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해주(海州)는 황해도 남해안에 위치한 도청소재지이다. 고조선시대에 대방군(帶方郡)에 속하여 고죽(孤竹)으로 불리었다. 고구려 때에는 내미홀(內米忽) 또는 지성(池城)·장지(長池) 등으로 불리우다가, 748년(신라 경덕왕 7)에 폭지군(瀑池郡)으로 바뀌었다. 936년(고려 태조 19)에 태조가 남쪽이 바다와 접하고 있다고 하여 해주를 사명(賜名)했으며 성종 때 와서는 별호로 대령(大寧)·서해(西海)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983년(성종 2)에 해주목으로 승격된 데 이어 1018년(현종 9)에 안서도호부로 개편되었고 1247년(고종 34)년에는 다시 해주목으로 환원되었다. 1616년(광해군 8)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23년(인조 1)에 다시 목으로 복구되었다. 1895(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해주부가 설치되었고, 1896년 도제 실시로 황해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1945년 해주시로 개편되었다. 1954년 북한의 관제 정비로 황해남도에 편입되었다.
성씨의 역사
중국 위군(魏郡) 동명(東明) 사람인 시조 석성(石星)은 명나라 세종 때 진사(進士)로 이과(吏科)에 급제하고 급사중(給事中)에 뽑혔으나, 목종에게 직간을 하다가 장형(杖刑)을 받고 파직되었다. 신종 때 재등용되어 호부(戶部)와 공부상서(工部尙書),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때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에 원병을 파견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나, 막대한 군비 조달로 국운이 쇠한 책임을 져 옥사하였다. 석성의 옥중 유언에 따라 장남 석담(石潭)은 어머니 류씨(柳氏)와 함께 해주(海州)로 이주해 정착하게 되었고, 수양군(首陽君)에 봉해져 수양산 아래의 땅을 하사받고 해주에서 살게 되었다. 차남 석천은 1597년(선조 30) 배를 타고 요동을 거쳐 내려와 가야산 남쪽 군성산(君聖山) 성주(星州) 대명동(大明洞)에 정착하여 성주석씨(星州石氏)가 되었다.
그 후 석담의 아들 석귀당(石貴棠)과 손자 석난(石亂)이 산음현(山陰縣) 모호리(毛好里: 지금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평촌리)로 이거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주요 세거지
경상남도 산청군 영서면
경상남도 함안군 마천면 추성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해주석씨는 270가구 총 942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