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31일
본문 : 창 12:10-20
제목 : 아브람의 실책
중심내용 : 약속의 땅 가나안에 기근이 임했다. 아브람은 아내와 롯과 함께 애굽으로 피신한다. 아브람이 아리따운 아내 사래로 인해 애굽인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누이로 속여 생명을 부지한다. 바로왕이 사래를 후궁으로 삼고 대신 많은 가축들을 하사품으로 아브람에게 내린다. 하나님께서 사래의 연고로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다. 바로왕이 사태의 전모를 깨닫고 아브람을 크게 책망한 후, 하사품과 더불어 아브람 일행을 애굽에서 내쫓는다. 신적 언약은 결코 파기될 수 없다.
명제 : 신적 언약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파기되거나 무효화되지 않는다.
설교목적 : 본문을 통해 아브람이 범한 몇 가지 실책과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가나안 땅에 임한 기근을 피해 애굽 행을 결정한 사건이다. 당시 가나안 지경은 아브람 언약에 근거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이었다. 따라서 아브람은 어떤 경우라도 아브람 언약에 근거한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과 인내를 발휘해 기근의 어려움을 감내하며 약속의 땅을 지켜야 했다. 나아가 당시 기근의 성격이 정황상 강수량 부족의 자연재해로 말미암았다면 향후 아브람 언약의 성취가 사람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의지로만 가능하다는 교훈을 깨달아야 했다.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에 성도의 역할은 단지 도구로 선용 될 뿐이다.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둘째, 사래를 누이로 속임으로 자신과 일행의 생명보존을 하나님이 아닌 사람(바로)에게 의지하려는 불신앙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성경은 우리의 도움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천명한다(시 121:1-8, 146:2-5). 셋째로 그런가 하면 아브람의 실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리심으로 아브람과 사래의 생명을 보존해 주시고 언약 파기의 위기로부터 저들을 안전하게 구원해 주신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사실과 언약 성취에 신실하신 하나님, 그리고 당시 아브람의 생애가 아브람 언약에 근거해 철저히 인도와 다스림을 받고 있음을 재확인시켜 준다. 본 기근 사건은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로부터 하란을 거쳐서 가나안으로 인도해 주신 사건(창 12:4-9, 히 11:8)에 이어서 다시 한번 아브람으로 하여금 언약 성취에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관과 신지식에 큰 진보를 안겨준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이는 현대교회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원리와 경험으로 적용된다(갈 3:13-14, 28-29절).
I. 도입 : 아브람의 믿음의 실족
1. 아브람이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도움으로 말미암는 믿음의 승리 사건이었다(창 12:4-9, 히 11:8). 반면 가나안 땅에 임한 기근으로 인해 아브람이 애굽으로 떠난 사건과 생명보존을 위해 아내 사래를 누이로 속인 사건은 하나님을 불신한 믿음의 실족 사건이었다.
2. 더구나 바로가 사래를 후궁으로 삼게 될 경우 아브람의 후손들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시겠다는 아브람 언약(창 12:2)은 파기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사래의 연고로 바로의 집에 내린 하나님의 재앙은 아브람 언약을 안전하게 보전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표명된 사건이다.
3. 바로는 사태의 전말을 깨닫고 아브람을 크게 꾸짖었으나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서둘러 아브람 일행을 많은 가축과 함께 애굽에서 추방한다(20절). 아브람은 바로의 꾸중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적 책망과 징계를 받은 셈이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보다 진전된 신관과 신지식에 접촉되는 절호의 계기가 되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모름지기 성도가 경험하는 고난과 시련은 성도를 연단해 성숙으로 이끄는 방편으로 작용한다(약 1:2-4). 인내가 요구되는 이유다.
Ⅱ. 전개 : 아브람의 실책을 선용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의 손길(10-20절)
1. 약속의 땅 가나안 지경에 임한 기근(10절상)
(1) 아브람 일행이 정착한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임했다(10절). 성경에는 기근에 관한 기사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성경에 기록된 기근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우선 자연재해의 일환으로 발생하는 경우다. 애굽의 바로왕이 칠 년 풍년과 칠 년 기근을 의미하는 꿈을 꾸었다(창 41:29-30, 56절)). 요셉이 이를 해몽하는 과정에서 후에 애굽 전역과 인근 지역에 걸쳐 임하게 될 칠 년 기근은 정황상 자연재해의 성격을 띤다. 특히 고대 팔레스타인(가나안 지경) 지방은 관개시설의 열악함으로 흉년으로 인한 기근이 종종 일어나곤 했다(창 26:1).
(2) 사람의 범죄로 인해 기근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다윗 시대에 삼 년 기근이 있었다. 성경은 이때의 기근의 성격을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삼하 21:1)고 기술한다. 기근은 죄에 대한 징계인 셈이다.
(3) 하나님께 대한 불충과 불순종의 대가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임할 재앙 중 기근의 재앙이 포함돼 있다(신 28:15, 47-48절, 대하 7:13-14).
2. 기근으로 인해 애굽 행을 택한 아브람의 실책(10절하-13절)
(1) 애굽 행을 택한 아브람의 믿음의 실족(10절하)
아브람 일행은 기근을 피해 남방에 위치한 애굽으로 피신한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지 못한 불순종의 처사다. 가나안은 약속의 땅이다. 가나안을 떠나는 행위는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는 행위가 성립된다. 아브람은 어떤 경우라도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며 가나안 지경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아브람은 생명보존이라는 현실적인 필요를 좇아 애굽 행을 결행했다. 사람의 생명이 떡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의 표명인 말씀에 있음을 외면했다(마 4:4, 신 8:3). 이뿐만이 아니다. 아브람은 아리따운 아내 사래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자신의 신변안전을 염려해 누이라고 속이며 비열한 행동까지 서슴지 않았다(11-13절). 죄의 왕 노릇하는 권세는 또 다른 죄를 동반한다. 아브람의 믿음이 한순간에 추락하는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언제 마귀가 틈타(벧전 5:8) 실족할지 모르는 것이 우리의 연약한 모습이다. 오늘도 우리가 여전히 믿음 안에 머무르며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고전 15:10, 행 17:28상).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이기는 능력으로 기능한다(롬 6:14).
아브람의 실패를 통해 성도의 신앙이 항상 상향곡선만을 그릴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신앙의 여정 속에 도사리고 있는 예측 불가한 여러 환경적인 요인으로 인해 항상 상승일로의 믿음의 상태를 유지할 수만은 없다. 등락이 있고 굴곡이 있게 마련이다. 성경 속의 여러 믿음의 선진들의 생애를 통해 얼마든지 이런 연약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아담 부부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노아, 롯, 모세, 다윗과 솔로몬, 엘리야, 베드로, 바울 등 그들도 우리와 본질상 성정이 다를 바 없다(약 5:17상). 반면에 성도의 연약과 실패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절감케 함으로 전심으로 하나님 의존적인 신앙으로 인도하는 긍정적이고 교육적인 효과를 수반한다. 이로 인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의 도우심을 구하는 절호의 기회로 작용한다(시 18:1-3, 121:1-2). 아브람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아브람을 가나안까지 선히 인도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이후의 아브람의 생애를 통해 남은 약속도 성취시켜 주실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부르신 자들에게는 모든 일을 합력해 선을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 방식이기 때문이다(롬 8:28). 아브람은 이 점에 유의했어야 했다. 환경과 상황에 매이지 말고 열악한 환경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을 발휘했어야 했다. 이 부분에서 아브람은 실패했다. 믿음의 인내로 기근의 고난을 극복하지 못했다.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으로 잠잠히 주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도와 다스림을 구하는 일에 실패했다. 급기야 아브람은 기근을 피해 애굽 행을 결단한다. 기근이란 시련 앞에서 영적인 분별력과 통찰력을 잃었다. 단지 육신의 소욕을 좇아 기근을 피하는 데 급급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처소인 가나안에 남기를 거절했다. 하나님의 처소(가나안)에서 잠시 고난받기를 세상(애굽)에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어야 했다(히 11:25). 계시 의존적이고 섭리 의존적인 신앙관의 실상이 이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목적이 세속적인 행복과 안녕 및 현세 지향적인 소원성취와 성공추구에만 집중된다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시 119:71)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은 공염불에 불과할 뿐이다. 고난을 믿음의 인내로 감당할 때 영적 성숙의 척도로 작용한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약 1:2-4).
(2) 아내 사래를 누이로 속이는 아브람의 이기적인 처사(11-13절)
아브람의 영적 실패는 기근으로 가나안을 등진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만에 하나 아리따운 사래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생명의 위협을 피해 볼 심사로 아내를 누이동생으로 속이는 데서 영적 침체의 절정을 보게 된다. 자신의 생명보존을 위해 아내 사래의 입장을 무시한 채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아브람의 처사는 성도로서 하나님을 향한 불신과 불충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는 사람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집착하게 될 때 얼마나 이성적 판단력이 마비되며 영적 분별력과 통찰력이 약화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3. 사래의 위기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14-20절)
(1) 바로가 사래를 후궁으로 삼음(14-16절)
일행이 애굽에 도착하자 예상했던 대로 바로의 대신들이 아리따운 사래를 애굽 왕 바로에게로 인도한다. 바로가 기꺼이 사래를 후궁으로 맞아드린다. 바로가 사래로 인해 아브람을 후대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하사품으로 내어준다. 큰 위기가 아닐 수 없다. 만일 바로가 사래를 아내로 취한다면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아브람 언약의 실현은 파기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아브람 언약의 성취는 아브람과 사래 부부를 아브람 언약 성취의 당사자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창 17:15-16).
(2) 사래의 연고로 개입하시는 하나님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17-18절)
하나님께서 사래의 연고로 개입하셔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다(17절). 사래를 바로로부터 구원하심으로 아브람 언약 성취의 통로로 삼으시기 위함이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재앙인지 성경은 침묵한다. 바로가 자신에게 임한 재앙이 사래의 연고로 인한 것을 인식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하나님의 특별하신 간섭이 있었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사래는 결코 바로의 아내가 될 수 없다. 사래는 아브람 언약의 동반자다(창 12:2, 17:15-19, 21:1-2). 만일 사래에게 무슨 변고가 생긴다면 그것은 곧바로 아브람 언약의 파기를 의미하는 셈이다. 신적 언약의 특성상 이런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사래의 일에 서둘러 개입하신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사래는 바로의 손에서 안전하게 구출돼야 한다. 아브람의 씨를 잉태해야 하는 아브람 언약의 동일한 수혜자이기 때문이다(창 17:15-16).
(3) 바로의 책망과 아브람의 출애굽(18-20절)
바로는 사래의 일로 임한 하나님의 재앙에 놀라 아브람을 불러 크게 책망한다. 그러나 단지 책망으로 끝낸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대제국 애굽의 왕을 기만한 괘씸죄로 능지처참이라도 당해야 할 절체절명의 위기의 상황이다. 정황상 아마도 하나님께서 사래의 일로 바로의 집에 내린 재앙이 너무나 크고 두려웠기 때문일 수 있다(창 12:17). 바로 왕은 즉시 아브람과 그의 일행을 애굽에서 강제 추방시킨다. 이때 사래의 연고로 아브람에게 주었던 많은 사례물을 함께 보낸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의 배후에서 아브람 언약의 성취를 위해 섭리적으로 역사하신 결과다. 모름지기 신적 언약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중도 파기되거나 무효화되지 않는다.
Ⅲ. 결론 : 하나님은 모든 것(아브람의 실책)을 합력해 선을 이루신다.
1. 하나님은 만사를 기뻐하시는 뜻대로 섭리하시는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
2. 신적 언약은 어떤 경우라도 반드시 성취된다.
3. 성도의 생애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언약적 구속경륜에 의해 주도된다.
4. 언약적 구속사관에 입각한 언약 신앙관 정립의 필요성이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