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이 법당인 와우정사 (4)
수원사람 김성채
대각전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셨을 때의 모습을 모신 전각입니다. “대각전”이라는 명칭을 지닌 법당은 어느 사찰에서도 본적이 없지만, 건축의 생김새도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한 특이한 형태입니다.
대각전
입구는 보리수나무를 본뜬 네 개의 돌기둥 위에 돔 형식의 지붕이 올려졌고 그 지붕위에 돌로 조각한 연꽃을, 연꽃 위에는 한옥 모임지붕에서 볼 수 있는 절병통을 곧추세우고, 법륜을 올렸습니다. 동그랗게 파낸 천장에는 부처님께서 위없는 진리를 깨우치셨음을 온 누리에 알리려는지, 축하드리려는지 알 수 없지만 세 명의 선녀들이 비파와 작은북 그리고 긴 나발을 연주하며 하늘을 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대각전의 천장 그림
기둥만으로 세워진 입구를 지나면 팔상성도와 같은 내용이 새겨진 검은 돌 판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곱게 갈아 매끈해진 여덟 장의 오석 표면을 세밀하게 두드려 그려낸 출가, 수행, 항마, 성도, 오비구, 열반도는 방금 전에 보았던 팔상성도와는 또 다른 경외심을 갖게 합니다.
오석에 표현 된 팔상성도
병풍처럼 둘려있는 오석을 지나면, 깨달음을 얻고자 생사를 넘나드는 6년간의 고행으로 피골이 상접한, 해골과 별로 다르지 않은 부처님의 모습이 하얀 옥돌로 조각되어 모셔져 있습니다.
“대각전”이라 이름의 전각을 다른 사찰에서 본 적이 없듯, 석가모니부처님의 고행상도 다른 곳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극단의 고행도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게 된 부처님은 보리수나무 아래로 자리를 옮겨 깊은 명상에 드시고, 드디어는 그렇게나 원하시던 무상보리의 정각(正覺)을 얻게 되십니다. 고행상은 바로 그때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머리뼈 속으로 꺼져 들어간 눈, 뼈와 가죽만 남은 팔뚝, 드러난 갈비뼈 위를 지나는 핏줄, 등에 붙어버린 배 등 세계 어떤 유명한 조각가도 이렇게 처참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부처님 같은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구 역사에 ‘생사를 걸어놓고 도를 깨우치려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아시아가 아닌 지역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어서, 이런 작품은 부처님을 뵙고, 가르침을 받고, 가르침을 따르는 아시아 지역의 불교미술에서만 탄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행상
‘부처님을 모신 전각(대각전)이다’고 하였지만 말만 전각이지 산기슭을 파낸 “움막”이 맞는 표현이고, ‘입구는 기둥과 지붕을 가졌다’했지만 움막으로 들이치는 비를 피하기 위해 만든 “차양”이라 함이 맞을 듯합니다. 부처님께서 이루신 정각이 평안한 집안에서가 아니고 보리수나무 밑에서인 까닭에, 이를 상징하고자 ‘샛별을 볼 수 있는, 노천이나 다름없는 이런 모습으로 꾸몄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열반전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신 모습의, 연잎위에 오른팔을 베고 옆으로 누워계신 모습의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전각입니다. 전각이라 이름 붙였지만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셨음을 나타내고자 한 때문인지, 대각전과 마찬가지로 산기슭을 파낸 움막의 형태입니다.
‘존엄한 자세로 명상에 잠긴 모습의 부처님도 많은데, 왜 누워계신 부처님을 조성했을까?’하는 생각도 들지만, 모든 번뇌를 소멸시킨 모습을 나타내고자 할 때 지그시 눈을 감고 누워계신 형상보다 더 적합한 자세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른쪽 옆구리를 대고 누우신 모습으로 조각되었고, 평평한 두 발바닥에는 32상호를 나타낸 수레바퀴 문양의 법륜이 그려져 있습니다.
열반상. 인도네시아 향나무. 길이 12m
누워계신 부처님 “와불”은 길이가 무려 12m에 이르는데, 인도네시아에서 수행 중이던 한 인도스님께서 와우정사를 세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도네시아산 통 향나무를 보내주었고, 그 향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라 합니다.
금강역사
와우정사를 들어서며 와우정사에는 일주문과 사천왕문, 금강문이 없음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문은 세우지 않았다고 하여도 부처님을 수호하는 신장이 없어서는 안 되겠기에 와우정사에서 가장 중요한(?) 열반전 앞에 금강역사를 세워놓았습니다.
밀적금강과 나라연금강
열반전을 향해 오르는 계단 끝 왼쪽에는 밀적금강이,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이 서있습니다. 다른 사찰에 갔을 때 금강문을 들어서면서 목조각으로 된 금강역사를 볼 수 있지만, 와우정사 금강역사는 돌로 조각되었고 노천에서 강한 햇빛에 음영이 확연해 훨씬 강인하고 역동적인 형상입니다. 울퉁불퉁한 근육으로 굵어진 한 손은 곤봉과 칼을 잡았고, 한 손은 손바닥을 힘차게 펴 앞으로 내밀었는데, 계단을 오른 사람들을 검문하려고 멈춰 세우는 형상입니다.
동남아시아 불상
열반전 아래에는 한눈에도 동남아시아에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 불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부처님 모습이 나라마다 다른 것은 불교를 받아들인 역사와 그 나라의 문화, 토착 신앙 등이 기술이 다른 탓이겠지만 자기 민족의 유전자를 담아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태국 불상은 몸이 비칠 정도로 얇은 옷을 입으신 모습에 우견편단을 하고 계신데, 왼쪽 어깨에 걸쳐서 오른쪽으로 흘러내린 면으로 짜인 황금색 가사가 작은 바람에도 계속 흩날리고 있습니다. 이것도 우리나라 불상의 대부분이 양어깨에 통견의 가사를 걸치신 것과 다른 모습입니다. 또 부처님의 머리도 육계가 둥근 모양으로 봉긋한 모양이고 나발 중간에 계주가 있음에 비하여, 태국 불상은 육계가 뾰족하게 솟았고 계주가 보이지 않는 점도 우리나라와 다릅니다.
태국 왕실에서 기증한 금동불상
이 금동불상은 태국 왕실에서 기증한 불상으로 무게가 10톤이나 되고, 높이가 5미터를 넘는 까닭에 금동불상을 모실 새로운 법당의 건축이 필요하게 되었으나, 기발함을 발휘하여 스테인드 그라스 벽을 두른 집을 만들어 모셨습니다.
중세시대 성당에서 실내의 어둡고 침침함을 걷어내고자 사용되었다는 스텐인드 그라스는 호화스런 문양과 색깔로 사람들에게 신의 영광을 보여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 스테인드 그라스를 부처님을 모신 절집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고, 노란연꽃과 흰 연꽃과 녹색의 연잎, 맑은 물색이 조화를 이루었는데 새로운 불교문화가 탄생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와우정사 경내의 모습
와우정사는 도시와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불교테마 공원”이라 불러도 전혀 틀리지 않을 사찰입니다. 큰길가에 인접하였음에도 자동차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고, 차를 주차시킨 다음 홀가분하게 걸음을 옮기면서 이제까지 말씀드렸던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경내 곳곳이 법당이어서 가파르지 않은 언덕길을 걸으면서 자연스럽게 참배할 수 있고, 또 여느 사찰에서와는 다른 방향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게 합니다.
더 좋은 것은 경내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거나, 어느 곳에서 돌아보든지 바로 옆에서 수려한 나무와 아름다운 들꽃을 볼 수 있고 새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께서 방문하여 훌륭한 풍경을 즐기시고, 부처님의 가르침도 새롭게 하시고, 와우정사의 창건 목적인 대한민국의 평화통일이 앞당겨지기를 기원하셨으면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