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트 비제 르 브룅(Élisabeth Vigée Le Brun (1755 ~ 1842)】 "프랑스 로코코시대에 프랑스 궁정화가"
글 이은화(미술평론가)
“왜 위대한 여성미술가는 없었을까?” 서양미술사 책을 한 번쯤 읽어본 사람이라면 가질만한 질문이다. 미술사의 바이블로 불리는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700쪽에 육박하지만 여성 미술가는 딱 한 명만 등장한다. 그것도 1994년에 추가된 것이고, 1950년 출간된 초판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렘브란트나 루벤스처럼 생전에 부와 명성을 누린 위대한 여성미술가는 정말 없었을까?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룅(Elisabeth Louise Vigee-Le Brun)이라면 “여기 있어요. 제가 딱 그랬어요”라고 답할 것 같다. 18세기말 프랑스의 궁정화가였던 르 브룅은 유럽 여러 도시에서 활동하며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렸다. 여성은 정규 미술교육을 받는 것도, 전문직을 갖는 것도 불가능했던 시대에 어떻게 그런 놀라운 성취를 이뤘던 걸까?
1755년 파리에서 태어난 르 브룅은 초상화가였던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그림을 배웠다. 타고난 재능 덕에 10대 초반부터 전문적으로 그림을 그렸고, 15세 때부터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을 부양할 만큼 돈도 충분히 벌었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소녀가장이었다. 로코코풍의 화려한 색채와 탄탄한 묘사력이 강점인 그녀의 초상화는 고객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하지만 19세 때 상업 활동 면허가 없다는 이유로 작업실이 폐쇄 당하면서 위기를 겪었다. 작업실 재개를 위해선 아카데미 회원이 되어야 했다. 당시 파리 화단은 왕립아카데미가 주류였지만 이곳은 암묵적으로 여성을 회원으로 받아주지 않았다. 해서 다소 권위가 떨어지는 생뤼크 아카데미에 등록해 활동했다. 2년 후인 1776년에는 동료 화가였던 장 피에르 르 브룅과 결혼해 4년 후 딸 쥘리를 낳았다. 결혼하면 가정에만 충실해야 하는 당시 관례를 깨고 르 브룅은 계속 그림을 그리고 살롱전에 출품하며 경력을 쌓아갔다.
감히 이를 드러내고 웃은 죄
르 브룅은 그림 실력뿐 아니라 미모와 패션 감각, 사교성까지 뛰어나 상류층 고객들의 주문이 쇄도했다. 아무리 힘들고 까다로운 주문자라도 그녀 앞에 앉으면 기분을 좋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녀에 대한 소문은 곧 마리 앙투아네트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마침내 왕비의 초상화를 그리는 궁정화가가 되었다. 당시 겨우 23세였다. 여왕의 공식 초상화가가 된 후엔 그야말로 꽃길이 펼쳐졌다. 28세 때 보수적인 왕립아카데미의 회원이 되면서 그녀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한창 잘나가던 31세 무렵, 르 브룅은 딸 쥘리를 안고 있는 자화상을 그렸다. 엄마 품에 꼭 안긴 어린 딸을 두 손으로 다정하게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따뜻한 모성애가 느껴지는 밝고 아름다운 초상화지만, 이 그림이 살롱전에 처음 공개됐을 때는 큰 논란을 빚었다. 동료 화가들은 물론 비평가와 후원자들도 비난을 퍼부었다. 이유는 단 하나. 감히 여자가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기 때문이었다. 입을 벌리고 웃는다는 건 정숙하지 못하다는 의미였다. 특히 상류층 여성의 초상화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자, 미술의 전통을 깨는 발칙한 행위였다. 혹평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화가의 의지는 굳건했다. 3년 후에 그린 거의 비슷한 구도의 모녀 초상화에선 자신은 물론 딸까지 입을 벌려 웃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가
르 브룅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를 그릴 때도 과감했다. 그녀 역시 여느 궁정화가들처럼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왕비의 초상을 여러 번 그린 적이 있으나, 1787년에 그린 초상화는 완전히 달랐다. 권력을 쥔 왕비가 아니라 자애롭고 가정적인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린 것이다. 나름 간소한 레드 벨벳 드레스를 입은 왕비는 어린 자녀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무릎 위에는 막내아들이, 어깨에는 큰딸이 사랑스럽게 기대고 있다. 황태자인 장남 루이는 요람을 가리키고 있다. 원래 요람에는 신생아였던 막내딸 소피가 그려져 있었으나 그림을 그리던 중 사망하는 바람에 최종본에서는 지워졌다. 해서 요람에 검은 천이 드리워져 있다. 엄마의 표정이 밝지 못하고 엄숙해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당시 앙투아네트는 루이 16세를 타락시킨 사치스럽고 사악한 이미지로 세간에 알려져 있었지만, 이는 적국 오스트리아에서 시집 온 외국인 왕비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편견이었다. 실제로 프랑스 왕비치고는 오히려 검소한 편이었고, 사교적이고 동정심이 많은데다 모성애도 강했다. 동갑내기 왕비와 깊은 우정을 나눴던 화가는 자식 잃은 고통과 모성애를 강조한 그림으로 왕비의 이미지를 개선해 보고자 했다.
모성애 강한 엄마, 위대한 여성화가
화가의 바람과 달리 초상화는 왕비를 구해주지 못했다. 불과 2년 후인 1789년 프랑스혁명으로 왕족들이 체포되자 르 브룅은 아홉 살 쥘리를 데리고 외국으로 피신했다. 12년 동안 홀로 아이를 키우며 세계 각지를 떠돌았다. 화가로서의 명성이 해외까지 자자했던 터라 다행히 어딜 가든 일거리는 있었다. 이탈리아 러시아 독일 등에서 초상화를 그려 돈을 벌었고, 무려 10개 도시에서 미술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돼 활동했다. 귀국 후엔 파리 저택과 시골집을 오가며 살다 1842년 눈을 감았다. 향년 86세였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앙투아네트보다 거의 50년을 더 살아낸 인생이었다.
시대를 앞선 화가였지만, 르 브룅의 이름은 역사에서 빠르게 잊혔다. 생전에도 외모와 사교술을 내세워 실력을 인정받았다거나, 심지어 다른 남성 화가가 대신 그려줬을 거라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뛰어난 여성에게 종종 따라붙는 모함과 폄훼였다. 그럼에도 8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긴 르브룅은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재조명되고 있다. 미모와 재능의 소유자, 모성애와 생활력 강했던 엄마, 국제적으로 활동했던 전문화가. 21세기였다면 ‘슈퍼맘’ ‘원더우먼’ 소릴 들었을 르 브룅은 곰브리치가 기록하지 않은 위대한 여성 화가였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 런던 소더비 예술대학원에서 현대미술학을 전공한 후 맨체스터 대학원에서 미술사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대학과 기업체, 미술관에서 강의하며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현재 KBS 라디오 <문화공감>에 출연 중이며, 동아일보 칼럼 <이은화의 미술시간>을 연재 중이다. 『가고 싶은 유럽의 현대미술관』 『자연미술관을 걷다』 등 13권의저서를 출간했다.
15세의 나이에 비제 르브룅은 초상화로 자신과 미망인이 된 어머니, 남동생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돈을 벌고 있었다. 초상화가인 아버지 루이 비제(Louis Vigée)에게 교육을 받은 그녀는 19세에 파리의 세인트 루크 아카데미(Academy of Saint Luke)에 입학했다. 2년 후, 그녀는 화가이자 미술상인 장 밥티스트 피에르 르브룅(Jean-Baptiste-Pierre LeBrun)과 결혼하여 미술계에 귀중한 접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비제 르브룅의 재능은 가장 까다로운 시터들조차 만족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곧 프랑스 여왕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1783년에 여왕은 그녀를 파리의 강력한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단 4명의 여성 학자 중 한 명인 비제 르브룅은 높은 예술적, 사회적, 정치적 명성을 누렸다. 그녀의 인지도는 너무 높아져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그녀는 아홉 살짜리 딸을 데리고 나라를 떠나야 했다.
그 후 12년 동안 작가는 로마, 비엔나,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베를린에서 가장 유명한 주민들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영국과 스위스에서 짧지만 매우 성공적인 체류 후, 비제 르브룅은 1809년 프랑스로 영원히 돌아왔다. 그녀는 생애의 마지막 33년을 화려한 살롱을 열었던 파리 거주지와 루브시엔느의 시골 집에서 보냈다. 학자들은 Vigée-LeBrun이 600 점 이상의 그림을 제작 한 것으로 추정한다. 1835년에서 1837년 사이에 처음 출판된 그녀의 회고록은 여러 번 번역되고 재인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