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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張家園 원문보기 글쓴이: 愚山
안시성 전투 양만춘과 연개소문, 당태종 이세민의 고구려 침략을 막아!
당태종 고구려를 침략하다.
전쟁은 시간문제였습니다. 천하 제국으로 고구려를 당의 세력권에 넣으려는 당태종과 천손 자손으로 고구려의 독자적 천하관을 유지하는 연개소문 사이의 대립은 세계관의 차이였고, 이는 거대한 전쟁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연개소문의 반정 소식을 들은 당태종은 고구려 침략을 결심하였습니다. 당태종은 수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준비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이세적李世勣 같은 소수의 장수를 제외하면, 군신 대부분이 고구려 원정을 반대했습니다. 그래도 태종은 고집을 부렸습니다. 당태종이 보기에 고구려 막리지 연개소문은 단순히 당의 침략만을 막을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당을 멸망시켜 고구려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거대한 정치가였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선수를 쳐야 하고,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출진과 고구려 요동방어선 붕괴
드디어 645년 보장제 개화開化 4년 당태종은 다음과 같은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요동은 본래 우리 중국 땅이다. 수나라가 네 번이나 군사를 일으켰으나 그곳을 얻지 못하였다. 내가 이제 출병하여 우리 자제子弟들의 원수를 갚고자 하노라.
당태종 이세민은 직접 활과 화살을 메고 이정李靖과 함께 무장의 쌍벽이라 불리는 이세적李世勣을 포함해서 정명진程名振, 장손무기長孫無忌 등의 쟁쟁한 장수 60여 명과 수십만 정예병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습니다.
전략은 수륙병진책과 기동전이었습니다. 수양제隋煬帝가 엄청난 대군을 몰고 갔다면 당태종 이세민은 그보다는 못하지만 상당한 규모의 정예 병력만으로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당태종의 본군本軍 20만에 고구려의 눈이 쏠려 있을 때, 이세적군 6만과 장량의 수군 4만의 움직임은 전혀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당군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출몰하여 요동 지역의 지휘 체계와 연락망 협력 체제를 무너뜨리는 전법을 구사하였고, 초기에 이런 전략의 성공으로 고구려는 대혼란과 공포에 빠져들었습니다. 동시다발적인 파상 공세에 고구려의 요동 지역 수비선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습니다. 고구려는 개모성蓋牟城에 이어 수군 기지 비사성卑沙城이 당군에게 함락되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당태종을 잡을 큰 그림을 그린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침략 소식을 미리 알고 전국 비상대책 위원회를 소집하여 전략 회의를 열었습니다. 연개소문이 정한 전략은 이러했습니다.
요동성을 비롯한 안시성 등 굳게 지켜야 할 성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전통적인 청야淸野 전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이후 기회를 보아 진공하기로 하였고, 최후의 결전장으로 삼은 곳은 양만춘이 성주로 있는 안시성安市城이었습니다. 이 안시성의 후방 구원 책임은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와 오골성 성주 추정국鄒定國으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연개소문은 당군이 돌아갈 길을 차단하고 중원까지 진격하여 당태종을 사로잡을 계획이었습니다. 반드시 사로잡아 항복을 받아 내야 이 전쟁이 완전히 끝난다고 보았습니다.
반정 이후 연개소문이 세력 규합에 실패하였다면 대당 전쟁은 그가 몰락할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국운이 걸린 중대한 문제 앞에 군부와 민심은 그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 민족의 일치된 힘으로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하다는 당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통쾌한 대승을 거둠으로써 고구려의 자존과 자긍심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치열하게 전개되는 요동 전역戰役
안시성 유인의 기본 전략
고구려는 수양제의 백만 대군을 막아 낸 난공불락의 성인 요동성을 1차 저지선으로 삼아 전열을 정비하였습니다. 하지만 평지성平地城이었던 요동성은 당군이 끌고 온 공성 무기의 입체적 공격과 때마침 불어 오는 강풍을 이용한 화공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백암성 성주 손대음孫代音의 항복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 항복으로 빈틈을 타서 반격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연개소문은 지켜야 할 곳과 반드시 사수해야 할 곳을 미리 정해 두고, 당군을 안시성으로 유인한다는 기본적인 작전을 지켰습니다.
15만 안시성 지원군의 진실
그래서 북부 욕살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 등에게 말갈군을 포함한 15만 대군을 거느리게 해 당군과 안시성 근처에서 일대 회전을 벌이게 합니다. 이른바 주필산 전투로 알려진 이 일에 대해 기존 사료에서는 고구려군이 대패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환단고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이때 고구려 구원군은 안시성과 연결되는 보루를 쌓고, 당군에게 지구전을 펼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북부 욕살 고연수가 군사를 이끌고 전진하여 안시성으로부터 40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러 대로 고정의高正義에게 대책을 물었습니다. 이는 고정의가 연륜이 깊어 일 처리에 능숙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고정의의 계책은 이러하였습니다.
“세민이 안으로 군웅群雄을 제거하고 나라를 차지하였으니 역시 범상한 인물이 아니오. 지금 모든 당나라 군사를 이끌고 왔으니 그 예봉銳鋒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오. 우리 계책은 병력을 움직이지 말고 싸우지 않으며, 여러 날을 끌면서 기습 부대를 나누어 보내 군량을 운반하는 길을 끊는 것이 가장 좋소. 양식이 다 떨어지면 싸우려야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을 것이니, 반드시 이길 것이오.”
고연수 등은 그 계책을 좇아 당군이 오면 막고 물러가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습 부대를 보내 군량을 불태우거나 빼앗았습니다.
기존에 알려진 대로 주필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고 하면서, 당군은 두 달 동안 이 일대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전투에서 이겼다면 의당 그 여세를 몰아 진격해야 할 군대가 토산을 쌓는다 어찌한다고 하면서 안시성 공략에 진땀을 흘리는 것만 보아도 주필산 전투는 고구려의 승리였으며, 서전에서 작은 패배를 크게 부풀리거나 왜곡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이세민은 온갖 계략으로 맞섰지만, 허망하게 사상자만 늘어나고,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요동으로 출병하여 전쟁한 것을 한탄하고 후회하였지만,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의 흑기黑旗만 봐도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당군은 붉은 깃발[赤旗]을 사용하였고, 고구려는 검은색 깃발을 사용하였습니다. 검은색의 ‘검’은 신성神聖을 상징하며, 북방 수기 물[水]을 상징합니다. 이는 남방 화기인 붉은 색을 이기는 수극화水克火의 이치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당태종 최후의 발악, 안시성 전투
안시성은 고구려 태조열제 시대 당시 요동 정벌에 나선 후 서부 방면을 경영하기 위해 설치한 성으로 바다와 육지를 잇는 요새 중의 요새였습니다. 성벽을 높이 쌓고 정예병을 두었으며 수십만 석의 양식을 쌓아 둔 철옹성이었습니다. 여기에 성주 양만춘楊萬春(梁萬春)의 지도력과 군관민의 혼연일체가 된 단결력, 명분 없는 당군의 침공을 막아 내겠다는 결사 항전의 의지가 있었습니다.
안시성은 고구려와 당군 양측 모두에게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당태종에게는 조여 오는 포위망을 뚫고 고구려에 일격을 가할 마지막 결전지가 안시성이었으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늦여름부터 시작하여 겨울까지 계속된 당군의 파상 공세를 안시성은 막아 냈습니다. 당태종은 토산을 쌓다는 둥 여러 가지 꾀를 내었으나, 아무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즈음 연개소문은 어양에 남아 있던 정예군 3만을 이끌고 만리장성을 넘어 베이징北京 북쪽 상곡 등지를 급습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유약한 당의 태자 이치李治(훗날 당고종唐高宗)의 혼을 빼 놓아 국가의 위급을 알리는 봉화를 올리게 하였습니다. 당태종이 우려했던 일이 현실화되었습니다. 양만춘과 안시성 사람들은 갑자기 올라온 봉화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도망치는 적들을 뒤쫓아 가는 일뿐이었습니다. 마침내 당태종은 645년 9월 18일 철군하고 말았습니다. 표면적 이유는 양식이 다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고구려가 당의 보급로를 차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장량의 수군이 비사성 함락 이후 어떤 활약도 보여 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동안 점령된 성들이 고구려에 의해 다시 탈환되었음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요택으로 패주하는 당태종
당태종은 철군 길을 요하 하구, 즉 요택遼澤으로 잡았습니다. 굳이 이 길을 택한 이유는 다른 길은 이미 고구려군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는 연개소문이 돌아갈 길을 끊고, 뒤에서는 양만춘과 추정국 등의 추격대가 눈에 불을 켜고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요택은 ‘진흙과 물이 있어 마차가 통하지 못하는 곳’이며, ‘풀을 베어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삼았으며’, ‘당태종 스스로 말채찍 끈으로 섶을 묶어 진창을 메워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때 진흙탕에 빠지고 얼어 죽은 병사들이 속출하였고, 당태종 몸에도 등창이 생겼다고 합니다. 겨우 빠져나온 이들은 이정의 구원군이 당도한 뒤에야 가까스로 사지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당태종이 처한 상황이 매우 급했음을 알려주는 단서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베이징 조양문 밖에서 산해관에 이르기까지 황량대라는 지명이 10여 곳 있습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태종이 모래를 쌓아 양식을 저장해 놓은 곳처럼 꾸민 곳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쫓겨 가는 중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장사 지내기 위해 크고 작은 구덩이를 팠는데, 위에 흙을 덮으니 마치 돈대처럼 생겼다고 해서 적골대라고 하였습니다. 베이징 동쪽 적곡돈의 유래입니다.
이때 당나라 군대를 완전히 제압한 연개소문은 양만춘과 함께 당태종을 추격하었고 수도 장안에 입성하여 상당한 영토를 할양받았습니다. 이에 따라 산시성陝西省, 허베이성河北省, 산둥성山東省 등지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쟁 이후 변화하는 당나라의 대고구려 전략
고구려와 당나라는 동아시아 패권을 걸고 운명적인 대전쟁을 벌였고, 고구려가 승리하였습니다. 고구려 원정 후 당태종은 병상에 드러눕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안시성 전투 때 눈에 화살을 맞는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서도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한 야욕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당태종은 649년 5월 ‘고구려에 대한 한恨’을 품고 5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언은 요동의 전역戰役을 파하라, 즉 고구려 침공을 그만두라는 것이었습니다. 당대의 영웅이지만 말년에 고구려를 침공하여 후회와 치욕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당은 고구려에 대한 전략을 새로 세웠습니다. 수시로 고구려를 침입하여 고구려가 항시적인 전시 상태를 유지하게 함으로써 국력을 서서히 소진시키는 전략을 구사하였습니다. 제국 전역에서 징발한 압도적인 물자를 바탕으로 한 국지적인 소모전과 요동을 우회한 상륙전 등으로 고구려의 국력 고갈을 시도했고, 실제로 많은 전투가 평양성 근처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연개소문이 사망한 후, 연개소문 아들끼리의 다툼과 내분을 이용해 668년 마침내 평양성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영웅의 퇴장과 고구려 멸망
당나라의 첫 침략 이후에도 계속되는 당의 도발을 막아 내며, 고구려의 절대 권력을 행사한 연개소문은 657년 10월 7일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묘는 운산의 구봉산에 있었습니다. 이후 660년 7월 백제가 당군 13만과 신라군 5만으로 구성된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면서 정세는 급변하였습니다. 서쪽과 남쪽으로부터 동시에 공격을 받게 된 고구려는 이에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웠습니다. 662년 정월에는 평양 부근 사수蛇水에서 당의 장수 방효태龐孝泰와 그 아들 열세 명을 포함한 당군 전원을 몰살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사서에서는 이 사수 대첩의 주역이 연개소문으로 나오기 때문에 연개소문의 사망 시기를 665년 이전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아무튼 백제가 망하고 고립된 상황에서도 고구려는 당의 대군을 맞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워 이겨 내는 투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부재는 국력 통합의 구심점에 공백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그의 장남과 동생들 간의 권력 투쟁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막리지 지위를 이은 큰아들 남생은 동생들과 분쟁을 벌이다가 적국인 당에 투항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는 신라에 투항하였습니다. 이런 연씨 집안의 싸움은 천 년 제국 고구려의 멸망이라는 파국적 결말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나라가 망하느냐 존속하느냐 하는 비상시국에서 고구려의 자존을 지키며 존속을 이루어 낸 지도자였음은 분명합니다. 이런 그를 단재 신채호는 우리 4천 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역주본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이덕일의 한국통사』(이덕일, 다산북스, 2020)
『광개토대왕이 중국인이라고』(월간중앙 역사탐험팀,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2004 )
『당 태종이 묻어버린 연개소문의 진실』(신영란, 작은키 나무, 2006 )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황원갑, 인디북, 2004)
연개소문에 관한 포스팅입니다. 참고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