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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히 먼 옛날, 하늘 나라를 다스리는 환인 임금님이 여러 아들을 불러놓고 물었습니다. "너희들중에 누가 세상에 내려가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싶으냐?" 여러 아들 중에서 환웅이 나서며 말했습니다. "저는 전부터 세상 사람들에게 덕이 되고 복이 되는 하늘 나라의 뜻을 펴서, 보다 아름답고 깨끗한 세상을 만들고 싶었사옵니다. 이제라도 아버님께서 허락해 주시면 내려가 보고자 하나이다." "오, 그러하냐? 땅 위에 어느곳 사람들을 다스리고 싶으냐?" "동방에 사는 무리이옵니다. 그곳 사람들은 마음이 어질고 슬기로워 그들을 다스리면 땅 위의 으뜸이 될 것이라 여겨지옵니다." "기특한 생각이다. 그러면 네가 잘 깨우쳐서 밝고 고운 나라가 되도록 힘써 보아라." 하늘 나라의 환인 임금님은 아들 환웅의 뜻을 알고 바람을 다스리는 신 풍백, 비를 다스리는 신 우사, 구름을 다스리는 신 운사에게 명령을 하였습니다. "너희들은 동방의 나라에 내려가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도록 하여라." 환인 임금님은 신의 힘을 나타내는 천부인 세 개를 주며 말을 이었습니다. "환웅을 도와 천추 만 년까지 그 나라를 지키도록 하라." "예!" 모두들 입을 모아 답하였습니다. "아버님의 소명을 받들어 길이 동방의 나라를 수호하겠나이다." 환웅은 농경 생활을 다스리는 3신과 3,000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아득한 구름 속을 헤쳐 태백산(지금의 묘향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백성들은 듣거라. 나는 너희들을 다스리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왔느니라." 환웅의 말에 사람들은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감사하옵니다. 보살펴 주소서!" 환웅이 3,000여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내려온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는 큰 시가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중심지라는 뜻으로 환웅은 이 곳을 신시(神市)라고 불렀습니다. "그대들의 슬기로움을 다하여 백성들을 잘 보살피도록 하라." 환웅은 바람, 비, 구름을 다스리는 신에게 백성들이 농사를 더욱 잘 짓게 도와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부하들에게는 병을 다스리고, 죄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는 일, 악하고 착한 일을 가리는 일 등을 비롯하여 인간에게 필요한 360여가지의 일을 맡겼습니다. 환웅이 신시를 열어 세상을 잘 다스린 덕으로 사람들이 더욱 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사람들 사이에는 나쁜 짓과 싸움이 없어졌습니다. 짐승들도 사람들을 본받아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그 무렵 평화로운 신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 속에 호랑이 한 마리와 곰 한 마리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몹시 부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신단수 아래에 계시는 환웅님을 찾아가서 우리의 소원을 빌어 보자." "좋은 생각이야!" 곰과 호랑이는 환웅을 찾아가 엎드려 빌었습니다. "우리들을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 "비나이다." 환웅은 인자한 미소를 띠며 대답하였습니다. "모든 일은 하늘의 뜻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힘겨운 시련이 없이는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수없다." "어떤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 환웅은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통을 주며 말했습니다. "100일동안 굴 속에 들어가 햇빛을 보지 말고 이 마늘과 쑥을 먹으며 정성스럽게 기도하면 사람으로 환생할 수 있느니라. 이것은 오로지 하늘의 뜻으로 되는 것이다." "어떠한 고통도 참고 견디겠습니다." "꼭 해내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겠습니다." 그러나 먹이를 많이 먹는 호랑이와 곰이 쑥 포기와 마늘 쪽만으로 100일을 견디기란 힘겨운 시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성미가 급한 호랑이는 겨우 37일을 견디다가 더 참지 못하고 굴 속을 뛰쳐나와 산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시련을 참고 견딘 곰은 100일째 되는 날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했습니다. "저의 몸을 아름다운 여인으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이제는 저와 맞는 짝을 이루어 주소서." 이 아름다운 여인은 소원대로 뜻을 이루어 환웅과 결혼하였습니다. 단군 왕검은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습니다.
이 때는 기원전 2367년경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5천년 전입니다. 단군 왕검은 다시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그 곳은 궁홀산 또는 금미달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단군 왕검은 그 곳에서 1,500년 동안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말에는 우리 민족이 나라를 세운 참뜻이 들어 있습니다. 단군은 다시 자리를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가 산신이 되어 무려 1,908년이나 살았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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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08년까지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존재한 한국 최초의 국가로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朝鮮)을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 '고조선'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그 뒤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 용어가 널리 쓰였다. 지금은 단군이 건국한 조선과 위만조선을 포괄하여 고조선이라고 부른다. 고조선의 건국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단군신화에서는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기술하였으나, 그대로 믿기 어렵다. 건국연대를 위로 끌어올린 이유는, 역사가 오래될수록 그 왕조는 권위가 있으며 민족도 위대하다는 인식의 반영에 불과하다.
고조선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7세기 초이다. 이 무렵에 저술된 《관자(管子)》에 '발조선(發朝鮮)'이 제(齊)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보하이만(渤海灣) 북쪽에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랴오허(遼河)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 것이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집단이 성장하면서 큰 세력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세운 중심집단의 시조설화(始祖說話) 형식으로 만들어졌다가, 뒤에 고조선 국가 전체의 건국설화로 확대된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와 주(周)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제후들이 왕이라 칭하였는데, 이때 고조선도 인접국인 연(燕)나라와 동시에 왕을 칭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고조선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연을 공격하려다가 대부(大夫) 예(禮)의 만류로 그만두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조선은 BC 4세기 무렵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연과 대립하고, 또 당시 중국인들이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BC 3세기 후반부터 연이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고조선은 밀리기 시작하였다.
BC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요하 상류에 근거를 둔 동호족(東胡族)을 원정한 다음 고조선 영역내로 쳐들어왔다. 이때 연은 요동지방에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고 장새(障塞)를 쌓았다. 그 결과 고조선은 서방 2,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고, 만번한(滿潘汗:랴오둥의 어니하 및 그와 합류한 청하의 하류지역에서 동북으로 성수산을 잇는 선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일대)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그 중심지를 요하 유역쪽에서 평양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그뒤 진(秦)나라가 연을 멸망시키고(BC 222), 요동군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고조선의 부왕(否王)은 진의 공격이 두려워서 복속할 것을 청하였지만, 직접 조회(朝會)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부왕이 죽고 아들 준왕(準王)이 즉위할 무렵 진(秦)이 내란으로 망하고, 대신 BC 202년 한(漢)이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은 진과 같이 동방진출을 적극 꾀하지 않고, 다만 과거 연이 쌓은 장새만을 수축하고 고조선과의 경계를 패수(浿水)로 재조정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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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95년 연왕(燕王) 노관(盧)이 한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지방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위만(衛滿)도 무리 약 1천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위만은 고조선으로 들어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고있었던 것으로 보아 연나라에 살던 조선인으로 보고있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위만은 BC 194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우고,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에 입성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패배한 준왕은 뱃길로 한반도 남부로 가서 한왕(韓王)이 되었다.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조선이라고 부른다. 위만은 유이민집단과 토착 고조선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중국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진번, 임둔 세력을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는 남쪽의 진국(辰國)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漢)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濊君) 남려(南閭) 세력은 한에 투항하였다.
이즈음 한(漢)은 동방진출을 본격화하였는데, 그것은 고조선과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양측은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한은 BC 109년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동원해 수륙 양면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였고, 고조선은 총력을 다하여 이에 저항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 이탈되었다.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은 강화(講和)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여 호를 이끌고 남쪽의 진국으로 갔다. 또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상(相) 한음(韓陰), 이계상(尼谿相) 삼(參), 장군(將軍) 왕겹(王?)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長)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BC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한은 고조선의 일부지역에 낙랑, 임둔, 현도, 진번 등 4군(한사군)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통치하려 하였으나 토착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래서 세력은 점차 약화되고 후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 이때 많은 고조선인들은 남쪽으로 이주하였고, 그들은 삼한사회(마한, 진한, 변한)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조선이 한의 대군을 맞아 약 1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고조선의 철기문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이었다. 고조선 후기에는 철기가 한층 더 보급되고, 이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고조선은 강력한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각 지배집단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조선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중앙정권으로부터 쉽게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조선 말기 지배층의 분열도 그러한 성격에 말미암은 바가 컸다. 지배층 사이의 취약한 결속력은 고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고조선 사회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지금 전하는 범금팔조(犯禁八條)를 통해 볼 때 계급의 분화가 상당히 진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제, 신분제가 존재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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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은나라 말기에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단군조선에 이어 건국하였다고 하는 나라.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대표적인 역사책은 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 사마천의 '사기(史記)', 반고의 '한서(漢書)' 등인데, 사서마다 내용이 약간씩 다르다. 그 밖의 기자에 관한 기록들은 모두 이들 세 사서에 그 유래와 근거를 두고 있다.
《상서대전》에는 주(周)의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망시키고 감옥에 갇힌 기자를 석방하자, 그는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겨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주의 책봉(冊封)을 받은 기자는 부득이 신하의 예를 차려야 하였으므로 BC 1100년경(무왕 13)에 주나라에 가서 무왕을 만났는데, 무왕은 그에게 홍범9주(洪範九疇)에 대해서 물었다고 한다.
또 《사기》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무왕이 은을 정복한 뒤 기자를 방문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를 묻자 홍범9주를 지어 바쳤다. 이에 무왕이 그를 조선왕으로 봉해주었으나, 기자는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한서》지리지 연조(燕條)에는 은나라가 쇠하여지자 기자가 조선에 가서 그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 양잠, 베짜기 기술을 가르쳤더니, 낙랑조선(樂浪朝鮮) 사회에서는 범금팔조(犯禁八條)가 행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위략(魏略)'에서는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準王. 고조선 마지막 왕)을 기자의 후예로 기술하였으며 '삼국지'는 이것을 인용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먼저 문헌상으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자는 기원전 1100년 전후의 인물인데,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쓰여진 《논어》 《죽서기년(竹書紀年)》 등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은 없고 기자의 존재 자체만 언급하고 있다. 기자동래설이 사실이라면 이들 기록에 그에 관한 언급이 있을 법한데 그렇지 않다. 그런데 기자의 동래 사실을 전하는 사서들은 한결같이 모두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쓰여진 것들이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한 기자동래설은 기원전 3~2세기 무렵에 중국인들이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조작해낸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실제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면, 황하유역과 만주,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문화가 긴밀하게 관련되어야 함에도, 동북아시아의 청동기문화는 비파형(琵琶形)동검문화로 특징되듯이, 계통상으로 중국 황하유역의 것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뿐만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와서 예의범절과 문화를 전하였다면, 은나라에서 사용된 갑골문(甲骨文)이 고조선지역에서 발견되어야 함에도 현재 발견된 예가 전혀 없다.
이처럼 기자동래설의 모순점이 밝혀지면서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었다. 먼저 기자조선을 고조선 내부에서 등장한 새로운 지배세력, 즉 한씨조선(韓氏朝鮮)의 등장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 견해가 있었다.
즉 후한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주나라 선왕(宣王) 때 한후(韓侯)가 연나라 근처에 있었다. 그후 한의 서쪽에서도 성(姓)을 한(韓)이라 하더니 위만(衛滿)에게 망하여 바다로 옮겨갔다.(…立姓韓 爲衛滿所伐 還居海中)”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바다로 간 자는 바로 준왕(準王)이므로 그의 성은 기씨가아니라 한씨이며, 중국인이 아니라 한인(韓人)인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후대에 기자를 한씨의 먼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의 성인을 자기의 조상으로 함으로써 가문을 빛내기 위함이었으며, 특히 기자릉(箕子陵. 고려 숙종때 평양에 축조)이나 기자묘(箕子墓)가 생기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의 사대사상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또 1970년대에는 한국 민족의 기원을 종족이동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기자조선의 실체를 재조명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동이족의 일파인 기자족이 화북방면에 있다가 은주교체기(殷周交替期)와 춘추전국(春秋戰國)과 같은 격동기에 북중국, 남만주, 평양으로 이동하여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기존의 사료를 새로운 각도에서 재해석한 점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내용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지는 못하였다.
한편 기자는 특정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기국(箕國)의 제후'를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 《춘추좌씨전》에는 주나라 초기의 제후국으로서 '기국'이 보이며, 《국어(國語)》에는 기국을 정복한 진(晋)나라 고대의 성씨에 기씨(箕氏)가 있다는 사실이 전한다. 또한 기후(箕侯)를 중심으로 한 기씨 일족이 주(周) 초기에 북방의 정복활동에 종사하다가 뒤에 산시(山西)에서 산둥(山東)으로 이봉(移封)되었다는 기록들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기국의 존재를 알려주는 '기후(箕侯)' '기(箕)' '기후방정(箕侯方鼎)' 등의 명문이 새겨진 은나라, 주나라의 청동기가 중국 각지에서 출토되는 것도 그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유력한 증거로 제시된다. 다만 이 견해는 기국(箕國)이 기자조선을 말하는 것인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기자조선과 고조선은 어떠한 관계였는지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위의 견해 가운데 어느 것이 타당한가는 현재로서 명확한 답을 줄 수 없다. 다만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기자동래설 그 자체는 부정된다 하더라도 자료의 해석방향에 따라 그것이 다양하게 이해되고 있는 측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상고사(上古史)에 대한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기자조선에 관한 자료는 그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실제로 은주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으로 이동하여 왔는데, 기자동래설은 바로 이같은 주민이동과 그에 따른 고조선의 사회변동과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있다. 더욱이 기자동래설을 고려와 조선시대에 사실로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자묘를 세우고 국가 차원에서 숭배하였다는 점에서도 기자조선 문제는 한국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고 볼 수 없다.
기자후예 또는 기자를 따라왔다고 하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 기자의 후예 ] 행주 기(奇)씨 , 서(徐)씨 , 태원 선우(鮮于)씨 , 청주 한(韓)씨 [ 기자와 같이온 성씨 ] 해주, 태인 경(景)씨 , 토산 궁(弓)씨 , 봉화 금(琴)씨 , 밀양, 함평 노씨(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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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 |
왕명 |
재위기간 |
약사 |
1 |
동명성왕(東明聖, B.C 58~B.C 19) |
B.C 37~B.C 19 |
성은 고(高), 원래 성은 해(解). 휘는 주몽(朱蒙).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와배다른 형제라고도 한다. 동부여(동부여)의 금와의 아들 대소의 모해를 피하여 압록강 연안인 졸본천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졸본부여)라 함. |
2 |
유리왕(榴璃, ?~18) |
B.C 19~A.D 18 |
성은 해(解). 휘는 유리(榴璃). 동명성왕 아들. 왕22년에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기고 왕33년에 한(漢)나라의 고구려현을 빼앗음. 유리명왕(榴璃明) |
3 |
대무신왕(大武神, 4~44) |
18~44 |
성은 해(解). 유리왕 셋째아들. 휘는 무휼(無恤). 동부여, 개마국을 쳐서 병합하고, 국토를 살수 이북까지 넓혔음. 낙랑군을 정벌함. |
4 |
민중왕(閔中, ?~48) |
44~48 |
성은 해(解). 휘는 색주(色朱). 대무신왕의 동생. 대무신왕의 태자가 나이가 어려 대신 즉위함. |
5 |
모본왕(慕本, ?~53) |
48~53 |
이름은 해우(解憂),해애루(解愛婁). 민중왕의 형. 성품이 사납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신하 두노(杜魯)에게 피살됨. |
6 |
국조왕(國祖, 47~165) |
53~146 |
7살의 나이로 즉위. 영토를 확장하고 부족국가의 틀을 벗어나 중앙 집권적 국가의 기틀을 마련함. 태조왕(太祖王) |
7 |
차대왕(次大, 71~165) |
146~165 |
휘는 수성(遂成). 국조왕 동생. 태조로 부터 왕위 계승을 반대한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학정과 횡포를 일삼다가 신대왕에게 시해됨. |
8 |
신대왕(新大, 89~179) |
165~179 |
휘는 백고(伯固). 국조왕의 막내동생. 차대왕의 횡포로 산에 숨어지 내다가 차대왕이 시해된 후 왕위에 오름. |
9 |
고국천왕(故國川, ?~197) |
179~197 |
휘는 남무(南武). 빈민 구제책으로 진대법을 실시함. 국양왕(國壤) |
10 |
산상왕(山上, ?) |
197~229 |
휘는 연우(延優), 위궁(位宮). 고국천왕의 아우. 고국천왕이 아들없이 죽자 즉위함. |
11 |
동천왕(東川, ?~248) |
227~247 |
휘는 우위거(憂位居). 산상왕의 아들. 248년에 신라와 화친함. 동양왕(東襄) |
12 |
중천왕(中川, ?~270) |
247~270 |
동천왕의 아들 |
13 |
서천왕(西川, ?~292) |
270~292 |
휘는 약로(藥盧), 약우(藥友) |
14 |
봉상왕(烽上, ?~300) |
292~300 |
휘는 상부(相夫), 삽시루. 왕2년과 5년에 연나라 의 침입을 격퇴했으나 사치와 방탕에 빠져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에게 폐위되자 자살함. |
15 |
미천왕(美川, ?~331) |
300~330 |
휘는 을불(乙弗), 우불(憂弗). 현도군을 공격하고 낙랑군을 점령하는 등 영토확장에 공을 세웠음. 호양왕(好讓) |
16 |
고국원왕(故國原, ?~371) |
331~371 |
휘는 사유(斯由), 쇠(釗). 백제 근초고왕과 평양에서 싸우다 전사함. |
17 |
소수림왕(小獸林, ?) |
371~384 |
휘는 구부(丘夫). 고국원왕 아들. 왕2년에 중국 전진(前秦)으로 부터 순도(順道)가 불상과 경문을 가져오자 이를 받아들여 최초로 불교를 수입함 |
18 |
고국양왕(故國壤, ?~391) |
384~391 |
휘는 이련(伊連). 요동과 백제를 정벌하여 국토를 넓혔음 |
19 |
광개토대왕(廣開土, 374~413) |
391~413 |
휘는 담덕(談德). 불교를 신봉하였고, 영토를 만주와 한강 이북을 차지하는 등 고구려의 전성시대를 이룩함. 호태왕(好太),영락대왕(永樂) |
20 |
장수왕(長壽, 394~490) |
413~490 |
성은 고씨, 휘는 거련(巨連),연(璉). 광개토대왕 맏아들. 남하 정책을 착수 하여 왕 63년에 백제의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였음. 왕 68년에 신라의 7개성을 함락시킴. |
21 |
문자명왕(文咨明, ?~519) |
491~519 |
휘는 나운(羅雲) 장수왕의 손자. 왕3년에 부여를 멸망 시키고, 신라와 백제를 여러차례 침공하여 영토를 넓혔음. 명치호왕(明治好). 문자왕. |
22 |
안장왕(安藏, ?~531) |
519~531 |
휘는 흥안(興安) 문자왕의 맏아들. 백제와 두차례 싸움. |
23 |
안원왕(安原, ?) |
531~545 |
휘는 보연(寶延). 안장왕의 아우. 양(梁)나라, 동위(東魏)와 수교 하였음. |
24 |
양원왕(陽原, ?~559) |
545~559 |
휘는 평성(平成). 돌궐의 침입을 격퇴 하였으나 신라, 백제의 침공을 많이 받았음. |
25 |
평원왕(平原, ?~590) |
559~590 |
휘는 양성(陽城). 중국의 진(陣), 수(隨), 북제(北齊) 등과 수교함. |
26 |
영양왕(瓔陽, ?~618) |
590~618 |
휘는 원(元). 왕9년에 수나라 문제의 30만 대군을 격퇴. 왕23년에 수양제가 113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섬멸 하였음.평양왕(平陽) |
27 |
영류왕(榮留, ?~641) |
618~641 |
휘는 건무(建武). 외교를 잘하여 수양제에게 잡혀간 포로를 찾아왔으며, 도교(道敎)를 처음으로 받아들임.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살해당함. |
28 |
보장왕(寶藏, ?~681) |
642~668 |
연개소문에 의하여 왕위에 오름. 당의 고종이 이세적(李世勣)을 보내 쳐들어오고 신라가 쳐들어와 고구려는 망하였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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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 |
왕명 |
재위기간 |
약사 |
1 |
온조왕(溫祚, ?~28) |
B.C 18~A.D 29 |
고구려 동명왕의 세째아들(혹은 둘째). 위례성에 나라를 정하고 나라이름을 백제라함. BC 5년에 서울을 한산(지금의 광주)으로 옮김. AD8년 마한을 병합함. |
2 |
다루왕(多婁, ?~77) |
28~77 |
온조왕아들. 말갈족을 격퇴하고, 농사를 장려하여 백성 생활을 안정 시켰음. 37년 후한의 낙랑군을 멸망시킴. |
3 |
기루왕(己婁, ?~128) |
77~128 |
다루왕의 맏아들. |
4 |
개루왕(蓋婁, ?~166) |
128~166 |
기루왕의 아들. 132년에 북한상성을 쌓음 |
5 |
초고왕(肖古, ?~214) |
166~214 |
개루왕의 아들. 신라를 여러번 침공하고, 210년에 적현성, 사도성을 축조함. |
6 |
구수왕(仇首, ?~234) |
214~234 |
초고왕의 맏아들. 가뭄과 홍수를 대비하여 둑을 쌓고 농사를 장려함.귀수왕. |
7 |
사반왕(沙泮) |
234 |
구수왕의 아들.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바로 폐위됨. 사비왕(沙沸) |
8 |
고이왕(古爾, ?~286) |
234~286 |
초고왕 동생. 관제를 제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여 국가의 기초를 확립함. |
9 |
책계왕(責稽, ?~298) |
286~298 |
고이왕 아들. |
10 |
분서왕(汾西, ?) |
298~304 |
책계왕 아들. 낙랑군의 서현을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낙랑군의 자객에게 살해당함. |
11 |
비류왕(比流, ?~344) |
304~344 |
구수왕의 둘째 아들. 민간의 형편을 잘알아 선정을 베풀었다고 함. |
12 |
설왕( ,?~346) |
344~346 |
분서왕의 맏아들 |
13 |
근초고왕(近肖古, ?~375) |
346~375 |
비류왕의 아들. 369년에 마한과 대방을 병합함. 고구려 평양성을 점령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킴.아직기(阿直岐), 왕인(王仁)을 일본에 파견하여 한문을 전파하고, 박사 고흥 “?백제의 국사 '서기(書記)'를 쓰게함. |
14 |
근구수왕(近仇首, ?~384) |
375~384 |
근초고왕의 큰아들. 일본과 국교를 맺어 문물을 보급시키는데 공이많음. |
15 |
침류왕(枕流, ?~385) |
384~385 |
근구수왕의 아들. 불법(佛法)을 시행하고, 한산에 절을 창건 하였음. |
16 |
진사왕(辰斯, ?~392) |
385~392 |
침류왕의 동생. 광개토대왕에게 한강 이북을 빼앗기자 이를 찾기위해서 출정하다가 병사함. |
17 |
아신왕(阿莘, ?~405) |
392~405 |
침류왕의 아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모두패함. 일본과 화친하여 태자를 볼모로 보냄. 아방왕, 아화왕.
|
18 |
전지왕(琠支, ?~420) |
405~420 |
아신왕의 아들. |
19 |
구이신왕(久爾辛, ?~427) |
420~427 |
전지왕의 맏아들 |
20 |
비유왕(毘有, ?) |
427~454 |
구이신왕의 아들. 송나라와 왕래하고 신라와 화친을 하는등 외교를 통한 친선에 힘을 씀. |
21 |
개로왕(蓋鹵, ?~475) |
455~475 |
휘는 경사(慶司). 비유왕의 맏아들. 고구려 장수왕의 습격을 받아 피살됨. |
22 |
문주왕(文周, ?~477) |
475~477 |
개로왕의 아들. 서울을 웅진(공주)으로옴기고 국방에 힘씀. 병관 좌평 해구(解仇)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살해됨. |
23 |
삼근왕(三斤, ?) |
477~479 |
문주왕의 맏아들. 13세로 즉위 반란을 일으킨 해구를 진로(眞老)로하여금 토평하게 함. |
24 |
동성왕(東城, ?~501) |
479~501 |
이름은 모대(牟大).삼근왕의 동생. 493년에 신라와 혼인 동맹을 맺고,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싸움. |
25 |
무령왕(武寧, ?~523) |
501~523 |
휘는 사마(斯摩). 동성왕의 둘째 아들. 국내안정에 힘을 쓰고, 쌍현성을 쌓아 외침에 대비함. |
26 |
성왕(聖, ?~554) |
523~554 |
휘는 명농. 무령왕의 아들. 538년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라 함. 554년 신라를 공격, 관상성에서 전사함. 성명왕. |
27 |
위덕왕(威德, ?~598) |
554~598 |
휘는 창(昌). 성왕의 아들. 고구려의 침공을 막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신라를 자주침. |
28 |
혜왕(惠, ?~599) |
598~599 |
휘는 계(季). 위덕왕의 아들로 즉위 하였다가 이듬해에 죽음. |
29 |
법왕(法, ?) |
599~600 |
휘는 선(宣), 효순(孝順). 혜공왕의 아들. 불교를 신봉하여 살생을 금하고, 왕흥사의 창건을 착수함. |
30 |
무왕(武, ?~641) |
600~641 |
휘는 장(璋). 수,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일본에 중 관륵(觀勒)을 보내어 천문, 지리, 역본(曆本) 등의 서적과 불교를 전파하였음. |
31 |
의자왕(義慈, ?~660) |
641~660 |
무왕의 맏아들. 642년 신라를 공격하여 많은 영토를 얻었으나 만년에는 사치와 방탕에 흘러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당나라에 압송되었다가 병사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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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 |
왕명 |
재위기간 |
성 |
약사 |
1 |
박혁거세(朴赫居世, BC69~AD4) |
BC57~AD4 |
朴 |
13세에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함. 왕21년에는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고 성을 쌓아 국가의 기초를 세움. BC27년 천일창(天日槍)이 왜(일본)땅으로 가고, 신라의 도공이 왜에 건너가서 신라식 도자기 제작. |
2 |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24) |
4~24 |
朴 |
박혁거세의 맏아들. 석탈해(昔脫解, 탈해왕)를 사위로삼아 정사를 맏겼다함. 병선 100여척으로 왜구 격퇴. |
3 |
유리이사금(瑠璃尼師今, ?~57) |
24~57 |
朴 |
남해왕 아들. 6부(部)의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내렸으며 신라 가악의 기원인 '도솔가' 등을 지음 |
4 |
탈해이사금(脫解, BC19~80) |
57~80 |
昔 |
석탈해(昔脫解). 65년 국호를 계림(鷄林)이라 고침. 김알지탄생. |
5 |
파사이사금 (婆娑, ?~112) |
80~112 |
朴 |
유리왕 아들. 월성을 쌓아 백성을 옮겨살게하고, 여러나라를 병합하여 국위를 떨침. |
6 |
지마이사금(祗摩, ?) |
112~134 |
朴 |
파사왕의 맏아들. 백제의 협조로 말갈을 물리쳤음. 지미왕(祗味) |
7 |
일성이사금(逸聖, ?) |
134~154 |
朴 |
아버지는 유리왕의 형. 농본정책으로 경지를 개간하고 백성의 사치를 금함. |
8 |
아달라이사금(阿達羅, ?~184) |
154~184 |
朴 |
원명은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현(縣)의 설치와 도로개통등 내치에 힘씀. |
9 |
벌휴이사금(伐休, ?~196) |
184~196 |
昔 |
탈해왕의 손자 |
10 |
나해이사금(奈解, ?~230) |
196~230 |
昔 |
벌휴왕의 손자. |
11 |
조분이사금(助賁, ?~247) |
230~247 |
昔 |
제귀왕(諸貴). 벌휴왕의 손자. |
12 |
첨해이사금(沾解, ?~261) |
247~261 |
金 |
벌휴왕의 손자, 조분왕의 동생. 고구려와 국교를 통함. |
13 |
미추이사금(味鄒, ?~284) |
262~284 |
昔 |
김씨 왕가의 시조 |
14 |
유례이사금(儒禮, ?~298) |
284~298 |
昔 |
조분왕의 맏아들. 백제와 수교함. |
15 |
기림이사금(基臨, 289~310) |
298~310 |
昔 |
조분왕의 둘째아들. 307년에 국호를 신라로 고침. |
16 |
흘해이사금(訖解, ?~356) |
310~356 |
金 |
기림왕이 후사가 없이죽자 군신들의 추대로 즉위함. |
17 |
내물마립간(柰勿麻立干, ?~402) |
356~402 |
金 |
중국문물 수입에 힘씀. 나밀왕(那密)이라고도 함. |
18 |
실성마립간(實聖, ?~417) |
402~417 |
金 |
내물왕이 죽은 후 백성들의 추대로 즉위. 내물왕의 태자 눌지를 시기하여 죽이려다 도리어 피살됨. |
19 |
눌지마립간(訥祗, ?~458) |
417~458 |
金 |
내물왕의 아들. 실성왕의 사위. 438년 우차법(牛車法)을 제정하였다. 458년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파. |
20 |
자비마립간(慈悲, ?~479) |
458~479 |
金 |
왕17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나제동맹을 맺음. |
21 |
소지마립간(炤知, ?) |
479~500 |
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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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지증왕(智證, 437~514) |
500~514 |
金 |
휘는 지대로(智大路). 왕이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함.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점령함. |
23 |
법흥왕(法興, ?) |
514~540 |
金 |
휘는 원종(原宗). 514년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 설치. 율령(律令) 반포. 52년 이차돈(異次頓) 순교. 532년 금관가야 멸망시킴. 536년 처음으로 연호를 건원(建元)이라함. |
24 |
진흥왕(眞興, 534~576) |
540~576 |
金 |
휘는 삼맥종(三麥宗). 황룡사(皇龍寺) 건립을 시작. 555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561년 창녕 진흥왕순수비, 568년 황초령 진흥왕순수비와 마운령 진흥왕순수비 건립. 562 대가야 멸망시킴 |
25 |
진지왕(眞智, ?) |
576~579 |
金 |
휘는 사륜(舍輪) |
26 |
진평왕(眞平, ?~632) |
579~632 |
金 |
휘는 백정(白淨) |
27 |
선덕여왕(善德, ?) |
632~647 |
金 |
휘는 덕만(德曼). 진평왕 맏딸. 614년 경주 첨성대 건립. |
28 |
진덕여왕(眞德, ?~654) |
647~654 |
金 |
휘는 승만(勝蔓) |
29 |
무열왕(武烈, 604~661) |
654~661 |
金 |
휘는 춘추(春秋). 태종무열왕(太宗武烈). 백제를 멸망시킴. |
30 |
문무왕(文武, ?~681) |
661~681 |
金 |
휘는 법민(法敏) 왕17년에 백제,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통일. 유언에 따라 동해 대왕암에 수장함. 667년 김유신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섬. 김유신(575~673) 죽음. |
31 |
신문왕(神文, ?~692) |
681~691 |
金 |
휘는 정명,명지(政明,明之). 문무왕의 아들. 만파식적을 만듬. |
32 |
효소왕(孝昭, 643~702) |
692~702 |
金 |
휘는 이홍(理洪),이공(理恭). 신문왕의 맏아들. 692년 설총이 이두(吏讀)를 정리. |
33 |
성덕왕(聖德, ?~737) |
702~737 |
金 |
휘는 흥광(興光). 723년 혜초가 서역(西域)에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 |
34 |
효성왕(孝成, ?~742) |
737~742 |
金 |
휘는 승경(承慶). 성덕왕의 둘째 아들 |
35 |
경덕왕(景德, ?~765) |
742~765 |
金 |
휘는 현영(憲英). 751년 대상(大相) 김대성(金大成)이 불국사(佛國寺) 창건. |
36 |
혜공왕(惠恭, 765~780) |
765~780 |
金 |
휘는 건운(乾運). 경덕왕의 아들. 8세에 즉위하여 여자 놀이를 하며 여자처럼 행동을 함. 대공의 난,김지정의 난 등으로 나라가 어지러웠으며 선덕왕에게 피살됨. 770년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주조. |
37 |
선덕왕(宣德, ?~785) |
780~785 |
金 |
휘는 양상(良相). 내물왕의 10세손 |
38 |
원성왕(元聖, ?~798) |
785~798 |
金 |
휘는 경신(敬信). 김주원이 냇물이 넘쳐 궁에 못들어가자 먼저 궁에 들어가 왕이됨. 788년 처음으로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설치. |
39 |
소성왕(昭聖, ?~800) |
798~800 |
金 |
휘는 준옹(俊邕). 원성왕의 태자인 인겸(仁謙)의 아들. 2년만에 죽자 이후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 졌음. |
40 |
애장왕(哀莊, 788~809) |
800~809 |
金 |
13세에 즉위. 섭정하던 숙부 김언승(金彦昇)에게 왕위 빼앗기고 시해됨. 해인사 창건. |
41 |
헌덕왕(憲德, ?~826) |
809~826 |
金 |
휘는 언승(彦昇). 조카를 죽이고 왕이됨. 친당정책. 백영(白永)에 명하여 패강(浿江)에 300리나 되는 장성을 쌓음. |
42 |
흥덕왕(興德, ?~836) |
826~836 |
金 |
휘는 수종(秀宗), 경휘(景徽). 원성왕의 손자며 헌덕왕의 아우.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만들어 장보고(長保皐)에게 관리토록 함. 능은 경북 경주 안강읍 육통리(사적 제30호) |
43 |
희강왕(僖康, ?~838) |
836~838 |
金 |
휘는 제륭(悌隆), 원성왕의 손자. 흥덕왕이 후사없이 죽자, 삼촌인 균정(均貞)을 죽인후 왕위에 올랐으나, 그를 도운 김명(金明)등이 난을 일으키자 자살함. |
44 |
민애왕(閔哀, ?~839) |
838~839 |
金 |
김명(金明). 시중으로 있을 때 흥덕왕이 죽자, 김제륭을 왕으로 내세우고 스스로 상대등이 되었다가 흥강왕을 죽게하고 왕이됨. |
45 |
신무왕(神武, ?~839) |
839 |
金 |
휘는 우징(祐徵). 민애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으나, 수개월 뒤 반대파인 죽은 이홍(利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함. |
46 |
문성왕(文聖, ?) |
839~857 |
金 |
휘는 경응(慶膺). 신무왕의 태자. 846년 장보고 반란, 염장(閻長)에게 피살됨. |
47 |
헌안왕(憲安, ?~861) |
857~861 |
金 |
휘는 의정(誼靖). 후사가 없어 왕족 응렴(膺廉)을 사위 삼고 왕위를 물려줌. |
48 |
경문왕(景文, ?~875) |
861~875 |
金 |
휘는 응렴(膺廉) |
49 |
헌강왕(憲康, ?~886) |
875~886 |
金 |
휘는 정(晸). 처용무가 유행하고, 사회가 사치와 환락에 빠져듬. |
50 |
정강왕(定康, ?~887) |
886~887 |
金 |
휘는 황(晃). 경문왕의 둘째 아들로 진성여왕의 오빠. 몸이 약해서 즉위 2년만에 죽음 |
51 |
진성여왕(眞聖, ?~897) |
887~897 |
金 |
휘는 만(曼). 음행(淫行)을 일삼고 병제(兵制)가 퇴폐하여 나라가 혼란에 빠짐 |
52 |
효공왕(孝恭, ?~912) |
897~912 |
朴 |
휘는 요(嶢). 정강왕의 아들. 궁예와 견훤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후삼국이 정립되는 것을 막지 못함. |
53 |
신덕왕(神德, ?~917) |
913~917 |
朴 |
휘는 경휘(景暉). 효공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백성의 추대를 받아 즉위함 |
54 |
경명왕(景明, ?~924) |
917~924 |
朴 |
휘는 승영(昇英). 신덕왕의 태자. 즉위 후 쇠퇴한 국운을 건지려 후당(後唐)에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 |
55 |
경애왕(景哀, ?~927) |
924~927 |
金 |
휘는 위응(魏膺).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를 하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자 자살함. |
56 |
경순왕(敬順, ?~978) |
927~935 |
昔 |
휘는 부(傅). 경애왕이 죽은후 견훤에 의하여 즉위 하였으나, 935년에 왕건에 항복하여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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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 |
왕명 |
재위기간 |
약사 |
1 |
수로왕(首露, 42~199) |
42~199 |
42년 알에서 낳아서 곧 즉위. 아유타국(인도의 한 국가) 공주허황옥과 결혼함 |
2 |
거등왕(居登, ?~253) |
199~259 |
수로왕의 아들. 어머니는 허황옥 |
3 |
마품왕(麻品, ?~291) |
259~291 |
거등왕의 아들 |
4 |
거질미왕(居叱彌, ?~346) |
291~346 |
마품왕의 아들. |
5 |
이시품왕(伊尸品, ?~407) |
346~407 |
거질미왕의 아들 |
6 |
좌지왕(坐知, ?~421) |
407~421 |
이시품왕의 아들. 금토왕(金吐王), 김질(金叱). 왕비 용녀의 사람들을 관리로 등용하여 시끄러웠다. 후에 왕비를 귀양 보내고 백성을 편안히 다스렸다. |
7 |
취희왕(吹希, ?~451) |
421~451 |
좌지왕의 아들. 질가(叱嘉) |
8 |
질지왕(?~492) |
451~492 |
취희왕의 아들 |
9 |
겸지왕(鉗知, ?~521) |
492~521 |
고이왕 아들. |
10 |
구형왕(仇衡, ?) |
521~532 |
겸지왕의 아들. 신라 진흥왕이 쳐들어오자 영토를 바치고 귀순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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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 |
왕명 |
재위기간 |
약사 |
1 |
고왕(高, ?~719) |
699-719 |
휘는 대조영(大祖榮). 고구려의 유민으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하여 동모산(東牟山, 길림성 동화)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진(震)이라함. 연호를 천통(天統)으로 함. 713년 고구려 영토를 거의 회복하고 국호를 발해로 고침. |
2 |
무왕(武, ?~737) |
719~737 |
휘는 대무예(大武藝). 일본과 국교를 맺어 문물을 교환하고 당나라를 공격함. |
3 |
문왕(文, ?~?) |
737~793 |
휘는 대흠무(大欽茂). 서울을 용천부(龍泉府)로 옮기고 관직제도를 정비 했으며, 주자감(胄子監)을 설치하는 등 문화 발전에 힘씀. |
4 |
대원의(大元義, ?~794) |
793~7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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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성왕(成, ?~795) |
794~795 |
휘는 대화여(大華與). 문왕의 손자. 연호를 중흥(中興)으로 고치고 상경(上京)으로 서울을 옮김. |
6 |
강왕(康, ?~809) |
795~809 |
휘는 대숭린(大崇隣). 문왕의 아들. 연호를 정력(正曆)이라 함. 일본, 당나라 등과 사신왕래, 문물교환을 활발히 함. |
7 |
정왕(定, ?~813) |
809~812 |
휘는 대원유(大元瑜). 연호를 영덕(永德)으로함. |
8 |
희왕(僖, ?~817) |
812~817 |
휘는 대신의(大言義). 연호를 주작(朱雀)으로 고침. 당나라와 교류하여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임. |
9 |
간왕(簡, ?~818) |
817~818 |
휘는 대명충(大明忠) 연호를 태시(太始)라함. |
10 |
선왕(宣, ?~830) |
818~830 |
중국으로 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리는 전성기를 이룩함. 고구려의 옛땅을 대부분 회복하여 영토가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개원(카이위안), 남쪽으로는 함경남도 정평, 북쪽으로는 헤이룽강(흑룡강)에 이르렀음. |
11 |
대이진(大彛震, ?~858) |
830~858 |
선왕의 손자. 연호를 함화(咸和)로 고침. |
12 |
대건황(大虔晃, ?~871) |
858~8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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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대현석(大玄錫, ?~892) |
871~8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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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대위해(大瑋?, ?~906) |
894~9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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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대인찬(?~926) |
906~926 |
103개의 성이 모두 거란에 점령되어 발해 멸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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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 |
왕명 |
재위기간 |
약사 |
1 |
태조(太祖, 877~943) |
918~943 |
이름은 왕건(王建). 신라 궁예의 부하로, 부하에게 옹립되어 송도에 도읍을 정하고 왕위에 오름. 935년 신라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함 |
2 |
혜종(惠宗, ?~945) |
943~945 |
휘는 무(武). 태조의 맏아들. 대광인 왕규(王規)의 음모에 신경쓰다 병사함. |
3 |
정종(定宗, 923~949) |
945~949 |
왕규의 난을 평정하고 불교를 숭상함. 서경(평양)에 왕성을 쌓고 천도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 |
4 |
광종(光宗, 925~975) |
949~975 |
휘는 소(昭). 자는 일화(日華). 노비 안검법을 제정하고,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를 실시함. |
5 |
경종(景宗, 955~981) |
975~981 |
휘는 주(인宙). 자는 장민(長民). 광종의 아들. 전시과를 제정함. 방탕한 생활로 정사를 돌보지 않았음. |
6 |
성종(成宗, 960~997) |
981~997 |
휘는 치(治).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유교를 국가지도의 원리로 삼아 중앙집권적 봉건제도를 확립함. |
7 |
목종(穆宗, 980~1009) |
997~1009 |
휘는 송(誦). 경종의 맏아들. 전시과를 고치고 학문을 장려 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나 강조(康兆)에게 피살됨. |
8 |
현종(顯宗, 992~1031) |
1009~1031 |
휘는 순(詢). 천추태후의 강요로 중이 되었다가 강조의 옹립으로 즉위함. 거란의 침입으로 혼란 하였으나, 강화하여 국내가 안정되고 문화가 발전함. |
9 |
덕종(德宗, 1016~34) |
1031~1034 |
휘는 흠(欽). 왕 2년에 천리장성을 쌓고, 국사편찬 사업도 완성함. |
10 |
정종(靖宗, 1018~46) |
1034~1046 |
휘는 형(亨).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고, 장자 상속과 적서 구별을 법으로 정하였음. |
12 |
순종(順宗, 1046~1083) |
1083 |
문종의 맏아들로 즉위한 해에 죽음. |
13 |
선종(宣宗, 1049~1094) |
1083~1094 |
휘는 운(運). 문종의 둘째 아들.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국 송나라에서 불경을 연구하고 오는등 고려문화의 융성기를 이룸. |
14 |
헌종(獻宗, 1084~1097) |
1094~1095 |
휘는 욱(昱). 즉위하자 이자의(李資義)의 난을 평정하고, 다음해에 신병으로 숙부에게 왕위를 물려줌. |
15 |
숙종(肅宗, 1054~1105) |
1095~1105 |
문종의 셋째아들. 조카인 헌종을 폐위 시키고 즉위함. 해동통보를 주조하여 화폐제도를 시작, 고려의 황금시대를 이룸. |
16 |
예종(睿宗, 1079~1122) |
1105~1122 |
휘는 우. 학문을 좋아하여 학교를 세우는 등 학문을 크게 진흥 시켰음. |
17 |
인종(仁宗, 1109~1146) |
1122~1146 |
휘는 해(偕). 어린나이로 즉위하여 이자겸의 난,묘청의 난 등을 격었으나 선정을 베품.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케 함. |
18 |
의종(毅宗, 1124~1173) |
1146~1170 |
휘는 현(晛). 인종의 맏아들. 무신을 천대하고 문신을 우대하다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나 폐위되고, 명종3년에 경주에서 살해됨. |
19 |
명종(明宗, 1131~1202) |
1170~1197 |
휘는 호(皓). 의종의 동생. 정중부의 추대로 즉위하고 최충헌(崔忠獻)에 의하여 쫏겨남. |
20 |
신종(神宗, 1144~1204) |
1197~1204 |
휘는 탁(晫). 인종의 다섯째 아들로 최충헌이 옹립한 왕임. |
21 |
희종(熙宗, 1181~1237) |
1204~1211 |
휘는 영. 신종의 맏아들. 최충헌을 없애려다 오히려 쫏겨남. |
22 |
강종(康宗, 1152~1213) |
1211~1213 |
휘는숙(璹), 정, 오. 명종의 맏아들. 명종과 함께 쫏겨났다가 최중헌에게 옹립되어 왕위에 오름. |
23 |
고종(高宗, 1192~1259) |
1213~1259 |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로 천도한 뒤 28년동안 항쟁 하였으나 결국 굴복함. 몽고를 불교의 힘으로 격퇴하기 위하여 팔만대장경을 조판함. |
24 |
원종(元宗, 1219~1274) |
1259~1274 |
휘는 정(禎). 몽고에 굴욕을 당한 뒤 즉위. 임연(林衍)의 난, 삼별초의 난 등으로 화평한 날이 없었음. |
25 |
충렬왕(忠烈, 1236~1308) |
1274~1308 |
원(元)나라에 굴복하여, 원의 제국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는 등 원나라의 지나친 간섭을 받았음. |
26 |
충선왕(忠宣, 1275~1325) |
1308~1313 |
휘는 장(璋). 몽고 황실의 딸과 결혼하고 1298년 왕위에 올랐으나 7개월만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 이후 10년간 원나라에 머물다 다시 즉위하여 원나라에서 국정을 봄. 고려와 원나라의 학문교류에 힘을 씀. |
27 |
충숙왕(忠肅, 1294~1339) |
1313~30, 32-39 |
휘는 도(燾). 정사에 염증을 느껴 아들 충혜왕에게 양위 하였다가 행실이 좋지 않자 2년만에 복위함. |
28 |
충혜왕(忠惠, 1315~1344) |
1330~32, 39-44 |
휘는 정(禎). 행실이 좋지 않아 정사를 혼란에 빠뜨렸음. 원나라로 귀양을 가다 병사함. |
29 |
충목왕(忠穆, 1337~1348) |
1344~1348 |
휘는 흔(昕). 원나라에 볼모로 있다가 8세에 원나라에 의하여 즉위함. 어머니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섭정함. |
30 |
충정왕(忠定, 1337~1352) |
1348~1351 |
휘는 저. 12세에 즉위하여 외가친척인 윤시우(尹時遇)와 배전(裵佺) 등으로 인해 정치가 문란해지고, 왜구의 침입이 잦아 3년만에 폐위됨. |
31 |
공민왕(恭愍, 1330~74) |
1351~1374 |
원나라 배척운동을 벌여 친원파인 기(奇)씨 일족을 제거하고,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여 국위를 떨침. 말년에 왕비인 노국공주가 죽자 정사를 그르쳐 최만생(崔萬生)과 홍륜(洪倫)에게 시해 당함. |
32 |
우왕(禑, 1364~1389) |
1374~1388 |
공민왕의 아들. 10세에 즉위하나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에게 폐위됨. |
33 |
창왕(昌, ?) |
1388~1389 |
이성계 등이 우왕을 내쫏은후, 창왕을 내세웠으나 1년만에 강화도로 쫏겨나 10세때 시해됨. |
34 |
공양왕(恭讓, 1345~1394) |
1389~1392 |
휘는 요. 이성계 일파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나 실권을 빼앗기고, 정몽주가 살해당한 후 폐위 당하고 고려는 멸망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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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 |
왕명 |
재위기간 |
약사 |
1 |
태조(太祖, 1335~1408) |
1392~1398 |
휘는 성계(成桂). 고려말 무신으로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우고, 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92년 조선왕조를 세움. |
2 |
정종(定宗, 1357~1419) |
1398~1400 |
휘는 방과(芳果). 사병을 삼군부에 편입시킴. 즉위 2년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음. |
3 |
태종(太宗, 1369~1422) |
1400~1418 |
휘는 방원(芳遠). 태조가 조선을 세우는데 공헌하였으며, 왕자들의 왕위 다툼(왕자의 난)에서 이겨 왕위에 오름. 여러 가지 정책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움. |
4 |
세종(世宗, 1397~1450) |
1418~1450 |
휘는 도. 태종의 셋째아들.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 해시계 등의 과학기구를 창제케함. 외치에도 힘을써 북쪽에 사군과 육진, 남쪽에 삼포를 두었음. |
5 |
문종(文宗, 1414~1452) |
1450~1452 |
휘는 향(珦). 학문에 밝고 인품이 좋았으며, 세종의 뒤를 이어 유교적 이상 정치를 베풀고 문화를 발달 시켰음. |
6 |
단종(端宗, 1441~1457) |
1452~1455 |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계유사화로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함. 200년후인 숙종때 왕위를 다시 찾아 단종이라 하였음. |
7 |
세조(世祖, 1417~1468) |
1455~1468 |
휘는 유. 국조보감(國朝寶鑑),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을 편찬하고 관제의 개혁으로 괄목할만한 치적을 남김. 수양대군(首陽大君). |
8 |
예종(睿宗, 1441~1469) |
1468~1469 |
휘는 광(胱). 세조의 둘째 아들. 세조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 시켰음. |
9 |
성종(成宗, 1457~94) |
1469~1494 |
휘는 혈. 학문을 좋아하고 숭유억불, 인재등용 등 조선초기의 문물 제도를 완성함. 경국대전을 편찬함. |
10 |
연산군(燕山君, 1476~1506) |
1494~1506 |
휘는 융. 폭군으로 무오사화, 갑자사화, 병인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임. 중종반정으로 폐위됨. |
11 |
중종(中宗, 1488~1544) |
1506~1544 |
휘는 역. 혁신정치를 기도하였으나 훈구파의 원한으로 실패하고 1519년 기묘사화, 신사사화를 초래함. |
12 |
인종(仁宗, 1515~1545) |
1544~1545 |
장경왕후의 소생. 기묘사화로 없어진 현량과를 부활함. |
13 |
명종(明宗, 1534~1567) |
1545~1567 |
휘는 환. 중종의 둘째 아들. 12세에 즉위하여 을사사화, 정미사화, 을유사화, 을묘왜변을 격음. |
14 |
선조(宣祖, 1552~1608) |
1567~1608 |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16세에 즉위. 이이, 이황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으나 당쟁과 임진왜란으로 시련을 격음. |
15 |
광해군(光海君, 1575~1641) |
1608~1623 |
휘는 혼. 당쟁으로 임해군, 영창대군을 역모로 죽이고(계축사화),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패륜을 많이 저질렀으며 한편 서적편찬 등 내치에 힘쓰고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양면 정책으로 난국에 대처함. 인조반정으로 폐위됨. |
16 |
인조(仁祖, 1595~1649) |
1623~1649 |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나 이괄의 난, 병자호란, 정묘호란을 격음. |
17 |
효종(孝宗, 1619~1659) |
1649~1659 |
휘는 호. 인조의 둘째 아들.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8년간 잡혀 갔다 돌아와 즉위후 이를 설욕하고자 국력을 양성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
18 |
현종(顯宗, 1641~1674) |
1659~1674 |
휘는 연. 즉위 초부터 남인과 서인의 당쟁에 의해 많은 유신들이 희생됨. 대동법을 전라도에 실시하고, 동철제 활자 10만여 글자를 주조함. |
19 |
숙종(肅宗, 1661~1720) |
1674~1720 |
남인, 서인의 당파싸움(기사사화)과 장희빈으로 인한 내환이 잦음. 대동법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함. |
20 |
경종(景宗, 1688~1724) |
1720~1724 |
휘는 윤. 숙종의 아들로 장희빈 소생. 신임사화 등 당쟁이 절정에 이름. |
21 |
영조(英祖, 1694~1776) |
1724~1776 |
타평책을 써서 당쟁을 제거에 힘썼으며, 균역법 시행, 신무고 부활, 동국문헌비고 발간 등 부흥의 기틀을 만듬. 말년에 사도세자의 비극이 벌어짐. |
22 |
정조(正祖, 1752~1800) |
1776~1800 |
휘는 성. 탕평책에 의거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서적보관 및 간행을 위한 규장각을 설치함. 임진자, 정유자 등의 새활자를 만들고 실학을 발전시키는 등 문화적 황금 시대를 이룩함. |
23 |
순조(純祖, 1790~1834) |
1800~1834 |
휘는 공. 김조순(金組淳) 등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시대. 신유사옥을 비롯한 세차레의 천주교 대탄압이 있었음.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남. |
24 |
헌종(憲宗, 1827~1849) |
1834~1849 |
휘는 환(奐). 8세에 즉위하여 왕5년에 천주교를 탄압하는 기해사옥이 일어났음. |
25 |
철종(哲宗, 1831~1863) |
1849~1863 |
휘는 변. 헌종이 후사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황후의 명으로 즉위함. 왕2년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됨. 진주민란 등 민란이 많았음. 병사함. |
26 |
고종(高宗, 1852~1919) |
1863~1907 |
휘는 희(熙).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대원군과 민비의 세력다툼, 구미열강의 문호개방 압력에 시달림.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퇴위함. 임오군란이일어남. |
27 |
순종(純宗, 1874~1926) |
1907~1910 |
이름은 척(拓). 고종의 둘째 아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35년간 치욕의 일제시대를 보내게됨. 이왕(李王)으로 불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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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 |
대통령 |
재임기간 |
본관 |
초대 |
이승만(李承晩, 1875~1965) |
1948.7~1952.8 |
전주 |
2 |
1952.8~1956.8 |
3 |
1956.8~1960.4 |
과도내각 |
허정(許政, 1896~1988) |
1960.4~1960.8 |
김해 |
4 |
윤보선(尹潽善, 1897~1990) |
1960.8~1963.12 |
해평 |
5 |
박정희(朴正熙, 1917~1979.12.26) |
1963.12~1967.6 |
고령 |
6 |
1967.7~1971.6 |
7 |
1971.6~1972.12 |
8 |
1972.12~1978.12 |
9 |
1978.12~1979.10 |
10 |
최규하(崔圭夏, 1919.7.16~) |
1979.12~1980.8 |
강릉 |
11 |
전두환(全斗煥, 1931.1.18~) |
1980.8~1981.2 |
정선 |
12 |
1981.2~1988.2 |
13 |
노태우(盧泰愚, 1932.12.4~) |
1988.2~1993.2 |
교하 |
14 |
김영삼(金泳三, 1927.12.20~) |
1993.2~1998.2 |
김녕 |
15 |
김대중(金大中, 1924.1.6~) |
1998.2~ |
김해(가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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