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제가 대학 은사님들과 선배님들과 같이 계룡산을 등산하고 쓴 등산기입니다. 이 글 속에는 한상복 교수님(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이 나오는데, 그 분의 인류학 공부사와 등산사가 있어 재미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류학자가 걸어온 길 중 지역대학에도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어 우선 이 등산기를 싣기로 하고, 다음 글에 한상복 교수님에 대하여 쓰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인류학과 82학번 장동환입니다. 대전에 거주하는 변호사입니다. 이 산행기를 쓰기 전 내산회의 오랜 내력을 잃고 존경과 흠모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내산회 계룡산 산행기를 감히 올리게 되어 이전에 올린 존경하는 한상복 교수님,김광억 교수님의 글을 읽고서는 제 글이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섭니다.
이렇게 먼저 찾아 뵈옵고 인사를 드려야 마땅할 존경하는 교수님들에게 인사 대신 이 지면에 글부터 올리게 된 점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계룡산 등정 전 내산회 싸이트를 견학하고, 서울에서 내려와 주신 많은 선배님들에게 못다한 제자와 후배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전하기 위하여 감히 산행기 작성 신청을 하였고, 허락해 주시어 이 글이 실리게 되었습니다.
왜 계룡산이 내산회의 06.6월 행사지가 된 것인지 자세한 내력을 모릅니다. 주초에 걸려온 기존회원인 차원식(82학번) 동문의 전화를 받고 내산회 언질을 받는 순간 이미 제 마음은 움직였는지 모릅니다. 금요일 새벽 축구열기를 뒤로 하고 갑사 주차장으로 나갔습니다. 오랜만에 뵐 분들은 연상하며 1시간 남짓 그 동안의 세월과 변한 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공주에서 출발한 시내버스가 들어오고 그리운 님들이 한분씩 하차하셨습니다. 단정하신 한상복 교수님은 얫날 학창시절의 축구얘기로 제 졸업(1988년) 이후 18년의 세월을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유영표 선배님은 이전에 다른 지면으로 그 옛날의 기억을 갖고 있던 터라 처음뵈었지만 낮설지 않았습니다. 유지현 선배님은 제가 기억하는 문리대 60년대 학번의 지금 모습이어서 반가왔습니다.
박종열 목사님은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전반까지 인천에서 같은 고민을 한 터라 오랜만에 뵈었고, 그간에 흐른 약간의 세월이 첫 모습에서 확인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자리에서 같은 고민을 하고 계신 모습이 대전에서의 안일한 저의 모습과 대조되어 숙연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유희락 선배님은 사실 월드컵 관련 책을 통하여 함자를 기억한 터라 어쩌면 제가 먼저 알고 있는 분인지도 모릅니다.
이강승 교수님은 같은 대전에 거주하셔서 일전에 전경수 교수님을 통하여 같은 충남대학교의 이동인 교수님과 같이 소개를 받은 적이 있었고 못다한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윤혜영 선생님은 야외인류학과란 호기심있는 단어의 주인공이셨고, 그 내력을 꼭 듣고 싶습니다. 저의 처와는 20년 선배동문이셔서 그렇게 인연은 가까이 있는듯 합니다.
정기동 선배님은 같이 고시공부 할 때 과천에서 연주대까지 40분에 주파하시는 그 날렵함이 등산대장의 직함으로 연결되는듯 하여 안 봐도 알겠습니다. 차원식군은 82학번 동기들 사이에서는 세기적인 센티멘탈리스트로 통합니다. 산행 중 그가 포착한 미세한 카메라는 그의 문자와 함께 많은 친구들이 본 것입니다. 끝으로 박용성 동문은 87학번으로 들었는데, 어르신 수발을 기꺼이 떠맡으신 귀여움으로 사랑을 독차지하셔서 부르웠습니다. 산행의 선발주자라서 꼭맞는 여학생이 동행하였으면 좋았겠다 싶었습니다.
음주산악회가 아니라 강변하시면서도 만남은 항상 달콤한 알콜의 유혹을 비켜가지 힘든지 서울,공주간 3시간은 막걸리 한 잔으로 메꾸어집니다. 천년사찰 갑사의 울창한 아름드리가 우리의 만남을 축하해 줍니다. 정기동 선배는 갑사가 몹시 궁금하신 모양입니다. 대열을 살짝 이탈하여 재빨리 갑사를 각인하고 비가 오면 이강승 교수님의 안내로 공주의 문화재를 보고 싶었다고 하시는 철지난 인류학도입니다.
갑사에서 금잔디광장까지는 계룡산의 능선을 가로질러 올라야 하는 제법 1시간 거리의 된바일입니다. 한상복 교수님의 내산내력을 읽은 터라 교수님의 산행주법이 시선이 갔습니다. 20대 초반부터 타신 내력의 의연한 주법은 한 순간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고희를 넘기시고 제가 그 연배에서 어떤 산행을 할까하는 상상을 하였습니다. 유지현 선배님의 땀의 결정이 계룡의 된비일의 만만치 않음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윤혜영 선배님은 체력을 안배하는 자신만의 노하우로 여유있는 산행입니다.
두번을 쉬고 그렇게 금잔디 광장을 올랐고 한상복 교수님의 바나나와 사과를 먹었습니다. 그 적시의 바나나를 일러 누군가 처음 먹었던 그 때의 바나나와 같은 맛이라는 최고의 찬사가 이어집니다. 1시간 반의 된비알과 바나나가 체력과 에너지를 상계하고 본격적인 계룡능선입니다. 약 10분을 오르면 국어교과서에 실린 "갑사가는길"의 저자가 지났던 남매탑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입니다. 사실 계룡산은 그 글로 인하여 더욱 유명해진 내력이 있습니다.
남매탑으로 바로 내려가면 동학사까지 30분에 이르나 목적지대로 계룡능선으로 가면 초입에 나오는 봉우리가 삼불봉입니다. 계룡산은 공주 학봉리에서부터 속새의 지명인 장군봉을 필두로 삼불봉,관음봉,천황봉의 종교적 명칭을 획득하고 그 앞에 9월 산행의 대둔산 5백나한을 가진 종교적 염원을 가진 산입니다. 그 삼불봉은 그 동북방향의 대전의 안산산성에서 바라보면 정확히 세 개의 봉우리를 가진 삼불이 동학사의 바로 위에 위치하여 그 이름의 내력을 확인할 수 있으나 정작 삼불봉을 지나가면 그언 원경에서 나오는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 삼불봉에서 누군가 김원룡 선생님을 기억하는 우리는 인류학도입니다. 여기서 찍은 사진을 유희락 선배님이 단체사진으로 올려 놓으셨군요. 그 삼불봉 옆은 대전의 산꾼들이 시산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합니다. 삼불봉에서 바라보는 애초의 목적지인 관음봉까지의 조망은 자연성능(그 능선이 자연바위로 쌓은 성의 연속같은 형상이라 얻은 이름입니다.)은 보기에 아찔하고 아득하기도 하여 대원들 사이에서 진로를 두고 약간의 의견이 있었으나 강경파가 승리하는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능선길은 보기보다 인공의 길이 만든 혜택으로 쉬운 곳입니다. 그러나 2킬로의 높낮이를 가진 능선길임은 분명합니다. 벌써 시간이 1시를 넘기고 새벽의 서울길의 내력이 쉽지만은 않았을 선배님들의 속사정입니다. 식사를 하셔야죠. 한상복 교수님의 정겨운 곶감입니다. 박종렬 목사님은 더 정겨운 삶은 계란이군요. 유지현 선배님은 먹음직한 떡입니다. 갑사에서 사온 파전과 막걸리가 있고, 도시락 2개가 추가되니 좁은 바위가 모자랄 정도의 진수성찬입니다.
식사시간은 유지현 선배님의 시간입니다. 참 즐겁게 드시고, 하신 말씀이 너무 생기가 있었습니다. 막걸리도 몇 잔씩 넘기니 거의 1시간이 지났군요. 산에서 먹는 음식은 버릴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 정리를 하는데 그 많던 음식이 남은 것이 없습니다. 음식이 적었던 것인지, 식욕이 좋았던 것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덜 드신 분은 안 계셨는지.
계룡능선은 6월 이른 성하의 폭염을 마주하며 걷는 것입니다. 가파른 능선과 철제사다리가 쉽없이 이어지는 경치는 장관이나 걸음은 더 힘든 코스입니다. 겨울에는 제법 칼바람이 부는 곳이기도 하지요. 그렇개 도착한 관음봉 정상(높이 800여미터 가량입니다.)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다른 사람들이 정자를 차지한 관계로 논산 상월들의 장관을 보는 정상의 기쁨을 아주 짧게 하고서는 그늘이 있는 관음고개로 내려갑니다.
관음고개는 남서쪽으로 문필봉,연천봉으로 이어져 신원사나 갑사로 갈 수 있고, 동으로는 쌀개봉으로 하여 계룡의 정상인 천황봉으로 하여 다시 북으로 황적봉으로 가거나 남으로는 논산 연산면까지 국사봉으로 거치는 금남정맥 구간입니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금남정맥은 금강을 북으로 두고 숱흔 빗물들을 내려주며 마이산을 거쳐 대둔산, 바로 이 관음고개를 거쳐 공주를 지나 부여 백마강으로 빠지는 240킬로입니다. 우리가 지나온 그 금잔디 광장에서 북으로 가다가 다시 공주 방면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지요.
관음고개에서 체력을 비축한 일행는 너덜바위 지대로 된 경사가 급한 은선폭포까지의 1킬로를 가야 합니다. 계단으로 정비되어 있으나 바위로만 이어져 올라오는 것도 힘들지만 이미 4시간의 산행을 한 일행들의 어려운 하산길입니다. 지금은 사라진 은선산장을 보고 은선폭포의 장관을 비가 적어 보지 못하고 규모만 확인합니다. 한상복 교수님은 눈대중으로 그 폭포의 높이를 정확히 재시는 혜안을 보여 주셨습니다.
은선폭포를 지나면 이제 계룡은 조금은 포근한 산길을 제공합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순탄치 않았던 산행의 마지막 순간에서 탁족과 함께 힘든 고생 끝에서의 행복을 우리는 나누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등욕도 가능했을 시간입니다.
산행의 마지막 만남은 대전에 사시면서 충남역사박물관 개관을 진두지휘하시는 오석민 선배님(80학번)입니다. 이렇게 산보더 더 좋은 사람을 만나는 생기를 나누는 산수정의 오붓한 시간입니다. 유희락 선배님이 표현해 주신 "이 보다 더 좋은 있을소냐"의 그 장면입니다. 소주와 막걸리가 오가고 옛이야기가 무르익는 동안 시작이 있으면 긑이 있다는 그 시간으로 흘렀습니다.
대전 둔산으로 와서 정기동 선배가 주도면밀하게 예매한 차에 분승하기까지 추억의 아이스크림으로 마지막 아쉬움을 달래었고, 다음 9월 산행이 대전에서 가까운 대둔산일 우리는 슬프지 않았습니다. 차창을 사이에 두고 나눈 눈인사가 무엇을 뜻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압니다. 그렇게 보내고 남은 대전의 3사람은 조금 더 마지막 회포를 풀었습니다.
"한계산행"이었다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더위,경사,처녀코스,5시간이 준 무척 힘든 산행이었습니까. 젊은 사람들에게 양해해 주신 하루였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