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03 신입회원 추천작품-1>
밥 맛 김 경 애
나는 맛을 느끼며 식사를 한 횟수가 고작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드물다. 직장 생활을 해온 터라 시간에 쫓기고 일에 빠져 때우는 식사가 거의 전부였다. 결혼 후 줄곧 긴장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습관처럼 음식이 입에 들어가는 순간 목으로 넘어가 버린다.
몇 달 전 딸을 출가시키고 남편과 겸상을 하게 되었다. 오붓이 밥맛을 느끼며 즐거운 식사여야 할 텐데 그렇지 못했다. 앉아서 물, 컵 하며 남편이 자꾸 시키는 바람에 늦게 수저를 들어도 빨리 놓고 일어섰다. 그때부터 남편의 불평이 나왔다. 혼자 먹어서 밥맛이 없다는 둥 밥을 그렇게 빨리 먹으면 무슨 밥맛이 있느냐며 나를 식탁에 앉혔다. ‘밥맛은 무슨 밥맛’ 하며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부아가 치밀어 올라왔지만 오이 한 접시를 와삭와삭 씹어 먹으며 삭였다.
결혼 후 단 한 번도 다정하게 밥맛을 즐기며 식사를 해 본 적이 없어 둘만의 겸상은 어색했다. 신혼 시절에는 시조모를 모시고 시동생과 함께 살았다. 남편이 읍내로 통근하게 되어 이른 아침과 늦은 퇴근으로 식사를 함께할 수 없었다. 서툰 솜씨로 정성을 다해 차려놓은 반찬을 두고 시조모께서 개코같이 맛이 없다는 타박에 주눅이 들었다. 시조모와 마주한 식사 시간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밥맛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따로 살던 시어머니와 살림을 합쳤다. 식구가 자그마치 아홉에 손님이 두세 명 보태졌다. 퇴근 시간에 양손 가득 장보기를 하여 식사 준비를 해야 했기에 항상 마음은 바빴다. 시조모와 시어머니는 내가 직장을 핑계로 거드름을 피울까봐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 삼시 세끼를 부지런히 차렸지만 정작 조용히 앉아 밥 먹을 시간이 없었다. 늘 차려만 놓고 국에 말은 밥을 후루룩 넘기고 뛰어다니기 바빴다. 저녁식사는 느긋하게 먹을 수 있었지만, 숭늉을 만들어 가면 반찬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반찬으로 대충 배고픔을 면했다. 바쁜 일상으로 아침을 거르거나 컵라면으로 때우는 일이 다반사였고 항상 허기진 기분이었다.
이태 뒤 둘째 시동생이 사업에 실패하고 함께 살게 되어 세 식구를 보탰다. 안방을 어른들과 시동생들에게 내주고 문간방으로 내려앉으니 남편이 전보(轉補)희망을 신청 했다고 나에게도 권했다. 별생각 없이 낸 전보 신청이 받아져서 경산으로 오게 되었다. 말이 경산이지 하루에 새마을 버스가 편도 세 번밖에 다니지 않는 봉화보다 교통이 더 불편한 오지였다. 우리 식구끼리 오붓하게 살게 된 기쁨도 잠깐이었다.
진량까지 가기위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아침을 차려 놓고 여섯 시 반에 일반 고속버스를 탔다. 일곱 시에 고속버스에서 내려 진량고등학교 통학버스를 얻어 탔다. 통학버스는 오전 중에 학교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이조차 놓치면 택시를 타야 했다.
아침 대용으로 준비한 빵과 우유를 먹으면 속 쓰림과 설사가 동반했다. 점심은 도시락을 먹으니 맛보다 배고픔을 면하는 식사가 되었다. 퇴근하는 길에 위장약을 사 먹고 밥을 먹어야만 소화를 시킬 수 있었다. 보릿고개도 아닐 때 음식은 풍부하지만 모든 장기가 탈이나 마음대로 먹지 못해 배고픔을 겪어야 하는 고통은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체중도 40kg 달랑달랑했다. 조퇴해야 했지만 별난 상사의 허락받기가 그리 쉽지 않아서 병원에 갈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방학 때 내 몰골을 본 친정엄마에게 이끌리어 병원에 갔다. 양약을 먹을 수 없어 한방으로 몸보신을 겸한 치료를 했다.
몸도 마음도 좀 쉴 만하니 시조모와 시어머니를 다시 모시게 되었다. 아이들이 중, 고생이 되어 도시락 다섯 개씩 싸 놓고 원거리 출퇴근을 했다. 아침은 먹지 못했고 점심은 학교 급식으로 먹을 수 있었지만 아이들 위주의 식단이라 입맛에 맞지 않았다.
남편은 효손이었다. 휴일에 가족이 한자리에 앉아 식사할 때 조모에게 입에 맞는 반찬이 있느냐며 이것저것 조모 앞으로 밀었다. 아이들과 나는 맛도 볼 수 없었다. 그리고는 조모가 좋아하는 반찬을 해 드리라고 생색을 냈다. 조모가 외식하기 싫어해서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도록 가족끼리 외식 뿐 아니라 나들이도 한 일이 없다. 배달 음식도 시조모는 자장면만 드셨다. 그 외 다른 음식은 모두 맛이 없다고 하여 시킬 수가 없었다. 우리 아이들도 포기를 했는지 조르지도 않았다.
시어른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남편과 내가 퇴직을 하니 느긋한 식사를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혹이 따라붙었다. 손녀 돌보미가 되어 그 치다꺼리를 한 뒤에 밥을 먹어야 하므로 음식은 식었다. 또 손녀가 남긴 밥 처리로 내 입맛에 맞는 식사를 하지 못했다.
남편과 함께하는 첫 가족 나들이는 손녀의 유치원 운동회 날이었다. 도시락과 간식을 챙겨 돗자리위에서 야외식사를 했다. 남편은 맛있다며 기분 좋게 식사를 했다. 딸이 아빠랑 야외에서 처음으로 먹는 자리란 말에 남편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가끔 점심에 남편과 둘이 외식 할 때도 남편이 좋아하는 쪽으로 해서 입에 맞지 않지만 그냥 먹어야 했다. 남편은 아직도 내가 어떤 음식을 즐기는지 모르고 있다. 우리는 연인처럼 다정하게 식사를 하지 않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밥만 먹는 부부일 뿐이다.
나는 육류보다 채식을 좋아하며 고기를 좋아하는 남편과 식성이 전혀 다르다. 가끔 남편이 생색을 내며 고깃점을 밥 위에 얹어줄 때면 정을 느끼기보다 어색해서 밥맛을 잃게 된다. 이제까지 살아온 대로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성의를 무시한다는 짜증스러운 소리가 듣기 싫다. 더 나이가 들면 다정하게 밥맛을 음미하는 식사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
밥맛이라는 이 한마디가 지난날을 돌아보게 한다. 밥맛을 모르고 살아온 세월이 느껴져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 2023,03 신입회원 추천작품-2>
하얀 밤(夜) 까만 속(心) 김 경 애
섣달 그믐밤을 하얗게 세우고 서울 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눈물이 시야를 가려 차창 밖의 풍경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기차가 더 느리게 달리는 것 같아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간밤에 사위가 딸의 간을 받아 이식 수술을 했다. 둘은 결혼한 지 다섯 달 밖에 되지 않았다. 이십 대 후반인 사위가 급성 간 경화에 걸렸다. 조금 차도를 보이는 것 같았는데 급속히 악화가 되었다. 손 쓸 겨를이 없이 복수가 차고 간 혼수가 와서 장기가 모두 망가졌다고 했다. 간이식을 해도 살아날 희망은 미미하다고 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간기증자를 찾았다. 마침 젊은 지인이 기증한다고 해서 한 가닥 희망을 품었었다. 그런데 기증자가 수술 직전에 포기 했다. 사위의 목숨은 경각에 달렸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라 가족들을 검사했지만 모두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그나마 바깥사돈이 지방간이 있지만 이식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대기자로 딸을 선택했다. 병원 측에서는 가능성 있는 수술을 하기 위해서인지 보호자에게 상의도 없이 대기자인 딸을 먼저 수술실로 데리고 갔다는 연락이 왔다.
그때부터 내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무서운 수술실에 손 한번 잡아주는 이 없이 혼자 들어갔다는 소리에 가슴이 아려왔다. 당장 달려가야 하지만 섣달 그믐날이라 차례 준비를 팽개치고 갈 수도 없었다. 정신이 멍해 헛칼질을 하여 도마에 피가 묻어 손이 베었다는 것을 알았다. 내 상처의 아픔을 느낄 경황이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백세 살 된 시조모에게 한 달에 한 번 나타나는 치매 증세가 발병했다. 다른 때는 그냥 앉아서 과거 이야기만 했는데 자꾸 어디를 간다고 방문을 열고 나왔다. 잠시 남편에게 부탁하고 부엌일을 마무리하러 갔다. 남편이 잠깐 잠이든 사이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당신이 업어 키운 증손녀가 수술한다는 영감이라도 왔나보다. 어디를 가느냐고 물어도 목적지도 없이 그냥 가야 된다고만 했다.
할 수 없어 하던 일을 멈추고 내 손목과 시조모 손목을 묶고 같이 누웠다. 수술대 위에 있는 딸을 생각하면 잠을 잘 수 없었지만 종일 고단한 탓에 깜빡 잠이 들었다. 팔이 번쩍 들려 눈을 떴다. 잠도 자지 않고 어디를 간다고 나서는 시조모를 재우는 일을 여러 번 반복하는 사이 새벽이 되었다. 이번엔 남편의 손목에 묶어 주고 부엌으로 나왔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시삼촌 가족과 시동생 가족들로 북적였었다. 정월 초하루 날이 시조모 생신이어서 생신 상을 차려서 아침을 먹고 차례를 지냈기 때문이다. 올해는 딸의 수술 때문에 경황이 없어 차례만 지냈다. 뒷정리는 동서에게 부탁하고 부랴부랴 서울로 향했다.
병실에 들어서니 딸은 바깥사돈과 나란히 누워 있었다. 딸을 보는 순간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래도 딸은 수술이 잘 되었다며 웃음으로 엄마를 맞아주었다. 다행히 딸의 간이 싱싱하고 커서 삼분의 이를 이식하고 바깥사돈은 삼분의 일을 이식했다고 했다. 붕대로 가슴과 배까지 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애처로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수술이 끝나고 회복할 때 아픔을 혼자 참았다는 생각에 더더욱 마음이 아팠다. 기증자의 간은 두 달이면 본래의 간만큼 재생된다고 해서 조금의 위안을 받았지만 남편은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면회 시간에 맞추어 사위에게 갔다. 사위는 아직 무균실에 있어서 먼발치로만 보고 전화로 서로 의사를 전달했다. 좋고 싫음은 전혀 표현하지 않는 남편이 손으로 머리위에 하트를 만들어 빠른 회복의 메시지를 보냈다. 의식을 겨우 찾은 사위도 미소로 답을 했다. 살 수 있다는 희박한 가능성을 가지고 한 수술이지만 살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 주었다.
시아버지와 한 병실에 누워 있는 딸을 간호한다고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하룻밤이라도 돌봐 주고 싶었지만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안사돈에게 부탁하고 병원 문을 나서는데 아프다고 짜증도 낼 수 없는 딸이 어른거려서 헛발을 디뎌 넘어지기도 했다 .
대구로 내려오는 기차를 탔다. 지난밤을 하얗게 세워 눈이 따가웠지만 감기지 않는다. 아파하는 딸을 두고 오는 마음이 새까맣게 타들어간다.
첫댓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스쳐지나갑니다.
밥맛도 그렇고, 야심에서도 자상한 감정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수필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딸 여성 엄마 할머니 감성은 곧 수필!
김경애 선생님 수필 두 편 잘 읽었습니다.
참 많은 이야기가 김선생님 한테는 있을 것 같습니다.
기대합니다. ㅎ
김경애 선생님, 수필 2편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은 참 행복하신 분입니다.
요즘 아내 밥술에 고깃점 올려 주는 남편, 드물어요.
김경애 선생님,영남수필문학회 회원되심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