31조 1항은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돼 있다.
교육평등권 위배, 교육 불평등 격차 해소 개선 의무 주체임에도 불구하고,교육청이 이를 조장하고 차별화하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대학입시를 치르기도 전에 교육불평등을 경험해야 하고 ‘불확실한 미래’ ‘희망고문’을 먼저 배워야하는 젊은 청춘들, 상황이 답답한 현실로 가고 있다.
미래의 제주고는 사면초가 고립에 둘러싸여 질식될 지경이다.
제주고등학교 미래는 특성화고 폐지, 일반고 전환시켜 제주 동지역 학생들과 제주고 학생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혁신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제주고 교실을 증축, 일반고 인원 흡수와 특성화고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면 현재의 학과 규모를 축소, 전문화시켜 양질의 교육과 집중적인 투자를 통해 제주관광 산업에 필요한 인재를 육성시킬 수 있는 직업반설치와 함께 대학진학 교과 과정 설치 운영되는 종합고등학교와 같은 실질적인 대안 교육이 요구된다.
시대의 가치 변화에 따라 유연한 교육 설계가 되어야 하며 즉시 반영이되어야 한다.
제주교육과 제주고 미래를 어둡게 하는 비현실적이고, 비교육적인 교육환경 강요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제주도 교육청은 제주고 구성원들 요구에 응답해야 할 것이다.
이를 부정하거나 외면하면, 제주도민과 연대한 여론, 지속적이고 강력한 저항에 직면할 것임을 경고합니다.
Joan Baez ~ Donna, Donna
Donna, Donna는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에 저항할 줄 모르고 자유의 소중함을 모른 채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비판하는 노래로, 인간의 삶을 시장에 팔려가 도살당하는 송아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On a waggon bound for market
there`s a calf with a mournful eye.
High above him there`s a swallow,
winging swiftly through the sky.
How the winds are laughing,
they laugh with all their might.
Laugh and laugh the whole day through,
and half the summer`s night.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Stop complaining! “ said the farmer,
Who told you a calf to be?
Why don`t you have wings to fly with,
like the swallow so proud and free? “ + Chorus
Calves are easily bound and slaughtered,
never knowing the reason why.
But who ever treasures freedom,
like the swallow has learned to fly.
슬픈 눈빛을 한 어린 송아지가
시장을 향해 달리는 마차 위에 있네.
그 위로는 하늘을 가로질러 쏜살같이
나르는 한 마리의 제비가 있네.
바람은 어떻게 웃을까요
있는 힘을 다해 그들은 웃지요
여름밤의 반나절을..
도나, 도나, 도나,
불평일랑 그만하고 농부에게 말해요
네게 누가 송아지가 되라고 했나.
너는 왜 자랑스럽고 자유스럽게 날 수 있는
제비와 같은 날개를 갖지 못했나.
바람은 어떻게 웃을까요
있는 힘을 다해 그들은 웃지요
여름밤의 반나절을..
도나, 도나, 도나,
쉽게도 송아지들은
자유를 잃고 도살을 당하지.
왜 그래도 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네.
하지만 누구라도 자유는 소중하게 생각하지
마치 제비가 하늘을 날면서 배운 것처럼
바람은 어떻게 웃을까요
있는 힘을 다해 그들은 웃지요
여름밤의 반나절을..
도나, 도나, 도나,
중학교 음악 교과서에도 수록된 이곡은 시장으로 팔려가는 송아지의 슬픔을 표현한 노래인 것 같지만
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인 작사가의 아내와 두 아들이 나치에 의해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는 모습을 노래한 것이죠.
원곡에 표기된 ‘도나’는 소를 몰 때 '이랴'로 해석이 되지만,‘Donay’로 아드 나이(히브리어로 주(主)여)를 위장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1960년 존 바에즈(Joan Baez)에 의해 녹음된 버전으로 인기를 끌어 널리 알려져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불리게 되었다.
존 바에즈는 밥 딜런의 음악 동료이자 연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권운동가이자 반전 평화 운동가였죠.
젊은 시절 지성과 미모와 하늘이 내린 목소리를 지니고 높은 인기를 얻었던 존 바에즈.
명문 보스턴 대학 출신의 지성적인 가수이자 70년대 저항운동의 기수였던 밥딜런과 함께 포크 가수로
유명한 조운 샨도스 바에즈(Joan Chandos Baez)는 1941년 1월 9일 미국 뉴욕의 스태이튼 아일랜드(Staten Island)에서
멕시코 출신 물리학자인 아버지 알베르트 바에즈(Albert Baez)와 스코틀랜트 출신의 어머니
존 브릿지 바에즈(Joan Bridge Baez)의 세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희곡 작가이자 교사였고, 아버지는 물리학자이자 유네스코(UNESCO)의 콘설턴트 일도 맡아
미국은 물론 전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연구하는 일을 해야했기 때문에 어린 존 바에즈는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바에즈는 아버지가 멕시코계라는 이유와 그녀의 갈색 피부로 인해 인종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고,
그녀의 아버지는 핵물리학자로 여러 방위산업체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는 유능한 인재였지만 핵무기에 반대했기 때문에
이런 제의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바에즈가 반전평화운동가이자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게 된 데에는
이런 아버지의 영향과 어릴 때 환경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아름답고 맑은 미소를 간직한 바에즈.
그녀가 가수로 한창 활동했던 1960년대는 정치적 사회적 격변의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그녀의 노래는 사람들에게 한 줄기의 빛이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로 유명한 1963년 워싱턴 평화 대행진. 당시 스물두 살에 불과했던 존 바에즈의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바에즈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저항운동에 동참했습니다. 무장한 경찰들이 포위해도 두려워하지 않았죠.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비폭력주의를 지키면서요. 감사합니다.”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자
존 바에즈는 반전 운동과 징병 거부 운동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로 인해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1972년에는 베트남 하노이를 찾아가서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미국 전역에 알렸죠. "음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음악이 전쟁터에서도 생명의 편을 들지 않는다면, 그 모든 소리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소용없지요.“ - 존 바에즈 존 바에즈는 그 뒤로도 수십 년 동안 내전과 분쟁으로 생명과 자유가 위협받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노래해 왔습니다.
존 바에즈는 아메리칸 포크계의 전설로서, 저항정신을 지닌 모범적인 실천가로서, 그리고 끊이지 않는 창의력과 삶에 대한
열정의 소유자로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